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G. 하딩

 




'''미합중국 제29대 대통령
워런 개메일리얼 하딩
Warren Gamaliel Harding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865년 11월 2일
미국 오하이오 주 블루밍 그루브
'''사망'''
1923년 8월 2일 (향년 57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재임기간'''
제29대 대통령
1921년 3월 4일 ~ 1923년 8월 2일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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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조지 트라이언 하딩(1844 ~ 1928)
어머니 피비 디커슨 하딩(1843 ~ 1910)
'''배우자'''
플로렌스 하딩(1860 ~ 1924, 1891년 결혼)
'''자녀'''
사생아 딸 엘리자베스 앤 블래싱(1919 ~ 2005)[14]
의붓아들 마셜 하딩(1880 ~ 1915)
'''학력'''
오하이오 센트럴 대학교[15] (B.A.)[16]
'''종교'''
개신교 (침례회)
'''신장'''
183cm
'''소속 정당'''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
2. 대통령이 되기 전
3. 대통령 당선과정
4. 평가
5. 업적
6. 기타
7.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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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대 미국 대통령의 육성'''

1. 개요


'''"나는 대통령직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며 이 직책을 맡지 않았어야 했소."'''

친구이자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이였던 니콜라스 머리 버틀러(Nicholas Murray Butler)에게 보낸 편지 中

미국의 제29대 대통령,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그 평가가 절대적으로 낮은 인물이다.
똑같이 무능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율리시스 S. 그랜트와는 달리 정치사생활을 막론하는 무능한 행적으로 인하여[1] 미국인들이 가장 안좋아하는 대통령을 조사할 때마다 '''절대적 1위'''를 고수하는 인물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에선 꼴찌를 면하는 경우도 많다.

2. 대통령이 되기 전


1865년 오하이오 주 블루밍 그루브(Blooming Grove)에서 태어나 변호사 시험에 떨어진 후 미국 오하이오주 소도시 매리언(Marion)의 한 신문 편집장으로 일하던 워런 하딩은 26세에 만난 5살 연상의 플로런스 메이블 클링(Florence Mabel Kling)과 결혼한 후 인생이 바뀌었다.[2] 그녀는 오하이오주에서 이름난 기업가의 딸로 정치적 야망이 매우 컸는데 그런 부인의 영향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오하이오주 정계에서 탁월한 웅변 능력으로 주목을 받는데 성공한 하딩은 오하이오 정계의 거물인 해리 M. 도어티(Harry Micajah Daugherty)의 후원으로 오하이오주 부지사를 거쳐 연방 상원의원까지 당선되었지만 별 볼일 없는 2류 의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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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만 33세)''' 처음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에 당선됐을 당시 하딩의 모습. 링크
앞서 보았듯이, 사실 본인도 대통령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1917년 공화당에 복당한 후 재출마를 고려할 때 그에게 접근한 하딩은 루스벨트의 눈에 들어 부통령 러닝메이트를 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1919년에 루스벨트가 사망하며 낙동강 오리알이 된다. 아마 루스벨트가 조금만 더 살았으면 그는 평범한 부통령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을 가능성이 높다.

