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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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의 불교 승려. 무소유의 정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54년, 22세에 효봉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남방불교 경전 숫타니파타를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번역하기도 했다.'''"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2. 생애
2.1. 탄생및 출가
1932년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우수영에서 태어나 목포공립상업중학교[2] 를 졸업하고, 목포상과대학교[3] 에 입학했는데, 하필 1950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게 되었고, 1955년 통영 미래사로 입산해 이듬해 승려 효봉을 은사로 출가, 사미계를 받고 1959년에 28세 되던 해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이후 쌍계사, 해인사, 송광사 등의 선원에서 수행했고, 불교신문 편집국장과 역경국장, 송광사 수련원장 등을 지냈다.
이후 서울 봉은사 다래헌에 살면서 운허 스님과 함께 불교 경전 번역 일을 하던 중[4] 함석헌, 장준하 등과 함께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법정은 종교적이고 피안적인 글만 썼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불교계 인사들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나섰던, 불교 승려로써 그 시절에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5] 생에 주로 암자나 산골에서 살았던 것은 맞지만,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개신교인이자 사회운동가였던 함석헌이 만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나 강원용 목사 등 타종교인들과 종교간 대화에 앞장서며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인물이었다.
2.2. 맑고 향기롭게 설립
그러다 1974년 인혁당 사건 이후에 송광사 불일암에 틀어박혔고, 그곳에서 <무소유>(1976년) 등을 통해 돈과 권력이면 다 된다는 조류와는 다른 삶의 길을 끊임없이 제시했다. 또한 송광사에 ‘선수련회’를 만들어 산사의 수행법을 대중들에게 전했는데, 오늘날의 템플 스테이의 원조가 됐다. 법정이 머무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지 전통과 현대, 불교와 대중의 소통이 있었다. 그는 관계의 단절자가 아닌 가교자였다.
무소유 외에도 여러 저서로 일약 유명해지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자, 1992년 어느날 갑자기 강원도 어딘가로 이사를 가버리곤 법회 때나 가끔 산을 내려왔고 어디에 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1994년에는 시민운동 단체인 ‘맑고 향기롭게’를 만들어 이끌었으며, 1996년 서울 도심의 요정 대원각을 시주받아 이듬해 길상사로 고치고[6] 회주가 되었다. 기생 출신으로 백석 시인의 연인으로도 알려진 김영한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스님에게 대원각 부지 7천여 평을 희사해 절로 삼겠다고 요청했던 것. 이것도 일부는 "무소유라더니 땅은 덥석 받았네?"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하는데, 법정 스님 본인은 10년 동안 안 받고 버티셨다. 그러다 1996년에야 시주를 받아들인 것. 단월(檀越)인 김영한은 2년 뒤인 1999년 세상을 떠났다. # [7]
2.3. 타 종교와의 교류
법정 스님은 생전 불교계 뿐 아니라 기독교 등 다른 종교인들과도 교류를 가졌으며, 그 덕분에 종교를 불문하고 많은 존경을 받았다. 특히 천주교와의 관계는 남달랐는데, 군사독재 시절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기도 했고 또 자주 교류했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선종하였을 때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와 함께 애도를 표하였고, 입적하였을 때는 이해인 수녀가 애도를 표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법정이 1984년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 미사 때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을 받고 명동성당을 방문해 설법을 한 적이 있었는데,[8] 이 인연으로 법정은 길상사 낙성법회 때 김수환 추기경을 초청하기도 했다.[9]"'''김 추기경님이 가지를 넓게 펴고 세상을 품는 느티나무였다면, 법정 스님은 늘 푸르름을 잃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는 소나무라 할 수 있지요.'''"
2.4. 입적
"이 몸뚱아리 하나를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나무들을 베지 말라. 내가 죽으면 강원도 오두막 앞에 내가 늘 좌선하던 커다란 넙적바위가 있으니 남아 있는 땔감 가져다가 그 위에 얹어 놓고 화장해 달라."
"사리는 찾지 말고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어떤 거창한 의식도 하지 말고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지 말라."
2010년 3월 11일에 법정 스님은 입적했다. 향년 78세. 법랍 55세였다.'''"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
입적 전날에 남긴 법어.
입적 이후 원적(圓寂)과 함께 자신 이름으로 출간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고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자신에게 신문을 배달하던 사람에게 전해 달라는 법정의 유지가 공개되었다.
