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외스티 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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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농무장관 칼리오
2.3. 총리 칼리오
2.4. 대통령 칼리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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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퀴외스티 칼리오(Kyösti Kallio, 1873년 4월 10일 ~ 1940년 12월 19일)는 핀란드정치인이다. 핀란드의 제4대 대통령, 제8대 총리(4회), 의회의장(6회), 농무장관(5회), 방위장관(1회), 교통공공장관(1회) 역임하였다. 오늘날까지 고졸 학력을 지닌 유일한 핀란드의 대통령이며, 핀란드의 장관과 총리로서 상당한 업적을 남긴 바 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스웨덴계로 본명은 구스타브 칼리오캉아스(Gustaf Kalliokangas)이다. 하지만 페노마니아가 되면서 핀란드어식 이름으로 개명했다. 북부지역의 윌리비에스카(Ylivieska)에서 지역 유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6년 중등교육기관인 문법학교를 다니다 서북해안 최대도시인 오울루에 진학했다. 하지만 공부보다는 청년운동, 농사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1894년부터 10년간 많은 땅을 사고 숲을 개척, 개간하며 건물을 올리며 고향 땅을 가꾸었다.
1905년 혁명 이전의 핀란드 국회는 귀족, 성직자, 시민, 농민의 4부 신분제 의회였는데, 이 중 농민부 의원은 자기 땅을 가진 농민들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선거권자 비율은 4.7%밖에 되지 못했으니 거의가 대지주들이었던 것이다.[1] 1904년 칼리오는 31세 나이로 농민부 의원이 되었는데, 귀족들 급의 대지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집안이 상당히 부유했음을 알 수 있다. 의원으로서 칼리오는 호헌파가 되었다.
1906년 의회개혁이 이루어지고 칼리오는 청년 핀란드당과 농촌연맹의 지지를 받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청년 핀란드당이 농촌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생각에 농촌연맹으로 당적을 옮겼다. 농촌연맹은 "농업동맹"(약칭 ML)로 개칭하는데, 이것이 현재 핀란드 중앙당의 전신이 된다.

2.2. 농무장관 칼리오


1917년 3월 23일, 칼리오는 핀란드 사회민주당오스카리 토코이가 수반을 맡은 원로원에 농무국장(농무장관의 전신)으로 입각했다. 7월 토코이 원로원이 독립을 선언하려 하자 케렌스키가 개입하여 원로원을 해산시켰다. 사민당 국장들은 모두 실각당했지만 우파 국장들은 새탤래 원로원에서 유임되었다. 칼리오는 농무국장으로서 8월의 식량부족 사태를 수습했다. 이후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가 원로원장이 되고 칼리오는 그 밑에서도 농무국장으로 유임되었다. 이 때부터 농업 전문가로 상당히 명망이 높았던 셈이다.
핀란드 내전 발발 1주일 전에 토지개혁 법안인 "소농민해방법"을 입안했지만 내전이 발발해서 통과되지 못한다. 내전 직후 적군이 헬싱키를 장악하자 스빈후부드는 얼마 뒤 헬싱키를 탈출해 북서해안의 바사에 원로원을 차렸지만 칼리오는 탈출하지 못하고 헬싱키 지하에 계속 숨어 지냈다. 4월 13일 독일 제국군이 헬싱키를 탈환하자 칼리오는 헬싱키 잔류 원로원 대표로서 5월 6일 바사 원로원과 정부를 통합했다.
내전 이후 신생 핀란드가 왕국이 될지 공화국이 될지를 두고 국체논쟁이 벌어진다. 섭정이 된 스빈후부드와 후임 원로원장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가 군주정을 지지하자 공화정을 지지한 칼리오는 파시키비 원로원에서 사퇴한다. 군주주의자들은 빌헬름 2세의 매제 헤센 공자를 왕으로 영입하려 했지만 독일 제국이 망하면서 다 없던 얘기가 되고 핀란드는 칼리오, 스톨베리 등 공화파의 뜻에 따라 공화국이 된다. 초대 대통령에는 스톨베리가 선출된다.
칼리오는 핀란드 공화국의 두 번째 내각[2]카를로 카스트렌 내각에 또 농무장관으로 입각했다. 그 다음 내각인 유호 벤놀라 내각에서도 그대로 유임되었다. 1919년-1921년 러시아령 카리알라 지역에서 봉기가 발생하자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남작을 비롯한 군부는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여 페트로그라드를 치자고 했지만 칼리오는 여기에 회의적이었고, 스톨베리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런 모험주의를 단속하던 실무자였던 내무장관 헤이키 리타부오리는 군부 내 사조직에게 총에 맞아 죽었다.
칼리오는 1920년 의회의장이 되었다가 1921년 다시 농무장관이 된다. 이 때 소작농들을 소규모 자영농으로 독립시키기 위해 토지를 유상몰수 후 분배하는 "칼리오법"을 만들어 이듬해부터 시행했다.

