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정관

 

1. 현실
1.1. 로마 공화정의 최고 관직
1.1.1. 선출과 권한
1.1.2. 임기
1.1.3. 군사 지휘권
1.1.4. 통치
1.1.5. 원수정 시대
1.1.6. 몰락과 폐지
1.2. 중화민국의 국가원수
1.3. 만주국의 국가원수
1.4. 산마리노의 국가원수
2. 가상
3. 관련 문서


1. 현실



1.1. 로마 공화정의 최고 관직



執政官
'''Consul'''. 고대 그리스의 Archon도 집정관으로 번역한다.
을 대신하는 국가의 지도자. 1년에 2명이 선출되며 사실상 명예로운 경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현대로 치면 대통령. 공화정 시대에는 대단한 권위와 권력을 가진 중요한 직책이었다. 그 때문에 프로콘술(proconsul), 즉 집정관 경력자는 다른 원로원 의원들과는 한층 격이 다른 권위를 지녔다.
로마시대에 집정관이라는 영예는 매우 컸기 때문에 귀족들의 경우 집정관 역임이라는 문구는 무덤과 족보에 꼬박꼬박 새겨놓았다. 또한 제정 시대 때나 비잔티움 제국 때의 황제들 또는 로마시대 말기의 군사령관들 역시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 가끔씩 집정관에 출마해서 당선되기도 할 정도로 집정관이 가진 권위는 상당히 높았다.

1.1.1. 선출과 권한


집정관은 백인대 집회라고도 불리는 센튜리온 집회에서 선출되며 해마다 후보 10여 명 중 투표로 두 명을 뽑는다. 집정관 선거은 6월~7월에 치르고 승계는 1월에 했다. 국가통치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임페리움(imperium)이라 불리는 군사지휘권이었다.[1]
기원전 367년 평민들의 기나긴 요구 끝에 결국 평민들이 집정관으로 선출될 수 있게 하는 법안이 통과된 후 일반 평민들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기원전 342년부터는 아예 집정관 두 명 중 하나는 무조건 평민이어야 한다는 법령도 생겼다.

1.1.2. 임기


집정관의 임기는 1년이었다. 기원전 300년 무렵 집정관의 연임 금지 규정이 생겼다. 연임 금지 규정은 로마가 작은 규모의 국가였을 때는 성공적으로 지켜졌으나, 점차 나라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전쟁 규모도 커지게 되어 군사적으로 유능한 인물이 집정관을 연임을 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실제 집정관이 연임한 경우는 주로 외부에 강한 세력이 나타나 로마의 존폐가 걸릴 정도로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 나타났다.
공화정 시기에 집정관을 연임한 대표적인 인물은 파비우스 전략으로 유명한 '쿵크타토르'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그 동료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등이다.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의 경우 기원전 215년 보결 집정관이었다가 214년 정규 집정관으로 연임한 예외적인 경우이며,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상대하는 특수한 상황이 반영되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게르만족과의 킴브리 전쟁에서 전임 집정관들이 줄줄이 패하고 전멸하면서 로마군이 8만 명이나 되는 큰 손실을 입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게르만족이 언제 로마 본토를 침공할지 모르는 비상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마리우스 외에는 로마를 지켜낼 역량을 지닌 장군이 없었으므로 로마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하에 마리우스는 집정관직을 무려 5번이나 연임하였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술라, 폼페이우스 같은 희대의 장군들마저 집정관을 연임한 적은 없을 정도로 집정관직을 연속으로 맡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 마리우스 이후에는 마리우스의 포풀라레스파 동료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카이사르의 내전 승리 이후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이 집정관을 연임했지만 변명의 여지 없는 독재로 여겨졌기에 두 사람 모두 살해당하는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와 벌인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기원전 30년부터 23년까지 집정관을 여덟 번 연임하며 연임 금지 규정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연임뿐만 아니라 집정관직을 맡은 지 10년 이내에 다시 맡는 것조차 관습에 어긋나는 일로 여겼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기원전 194년에 집정관을 맡았기에 기원전 190년 선거에 나서지 못하고 동생 루키우스를 내세운 후 그의 막료로 셀레우코스 전쟁에 종군했다.

