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추
1. 개요
타락한 중을 욕하는 말로, '땡추중'의 줄임말이다. '땡중'이라고 하기도 한다. 땡추가 표준어지만, 사실 '땡초'로 표기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나 땡초는 식물 고추와 동음이의어가 되기 때문에 본 위키에서는 편의상 땡추로 직접 링크하는 것이 편할 것이다.
점잖은 단어로 이야기하면 파계승이지만, 실제 언어 사용에서는 어감이 약간 다르다. 땡중은 이누야샤의 미륵처럼 경박한 느낌이라면[1] 파계승은 계율을 어겼다는 의미가 강해서인지 조금 더 무겁고 진중한 상황에서 쓰인다.
파계(破戒)란 말은 '계율을 깨뜨렸다.'는 뜻으로, 범계(犯戒)라고도 부른다. 승려가 지켜야 할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계율을 어긴 것을 말한다. 특히 '살생하지 마라.' 같은 중대한 계율을 깨트린 경우는 바라이죄(波羅夷罪)라고 하여, 계율을 어긴 시점에서 즉각 승단을 떠나야 한다. 동료 승려가 바라이죄를 범한 줄 알면서도 묵인것 또한 역시 중대한 계율 위반으로 본다, 바라이죄를 범한 파계승은 죽어서 인간으로 환생하기 전까지 다시는 승려가 될 수 없다.
땡중이니 땡초니 하는 단어의 실제 사용례는 스님들끼리 농담 삼아서, 혹은 친근감 있게 서로를 부를 때 쓰는 경우가 더 잦다. 하지만 이것도 '''엄연히 욕'''이다. 따라서 신도나 일반인은 스님에게는 대놓고 이런 말을 쓰면 '''절대로 안 된다'''. 다른 예로 이해하고 싶으면 개신교 쪽에서 목사나 평신도에게 면전에서 대놓고 먹사, 예수쟁이/개독교라고 부르는 정신나간 상황을 상상해 보자. 마치 흑인들은 서로를 친근하게 니가(깜둥이)라고 부르지만, 타인종은 흑인더러 니가라고 부르면 안 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외에도 경찰을 짭새/똥파리#s-5라고 부른다든가[2] , 군인을 군바리라고 부른다든가 하는 것도 이와 같다. 가끔 사극이나 무협지 등에서 득도한 스님이 자기를 땡추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 성철 스님도 생전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마 땡초가 좋은 중 될라 안 카나?"'''[3] 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무튼 본질은 욕이지만, 더 정확히는 '파계승'을 부르는 속칭이기도 하기에 정식으로 인정받은 비구/비구니가 파계하면[4] 이렇게 된다.
사실 이 정도 파계는 애교고, 요즘은 이런 소소한 파계보다는 먼저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큰스님쯤 되는 고위층 승려들이 부정부패를 벌이는 게 불교계에 있어 큰 문제로 꼽힌다. 십일조 체계가 확실히 잡힌 개신교에 비하면[5] 불교가 신도들로부터 걷는 돈은 대개 정말 순수한 의미로 자발적이기에 새발의 피 수준이라는 걸 감안하면 안 그래도 없는 살림에 부정부패가 가능하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사실 경제적 문제 탓에 금전적 부정부패는 대부분 한국 불교 제1종파인 조계종에서 많이 발생하는 편이다. 그나마 조계종이 자금 사정이 가장 낫기 때문이다.
조직폭력배들이 개심한다면서 도피하는 루트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조양은처럼 개신교 장로나 목사 행세를 하는 자들이다. 아직도 거대 사찰 이권 다툼이나 분규 시 덩치 좋고 험상궂은 스님들이 각목 들고 서로 싸우는 모습이 종종 포착되는데, 이들 대부분이 바로 악명높았던 과거 주먹패들이며, 법망을 피해 중으로 위장한 땡추들이다.