3. 대통령 당선과정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각종 조사 및 예측에 따르면 (전임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의 삽질 등 여러 이유로 인해) 공화당의 집권이 확실해진 상황이었다. 이때 공화당 내부에서는 당내 파벌끼리 자기네들끼리 해먹겠다고 난리를 쳤는데, 그래도 결정이 나지 않자 당원 투표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때 '''9번'''이나 투표를 했는데도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결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칠 대로 지친 계파 대표들이 모두 합의해서 '''"이렇게 싸우기만 할 바에 그냥 우리 모두가 쌈싸먹을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을 적당히 골라서 선거에 내보내자."'''라는 취지로 뽑아준 사람이 하딩이니 뭐.[3] 이 결정이 날 때 하도 사람들이 시가를 펴 대는 바람에 그 방이 시가 연기로 매우 자욱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Smoke-filled room'(시가 연기로 꽉 찬 방)으로 유명하다. 부통령 후보는 첫판에 캘빈 쿨리지로 결정됐으나 대통령 후보는 아무리 투표를 해도 결판이 안 났던 것이다.
하딩은 처음에는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나오지도 않았으나 당내 계파 중진들에 의해 흔히 말하는 경선 “들러리” 역할로 당내 경선에라도 출마하라고 압박을 받았다. 그래서 하딩이 출마를 했으며 원래 경선 캠프도 차리지 않았을 정도. 당시 공화당 경선에서 최유력 후보는 레너드 우드(Leonard Wood) 장군, 프랭크 로덴(Frank Orren Lowden) 일리노이 주지사, 하이럼 존슨(Hiram Johnson) 상원의원 3명이었다. 계속 투표를 했는데도 우드, 로덴, 존슨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자 계파 수장들이 모여서 최하위였던 하딩을 뽑기로 하고 우드 쪽 대의원들(사실상 군인 표)을 제외한 나머지 대의원들이 모조리 하딩을 찍어서 갑자기 8차 투표에서 하딩이 선두로 치고 나오고 9차 때 나머지 후보들이 사퇴하는 형식으로 하딩이 대선후보로 선출된 것이다.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하딩-쿨리지 조의 상대 후보는 민주당 제임스 M. 콕스-프랭클린 루스벨트 조였다. 1920년 대선 출마자 중에서 콕스를 뺀 하딩, 쿨리지, 루스벨트는 대선에서 당선돼 대통령직을 해봤다. 사실 전당대회 막장은 민주당이 더 했는데, '''1920년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대회는 무려 44번이나 투표를 한 끝에 콕스로 결정났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고작 9번''' 투표였는데..(...) 공화당과 마찬가지로 민주당은 부통령 후보는 루스벨트로 빨리 당첨됐으나 대통령 후보는 양보하는 사람이 없어서 투표가 반복됐다. 원래 민주당 후보로는 우드로 윌슨 정권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William Gibbs McAdoo가 가장 유력했으나 '''38차 투표'''에서 콕스로 역전되어 콕스가 후보로 뽑혔다.
하딩의 선거공약이 "정상 정치로의 복귀"(Return to Normalcy)[4] 였다. 윌슨의 다소 개방적인 외교정책과 제1차 세계 대전에 진절머리가 난 미국을 "정상 상태"로 되돌리겠다는 이야기. 대표적인 고립주의 공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너무 복귀한 나머지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딩은 1920년 대선에서 '''무려 1천 6백만표(60.3%)'''라는 경이로운 득표율을 보였는데 이는 토머스 제퍼슨이나 제임스 먼로 이후 최대이며, 바로 직전 윌슨 대통령의 표(약 9백만표)의 1.7배로, 이 기록은 60.8%를 받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1936년)까지 깨지지 않았다. 이후엔 린든 B. 존슨의 61.1%(1964년), 리처드 닉슨의 60.7%(1972년) 등의 기록이 있지만 이건 모두 '''신임받은 재선 대통령으로서의 득표였다.''' 즉, 초선에 갑툭튀한 인물에게 몰아준 케이스는 이 경우가 유일하다.
하딩의 1920년 대선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신규 유권자가 생긴 대선이기도 하다.[5][6] 1920년 첫 라디오 정규방송이 1920년 선거 개표방송이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미국 미디어 역사에 의외로 큰 족적을 남긴 인물.

