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손무기

 


<colbgcolor=#a48252><colcolor=#ece5b6> '''능연각훈신
조국공(趙國公)
長孫無忌 | 장손무기
'''

'''작호'''
조국공(趙國公)
'''이름'''
장손무기(長孫無忌)
''''''
보기(輔機)
'''부친'''
장손성(長孫晟)
'''출생'''
594년 ~ 659년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4.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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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나라의 인물. 자는 보기(輔機). 장손성의 아들.

2. 생애


그의 조상은 북위의 황족으로 이세민이 여동생과 결혼해서 이세민과 친해졌으며, 재주와 책략을 가졌고 당고조 휘하에서 위북행군 전첨이 되었다. 이세민의 정벌을 도왔고 개국공신이 되어 제국공 등의 작위를 받았다. 626년에는 비부낭중으로 있으면서 방현령, 두여회와 함께 이세민에게 이건성, 이원길을 죽일 것을 모의해 이세민이 황제를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이세민이 황제에 오르자 좌서자, 이부상서 등을 역임했고 조국공의 작위로 옮겼다.
장손무기는 이세민이 황제가 되기 전부터 사귄데다가 외척이라 다른 신하들보다 대우가 좋았으며, 여동생인 문덕황후 장손씨전한 시대의 몰락한 외척인 여씨, 곽씨, 상관씨를 거론하면서 장손무기가 국정을 잡는 것을 원하지 않아 했지만 이세민은 듣지 않고 장손무기를 채용했다. 이후 우복야가 되었다가 628년에 어떤 사람이 장손무기에 대한 권력과 총애가 지나치게 왕성하다는 표문을 올리자 두려움을 품고 스스로 파직하기를 요청했으며, 파직되면서 개부의동삼사에 임명되었다.
633년에는 사공에 임명되었고 이후 조주자사에 임명되었지만 봉국에 가기를 원하지 않는 표문을 올려 조주에 가지 않게 되었으며, 642년에는 사도가 되었다. 643년에는 능연각훈신, 태자태사가 되었고 당태종이 이치가 어질지만 나약한 것으로 의심해 이각을 태자로 삼으려고 하자 이를 중지시키도록 이야기했으며[1], 645년에는 섭시중이 되어 고구려 원정에 종군했다.
647년에는 양주도독에 임명되었지만 그 일을 관장하지 않았고 648년에는 검교중서령, 지상서문하상사가 되었으며, 649년에 태위, 동중서문하삼품으로 있다가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이 즉위하자 문하이성사를 겸임했고 지상서성사를 사양했다. 651년에는 영휘령을 올리면서 당고종이 조서를 통해 천하에 반포되었고 658년에는 현경례를 상주해 당고종이 조서를 내려 이를 시행하게 했다.
장손무기는 측천무후로부터 자신을 돕지 않는 일로 원망을 받았는데, 659년에 측천무후가 허경종을 시켜 장손무기가 위계방과 반란을 일으키기로 모의했다고 모함했다. 이로 인해 태위와 봉읍을 빼앗기고 양주도독이 되어 검주로 연금되었다가 목을 매고 자살했다.
여담으로 국내 모 학습만화에서는 고구려-당 전쟁을 묘사할 때 이 인물을 황제의 손자 무기라고 표기하는 괴이한 오류를 범한 적이 있다. 성이 장손인 것을 보고 한 오류로 보이는데, 장손무기가 당 태종보다 나이가 많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3.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KBS 사극인 대조영에서는 안대용이 분하였는데 실제 장손무기와 달리 이세민에게 아부하는 아첨꾼의 기질로 묘사하였다. 본래 섭시중으로 종군한 고구려 원정에서 부터 당의 승상이라고 고증오류를 내버렸다. 본래 승상은 한나라시절의 관직이고 수·당 시대에는 이미 3성 6부제가 확립되어 있었기에 명백한 고증오류다. 이후 당태종이 승하한뒤 당고종측천무후가 재차 원정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한 이후였으나 장손무기가 당나라의 개국공신 중 한 명으로 꽤나 영향력이 큰 인물임에도 작중에선 그다지 비중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세적소정방이 당나라의 원로격 인사들 중에서 전면에 나섰다고 할수 있다.
연개소문에서는 청년 시절은 손종환, 중년 시절은 장항선이 연기했다.[2] 청년 시절의 장손무기는 성우 손종환의 몇 안 되는 사극 출연작이다. 대조영과 다르게 상서복야란 관직이 유일하게 고증되있다 보니 관직명의 오류는 없다. 대조영에서의 아첨꾼 기질은 없어졌는데 물론 방현령과 같이 황제 듣기 좋은 말을 조금하긴 한다. 이후 당나라의 무장들과 한뜻으로 고구려 원정에 동조하였다. 위징이 마지막으로 말한 두 가지 말중에 태자 이승건의 사건이 터지자 이를 처리하는 심문관의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1부의 수나라의 재상 양소가 맡았던 역할과 같다. 양소 역시 태자를 처리하는 심문관이었고 똑같이 우복야의 벼슬을 재직하였다. 최후에서도 양소는 장형에게, 장손무기는 무측천에게 당했는데 비록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둘 다 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으니 비슷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태자의 사건을 정리한뒤 드디어 고구려로 떠나는데, 여기서도 조금의 오류는 있다. 바로 장손무기가 섭시중이 아니라 원정군 대총관인 것 말이다. 고구려 원정이 실패하고 당고종이 황위에 오른 뒤 당나라의 원로이자 막강한 권신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당태종의 유훈인 무씨 성을 가진 여인을 내쫓으라는 말을 지키려 했으나[3] 무조(훗날의 측천무후)에게 결국 당하여 파직당한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꽤나 양소와 닮은 캐릭터라고 볼 수 있는데 재상이었고 나라 최대의 권신이었던 점, 태자 문제를 정리하고 신태자를 황위에 올린 점, 지나친 권력을 누리다가 결국에는 황제에게 버림받고 죽는 점이 묘하게 똑같다. 또한 장손무기와 맞선 이적 역시 1부의 우문술과 비슷한 점이 많다.

4. 둘러보기(계보)




'''''' '''상서우복야'''
전임 봉덕이

'''장손무기'''
627년~628년



후임 두여회
'''''' '''사공'''
전임 배적

'''장손무기'''
633년~642년

후임 방현령
'''''' '''사도'''
전임 이원길

'''장손무기'''
642년~649년



후임 이원경
'''''' '''태위'''
전임 이세민

'''장손무기'''
683년~685년

후임 이원가
[1] 장손무기가 이치의 외삼촌이어서 그런 것이다. 이세민의 가장 뛰어난 아들이 이각이었지만''' 자신의 조카가 아니기에 막은 것.''' 결과는 자업자득. [2] 손종환은 연개소문 2부에서 장손무기의 아들로 재출연한다.[3] 이 과정에서 고종의 면전에 대고 "폐하를 보위에 올린 사람이 바로 신이옵니다!" 운운하면서 고종과 이적, 설인귀 등으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