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

 



Lauri Kristian Relander: 1883년 5월 31일 - 1942년 2월 29일
제2대 핀란드 공화국대통령(임기 1925년 3월 2일 – 1931년 3월 2일 ).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비푸리주지사, 제9대 의회의장을 역임했다. 소속 정당은 농업동맹.
대통령 당선 당시 42세로, 어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동세대의 노회한 정치인들(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퀴외스티 칼리오 등)에 비해 20살 가량 어렸다. 그만큼 미숙했고, 국정운영에 난맥이 잇따랐다. 재임 중 자생적 파시스트 집단인 라푸아 운동의 준동이 있었으며, 라푸아 운동의 압박을 못 이기고 그들의 지지를 받는 스빈후부드를 총리로 지명했다. 이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스빈후부드가 대통령이 되면서 전간기 핀란드 민주주의 최악의 위기를 초래했다.
치적이 없다 보니 핀란드의 여러 능력자 대통령들 가운데 유독 무능해 보인다. 심지어 핀란드어 위키백과에서 보통 정치인의 업적을 소개하는 초록 부분에서 "재임 중 최초의 여성 각료인 미나 실란패가 배출되는 등..." 을 거론하고 있지만, 미나 실란패는 사회민주당 여성운동의 대모였고, 배이뇌 탄네르의 사민당 내각에서 장관보로 입각한 것이라 이것은 탄네르와 실란패, 그리고 사회민주당의 업적이지 렐란데르의 업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죽 써줄 말이 없었으면...
렐란데르는 내치에서 죽을 쑨 만큼 그 스트레스를 해외순방에서 푼 것 같은데,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 많이도 다녔다. 잦은 해외순방 때문에 "여행하는 라섹시(Reissu-Lasseksi)"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었다. 전임자 스톨베리가 내성적인 성격 탓에 해외순방은커녕 관저에서 두문불출하며 공무에만 힘썼던 것 때문에 대조되어 더욱 욕을 먹었다. 요새는 신생 독립국 핀란드가 이웃나라들과 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었다고 변호해 주는 의견도 있지만 다수설은 아니며, 1920년대 당대에는 전혀 그런 쪽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대통령 임기 끝이 가까워오자 재선은 글러 보였고, 실제로 경선 결과 칼리오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자 당권이라도 확보하겠다고 자당 후보인 칼리오를 흔드는 해당행위를 저질렀다.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3대 대선에서 스빈후부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당권투쟁에서 칼리오에게 패배한 뒤 정치적으로 거세되어 상호화재보험사 이사로 여생을 보내다가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사망. 향년 58세로 환갑도 못 채우고 죽었다. 가장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되어 가장 젊은 나이에 죽은 셈.
여러모로 미국의 하딩과 비슷한 유형. 하지만 하딩은 (이원복의 표현대로) "평범한 시대의 평범한 대통령"이었지만 렐란데르는 비범한 시대의 평범한 대통령이었고, 그것이 그의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