임페라토르

 



1. 개요
2. 역사
2.1. 공화정 초기
2.3. 공화정 말기
2.6. 제정 로마 시대의 황제, 임페라토르
3. 역대 임페라토르
4. 후계 언어들에서 임페라토르의 후신
5. 관련 문서


1. 개요


imperātor
로마황제를 이르는 말.
영어 단어 엠퍼러(Emperor)의 어원[1]이다. 라틴어를 풀이하면 접두사 'im- (in-; 주다)'과 어근 '-perāre(prepare; 채비)', 접미사 '-tor(agent; 대상자)'의 결합어로, '통솔권(Imperium)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동양에서는 군주제에 대응하여 '황제'로 의역한다[2]. 본래는 고대 로마에서 장군을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쓰이다가, 이후 전체 로마군에 대한 임페리움인 "임페리움 마이우스(Imperium Maius[3][4])"를 특권으로 수여받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점차 황제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 황제의 다른 칭호인 카이사르는 약칭, 아우구스투스가 존칭이라면, 임페라토르는 공식 명칭으로 공문서 상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2. 역사



2.1. 공화정 초기


본디 고대 로마에서 임페리움은 통치자의 권한, 즉 로마 왕정 당시의 왕의 권한을 의미했으며, 법률로 제한되는 범위 내에서 무한한 권한을 지니는 것을 의미했다. 임페리움은 관직별로 정해진 범위 내에서만 주어졌으며, 이 범위는 추상적인 임무 내용일 수도 있고, 일정 범위의 지역 또는 행정구역을 임지(Provincia[4])로 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안찰관의 임페리움은 "수도 로마 내부"에서 "공공사업"에 한해서 부여되었다. 즉, 임페리움은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공공사업의 실시, 각종 정책의 설정, 그리고 군대의 지휘 등을 모두 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했다.
임페리움을 수여하는 것은 원로원의 권한이었다. 로마 공화국의 관직들 중 집정관(Consul)과 독재관(Dictator)은 "로마 공화국의 모든 것"을 임지로 하는 막강한 임페리움을 당연직으로 수여받았다. 집정관이 평상시의 국가원수, 독재관이 비상시 임명되는 국가원수임을 고려하면 사실상 이 정도 수준의 임페리움은 국가원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당연히 대부분의 관직들이 아직 설치되지 않았던 공화정 초창기에는 임페리움은 집정관 둘과 유사시 집정관을 제치고 선정되는 독재관에게만 부여되었다.
군사 분야에서 이 임페리움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데, 군대를 임지로 하는 임페리움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복수의 군단을 지휘할 수 있었다. 즉, 안찰관의 임페리움은 군대를 임지로 하지 않으므로 안찰관은 군단을 이끌 수 없었다. 각각의 군단은 군단장(Legatus, 레가투스)이 이끌지만, 통상의 경우 군단장은 군대를 임지로 하는 임페리움을 수여받지 않는다면 다른 군단을 추가로 이끌 수 없었다. 이는 행정의 우두머리가 군대의 우두머리를 겸하는 것을 의미했다.
로마가 초기 도시국가일 시절에는 보통 전쟁을 하더라도 군단을 4개 이상 편성하는 일이 없었다. 따라서 한 해에 뽑힌 두 집정관이 각자 임페리움을 들고 각각 2개 군단을 이끌면 그것으로 로마군 전체가 할당되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2.2. 포에니 전쟁


사실 제1차 포에니 전쟁까지만 해도 이전까지의 시스템이 꽤나 잘 굴러갔다. 집정관 2명이 이끄는 4개 군단 전부를 모두 전선에 내보내야 했기 때문에 그 동안 수도에 남아있는 법무관(Praetor)에게 임시로 임페리움을 수여하여 수도 방위를 맡긴 정도였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부르는 제2차 포에니 전쟁때 터졌다. 이 때 로마는 본토 이탈리아가 외부 강대국에게 공격받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대항하여 매년 20개가 넘는 군단을 편성하고 이탈리아 반도이베리아 반도 전역(全域)에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현직 집정관 2명만으로는 전선을 제대로 형성할 수 없었다. 따라서 원로원은 법무관에게도 상설 임페리움을 부여하였으나 이걸로도 모자라 결국 전직 집정관(Proconsul)들에게도 임페리움을 수여하여 각 전선에 사령관으로 비치하였다. 심지어 전직 법무관(Propraetor)들 역시 임페리움을 수여받고 전장에 나가기도 하였다. 한니발 전쟁이 끝나고 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잡으며 속주(Provincia) 체제가 갖추어지자, 임페리움은 점차 각지의 총독들에게 수여되는 "군사 지휘권"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전직 집정관들은 임페리움을 수여받고 각지의 속주로 나가 복수의 군단들을 이끌며 속주를 몇 년간 통치하게 되었다.