2.3. 총리 칼리오


1922년 11월 14일 처음 총리로 취임한다. 칼리오 내각은 그해 8월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당 당원 200명을 체포했다. 이때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준군사조직, 지도부, 그리고 현직 의원 27명까지 모조리 체포되었다. 사회민주당은 의회 정족수가 미달하게 되었으니 의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할 것을 요구했다. 우파는 좌파가 이번 체포로 피해자 행세를 하며 선거에 이용하기 전에 먼저 선고부터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톨베리 대통령은 사민당과 합의하여 새로 선거를 하기로 했다. 칼리오는 불복했고, 스톨베리는 칼리오를 실각시켰다. 이것은 내각책임제를 존중하던 스톨베리 대통령이 총리에게 개입한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칼리오는 아직 좌파들에 대하여 경직된 반공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스톨베리 이후 농업동맹의 라우리 크리스티안 렐란데르가 2대 대통령이 되었고, 칼리오는 1925년 12월 두 번째로 총리가 된다.[3] 칼리오는 이번에는 거대 임산기업들을 국유화하여 농민들에게 임야를 불하하는 "풀키넨법"을 시행한다. 이런 토지개혁 문제 때문에 농업동맹은 1920년대 내내 대지주 중심의 보수정당 국민연합당과 사이가 껄끄러웠다. 그렇다고 내전의 앙금이 남아 있는 사민당과 사이가 좋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런 애매한 상황 때문에 사민당의 배이뇌 탄네르 내각이 1926년 소수여당내각으로 입각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1930년 6월, 핀란드의 자생적 파시스트들인 라푸아 운동이 당시 총리였던 칼리오에게 접촉해 그를 지도자로 영입하려 했다. 하지만 칼리오는 거부했다. 전국의 라푸아 운동가 1만 2천여 명이 헬싱키로 진군해 오던 중인 7월 4일, 렐란데르 대통령이 사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우익에게 기울자 칼리오 내각은 총사퇴했다. 렐란데르는 라푸아 운동의 요구에 따라 스빈후부드를 총리로 기용했다.
1931년 대통련 선거에서 칼리오는 농업동맹 후보로 선출되었다. 재임 기간 중의 무능으로 당내 위상이 실추된 렐란데르는 칼리오에게 트롤링을 했고, 칼리오는 300표 중 56표를 득표해 낙선했다. 3회의 결선투표 끝에 151표의 스빈후부드가 149표의 스톨베리를 간발의 차로 누르고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때쯤 되면 칼리오의 좌익(적어도 탄네르 같은 개량주의자들)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유해지는데, 1936년 네 번째로 총리가 되었을 때 사민당에 손을 내밀고 입각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극렬 반공주의자인 스빈후부드가 거부권을 행사해서 농민-사민 연정은 일단 실패한다. 스빈후부드는 이후 임기 말까지 농민-사민 연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골몰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2.4. 대통령 칼리오


1937년 대통령 선거에서 칼리오는 자당인 농업동맹, 연정당인 국민진보당사회민주당의 지지를 받아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연임에도 실패하고 국민연합당 당권도 파시키비에게 빼앗긴 스빈후부드는 순식간에 퇴물이 되어 몰락했다. 극우들은 당연히 칼리오의 대통령 당선을 불만스러워했다. 반면 사민당은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내각과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침의 칼리오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핀란드는 국내의 극우세력을 일단 잠재우는 데 성공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겨울전쟁 개전 전야까지 민주주의와 정당정치꾼들을 혐오하던 만네르헤임 남작은 조금만 수틀리면 방위평의회 주석을 그만두겠다고 여러 번 정치인들을 겁박했다. 그때마다 칼리오는 만네르헤임을 달래서 사표를 기각했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협박에 칼리오는 한 뼘의 땅도 내줄 수 없다고 버텼고 핀란드군은 정말 잘 싸웠지만 국력의 체급차는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칼리오는 1940년 인구와 영토의 10%를 소련에 할양하는 모스크바 조약에 동의했다. 얼마 뒤인 8월 27일 그 충격으로 중풍을 맞아 오른손이 마비되었다. 이후 계속전쟁을 준비하면서 독일과 교감하는 과정에 칼리오는 참여하지 못하고 총리 리스토 뤼티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했다.
1940년 11월 27일, 칼리오는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여 낙향할 계획을 발표했다. 12월 19일 대통령 송별식이 예정되었고, 칼리오는 무리해서 송별식에 참여했다. 이 날 만네르헤임과 함께 헬싱키 중앙역에서 군인들을 사열하던 도중 칼리오는 치명적인 심장발작을 일으켜 쓰러졌고, 군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만네르헤임의 품 속에서 사망했다.

3. 기타


  • 경건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그 본인도 매우 금욕적이고 신앙심이 깊었다.[4] 1919년 도입된 금주법이 1932년 폐지되자 상심했다고 한다. 칼리오가 대통령이 되자 대통령궁에서 알코올성 음료가 일체 금지되었고, 독립기념일 행사장에서도 춤을 추지 않았다고 한다.
[1] 귀족부 의원은 귀족가문 당주들이었고, 성직부 의원은 성직자들과 대학교수들이었다. 시민부 의원은 세금 납세액으로 정해졌는데 전체 도시 인구의 7%에 불과했다.[2] 내전 및 그 직후의 스빈후부드, 파시키비는 "내각/총리"가 아니라 "원로원/원로원장"이라고 한다. 하지만 총리 대수를 카운트할 때는 스빈후부드 원로원까지 소급해서 스빈후부드를 1대, 파시키비를 2대로 친다.[3] 그 사이 1923년에는 뭔가 안 어울리게 방위장관도 한 번 역임한다.[4] 농업동맹에는 칼리오 뿐 아니라 종교적 경건주의, 금주주의(teetotalism) 성향을 가진 당원과 유권자들이 상당했다. 현대 핀란드 중앙당도 칼리오 시기만큼은 아니지만 루터교 내 보수파나 복음주의 교회를 다니는 금욕주의적 당원들이 꽤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