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점수
頓悟漸修
1. 개요
'돈오'는 단박에 깨닫는 것을 의미하고, '점수'는 점진적인 수행을 말한다. 불교 수행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는 순간적인 깨달음이 필요하고, 그렇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점진적인 수행, 즉 점수(漸修)는 계속해야 한다는, 선종 불교 수행 방법론이다.
한국에서는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이 주장하였는데, 지눌의 창작은 아니고 당나라의 승려인 화엄종 제5조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이 제시한 수행방법론에서 따온 것이다.
지눌은 돈오점수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두 가지 사용했는데, 하나는 태양이 뜨고 봄이 와도 겨우내 쌓인 눈이 한 번에 녹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린아이가 감각기관을 갖추고 세상에 태어나지만 인간으로서 제 기능을 하려면 어른이 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먹고 마시고 자고 운동하고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2.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돈오점수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비판받은 것은 근현대에 와서였고, 돈오점수를 비판한 대표적인 인사 가운데 고승 성철이 있었다. 1981년 당시 조계종 종정이던 성철은 자신의 저서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지눌의 돈오점수설은 깨치지 못한 거짓 선지식이 알음알이(知解)로 조작해 낸 잘못된 수행이론으로 알음알이는 깨달음을 이끌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하며 "이 같은 돈오점수 사상을 신봉하는 자는 전부 지해종도(知解宗徒)이며 이단사설(異端邪說)에 현혹된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한 마디로 '얻고 나서도 수행이 더 필요한 깨달음이라면 그 깨달음을 과연 진정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
성철에 따르면 '돈오돈수'의 의미는 깨침과 닦음이 점차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일시에 완성된다는 것이다. 지눌이 주장한 '궁극적 깨달음인 증오(證悟)를 위해서는 해오(解悟) 이후 점수(漸修)가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한다.'는 말은 영원히 깨달음의 길을 등지는 자살행위이고, 해오 이후의 닦음은 결국 증오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므로, 증오를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업장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성철은 보조지눌을 "'''마당에 돋아난 당장에 찍어내야 할 종자 나쁜 나무'''"라고까지 몰아붙였고, 성철 자신이 방장으로 있던 해인사 강원에서 아예 지눌의 <절요(節要)>를 가르치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무려 800여 년 이상 한국 선불교 조계종의 종조 내지 중흥조로 추앙받으며 절대적 권위를 누린 보조선(普照禪)을 최초로 비판했음은 당시 학계뿐 아니라 불교계 안팎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학계는 성철이 당시 조계종의 최고 지도자이자 선사라는 이유로 즉각 반론을 제기하지는 못했다.
1986년 이종익 박사는 <한국화엄사상연구> 「보조선과 화엄」에서 "최근 모 선사(성철 스님)가 보조국사의 『법집별행록절요(法集別行錄節要)』의 첫머리 몇 줄만 보고 보조를 지해종도에 불과하며 그를 신봉하는 자도 지해종도라고 망언하는 것은 그의 문자식견(文字識見)을 크게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라 하고 "선사(禪師)도 편견 · 독단에 치우치면 그것은 불법의 큰 적(賊)이 된다는 점을 반성해야 할 것"이라며 성철의 주장을 반박했다. 보조 지눌이 돈오점수만 설한 것이 아니라 현생에 큰 발심을 낸 일반인(大心凡夫)에게는 일생동안 성불을 위해 수행을 해야 함을(頓悟圓修 一生成佛) 강조했고, 전생에 이어 오랜 기간 닦음을 이어온 이(宿世緣熟者)에게는 그 근기에 따라 돈오돈수를 주장했다. 그러므로 성철이 보조선을 폄하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
이종익 박사에 이어 법정도 「보조사상」1집(1987) 권두언을 통해 “'''중생계가 끝이 없는데 자기 혼자 돈오돈수로 그친다면 그것은 올바른 수행도 아니고, 지혜와 자비를 생명으로 여기는 대승보살이 아니다.'''” 반박하고, "석가모니의 경우, 보리수 아래서의 깨달음은 돈오이고, 이후 45년간 교화활동으로 무수한 중생을 제도한 일은 점수에 해당된다”며 “돈오점수를 자신의 형성과 중생의 구제로 풀이한다면 그것은 바로 알아야 바로 행할 수 있고, 그런 행의 완성이야말로 온전한 해탈이요 열반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는 불교계 내에서 성철을 반박한 첫 시도였다.
1990년 10월 13~14일 송광사에서 열린 학술토론회에서 동국대 목정배(睦楨培) 교수[1] 와 박성배(朴性焙) 뉴욕주립대 교수 사이에 각자의 논문 발표를 통한 돈오점수 또는 돈오돈수 논쟁이 있었는데, 목정배는 「<禪門正路>의 근본사상」에서 "깨달았어도 계속 수행해야 하고 설법을 못하는 것은 깨달음의 완숙이나 원만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증거"라며 성철의 견해를 지지하고 돈오점수의 모호성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에 맞서 박성배는 "보조국사의 <절요>는 문자와 언교를 주축으로 하는 지해(知解)의 역할이 불가수행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으며 불교는 도그마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시각을 허용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성철 스님이 교(敎)와 선(禪)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리라'''고 가르친 반면 보조국사는 양자택일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선에서 교를 보고 교에서 선을 보라고 강조한다." 말하고, 성철 스님이 해인사강원에서 보조국사의 <절요>를 가르치지 못하게 한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다만 양측 모두 ''''돈오점수'나 '돈오돈수' 모두 수행을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라는 점에서는 동의했다.