2.3. 공화정 말기


그리하여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패권자가 되었고, 각지에 속주를 설치하였다. 각 속주에는 임페리움을 수여받은 총독(전직 집정관)이 파견되었다. 로마의 군단들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과 함께 징집병에서 상비군으로 대체된 상태였다. 따라서 군단은 더 이상 전쟁이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속주 각지에 영구적으로 주둔하게 되었다. 본국에서 총독이 파견되어 오면 전임 총독으로부터 이 군단들의 지휘권을 인수하는 체계였다. 총독들은 야만족이나 반란군, 해적 따위와 맞서 싸우고 대부분의 경우 우월한 로마의 군제와 기술력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이 즈음 해서, 임페라토르라는 말의 의미가 살짝 변화하게 된다. 본디 임페라토르는 민회 선출직 관직에 있는 사람(magistratus 마기스트라투스) 중에서 임페리움을 수여받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으로 인해 유발된 군단의 사병(私兵)화를 전후해서 개선식(triumphus)[5]를 거행할 정도의 군공(軍功)을 세운 장군에게 붙여주는 명예로운 칭호가 되었다. 그런 사령관은 승리를 거둔 뒤에 거창하게 연설 한 번 하고, 열광적인 병사들로부터 "임페라토르! 임페라토르!"라는 환호성을 들은 뒤 원로원에 개선식을 요청했다. 그러면 보통은 승인이 떨어졌고, 사령관은 개선식을 하기 위해 수도 로마로 귀환했다. 개선식이 끝나면 거기에서 군단을 해산하고 임페리움을 반납하는 것이 관례였다. 임페리움을 반납했으므로 공식적으로 임페라토르가 더 이상 아니게 되었겠지만, 후일 클리엔테스가 된 퇴역병들이 가끔씩 존칭의 의미로 자기의 옛 사령관을 임페라토르라 부르는 일은 있었을지도.

2.4. 율리우스 카이사르


카이사르는 집정관 임기를 마치고 일리리아[6], 갈리아 키살피나[7] 두 속주의 총독으로 내정받았고, 여기에 더해 갈리아 트란살피나[8]의 총독권 또한 추후에 원로원 의결을 통해 부여받았으며 이에 따라 4개 군단의 명령권(임페리움)을 수여받았다. 이때문에 그는 공화정 로마의 관례대로 해당 군단들의 임페라토르가 되었다. 복수의 속주의 총독을 겸임하는 것 역시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조치였고, 이 세 속주의 위치 상 누가 봐도 카이사르는 야만족의 땅 갈리아를 정복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로마의 총독으로서 인접 지역에 정착한 갈리아족의 내부 분쟁에 개입하는 형태로 갈리아 전쟁을 시작해 8년이라는 초유의 짧은 기간 안에 갈리아 전역 제패라는 유례가 없는 업적을 남긴다.
카이사르의 업적과 그를 향한 민중의 지지를 경계한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 권고를 선언해 그를 공격하나, 카이사르가 그에 불복하고 루비콘 강을 건너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다. 카이사르는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을 승리로 마쳤다. 내전이 종결된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수도 로마에서 종신독재관에 취임하면서 '''전체 로마군에 대한 종신 임페리움'''도 함께 가지게 되었다. 이는 그가 전체 로마군에 대한 통수권을 거머쥐게 된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런 카이사르의 움직임을 왕이 되려는 야욕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한 극렬 공화정주의자들에게 카이사르는 암살당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 옥타비우스 투리누스가 그의 양자로 입적됨과 동시에 그의 자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물질적인 자산과 정치적인 자산 모두를.