1.1.3. 군사 지휘권


군사 지휘권(Imperium)은 2개 군단의 지휘권에 전쟁에 필요한 모든 재량권을 인정받는 것으로 공화정 시대에는 2개 군단 병력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보조병까지 합쳐 대략 2만여 명 규모의 병력이었다. 로마는 해마다 전쟁을 수행하였으므로 집정관은 항상 총사령관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때문에 로마에 머무는 기간은 얼마되지 않았다. 집정관이 지휘하는 부대는 로마 시민들에게서 제비뽑기 방식으로 뽑은 병력들로, 1년 기간이 되면 해산한 뒤 새로 뽑히는 병력들로 교체되었다.
공화정 시대에는 당해에 선출된 집정관만이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고 법무관, 전직 집정관 등은 군대를 지휘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가 이탈리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벌여진 대표적인 전쟁인 삼니움 전쟁, 피로스 전쟁 등은 집정관들이 지휘하는 병력들로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이 전통은 1차 포에니 전쟁 때까지 유지되다 한니발 바르카가 등장해 전쟁의 규모가 상당히 커지자 법무관(praetor), 전직 집정관(proconsul)에게도 임페리움을 수여하는 일이 생겼다. 특히 전직 집정관(proconsul)의 경우, 총사령관의 집정관 임기가 끝나면 교체되는 일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한니발을 상대하면서 집정관의 교체가 주는 혼선이 전쟁에 영향을 주는 일이 자주 생기자 고안해낸 방법이었다. 즉 집정관이 군대를 지휘하다 임기가 끝나면 전직 집정관의 신분으로 그대로 전쟁을 지휘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집정관과 전직 집정관의 권한의 차이는 상당히 컸다. 예를 들어 현직 집정관은 전쟁의 시작과 종료를 결정할 수 있었고 또한 전직 집정관의 부대에 명령할 권한도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정치가들은 현직 집정관 시절에 전쟁을 수행하여 마무리짓고 싶어하였다. 대표적으로 마리우스는 킴브리 전쟁을 앞두고 계속 현직 집정관 상태를 유지하였으며[2] 또한 카이사르 역시 현직 집정관일 때 폼페이우스와의 내전과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수행하였다.

1.1.4. 통치


집정관은 상당 기간 전쟁을 수행하였지만 아주 가끔씩은 로마에 머물며 국가를 통치하였는데 이때 이들은 1개월씩 번갈아 통치하였으며, 자신이 통치하지 않는 달에는 다른 집정관의 정책에 동의/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즉 자신이 집권하는 달에도 상대 집정관의 동의를 얻어야 정책을 집행할 수 있었다. 집정관 부재 중에는 법무관이 집정관의 일을 처리하였는데 평소엔 한 명만 두다 나중에 로마의 규모가 커지자 8명까지 늘어났었다.
원로원 회의나 선거, 축제 등의 국가행사는 집정관이 주재하며 국가에 불길한 전조를 선포함으로써 상업을 마비시키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집정관이 이러한 점술가의 역할도 겸직하는 것은 상당히 특이한 제도로 로마 시대의 집정관은 성직자와는 거리가 먼 완전한 정치가였기 때문이었다.
집정관은 권위를 상징하는 릭토르 12명을 거느렸다. 릭토르는 파스케스[3]라는 도끼날을 나무가지 가운데에 심어놓은 무기로 무장한 자들로 집정관을 호위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참고로 이는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에서 유래한 문화였다.
프로콘술들은 원로원에 대략 20-30명 정도가 있었고 집정관은 주로 법무관을 역임한 이들이 곧장 후보로 나서 그들 가운데에 선출되므로 집정관은 원로원 의원들이 보기에는 성공한 정치 입문자에 불과하였다. 때문에 집정관 직위가 매우 권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원로원을 무시할 수는 없었고 따라서 원로원의 권력은 점점 강력해졌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원로원이 한 개인이 독재를 하는 것을 막고 싶어하였고 또한 로마 공화정은 철저히 유력 가문들에 의한 정부였으므로 집정관 직위를 여럿이 돌아가면서 맡는 것을 귀족들이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집정관 자리는 연임이 극히 드물었고 따라서 집정관에 당선된 이들은 이 자리에 연연해하기보다는 앞으로 그들이 원로원 의원으로서 정국을 운영할 것을 염두에 두었다. 이 때문에 집정관들은 원로원의 의향을 철저히 따랐고, 사실상 원로원이 곧 로마의 통치기구로 역할했다.

1.1.5. 원수정 시대


제정 시대에는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투표는 유명무실해지고 황제에게 임명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직위로 전락하였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정관직은 원로원의 자존심과도 같아서,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가 집정관을 겸하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제국 전체의 집정관급 공직이 크게 늘어나면서 보결 집정관 제도가 활성화되었다. 1월에 취임한 정규 집정관 2명은 그 해의 중반이 되기도 전에 사임하는 것이 관례화되었고, 이후에는 약 두 달 단위로 보결 집정관들이 취임-사임을 반복하여 한 해에만 10명 이상의집정관 역임자들이 생겼다.
실권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제정 중기까지는 명예로운 경력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예직으로 상징적인 권위는 여전히 드높았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 알짜 원로원 속주의 총독이나 로마 시 장관(urban prefect), 집정관급 사령관 등이 되기 위해서는 집정관 경력이 필요했다. 원로원 의원들 중 집정관 경력자, 그 중에서도 보결이 아닌 정규 집정관 역임자는 다른 의원들보다도 급이 높은 유력자로 취급되었다. 특히 황제와 공동으로 정규 집정관에 취임하는 것은 그 사람이 황제의 최측근, 심복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황제들은 원로원 내에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하고 자신 또는 후계자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집정관직을 활용하였다.

