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유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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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우크라이나어: Ві́ктор Андрі́йович Ю́щенко (빅토르 안드리요비치 유셴코)[1]
'''출신 정당'''
우리 우크라이나 (Наша Україна)
'''생년월일'''
1954년 2월 23일 (62세)
'''가족'''
스비틀라나 콜리스니크 (1977년 결혼)
자녀 비탈리나·안드리
카테리나 추마첸코 (1998년 재혼)
자녀 소피야·흐리스티나·타라스
'''임기'''
2005년 1월 23일 ~ 2010년 2월 25일
1. 개요
2. 생애
2.1. 대통령
3. 평가


1. 개요


빅토르 유셴코는 우크라이나의 3대 대통령이다. 우크라이나 국립은행 총재, 7대 우크라이나 총리로서 재임했으며,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2. 생애


빅토르 유셴코는 1954년 2월 23일 우크라이나 SSR 북부 수미주 네드리하일리우군에 위치한 호루지우카(Хоружівк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안드리 안드리요비치 유셴코(Андрій Андрійович Ющенко, 1919–1992)는 영어교사로, 2차대전에 참전했으나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수용된 적이 있었으며, 어머니인 바르바라 티모피이우나 체르넨코(Варвара Тимофіївна Черненко, 1918–2005)는 물리, 수학 교사로 부부가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다.
1975년 유셴코는 테르노필 재정 및 경제연구소를 졸업한 뒤 회계사로 일을 시작했으며, 1983년에는 소련국립은행 우크라이나 사무소에서 농업융자 부관리자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은행가로써 재능을 드러냈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농업산업은행 부지배인 및 수석부지배인을 역임했으며, 1993년부터 우크라이나 국립은행 총재를 역임하기 시작했다.
유셴코는 우크라이나 중앙은행 총재로 역임하면서 독립 이후 새로운 화폐인 흐리브냐 창설을 주도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내 상업은행용 관리시스템을 개발했다. 특히 90년대 말 우크라이나가 겪고 있던 초인플레이션을 해결하면서 경제 관료로써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었던 레오니드 쿠치마는 이러한 점에 주목해, 유셴코는 1999년 총리로 발탁되었다.
총리로 재임하면서 유셴코는 그의 개혁적인 경제정책으로 당시 우크라이나 의회 과반수를 점유하던 우크라이나 공산당[2]올리가르히 세력과 마찰을 빚었고,[3] 결국 2001년 불신임 투표를 통해 사임되었다. 이후 2002년 우리 우크라이나에 가입, 정치인으로써 율리야 티모셴코와 제휴 관계를 맺으면서 야권 정치인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기오르기 곤가제 사건[4] 등 당시 대통령이었던 쿠치마를 지지율에서 앞지르면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써 언급되기 시작했고, 2002년 총선에서 득표율 1위를 기록하는 선전을 거두웠다.

독살 기도 사건 이후 11년이 지난 2015년에 사건 당시를 회상하는 유셴코.
이렇게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가 되었고, 200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유세 도중이던 2004년 9월 5일 빅토르 유셴코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는다. 이 날 키예프 근교에서 우크라이나 보안국(SBU) 간부들과의 식사 직후 갑자기 쓰러지게 되고 여러 차례 치료 과정에도 불구하고 차도가 보이지 않자[5] 며칠 후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긴급 후송된다. 이후 혈액 검사 결과 무려 기준치의 5만배가 넘는 다이옥신이 검출되니 이것이 바로 소위 다이옥신 수프 사건이었다. 그러나 얼굴이 완전히 망가지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여러차례에 걸친 치료 과정 끝에 유셴코는 암살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나게 된다.
그리하여 1차 투표에서 39.9%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하였고 결선투표에서도 우세가 점쳐졌으며 실제 출구조사에서도 11%나 앞서는 여유있는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러나 실제 개표에서는 예상과 다르게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유셴코 진영은 선거 부정 사례를 입수,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키예프에서만 50만 시민들이 독립광장(마이단 네잘레주노스티, 유로마이단이 일어난 그 광장이다.)에 모여 정부가 재선거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했다. 처음에 정부는 유셴코와 협상하면서 결과를 승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11월 24일 우크라이나 중앙선거위원회가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었다고 발표하자 이에 키예프, 리비우 지방의회 등에서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서고, 이에 동부지역에서 크게 반발하면서 우크라이나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이 와중에 우크라이나 대법원에서 침묵을 깨고 현 대통령 선거에서 대규모 부정 사례가 발견되었으며, 이에 재선거를 요구하자 상황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결국 12월 26일 재투표가 진행되어 유셴코가 51.99%로 승리했다. 이에 야누코비치는 부정 의혹을 제기하려 했으나 우크라이나 중앙선거위원회와 대법원 모두 야누코비치의 청을 기각했다. 그렇게 유셴코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1. 대통령