2.5.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카이사르의 금전적, 정치적 유산을 모두 상속받은 뒤, 제2차 삼두정치가 끝난 이후 라이벌이 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고 로마의 명실상부한 최고 실세가 되었다. 그러나 교활한 정치꾼답게 그는 공화정 복귀를 선언하였다. 로마 원로원마리우스술라의 시대 이후로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최고지도자 한명의 독재 체제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은 매우 기뻐했다.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의미의 존칭인 "아우구스투스 Augustus"를 선사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는 계속해서 로마의 최고권력자로 군림했다. '''먼저 아우구스투스에게는 군대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이끌던 군단들의 중~상급 장교들과 동방/서방의 속주 및 동맹국 지도자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양아버지 카이사르에게서 물려받은 끈끈한 클리엔테스 관계로 묶여 있었고, 후술하듯 아우구스투스는 양아버지 카이사르가 정복한 속주들의 대부분의 총독직을 싸그리 겸임했다. 로마 공화국의 군대 과반이 아우구스투스 개인을 따르는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은 공식적인 직위 여부를 막론하고 탄탄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막대한 재산이 있었다.''' 아버지 카이사르에게서 상속받은 상당한 재산 이외에도,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이집트를 격파하고 그 당시 공화국 식량의 1/4을 공급했던 이집트를 아우구스투스 자신의 개인 영지로 흡수했기 때문에[9]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공화국 경제의 상당한 부분과 수도 로마의 식량 공급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방치했던 본토 이탈리아 내의 가도(街道)정비를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모두 처리해 버렸다. 심지어 어느 해의 로마 국고는 상당 부분이 아우구스투스 개인이 기부한 금액으로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는 공화국 체제에서도 '''계속해서 집정관직을 연임하면서 권한을 쥐고 있었고 해가 지나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막대한 권위를 가져다 주었다.''' 젊은 시절에 최고 제사장에 당선된 아우구스투스였기에 종교 분야의 우두머리라는 타이틀로부터 나오는 권위는 덤.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전대미문의 대권력을 형식적으로는 공화정을 유지시킨 채 자신의 손아귀에 집어넣었다. 그 과정은 가히 현대 독재자들의 귀감이 될, 그야말로 예술적인 정치공학의 정수라 할 만했다. 먼저 아우구스투스는 악티움에서 자신의 라이벌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수도 로마로 개선한 뒤, 기원전 27년에 원로원에 출석하여 자신의 모든 초법적 권한을 내려놓고 공화정으로 복귀할 것을 선언했고, 전술했듯 그 공로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와 프린켑스의 칭호를 얻는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복귀를 천명한 기원전 27년 이후 한동안 "더 이상의 내전과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집정관에 연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스스로는 모든 속주의 통제권을 원로원에게 되돌려준다고 선언했으나, 막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닌 자신 이외에는 당시 변방에 해당하던 갓 정복한 속주들을 안정시킬 능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는 관료제가 매우 취약하여 각 속주의 총독은 사비로 행정관들을 고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원로원은 몇몇 "혼란스러운" 속주들을 10년간 통제할 권한을 집정관 아우구스투스에게 부여하였다. 그러나 갓 정복된 갈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부족이 남은 히스파니아, 그리고 막강한 가상적국 파르티아에 맞서야 하는 시리아 등 로마 제국 대부분의 속주가 이런 혼란스러운 속주들로 분류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모든 속주들의 총독을 겸임하게 된 자신의 권한으로 원로원 의원이나 에퀴테스 계급의 능력자들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파견했다. 이는 후일 우리가 황제 속주라고 부르는 속주들의 시발점이 되었다. 나머지 속주들은 원로원이 총독을 선정했고, 이곳들은 후일 원로원 속주가 된다. 집정관으로서의 권한 외에도 그가 당시 로마제국 속주의 과반을 자신의 임지로 확보함에 따라, 속주에 따라가는 로마 군단의 지휘권 역시 대부분(26개 중 20개)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휘하에 들어왔다.
그러나 약 5년 동안 집정관을 연임하자, 공화정 복귀의 실체에 대해 원로원 의원들이 의심하기 시작했고, 마침 거의 그를 죽일 뻔했던 병마에 시달리던 아우구스투스는 더 이상 집정관에 출마하지 않기로 선언했다. 집정관직을 내려놓은 아우구스투스는 더 이상 자신이 총독(프로콘술 Proconsul)이 아닌 속주들에 개입할 수 있는 집정관으로서의 권한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 권한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로마에 질서를 가져다준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써 반대급부로 두 개의 특권을 요구했는데, 바로 자신에게 모든 속주와 본국 이탈리아를 임지로 하는 "총독의 최고 임페리움 (Imperium Proconsulare Maius,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10])" 또는 줄여서 "임페리움 마이우스"를 주어 원로원 속주를 비롯한 모든 속주들에 "로마 시민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줄 것[11], 그리고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마찬가지로 혼란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이 국정의 주요한 문제를 다스릴 수 있도록 자신에게 "호민관 특권(Tribunicia Potestas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을 수여할 것이었다. 본래 아우구스투스는 호민관에게 주어지던 신변불가침권(Tribunicia Sacrosantitas, 트리부니키아 사크로산티타스)[12]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좀 더 확대하여 자신에게 호민관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수여해달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는 감찰관(Censor, 켄소르)의 권한 중 일부를 자신에게 수여했는데, 이는 인구주택총조사에 해당하는 통계를 낼 권한과 귀족이거나 관직을 역임하여 자격을 획득한 사람들 중 원로원 의원을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이었다.