이에 고인의 뜻을 따라 일체의 장례 의식을 거행하지 않고 2010년 3월 13일에 전남 순천시 송광사[10] 에서 다비를 진행하며, 조화나 부의금을 받지 않았다.(관련기사) 다비식 이후 나오는 사리는 유지에 따라 수습하지 않았으며, 유골도 49재까지 송광사와 길상사에 안치했다가 조계산 불일암과 강원도 수류산방[11] 인근에서 비공개로 산골하였다. 길상사에 생전 승려가 사용하던 유품과 영정을 모아두고 있다. 생전에 법정 스님이 나무 소비를 이유로 지인들에게 일반 화장장에서 다비해 달라고 했다는 말이 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만약 그 말이 진짜였다면, 법정 스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법정이 생전 17년을 머물렀던 송광사의 불일암은 법정 스님의 맏상좌[12] 덕조(德祖)가 법정의 유언을 따라 10년 동안 지켰다. # 또한 본인이 설립한 맑고향기롭게의 이사장 자리는, 덕인(2010~) - 덕운(2011~) - 덕일(2016~) - 덕조(2020~) 순서대로 맡고 있다. 다만 내부 갈등이 없지는 않았던 듯.
3. 논란과 오해
법정(승려)/논란 항목 참조.
4. 이야깃거리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무엇인가? 불교도 기독교도 혹은 유태교도 회교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바로 친절이다. 친절은 자비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2004년 하안거 해제 법문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이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사람끼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보다 따뜻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친절과 따뜻한 보살핌이 진정한 대한민국을 이루고, 믿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
- 타인에 대한 친절을 최고 덕목으로 보았다.
- 김영한과의 인연이 유명하다. 자신이 소유하던 서울특별시에서도 가장 이름 높았던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법정에게 시주한 것. 법정은 10년 동안이나 사양하다 결국 김영한의 고집에 못이겨 1997년 대원각을 시주받아 길상사라는 사찰로 바꾸어 창건하였다.
- 대광고등학교와도 인연이 깊은데, 이 학교 출신인 가수 김광석에게 원음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었고, 윤동주에 대한 연구의 끝판왕인 마광수 교수도 대광고 출신이다. 김광석과 마광수는 1992년 불교방송에서 송출된 라디오 프로그램인 <밤의 창가에서> 마광수 교수가 방송의 게스트로 출연하여 방송 수위를 넘는 발언을 한 것이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오늘날에는 오히려 불교방송이 수구적이지 않은 이미지를 갖춘 꼴이 되었다.
- 국수를 엄청나게 좋아해서, 남들이 몇 생에 걸쳐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국수를 먹었다고 한다. 입적 직후 나온 다큐멘터리에서 법정의 평소 식생활을 간략하게 설명한 적이 있는데 아침엔 빵 두 쪽, 점심은 제대로 차려먹고, 저녁엔 늘 국수를 찾았다고 한다. 법정이 최고로 치던 국수 레시피는 금방 탁 삶아서 우물물에 면을 씻은 뒤 간장에 비벼 먹는것. 최악으로 친 건 고속도로 휴게소의 우동이었다. 그도 그럴만한게 고속도로 휴게소의 요리에는 불교에서 거부하는 오신채가 필수적으로 들어가는데다가, 건더기가 많이 들어가기때문에 무소유를 중요시 여기는 법정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낭비로밖에 안보이기 때문.
- 의외로 아이스크림도 좋아하셔서, 자주 드셨다고 한다. 특히 바밤바를 좋아하셔서 법정 스님 수필집을 보면 다른 스님들과 목욕갔을 때 간식으로 드시곤 했다는 데 한 번에 3개를 드신 적도 있다고...
- 해인사 선방에 있을 때 절에 온 어떤 아줌마가 장경판전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보고 "아, 빨래판 같은 거요?"이라고 한 데에 충격을 받아서[14] 한글 역경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이후 운허 스님을 도와 『불교사전』을 편찬하고 봉은사의 다래헌에 머물며 한자로 된 불경의 번역에 힘쓰게 되었다고 한다.#
- 출가 전 독사진 출가 전 단체사진 및 젊은 시절의 모습 승려가 되기 전 사진들을 보면 지금 시점으로도 상당한 훈남이었다. 포토샵이란게 없던 시절이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