일본에서는 '나마구사보즈'(生臭坊主)나 '쿠소보즈'(くそ坊主)가 한국어 땡추와 의미나 어감이 비슷하다. '나마구사(生臭)'는 비린내가 난다는 의미로, 허구한 날 고기를 구워 먹어서 몸에서 고기 냄새가 난다는 뜻이다.
2. 어원과 역사적 배경
어원은 조선 중기 때, 유교국가를 타도하고 불교국가의 부활을 위해 암약했던 승려로 구성된 비밀 조직인 '''당취'''(當聚)다. 지리산과 금강산의 하급 승려 위주로 결성하였다. 무력으로 조선 왕실을 전복하려 했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당연히 무술을 배웠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음주와 살생을 하게 되었다. 힘쓰는 인원을 확보하기 위해 떠돌이 건달이나 걸인을 머리만 깎이고 가입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조직 전체의 질과 기강이 해이해져서 유생들이 이걸 보고 승려들이 타락해서 계집질이나 하고 있다며 비난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6] 이들은 삼보를 어겨 타락한 중들을 응징함과 동시에 절과 마을에 약탈과 방화를 일삼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정여립의 난 때 휴정대사가 역모 혐의로 붙잡혔으나 조사과정에서 풀려났고, 야사에 따르면 이때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그림을 받았다. 하지만 휴정대사와 유정대사가 땡추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주장 중 하나이므로 일반화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런 주장을 담은 대표적인 책 '서산, 조선을 뒤엎으려 하다' 자체가 근거에 비해 비약이 다소 심한 경향이 있음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조선시대는 불교에 대한 탄압이 정말로 가혹했던 시절이다.[7] 오죽했으면 조선시대보다는 일제강점기가 차라리 한국 불교에 대한 대접이 더 나았다고까지 평가되었을까. 이것은 조선이 노골적으로 불교를 멸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8] 하지만 일제강점기 당시의 불교 우대 정책은 도리어 대다수의 민중들로 하여금 불교에 더더욱 등만 돌리게 만드는 결과만 초래하게 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한 중들이 많아져서... [9]
당시 유교를 숭상하던 양반층도 자신들의 글에 불교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승려 박대는 기본에 심지어는 절에 가서 깽판까지 치고올 정도였으니 위의 승려 비밀조직이 있었다는 문헌도 사실 비약적인 면이 클 수밖에 없다. 오죽했으면 문정왕후는 승려들에게 사대부와 같은 권한을 준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과거에 세종대왕도 실시하던 승과 부활시키고 사대부들이 절 가서 깽판 치는 것 좀 못하게 했다고 욕을 먹고[10] 율곡 이이는 과거에 불교에 심취한 일 때문에 소승이니 중놈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성균관에서 왕따가 되었다. 허균도 불경을 섭렵하고 불교를 신봉했는데 이로 인해 탄핵을 받았다.
이후 임진왜란 때 당취의 일원이던 무술스님들이 승병으로 활약하고 조선 정부의 인정을 받게 되면서 대부분 양지로 나오게 되었으나, 조정에서 불교를 위해 개선된 대우가 하나도 없었다.[11] 오히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선 승려에게 과도한 부역을 부과하는 등 수탈이 강해졌다. 그 결과 일부는 음지로 숨어들어 사실상 스님의 옷을 입은 산적이 되거나, 환속 후 거사(속세승)를 자칭하며 유민(流民, 난민 집단) 일파에 들어가 지배층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민란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땡추라는 단어에 비난의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추정된다.
3. 땡추 속성을 지닌 캐릭터
창작물에서는 몇가지의 유형으로 나뉜다.
- 불교의 계율을 어기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땡추.(★) 전형적인 타락한 성직자이다. 실제로는 파계는 물론 형사처벌까지 갈 수 있는 케이스다.
- 인간성이 글러먹진 않았지만, 수행에는 관심없고 세속적 욕심이나 이상에 관심이 더 많은 경우.(☆) 대부분 개그 캐릭터다.