이 시점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공식적으로 보유한 직위 및 권한은 다음과 같다. 먼저 명예직인 원로원 제일인자(Princeps)와 별 실권은 없지만 상당한 권위를 주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대부분의 속주들의 총독(Proconsul)직과 그에 딸려오는 군단들에 대한 임페리움, 자신이 총독인 속주들과 자신이 총독이 아닌 속주들 그리고 본국 이탈리아 전역에서의 임페리움 마이우스, 그리고 호민관 특권과 감찰관 특권. 이 모든 직위와 권한들 자체는 로마 공화국에 이미 있었다.
  • 프린켑스(원로원 제일인자)는 원로원의 의원들 가운데 으뜸이란 뜻으로 본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같이 로마 공화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에게 수여되는 유서 깊고 명예로운 호칭이다.
  •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제사장)왕정 시대 국왕이 가지던 제사와 종교의례의 최고지도자직을 계승해서 공화국 성립 당시부터 있었던 직위다.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버지도 최고 제사장에 당선되어서 암살당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 프로콘술(총독)직은 로마가 제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처음으로 속주를 설치한 이래로 유서 깊은 직위였다.
  •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총독의 최고 임페리움)은 현직 집정관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고위관직(Magistratus, 마기스트라투스)"들의 임페리움을 필요 시 직권으로 덮어쓸 수 있는 임페리움이다. 임페리움 마이우스는 지중해의 해적 소탕작전 당시 폼페이우스에게 그가 총사령관으로서 로마제국의 모든 역량을 동원할 수 있도록 수여된 전례가 있다. 집정관을 포함하여 모든 로마의 관직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임지와 임무 범위[13] 내에서 임페리움을 보유하지만, 그보다 상위에 있는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이 요구하면 권한을 양보해야 했다. 가장 높은 임페리움은 독재관(Dictator, 딕타토르)의 것이었고, 독재관의 임페리움은 로마 공화국의 모든 것을 임지로 가진다. 그 다음이 집정관(Consul, 콘술)의 것이었다. 총독(Proconsul, 프로콘술)의 임페리움은 집정관 다음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요구한 "총독의 최고 임페리움", 또는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는 다른 총독들의 임페리움보다는 높지만 집정관이나 독재관의 임페리움보다는 낮았다.
  •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호민관 특권) 역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그 호민관에 귀족인 본인이 직접 취임할 수는 없으니 그 특권만 인정해 달라는 논리였는데, 그의 말마따나 호민관에게는 그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반역죄로 처벌한다는[14] 신변불가침권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원로원의 표결에 대한 거부권과 민회 소집권이었다[15].
  • 켄소르(감찰관). 아우구스투스가 이 직위에 연속으로 취임한 것인지 그 특권만 받은 것인지는 학자들의 이견이 분분하지만 당대에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아우구스투스의 호민관 특권에 포함되어 같이 부여된 감찰관 특권에는 원로원 의원의 인사권이 포함되었지만, 이는 본래 감찰관의 권한이었고 감찰관은 유구한 전통을 가지는 직위였다.
이처럼 아우구스투스의 모든 직위와 권한은 이미 로마 공화정 내에서 합법적으로 존재하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한 사람이 동시에 겸임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아우구스투스는 '''국가원수로서의 권위'''와 '''군 최고통수권''', 그리고 '''입법부에 대한 인사권과 거부권'''까지 사실상의 군주로서 필수적인 세 권리를 합법적으로 모두 거머쥐었다. 현대로 비교하자면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이 대통령, 총리, 국회의장, 대법원장, 국방장관, 행정안전부장관, 경제장관, 검찰총장, 각 광역자치단체장, 종교지도자 자리를 모두 혼자 겸임'''하여 독재를 시작한 것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이 전대미문의 권한 집중을 통해, 아우구스투스는 바야흐로 역사상 가장 독특한 군주정 중 하나인 로마 제정을 시작한 것이다.
이 외에도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이자 개선장군으로서 평민들에게 막대한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하여 아우구스투스는 한 가지 권한을 더 얻어낸다. 기원전 22년에 수도 로마에 식량난이 터져서 로마 전체가 혼란에 빠진 때가 있었는데, 평민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이와 같은 대 재해가 닥쳤을 때의 고대 로마의 전례에 따라 독재관에 취임하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 출석하여 겸손하게 독재관 직위를 사양하는 대신 자신의 이집트 영지와 자신이 총독으로 부임해 있는 속주들로부터 대량의 식량을 공수하여 단번에 문제를 해결했다. 같은 일이 기원후 8년에도 터지자, 아우구스투스는 "보급 장관(Praefectus Annonae, 프라이펙투스 안노나이)"직위를 신설하고 자신이 취임하여 로마 시민들의 목숨줄을 움켜쥐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수여받은 사실상의 제국 전역에 적용되는 임페리움 마이우스에는 한 가지의 부가효과가 더 있었다. 본래 개선식은 전쟁에서 이기거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 그 군단들의 임페리움을 보유하고 전투를 지휘했던 최고사령관이 개선장군이 되어 로마를 행진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거의 모든 로마 군단들의 최고사령관은 아우구스투스였다. 만약 아우구스투스가 총독 대리로 전선에 파견한 사령관이 군공을 세우면, 그것은 고스란히 공식적으로 그 군단들의 총사령관인 아우구스투스의 군공이 되어 개선식을 올릴 권리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주어졌다. 즉, 아우구스투스가 임페리움 마이우스를 얻은 시점부터 사실상 개선식은 오직 아우구스투스 혼자만이 올릴 수 있었고,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임기 중에 개선식을 여러번 벌여 평민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높였다.