1.1.6. 몰락과 폐지


3세기 말부터는 제국의 군제나 행정 관제 등이 크게 변화하면서 원로원 계급의 특권도 사라졌고, 경력이 적고 권한도 낮은 직위나 기사 계급 출신의 군사령관 등에게 집정관직이 남발되면서 집정관직의 가치는 크게 추락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로는 로마 집정관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집정관을 한 명씩 선출하게 되었다. 로마 집정관은 서로마의 멸망 이후로도 오도아케르 왕국, 동고트 왕국 시대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의 관제개혁을 통해 로마 집정관은 534년을 끝으로 소멸하였고 동고트 왕국도 동로마에게 망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집정관 역시 541년을 끝으로 없어져서 선출 집정관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집정관은 황제의 당연직 및 칭호 중 하나로 흡수되었다가, "현제" 레온 6세[5] 시기의 법령개정을 통해 아예 명칭 자체를 폐지해버렸다.

1.2. 중화민국의 국가원수


1924년 북경정변으로 차오쿤 정권이 붕괴된 이후 도입된 직위이다. 직예군벌을 축출한 봉천군벌서북군벌안휘군벌의 수장인 돤치루이를 새 대총통으로 추대했는데 돤치루이는 기존의 민국은 회선 사건으로 죽은 것이라면서 대총통의 자리를 거부하고 임시 집정이라는 새로운 직위를 만들어서 취임했다.
집정제는 1926년 대고구 사건으로 돤치루이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유지되었으며 1927년, 장쭤린이 대원수제를 선포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1.3. 만주국의 국가원수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유지된 만주국의 국가원수 직책.
만주국 건국 시점에서 봉천군벌의 구파는 공화국을 주장했고 청나라 복벽, 연성공 쿵더청의 옹립, 일본에 합병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관동군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를 옹립하여 중국과 구분되는 별도의 군주국을 설립하기로 했으나 공화국을 주장하는 세력이 완강하여 선통제를 공화국 국가원수인 집정으로 취임시킨 후 그가 집정으로의 덕을 행하면 그것을 근거로 황제로 추대하겠다 하여 선통제를 집정으로 추대했다. 이후 만주국 내부의 정치사정이 안정되면서 1934년, 푸이는 강덕제로 즉위, 만주국의 황제가 되었고 집정제는 폐기되었다.

1.4. 산마리노의 국가원수


Capitani reggenti
산마리노는 아직도 고대 로마와 같이 2명의 집정관이 선출되어 다스린다. 연원을 따지면 고대 로마에서 301년에 가톨릭에 대한 탄압을 피해 온 가톨릭 교도 로마인들이 세운 나라가 지금까지 쭈욱 내려온, 바티칸과 함께 고대 로마의 직계 후손쯤 되니까....다만 현지 표기는 다르다.
6개월을 임기로 두 명이 선출되어 임기가 짧은 탓에 전 세계에서 여성 국가수반을 많이 배출한 나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처럼 자주 바뀌는 바람에 1대, 2대 하는 식으로 대수를 매기지 않는다.
집정관이 되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 산마리노 출생이어야 한다. 즉 외국인이나 귀화자는 불가능.
  • 최소 25세 이상이어야 한다.
  • 대평의회 소속이어야 한다.
  • 집정관을 지낸 자는 3년 이내에 재선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산마리노의 국가원수 capitani reggenti는 다른 나라의 총리와 같은 직책으로 여겨진다. 총리와 다른 점이라면 국가원수 역할도 겸하고 임기가 의원으로서의 임기와 상관없다는 것 정도.
3년 주기로 재선이 가능해서 역대 집정관 목록을 보면 재선된 사례가 많으며 최대 4번 재선된 집정관도 있다. 물론 의원의 임기가 끝나면 다시 의원이 되기까지는 몇년이 또 걸리므로 평생 3년마다 집정관 해먹는 일종의 장기집권 같은 꼼수는 꿈도 못 꾼다.

2. 가상



2.1.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의 집정관




2.2. 크루세이더 퀘스트의 용사 아칸




3. 관련 문서



[1] 카이사르가 독재를 할 때 이걸 놓지 않고 있었으며 아우구스투스는 여기에다가 호민관 특권들만 받아서 황제가 된다.[2] 이는 그 직전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파트라키 출신 전직 집정관 카이피오가 평범한 가문 출신의 현직 집정관의 명령을 따를 것을 거부했다가 대패했던 점도 컸다. 그리하여 로마 민중은 마리우스가 부재 중에도 집정관 선거에 참석시켜 다섯 번 연속으로 선출하는 일을 벌인다. 심지어 현직 집정관조차 파트라키 출신이 명령을 거부했었는데, 당시 마리우스의 출신을 볼 때 전직 집정관직으로는 전쟁을 주도하기 어려워졌을 것이다.[3] 지도자의 권위를 상징하고 후일 파시즘의 어원과 상징이 되었다.[4]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의하면 점점 재상처럼 되었다고 한다.[5] 9세기 말 ~ 10세기 초, 중국으로 따지면 당말 ~ 오대십국 초, 한국은 견훤과 궁예가 나라를 세워 후삼국시대가 되었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