4. 평가


무능력한데다 성격도 유약했고, 선출배경에서 볼 수 있듯이 당내 파벌의 안배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각 파벌에서 보내온 장관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으며, 부하들도 똑같이 무능한데다 부패해서 임기 내내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하딩의 친구들로 구성된 "오하이오 갱"들의 부패 때문에 죽을 때까지 힘들어 했다고 한다.
  • 재향군인회(Veterans' Bureau) 회장 찰스 포브스 (Charles Forbes)가 보훈 병원 건립 예산을 횡령하는 등의 비리를 저질렀다. 원래 재무부 주관인 보훈병원 건립권을 미국 재향 군인회(American Legion)을 이용해 압력을 넣어 재향군인회로 이관시킨 뒤 비리를 저지르다 딱 걸린 것이다. 구체적인 수법을 설명하자면 보훈병원 건립에 참여한 민간 사업자들과 짜고 쳐서 필요 예산을 과대하게 부풀린 이후 남은 예산을 자기들끼리 나눠가진 것이다. 비리 사실이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자 포브스는 사직서를 낸 후 유럽으로 도주했다.
  • 법무부 장관 해리 도허티(Harry M. Daugherty)[7]가 1차대전 당시 압류한 미국 내 독일 자산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부정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다만 이 사건은 하딩의 임기 이후에 발생했고, 하딩 재임 시절에는 밑에서 설명할 티포트 돔 스캔들에 연루되었는지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8]
  • 티포트 돔 스캔들: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터지기 전까지 미국 최대의 스캔들. 요약하자면 내무부 장관 알버트 폴(Albert Bacon Fall)[9]과 몇몇 사업가들이 짝짜꿍이 되어 유사시 해군용으로 쓰도록 남겨둔 유정을 현재 돈으로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받고 사업가들에게 넘겨준 것. 1922년 월스트리트 저널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사실 원래 석유 저장시설 관할권은 해군성에 있었는데 내무부 장관이 해군장관한테 관할권을 넘기라고 꼬드겼다. 해군장관은 또 좋다고 대통령 재가를 받아 내무부로 관할권을 넘겨줬다. 그 이후엔...[10]
하딩 자신도 자신이 대통령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고 말할 정도로 능력이나 전망을 갖추었다고 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생활도 나빠서 집권여당인 공화당이 주도해서 금주법을 만들어놓고도 정작 자신은 백악관에서 수시로 술쳐먹고 놀자판을 벌였다. 심지어는 금주법으로 압류한 밀주를 그대로 백악관으로 가져와서 마셨다는 증언도 있으며, 소문에 의하면 '''영부인께서 직접 폭탄주를 말아주셨다고'''... 그리고 하딩의 취미가 술쳐먹고 포커치는거라 백악관에서 수시로 포커판이 벌어졌고 이 포커판에서 한 게임에 당시 돈으로 4000달러[11]가 오갈 정도로 큰 도박판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공처가였는데 아내를 항상 '공작부인'이라고 부르며 아내에게 설설 기었다고 한다. 그런데 부인을 두려워하면서도 불륜을 저질렀다. 바람을 피우다가 걸려도 당당했다는 후문이다. 백악관에서 바람을 피우다가 부인한테 들키자 경호원들을 고기방패로 삼는 찌질한 모습을 보여준 일화로 악명이 더 높아졌다. 심지어는 옷장속에서 바람을 피운 일도 있다고 한다. 이 양반 대체...
재임 2년 3개월만에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에 돌연사했는데, 심장마비란 설이 유력하다. 근거로 목적 자체가 선거 유세 지원이었다. 하딩은 이 무렵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져서 의사가 휴양할 것을 권고했는데도 공화당 의원들이 억지로 밀어붙이는 바람에[12] 아픈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섰던 것. 더구나 당시 하딩은 자신도 몰랐던 비리와 관련한 보고서를 받고 이 때문에 대단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죽기 바로 전달인 1923년 7월에 알래스카 여행 중 식중독에 걸려 큰 고생을 했다. 결국 그는 기차 안에서 쓰러졌고 샌프란시스코호텔에서 폐렴 증세를 나타내더니 1주일 정도 병상에 있다가 숨을 거두고 만 것. 당시 신문에 하딩의 사인은 뇌경색으로 보도되었다. 국내에도 조선왕 독살설이 있듯 미국에도 대통령 독살설이 있는데, 12대 재커리 테일러와 함께 독살 이야기가 도는 케이스. 티포트 돔 스캔들의 진상이 밝혀지자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사후 하딩의 여러 스캔들이 터져나오고 희대의 막장 인증 대통령이 되면서 무능한 대통령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되었다.

5. 업적


고립주의를 표방한 그로서는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하딩의 최대 업적은 '''세계 최초의 군축조약인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은 것이다.''' 이 조약 덕분에 미국은 영국과 함께 세계 1위의 해군력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해군력을 억제하는데 성공하여, 1923년 경에 미국과 일본 간의 무제한적인 해군군비경쟁으로 인해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수많은 억측들을 (최소한 20년 가까이) 잠재웠다.
또한 군축회의와 병행하여 진행한 일련의 회담을 통해서 일본이 팽창하는 뒷배경으로 사용되었던 영일동맹을 해체시키고, 베르사유 조약21개조 요구 이래 일본이 중화민국에서 무제한적으로 팽창하는 사태를 저지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이 차지한 산동성내 독일 이권을 베르사유 조약과는 반대로 중국에게 반환시키고, 중국시장에 있어서 '기회균등의 원칙'을 내세워서 일본의 중국침략을 일시적이나마 저지시키는 9개국 조약을 성사시킨 일이었다. 하지만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던 쑨원의 지원 요구에는 북양정부를 정통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차없이 거절했다.
그리고 막장 이미지와는 달리 대단히 좋은 일을 하나 하려고 했는데 바로 국가 차원에서 1차대전 참전용사들을 돌봐주려고 한 것. 당시까지 미국에서는 이런 전례가 없었고 미국 독립 전쟁이나 남북전쟁 때와는 달리 1차 대전 참전자들에게는 연금이나 기타 혜택도 없었다. 하딩이 이를 위해 Veterans Bureau[13]를 세우고 병원도 지어서 참전용사들을 지원해주라고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첫 국장으로 앉힌 인물인 찰스 포브스가 비리와 부패의 일인자였다는 것.
친구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바람에 얼마 안되는 업적은 잊히고 오명만이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1960년대 이후부터 지금도 종종 재평가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워낙 쌓아온 이미지가 커서... 그리고 민주당 슈퍼스타 대통령 사이에서 공화당 막장정권의 시작을 끊어 평가가 더욱 박하다.
허나 인사를 꼭 막장으로 한 것만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전직과 미래의 대통령에 대한 인사가 기가 막혔는데, 연방 대법원장에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상무장관에 허버트 후버를 앉혔다. 둘 다 대통령 시기가 안습일 뿐이지 나름 능력자였기에 각자의 분야에서 꽤 괜찮은 업적을 남겼다. 후버가 상무장관 시절에 남긴 최대의 업적이 바로 후버 댐이다.