2.6. 제정 로마 시대의 황제,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가 수여받은 직위들 중 임페리움 마이우스와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개인 재산이었다. 즉, 로마 공화국의 상속법에 따라 그는 자신이 지정한 사람에게 이 전대미문의 막강한 권한을 상속해 줄 수 있었다. 현대식으로 비유하자면 대통령 직위 자체는 상속되는 것이 아니지만, 내각 구성권 및 내각 인사권과 국군통수권, 각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한 인사권, 그리고 국회의원과 법관에 대한 인사권과 국회 입법에 대한 거부권은 현직 대통령이 자기 후계자에게 상속해 줄 수 있으며, 이 권한을 상속받은 사람에게 국회가 대통령 직위를 사후승인 같은 느낌으로 부여하는 형식이었다. [16]
제정 시대 이후로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로마제국의 동쪽 절반에서는 황제를 그리스어로 "왕"을 뜻하는 바실레우스로 불렀다.[17] 그러나 나중에는 바실레우스라는 말은 오직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게만 사용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리스어의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와 라틴어의 임페라토르(Imperator)는 동의어가 되었다. 현대 그리스어에서는 아프토크라토라(αυτοκράτορα)라는 말을 새로 만들어서 황제를 뜻하는 말로 쓰고 이는 전제정치를 뜻하는 영어 단어 autocracy의 어원이기도 하지만, 현대 그리스에서도 동로마(비잔티움) 황제를 칭할 때는 그대로 바실레우스(바실라스)를 칭한다.

