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드 쿠치마

 



'''우크라이나 제2대 대통령
Його Превосходительство
Леонід Кучма'''
''' 이름'''
'''Леонід Кучма
Leonid Kuchma
레오니드 쿠치마'''
'''본명'''
'''Леонід Данилович Кучма
Leonid Danylovych Kuchma
레오니드 다닐로비치 쿠치마'''
'''출생'''
1938년 8월 9일
[image] 소련 우크라이나 SSR
체르니히우 주(Чернігівська область)
'''국적'''
[image] 소련[image] 우크라이나
'''학력'''
국립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대학 (기계공학 / 학사) (1954-1960년)
'''정당'''
'''무소속''']] '''
'''직업'''
정치인
'''신체'''
176cm
'''인종'''
우크라이나인
'''가족'''
루드밀라 쿠치마 (배우자)
슬하: 1녀[1]
'''경력'''
'''前 우크라이나 제2대 대통령'''
'''재임기간'''
1994년 7월 19일2005년 1월 23일
'''서명'''

1. 개요
2. 생애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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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의 2대 대통령.

2. 생애


1938년 우크라이나 북부에 위치한 체르니히우 주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위를 따냈고 이후로 유즈마시에서 우주항공공학 일을 하면서 동시에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소련 공산당을 비판하면서 당시에는 당내 개혁파로 거물급 인사가 되었으며 소련 붕괴 직후 우크라이나가 독립하자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대통령 치하에서 총리가 되었지만 1년만에 사임했다.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는 엄청난 물가상승과 무분별한 민영화, 사회복지 붕괴, 지하경제 창궐로 몸살을 앓고 있었으며 민영화의 과실물은 소수의 올리가르히가 차지하는 막장상황이었다. 쿠치마는 크라우추크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여 동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표를 쓸어 1994년 대선에서 52%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쿠치마는 통화안정을 위하여 통화발행을 억제했으며 이를 통해 물가상승률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지하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고, 경제성장률도 낮았던데다가 무성보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쿠치마의 경제운용 능력에 대해 의문점이 생기면서 지지율이 떨어졌다. 그러나 결선투표에 올라온 것이 공산당 후보였기 때문에 서부의 지지를 압도적으로 얻어 재선되었고,[2] 빅토르 유셴코를 총리로 지명하면서 부작용이 있기는 했어도 어쨌든 이때부터 우크라이나의 경제가 성장기조로 돌아서며 우크라이나 경제의 완전 정상화에 성공을 거두었거 1990년대 말부터 7%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권 2기 중반기에 기자 기오르기 곤가제(გიორგი ღონღაძე) 암살사건이 터지고[3] 쿠치마가 10억 달러 가량의 거액을 빼돌렸다는 것이 폭로되면서 지지율은 떨어졌다. 2002년 총선에서 득표율 3위에 그치는 참패를 거두웠지만 지역구는 선전해서 175석으로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는데 이후로 우크라이나의 야당들과 개혁파들은 '쿠치마 없는 우크라이나'라는 운동을 벌이며 반대시위를 벌이며 레임덕이 가속화되었다. 다만 개헌저지선은 확보했기 때문에 탄핵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레임덕에 시달리던 상황이라 2004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포기하고 2004년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후계자로 야누코비치를 밀어주었다. 야누코비치는 공산당과 사회당의 지지를 얻으며 순항할것같지만 우크라이나 개혁파의 지지를 얻은 유셴코와 경합이던 상황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유셴코를 대상으로 한 암실시도 시건이 벌어지는 등 선거과정에서 의문스러운 상황이 게속 벌어졌고, 결국 동부지역에서 중복투표 사례가 대규모로 발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서 선거가 번복되는 사태가 벌어졌고(일명 오렌지 혁명)정적으로 돌변한 유셴코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마지막까지 난장판이 되는것을 지켜보며 임기를 마쳤다.
이후로 전직 대통령으로써 오렌지 혁명과 관련된 사건이나 기오르기 곤가제 사건을 어찌어찌 넘어가면서 실질적으로 처벌받지 않았고, 유로마이단 이후로는 우크라이나 측 외교대표를 맡고 있다. 즉, 구린일은 많았지만 실질적으로 어느정도 평가가 다시 올라가면서 명예가 회복된 셈이다.

3. 평가


재선하며 유럽연합미국,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면서 전임 크라우추크 대통령이 말아먹었던 경제분야를 개혁하며 발전시켰다. 그와 동시에 비밀경찰을 운용하면서 정적과 언론을 탄압하는 폭압적인 권위주의 통치를 하며 민심을 잃었다. 그래도 막장이었던 자국 경제를 어느 정도 복귀시켜 놓은 공은 부정할 수 없고, 자기 임기가 끝나자 자연스레 내려왔다. 연임한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아직까지는 이 사람이 유일하다. 또한 2010년대 중반까지 율리야 티모셴코, 빅토르 유셴코, 야누코비치 등 2010년대 중반까지 우크라이나의 주요 정치인을 양성했다는 점에서 인재발굴 능력도 있었다.
이렇듯 2기 임기 중후반기의 정국혼란을 스스로 자초했다는 점이나 개혁파와 친러파 양쪽에게 미움살 행동을 했기 때문에 한동안[4] 평가가 좋지 않던 상황이었지만 티모센코, 유셴코, 야누코비치가 쿠치마만도 못한 정치력을 선보인데다가 경제위기 해결에 무능한 모습을 보이며 상대적으로 평가가 올라갔고, 유로마이단 이후로는 우크라이나 측 대표를 맡으면서 외교전선에서 활동을 재개했고, 가장 평가가 높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이라는 여론조사도 나오고 있다.

[1] 1970년생.[2] 1991년 대선과 더불어 우크라이나에서 동서구도가 무의미 했던 대선이다. 정확하게는 서부에서 비야체슬라우 초르노빌(В'ячеслав Максимович Чорновіл) 후보가 서부 3개주만 1등을 달렸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크라우추크가 압승을 거두어서 동서 구도가 별의미가 없었던 것.[3] 기오르기 곤가제는 조지아 출신으로 반정부 성향의 '우크라인스카 프라우다'의 공동 창립자였다. 2000년 9월 16일 실종되었는데 2달 뒤인 11월 3일 키예프 근교의 한 숲에서 '''목 없는 시체로 발견되었다.'''[4] 전자는 부정선거 사례때문에 후자는 야누코비치의 당선을 막히게 만들었다는 점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