- 스스로 땡추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거나 현자인 경우. 원효 대사 등 몇몇 고승들의 파격적인 행적들을 차용해서 '알고보니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이라서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란 설정을 부여하기도 한다.[12] (※)
- 고의는 아니지만 실수나 사고로 계율을 어기거나 죄를 뒤집어쓴 채 파계를 당했으나 승려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 형태.
전자는 흉악범들을 학살하는 주인공 제이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인물이지만 간혹 그에 의해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후자는 이름부터가(...) 땡중으로, 석보살의 수제자였다가 현재는 제이의 편에 섰다.
- 먹짱 - 공념
근본적으론 선량한 인물이나, 실상은 식욕을 버리지 못해서 허구한 날 닦으라는 도는 안 닦고 처먹기만 한다. 게다가 작중에서 먹보 도전을 해서 얻은 상금으로 공양비를 채울 생각도 하는 걸 보면 금전욕도 조금 있는 듯 하다.
- 무사 - 지산 스님
사실 여기 올라올 일이 없는 인물이다. 땡추짓은 커녕 불경 번역을 위해 직접 서역까지 다녀올 정도로 불심이 깊고 객잔을 두고도 돈 한푼 없어 말라 죽어가던 고려인 일행의 밥값을 거리낌없이 내주고 혼자몸 건사하기도 힘든 마당에 길안내까지 해주는 대인배다. 사신단의 유학자와 쓰잘데기 없이 아가리 배틀(...)을 벌이기는 하나 이 두 사상의 특성상 피할 수 없는 일이고 후반부에 원나라 병사들 상대로 무쌍찍는 것도 역사적으로 외세에게 백성을 지키기 위해 승려들이 창칼을 든 역사가 있는만큼 문제될 게 없다.'
원래 스님이었으나, 현실을 뒤집자는 이상이나 야망을 가진 이들이다.
원래는 선량한 승려였으나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다 마을 촌장 일파가 불태워 죽이자 복수귀가 되어 엄청난 수련을 하면서 얻은 힘으로 촌장 일당들을 죽여서 파계승이 되고 십본도에 들어갔다.
- 사무라이 스피리츠 시리즈 - 가후인 니코친
- 사하촌(요산 김정한 저) - 보광사 승려 전원(★)
- 서유기 - 관음선원 승려들
저팔계의 경우는 계율을 깨거나 파문당하지는 않기에 취소선이지만, 행적만큼은 위의 유형 설명 중 두번째 유형의 땡추와 정확히 부합한다. 한편 관음선원 승려들의 경우 삼장법사의 금란가사를 탐내 거처에 불을질러 죽이려했다.
- 수호전 - [13] , 배여해(★)[14] , 등원각
- 수호후전 - 살두타, 담화
- 스님의 일탈[15] - 덕만[16] , 주지스님[17]
- 승려와 나누는 색욕의 밤에 - 쿠죠 타카히데
승려인데 색욕마인이다.
독자들에게 땡중소리를 듣고있으며 아예 본편에서도 땡중소리를 들었다
최동열 기자가 원고 건으로 찾아왔을 때 "원고? 예끼 이놈아! 그러면 시원한 곡주[18] 라도 내와야지 않겠느냐."라고 말했으며, 곧바로 최 기자가 준비해왔다고 하자 "안그래도 오늘은 만공스님도 찾아온다 했으니 맘껏 들어보자꾸나" 라며 술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연히 비하의 목적은 아니며, 위에서 제시한 유형 중에선 3번째 유형으로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승려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다[19] . 해당 장면은 야인시대 30화에서 등장한다.
일단 둘 다 작품 공인 땡중 맞다. 무신은 이누야샤와 미로쿠가 그렇게 부른적이 있었고, 미로쿠는 카고메를 제외한 동료 모두가 그렇게 부른적이 있었다. 먼저 전자는 스님이란 작자가 술에 절어 살고, 후자는 청출어람이라고 여자와[20] 돈을 밝힌다. 미로쿠는 땡중인 무신 스님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첫 등장때도 술 마시는것으로 등장한다.
