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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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정치가, 역사가. 능연각 공신의 한 명. '''현령'''은 자이고, 이름은 '''교'''(喬)이다. 당태종 이세민의 심복으로서 진왕 18학사의 한 명으로 불렸다.
2. 생애
수나라에서는 진사가 되어 습성현위에 올랐고 600년에 인재를 선발하는 일에 참여했으며, 고효기가 방현령에 대해 이 같은 젊은이는 본 적도 없고 다른 날에 큰 그릇이 될 것이지만 대성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원망스럽다고 할 정도였다. 617년에 이세민에게 항복해 기실참군에 임명되었으며, 621년에 왕세충이 항복하자 이세민의 명령으로 중서성, 문하성에 들어가 호적, 농지에 관한 문서, 왕세충이 내린 명령을 거뒀다.
624년에 이건성, 이세민이 다투면서 당고조는 형제가 화목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면서 여러 신하들을 유배시켰는데, 그 중에서 두여회의 숙부 두엄이 이건성을 모시려고 하자 방현령은 그가 교활하고 술수가 많아 이건성을 가르친다면 이세민에게 불리할 것이라 여겨 이세민에게 이야기해서 두엄을 천책상장부에 넣었다.
뛰어난 재능과 식견을 가진 탓에 황태자 이건성과 진왕 이세민이 갈등에 놓이게 되자 진왕부 출입을 금지당할 정도로 이는 이건성이 방현령의 두뇌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였으며, 은밀히 두여회, 이세민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626년에 현무문의 변을 모의해 결국 황태자 이건성을 제거하고 이세민을 황제로 올리는데 공헌했다.
당태종 즉위 후 소위 정관의 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6월 12일에 고사렴과 함께 우서자에 임명되었다가 7월 6일에는 중서령이 되었다. 629년에 2월 6일에 좌복야에 임명되면서 두여회와 함께 권력을 잡고 일을 처리하게 되었으며, 629년에는 왕규와 함께 관리 선발을 관장했다.
637년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조서를 받아 율령을 제정하고 위징과 함께 신례 138편을 올렸으며, 639년에는 태자소부를 겸임했고 아들 방유애가 고양공주의 남편, 딸이 한왕 이원가의 비라서 가득하게 꽉 찬 것을 깊이 두려워해 기밀에 관한 업무를 풀어줄 것을 청했지만 이세민이 허락하지 않아서 계속하게 되었다.
642년 가을 7월 5일에 사공이 되었고 643년에는 양공의 작위로 있으면서 능연각훈신에 봉해졌으며, 4월 10일에 태부가 되었다가 감수국사를 지내 허경종과 함께 고조실록, 금상실록을 편찬해서 7월 16일에 책을 완성해 이를 올렸다. 또한 과거 왕조들의 역사 정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북제서, 양서, 진서, 수서, 주서 등을 편찬했다.[1] 648년에 사공 겸 양문소공으로 있다가 7월 24일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3. 기타
- 방현령은 정벌하는 것에 있어서는 두여회, 이세민과 함께 모의했는데, 이세민이 군사를 격파하고 성을 함락할 때마다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은 재물을 두고 다투었지만 방현령만은 홀로 사람을 골라서 이세민 휘하에 들였다. 또한 장수들 중에 용기, 지략이 있는 사람은 방현령과 반드시 깊이 연관 관계를 만들어놓고 이세민을 위해 상주하게 해서 당고조가 감탄할 정도였는데, 이로 인해 당고조가 방현령은 자신의 아이를 위해 일하면서 1천 리 떨어져 있어도 얼굴을 맞대는 것 같다고 했다.
- 정치적인 일에 밝고 통달하면서 법조문을 가지고 보필했으며, 열심히 일하면서도 한 가지 일에서 실수가 있을까 두려워했다. 법률을 사용해 관대하고 공평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선한 것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치 자기가 가진 것같이 생각해 갖추려고 했다.
- 또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서 자기의 장점으로 다른 사람을 제한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두여회와 함께 학문을 연구하면서도 항상 못 다한 것처럼 했다. 대각의 규모는 두여회와 함께 정했고 두여회가 오면 갑자기 방현령의 계책을 채용했으며, 방현령은 모의를 잘했고 두여회와 함께 깊이 서로 알아주어 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당시에 현명한 재상을 말하면 방현령은 두여회와 함께 추천되었다. 방현령은 비록 총애하는 대우를 받았지만 일로 인해 견책을 받으면 여러 차례 조당에 나아가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죄 받는 것을 청했고 두려워하는 것이 마치 용납받지 못할 것처럼 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바로 방모두단(房謀杜斷). '방현령이 모의하고 두여회가 결단을 내린다'는 의미로 '누구나 각자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 방현령에게는 아들로 방유직(房遺直), 방유애(房遺愛), 방유칙(房乳則)이 있었다. 둘째 아들인 방유애는 상기한대로 태종의 딸인 고양공주에게 시집을 갔는데, 고종의 재위 시기인 653년에 형왕 이원경의 옹립을 꾀하다가 처형당하여 태묘에 배향되었던 방현령에 대한 예우가 철회되기도 하였다.
4. 둘러보기
[1] 그러나 《구당서》의 〈방현령전〉에는 "《진서》는 장영서의 진서를 주로 삼아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자세히 쓰여져 있으나 편찬한 사관은 문학인이 많았기 때문에, 속이거나 틀리거나 자질구레한 일과 널리 이상한 말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고, 또한 곳곳에서 평론하며 화려함을 다투었으나, 사실을 살피는 것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학자들에게 몹시 비웃음을 받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2] 성룡의 본명이 방사룡(房仕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