보조사상연구원 소속 연구자들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궁지에 몰렸던 성철 스님을 지지하던 연구자들은 성철 스님의 입적 1주기를 맞아 조계사에서 개최한 학술세미나를 통해 성철을 비판하는 견해를 반격했다. 윤원철 교수는 「선문정로의 수증론」에서 "성철 스님이 돈오 이전의 수행을 사실상 점적(漸的)인 개념으로 설명하면서도 점(漸)을 극하게 부정하는 것은 점차(漸次)를 인정하면 수행 단계 그 계위(階位) 하나하나에 의미와 가치를 둠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함정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며 "완전히 깨닫지 못한 범주에 속하는 경지가 아무리 고매하다고 해도 구경각(究竟覺)에 비춰보면 무가치함을 깨닫고 수행에 더욱 매진해야 함을 강조하기 의도"라고 밝히고, "성철 스님의 수행론을 두고 아무런 수행의 노력도 필요없다는 뜻이라거나 돈수를 단박에 닦아 마친다는 말의 어감을 흔히 오해해 '쉽다'는 뜻으로 생각함은 그릇된 것"이며 "성철 스님의 돈수란 돈오한 뒤에는 불각(不覺)의 수행방편이 필요 없음을 강조한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윤 교수의 주장에 목정배 교수 등이 동조했고 이에 김호성 교수 등이 반박하면서 돈점 논쟁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진행된다.
성철 스님의 문제제기로부터 비롯돼 30년 이상 지속돼 온 돈점 논쟁은 아직까지 구체적인 결론을 맺지는 못했지만, 수많은 학자들이 참가하면서 20세기 한국불교학계의 최대이슈가 되기에 충분했다.# #
3. 기타
그리스도교에서도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논쟁은 흥미롭게 보이는지 그리스도교 신학의 관점에서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를 본 해석도 있다. 프랑스인 신부인 서명원(52ㆍ본명 베르나르도 스니칼) 서강대 종교학 교수[2] 는 2005년 보조사상연구원 학술지 '보조사상' 제24집에 기고한 논문 '비교종교학의 관점에서 본 한국불교의 돈점논쟁(頓漸論爭)'에서 진리에 대한 체험 과정인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를 가지고 신약성서를 새롭게 바라본 견해를 제시했다.
예수가 '단박에 깨쳐서 단박에 수행이 완전히 이뤄지는' 돈오돈수의 형태로 '거듭남'을 이루었다면, 예수의 제자 12사도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는 돈오점수의 형태로 거듭남을 이루었다고 했다.[3] 그리고 성철의 사상을 "돈오돈수적인 배타주의를 통해서 지눌의 지나친 돈오점수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다만 '''돈오돈수를 말했던 성철 자신도 돈오돈수적인 삶을 살지는 않았다'''며 현재는 성철보다는 지눌이 옳다는 입장이라고.#
어떤 개신교 목사는 "한국교회에도 흔히 신학훈련과정을 거치지 않고 성경만을 깊이 연구해 기독교 진리를 통달한 목회자들이 있다."하고 "이들은 대체로 성경을 가르치고 열정적 설교도 하지만 비신학적 용어 사용으로 인해 비판을 받는다. 그래서 교회에서 익숙치 않은 그들의 한두 마디 언사로 인해 '이단 시비'를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았다면 그는 곧 '돈오돈수'로 기독교의 진리를 체득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체계적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더라도 신학적 용어만 바르게 선택해서 사용할 수만 있다면(?) 훌륭한 설교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를 ‘돈오돈수’로 깨달은 사람이라고 하여 우리가 내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진화론의 양대 학파로 꼽히는 점진론과 단속평행론을 은유해서 돈오점수냐 돈오돈수냐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듯 돈오돈수와는 논쟁이 심한 관계인데, 통상적으로는 돈오돈수보다 평이 좋은 편이다. 깨달음의 기준이 정확하지 않기에 이를 빙자해 육식, 음주, 흡연, 성적 문란, 사치 등의 온갖 부정을[4] 합리화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1] 앞서 「선문정로의 돈오관」(1988)에서 "보조국사가 고려시대에 조계선을 중흥하는데 그 공로가 지대하더라도 원증돈오(圓證頓悟)와 거리가 있다면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며 성철의 입장을 지지했다.[2] 가톨릭 신부이지만 동시에 불교학자로 2004년 <성철스님의 생애와 전서(全書)>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프랑스 제7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만 2014년 저서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에서 성철 스님을 두고 군사독재에 부응한 정치적 인물로 평가한 것에 대해 불교계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3] 죽음을 앞두고 수난의 길로 들어가는 스승을 배반하고서도 다시 그 스승에게 돌아오는 사도 베드로나, 스승을 팔아 넘기고서 극심한 죄책감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었던 이스카리옷 유다 모두.[4] 사실 예전에 기행으로 유명한 승려들도 설화난 민담으로 미화되었을 뿐 실상은 오늘날 땡추랑 별반 다를 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