- 이말년 서유기 - 현장법사
일단은 진짜 스님으로 여색에는 관심없고 중생 제도에 더 관심을 두며 통상시에는 수행과 염불을 외지만 어지간한 소음 공해인지라 땡추 취급 받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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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가 법운을 가리켜 대놓고 땡중이라며 디스하기는 한데 이런 것에는 서로 복잡한 사연이 있다. 사실 땡추라긴보단 파계승에 더 가깝다.
현장삼장이 땡중이 된 건 거슬러 올라가보면 광명의 영향이었다. 가장 먼저 가르친 단어가 갈비이고, 광명 그 자신도 술 담배를 즐겨 했을 정도니... 다만 현장삼장이 살육을 벌인 건 어린 나이에 겁탈당할 위기에서 호신 목적으로 총기를 사용한 데서 시작되었으며,[21] 담배는 광명 삼장이 아닌 다른 주지승으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작중에서 여색을 밝히는 일은 한 번도 없다. 반면 니건일은 수도승 시절에 야설을 썼을 정도로 색욕까지 탐했던 전력이 있다.
- 태조 왕건 - 타락한 궁예(★)[22] , 석총(※), 허월(※)[23] , 도우(★)[24]
- 패션왕, 복학왕 - 일진 스님
- 호혈사일족 - 진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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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프노시스 마이크 - 하라이 쿠코(☆)
절 안에서 껌을 씹거나 절 내에서의 청소를 귀찮아하며 아버지를 향해 걸레를 던지고 도망가는 모습도 보였다.
이 쪽은 비구니 행세만 하는 것이고 정체가 따로 있다. 돈을 밝히고 식사 관련 규율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
4. 같이보기
[1] 그 중에서도 여자를 밝히는 것은 땡중에게 있어서 필수요소나 다름없다.[2] 이 쪽은 경찰 → 경찰 쪽이기보다는 범죄자가 경찰을 부를 때 더 많이 쓰이는 편이다.[3] 성철 스님은 매우 카랑카랑한 동남 방언이 특징이었다.[4] 예를 들어 생명을 살해했거나, 성관계를 맺었다거나... 큰 계율이든 작은 계율이든 어기면 모두 파계(범계)인데, 대부분은 성관계 관련이다.[5] 보통 평범하고 정상적인 교회가 아니라 개독교 계열의 문제가 있는 교회 쯤 되면 돈을 아주 그냥 부정한 방법으로 모으는데, 속된 말로 갈퀴로 긁어모은다. 단, 말 그대로 비정상적인 개신교 교회들에서만 이렇다. 일반 '평범하고 정상적인' 교회들은 대개 헌금 내도 그만 안 내도 그만인 경우가 대다수이다.[6]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 이런 양반들의 인식을 반영한 대사가 나온다. 조윤이 승려들을 가리켜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산속 절에 공양하러 간 부인들이 임신을 해서 돌아오는 이유가 뭐겠냐?'며 땡추를 도발한다.[7] 그러나 불교 측이라고 절대적으로 무고한 것은 아니다. 이전 왕조 고려는 숭불 국가에 승려 집단의 권한과 사회적 지위가 무척 컸던 국가이므로, 말기로 갈수록 스님 대비 땡초의 비율도 늘어나며 대형사찰이 큰 땅을 소유하고 이권사업을 벌이는 등 개판오분전 상황을 보였다. 당연히 이는 조선왕조가 억불 정책을 실시하는데 큰 빌미가 되어주었다.[8] 조선이 숭유억불을 하게된 것은 물론 성리학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말 불교가 크게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불교가 부패하게 된 건 고려의 책임이 크다. 사실 불교가 조선왕조 500년 내내 박대당한 건 아니었으며, 초기에는 그래도 아주 푸대접은 아니었다. 태조는 애초부터 불교 신자였기에 무학대사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말년에 받은 마음의 상처를 씻고자 불교에 깊이 의지하였다. 