6. 기타


그리고 남북전쟁 이래 쏟아져 나온 마지막 오하이오 출신 대통령이다. 7명 중 마지막. 특기할 것은 공화당 출신 중 선거로 당선된 이는 모두 오하이오 출신이었다는 것. 나머지는 모두 비 오하이오 출신. 이건 허버트 후버부터 깨지게 된다.
그 유명한 토머스 에디슨과 친한 편이었다. 에디슨은 원래 공화당 지지자였으나 우드로 윌슨을 지지하기도 했다.

7. 매체에서


HBO 시리즈 보드워크 엠파이어 시즌 1에 후보로 선출되는 모습이 나오고 그 이후에는 언급으로만 등장한다. 물론 고증에 100% 충실하여 해리 도허티에 휘둘리는 유약한 바람둥이로 나온다.
[1] 그랜트와 하딩은 측근 비리를 통제하지 못했던 무능한 정치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율리시스 그랜트의 경우 본인 자체는 청렴했고 부부 금슬도 매우 좋았던 인물이라 불륜과 술판, 포커판을 벌이는 등 사생활에서도 총체적 난맥상을 보여준 하딩보다는 그나마 낫다는 평을 받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도 그랜트는 남북전쟁 당시의 장군으로서 매우 높게 평가받고 있었다.[2]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고, 아내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3] 선거가 박빙으로 예측되었다면 끝장을 봐서라도 누구 하나를 내세웠을지 모르나 1920년의 선거는 좀 달라서 공화당으로 정권이 넘어올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이러니 이런 별 특징도 능력도 없는 인간을 내세울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4] 하딩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하딩이 워낙 무식한 자라 normal의 명사형인 normality도 몰라 normalcy라는 명사를 창조(!)했다고 욕했다. 하지만 normalcy는 거의 쓰이진 않았어도 그 이전에도 normality의 동의어였다.(출처: Lies, myths and cherished history in American history)[5] 3009만명에서 5440만명으로 1.8배, 거의 배로 증가했다. 반면 투표율은 61.6%에서 49.2%로 과반이 안되게 급감했는데, 그래봐야 총 투표수가 1853만명에서 2675만명으로 44%나 증가했다.[6] 사실 이 시기는 미국 역사에서 정치적 관심이 줄어들던 시기와 일치한다. 독립 초에 30% 미만이었다가 앤드루 잭슨 이후로 50%대, 19세기 중후반만 해도 70% 중후반에서 80% 전반까지 나오던 대선 투표율은 쿨리지가 출마한 다음번 1924년 선거에서 48.9%로 바닥을 찍는다. 하지만 이후로 회복하여 20세기 중후반 동안 50~60% 초반을 오가게 된다. 다시 50% 밑으로 내려간 건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49.0%)로, 빌 클린턴의 재선 선거였고, 다시 50~60% 초반으로 오늘에 이른다.[7] 바로 앞서 말했듯이, 이 사람은 하딩의 정치적 후원자이자 브로커였다. 하딩 재임시절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8] 특검 수사에서 도허티는 티포트 돔 스캔들에 연루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9] 이 인간이 내무부 장관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딩의 포커 친구라는 이유가 컸고, 당연히 무능한 데다가 돈만 밝혀 결국 후임 대통령인 쿨리지는 폴을 구속한다. 그리고 이건 미국 역사상 최초로 현직 장관이 구속된 사례다.[10]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 마지막에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광기를 보이며 폴 다노에게 "내가 네 밀크셰이크를 다 마셨다."라고 언급을 하는데, 그 말은 티포트 돔 스캔들의 심각성을 알려주기 위하여 쉽게 예시를 들기 위해 나온 비유이다.[11] 1920년의 1달러는 대략 2017년의 12-13달러 정도 된다. 즉 포커판으로 거의 5만 달러를 날렸다는 소리.[12] 아마도 전대 대통령인 윌슨의 악례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13] 오늘날 미 보훈부의 전신격인 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