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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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정치가, 능연각 공신의 중에 한 명. 자는 극명(克明). 당태종 이세민의 심복으로서 진왕 18학사의 한 명으로 불렸다.
2. 생애
경조 두릉 출신으로 수나라에서 현위를 지냈고, 600년에 인재를 선발하는 일에 참여했으며, 고효기는 두여회에 대해 임기응변의 재주를 가지고 있어 동량의 중책을 맡게 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수양제가 살해당하고 천하가 혼란해서 은둔하다가 당나라를 섬겼으며, 621년에 왕세충이 격파되면서 숙부 두엄이 붙잡히자 두엄의 동생인 두초객의 요청으로 이세민에게 요청해서 그를 살려줬다.
진왕부에서 병조참군을 지내다가 섬주장사로 승진했으며, 진왕부의 관료들이 외직에 임명되면서 방현령은 두여회가 제왕을 보좌할 만한 인재라 사방을 경영하려면 두여회가 아니면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로 인해 이세민이 상주문을 올려 두여회를 진왕부 소속으로 삼았으며, 두여회는 방현령과 함께 이세민을 쫓아서 정벌하거나 모의했고 군대 안에는 많은 일이 있었지만 두여회가 물 흐르듯 해결했다.
은밀히 방현령, 이세민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626년에 현무문의 변을 모의해 결국 황태자 이건성을 제거하고 이세민을 황제로 올리는 것에 공헌했으며, 6월 12일에 장손무기와 함께 좌서자가 되었다가 7월 6일에는 병부상서가 되었다. 628년에는 힐리가한이 돌리가한을 공격했고 당나라에서 양 측과는 모두 우호를 맺은 상황이라 고민했지만 두여회는 그들이 혼란한 것을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629년 2월 6일에는 우복야에 임명되어 방현령과 함께 권력을 잡고 정사를 관장했으며, 12월 17일에 병으로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채성공으로 있다가 630년 3월 19일에 죽었으며, 그가 죽은 지 13년 후에 당태종이 두여회를 능연각 공신에 봉했다.
방현령과 함께 대각의 규모를 정했고 두여회는 방현령과 함께 상의해 결단을 내릴 수 있었으며, 방현령과 함께 깊이 서로 알아주어 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당시에 현명한 재상을 말하면 두여회는 방현령과 함께 추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