그의 아들인 정종 또한 불교 신자였다. 철저한 성리학자 세종조차도 말년에는 훈민정음으로 불교 서적을 짓는 등 불경에 관심을 보였으며, 세조는 역대 조선의 임금 중에서도 특별히 불교에 호의적이었다.[9] 부산대학교 교수를 지냈던 요산 김정한 작가의 단편 소설 '사하촌'과 '모래톱 이야기'를 읽어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실제로 김 작가가 이 작품들을 발표한 후 범어사의 일부 중들이 그를 '''직접 찾아가서 노골적으로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10] 문정왕후를 깔 때는 측근 비리나 수취제도 문란의 방치 등 다른 병크들이 넘치는데 실책도 아닌 불교 중흥을 들먹일 이유가 없다.[11] 다만 임란 동안에는 조선 사신들도 승려들을 까지 않았고 열반이 코앞이던 사명대사에게는 약까지 보내줬다.[12] 전설의 고향의 한 에피소드는 이 클리세를 역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속세를 등진 선비가 술과 고기를 게걸스레 먹는 승려를 만났는데 오히려 득도한 고승들이 규율에 얽매이지 않으니 내 고민을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며 상담하는데 사실 그 승려는 속세에서 강간 살인을 저지르고 산으로 도망쳐 스님 행세를 하는 진짜 땡추였고 이에 격분한 선비는 절벽 밑으로 걷어차 버린다. [13] 하는 짓만 보면 진성 땡중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깨달음을 얻고 열반한다. 다만 노지심은 절에서 쫓겨난 인물은 맞지만 다른 절로 쫓겨나간 것일 뿐 정식으로 파계를 당하지는 않았다. 수호전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노지심이 출가할 당시 오대산 문수원의 지진장로는 지금은 저래도 언젠가는 도를 깨달을 사람이라며 받아주었다. 처음부터 파계할 생각은 없었다는 뜻.[14] 배여해는 양웅의 아내 반교운과 바람을 피우다 양웅의 의형제 석수에게 들켜서 반교운과 함께 살해당한다. 이쪽은 진짜로 땡중에 악인.[15] 엉덩국이 그린 만화.[16] 초반부부터 여자들을 꼬시고 다닌다.[17] 절에서 아내와 통화하는 장면이 있다. 다른 스님들은 모르는 듯.[18] 원래 스님들의 은어로는 술이 곡차이지만 여기서는 일반인들이 곡차라고 하면 잘 못알아들을 거 같아 곡주로 대사를 바꾼 듯하다.[19] 실제의 한용운 선생도 자신의 논문인 불교유신론을 통해 승려들이 계율에 얽매이지 말 것을 주장하여, 대처승을 인정할 것과 더불어, 제한적인 육식과 음주, 승려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허용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20] 여자 밝히는건 미로쿠네 집안의 나쁜 버릇인듯 하다. 풍혈의 저주 생긴 동기부터 미로쿠네 조부가 미녀로 변신한 나라쿠에 낚여 그리 된것이라...[21] 그 때문에 자살하려 했는데도 총알이 없어 실패하자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며 자신을 비웃었다.[22] 타락 이전엔 땡추가 아닌 생불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으나, 타락 이후에는 아예 땡추를 넘어서 관심법하는데 기침했다고 죽이기까지 하는 미치광이 살인귀가 되고 말았다.[23] 석총과 허월은 서로를 땡초라고 부르며, 곡차를 좋아하는 등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석총은 법상종의 고승으로 추앙받는 큰스님이자, 세상과 백성을 구하기 위해선 자기 목숨도 마다하지 않는 고결하고 곧은 인물이다. 그리고 허월은 권력의 허망함을 느끼고 속세를 버린 인물이며, 세상과 인물 보는 눈이 밝은 현자이다.[24] 원래 그냥 스님이었으나, 나주 전투 당시 후백제 능창 휘하에 있던 형제들이 모두 전사한 이후 복수귀가 되었고, 태봉국의 관리 임춘길에게 지나가는 스님인 척 잠입하여 왕건을 상대로 여러 모략을 꾸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