3. 역대 임페라토르


로마의 역대 황제 문서 참조.

4. 후계 언어들에서 임페라토르의 후신


많은 로망스어권에서 황제를 뜻하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영어의 Emperor[18], 프랑스어의 Empereur, 스페인어의 Emperador, 포르투갈어의 Imperador, 이탈리아어의 Imperatore, 루마니아어의 Împărat가 모두 라틴어 Imperator를 어원으로 한다.

5. 관련 문서




[1] 라틴어 'imperātor' - 앵글로노르만어 'empereor' - 중세 영어 'emperour'. 영어 외의 파생어들은 하단의 '후계 언어들에서 임페라토르의 후신' 참조.[2] 총독, 속주, 장관 등의 이름도 동양의 율령제의 예에 준하여 의역한 것. [3] 영어의 Major와 같은 단어인 Maior의 중성형이다.[4] 임페리움 마이우스는 '무제한' 임페리움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집정관의 임페리움을 넘어서는 최상위의 임페리움이었다.(단, 독재관의 권한은 제외.)[4] 나중에는 이 말이 속주라는 뜻이 된다.[5] 영어로 대승(大勝)을 의미하는 triumph의 어원이다[6] 현대의 서북부 발칸 반도, 즉 아드리아해 연안부에 해당한다. 거의 구 유고슬라비아의 영토라고 보면 된다.[7] 루비콘 강 이북, 알프스 산맥 이남의 이탈리아 북부지방에 해당한다.[8] 지중해 연안의 프랑스 남부지방에 해당한다.[9] 이집트인들의 문화와 전통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일종의 파라오 취급을 받았다.[10] 마이우스는 영어로 "주요한"이란 뜻을 가진 "Major"의 어원이다. [11] 이후 숱한 창작물들에서 공화정으로부터 독재로 변질하는 나라의 최고 권력자들의 레퍼토리로 등장한다. [12] 일종의 면책특권으로, 호민관의 신변을 공격하거나 호민관을 임기 중에 기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13] 예를 들면 안찰관은 수도의 공공사업을 임지로 받고 군대는 임지가 아니므로 안찰관의 임페리움으로는 군대 지휘가 불가능하다.[14] 즉 현대 형법에 따르면 호민관을 살해하는 것은 내란목적살인죄로 처단된다는 의미다. 정확히 따지면 호민관의 신변불가침권(Tribunicia Sacrosantitas)의 내용은 '임기중의 호민관을 살해하는 행위는 반역으로 처벌되고, 임기중인 호민관은 법적으로 기소되지 않는다' 는 것이다.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측면에서는 후술된 '원로원의 결의에 대한 거부권'+'민회 소집권'에 비해 의미가 적지만, 물리적인 공격행위와 법적 책임 모두 보호받는다는 점에서 역시 (전제군주 이상의 수준으로 강력해진) 로마 황제권의 구성요소로써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말하자면 '원로원 결의 거부권'과 '민회 소집권'이 황제로써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보장한다면 신변불가침권은 황제의 신분을 보장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15] 즉 로마 황제는 황제 등장 이전까지 입법권과 행정권, 사법권을 모두 겸비한 로마의 최고 권력기구였던 원로원이 내린 결정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거부' 할 수 있고, 민회의 의결이란 형태로 자신이 원하는 법령이나 정책을 입안할 수 있었던 것. 즉, 사실상 군주나 다름없는 국가 운영의 전권을 보유한 셈이다.[16] 공직을 재산으로 여겨 친족에게 상속시켜준다는 개념은 현대 민주공화국가 국민의 관점에서 보면 물론 미친것 같지만... 전근대에는 그다지 특이한 개념이 아니었다. 중세 유럽에서도 관직을 돈을 주고 산 일종의 재산으로 여겨 자식에게 물려주는 경우는 비일비재했고, 애초에 세습군주정 자체가 권력을 사유재산으로 여기는 논리를 기반으로 했던 것. 유럽의 공작, 후작, 백작 등의 작위도 그 유래가 로마 시대 관직에서 비롯되는 것들도 있다.[17] 로마법 대전에 수록된 그리스어 사료 중에 그리스인이 로마 황제에게 청원하자 황제가 비답을 내린 것이 있는데, 거기서도 청원인이 황제를 '바실레우스'로 지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18] 노르만 정복 때문에 프랑스어의 Empereur를 흡수한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