이렇게 아슬아슬한 과정을 겪으며 대통령에 당선된 유셴코는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권력을 행사해도 이를 견제할 수 없던 쿠츠마 시절의 교훈을 활용해[6] 헌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했다. 그가 개정한 새로운 우크라이나 헌법은 대통령의 국정운영 권한을 축소시키고 총리에게 실질적인 행정부 수반으로써 내각을 구성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이원집정부제의 요소를 골자로 했다. 이는 대통령에 의한 독단적인 국정운영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총리가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다른 성향을 보일 경우 마찰을 일으켜 국정 운영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장점과 단점을 포함한 헌법개정안은 이후 우크라이나를 위기에 빠트리기도 했고, 위기에서 구하기도 했다. 당장 유셴코와 정치적 동지 관계였던 티모셴코가 총리에 임명된 이후, 총리의 권한을 이용해 개혁적인 내각을 구성하자 처음에는 친러세력과, 나중에는 친러세력과 친서방세력을 중재하려던 대통령과도 마찰을 일으켰다. 하지만 2014년 유로마이단 당시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망명했을 때, 우크라이나 정부는 올렉산드르 투르치노프 대통령 대행과 함께 아르세니 야체뉵 총리[7]를 수반으로 한 내각이 지도력을 발휘, 우크라이나는 정국혼란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빠르게 새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였다. 우선 친러세력은 유셴코의 '''독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그를 미워했고, 특히 동부 지역에서는 유셴코의 당선 당시 '''분리독립'''을 언급할 정도로 친러 세력은 그에게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다.
친러 세력 뿐만 아니라 그의 지지세력들 역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NATO 가입'''을 요구하면서 우크라이나를 급진적으로 서방식으로 개혁하길 원했다. 즉, 한 마디로 두 세력 중 어느 한 곳을 고르자니 나머지 세력과 '''척을 질래야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유셴코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우크라이나군을 이라크에 파병하면서 NATO와 가까워졌다. 하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서방으로 향하려 하자 거의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반응했고, 우리에게는 잠가라 밸브로 알려진 천연가스 거래 제한 및 채권 압박 등을 통해 우크라이나 경제에 압박을 주었다. 당연히 유셴코 입장에서는 이러한 러시아의 압력이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티모셴코를 비롯한 지지세력이 마찰을 빚자, 결국 2007년과 2009년 두 차례 우크라이나 의회를 해산시키면서 재선거를 실시했다.[8]
한편 2006년 미군과 함께 우크라이나에서 진행한 시 브리즈(Sea Breeze) 합동 훈련으로 난리가 나버리자, 친러세력을 어떻게 해서든 달래보기 위해 자신의 경쟁자였던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했다. 하지만 2006년 야누코비치가 범죄혐의가 관련있다는 문서가 발견되자, 결국 그를 해임하고 다시 티모셴코를 총리로 임명했다. 요약하자면, 야누코비치와 티모셴코 (어쩌면 미국러시아까지도) 어느 하나 유셴코를 끝까지 도와주지 않았던 셈.[9] 거기에다가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리더십은 더더욱 추락했고, 임기말 지지율은 바닥을 기었다.
이런 상황에서 2010년 1월 17일에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5% 득표에 그치며 재선에 실패했고, 결국 단임으로 끝났다.

3. 평가


대통령 임기 기간 내내 자신의 반대세력 뿐만 아니라 지지세력의 견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러시아의 간섭과 정치적 급진파였던 티모셴코에 휘둘리면서 민심을 잃었다. 이는 전임자인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 균형을 강조하면서 얻은 정치적 안정으로 경제 발전에 힘쓴 레오니드 쿠츠마에 비교하면 여러모로 정치적인 소통 역량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많이 아쉬운 점이었다.
하지만 비록 유셴코는 정치적으로는 집권기간 동안 많은 혼란기와 어려움을 보냈고, 정치적으로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긴 하나 적어도 헌법 개정을 통해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쏠려있던 권력을 총리와 의회에 배분해 옛 소련 국가의 취약점 중 하나인 권력 집중을 막았다는 점[10] 에서 우크라이나가 어느 정도 민주 국가로써 기능할 수 있게 한 바탕을 마련했다. 이런 점에서 유셴코는 민주국가의 지도자로써는 괜찮은 인물이었다.
또한 유로마이단의 목표 중 하나가 야누코비치가 2010년 취소시킨 2004년 헌법개정안을 다시 되돌리는 것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결과적으로 그가 만든 헌법이 나라를 권위적으로 운영하던 야누코비치를 막아낼 수 있었단 점에서 나름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 본래 국립국어원의 표기용례는 우크라이나어 발음에 가까운 '유시첸코(유슈첸코)'였지만 2005년러시아어 표기법이 제정되면서 '유셴코'로 정정됐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어로는 Щ·щ가 들어간 그의 성씨를 '유슈첸코[juʃtʃenko\]'로 발음하므로 정정된 표기는 잘못된 표기이다. 물론 국립국어원에 별도의 우크라이나어 표기법이 없으므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당시의 관련 글. 참고로 국립국어원에서는 이와 유사한 다중자음을 지닌 폴란드어 지명 Szczecin[ʂt͡ʂɛt͡ɕin\]을 '슈체친'으로 표기한 바있다.[2] 1990년대 경제난의 여파로 소련시절에 대한 향수가 증가하면서 쿠치마 정권 초중기 동안 원내 1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서부에서 소련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기 때문에 결국 대통령직을 배출해내는데 실패했지만 그래도 무시할만한 세력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2000년대 이후로 지역당에게 지지기반이 흡수당하고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야당이 세를 얻기 시작하며 중견정당으로 전락했고, 이후로 연립정당으로 연명하다가, 2014년 유로마이단 이후로 금지판결이 내려지면서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3] 특히 올리가르히 세력의 경우에는 쿠치마 정권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무시하기가 힘들었다.[4] 조지아 출신 우크라이나 언론인으로, 2000년 인터넷 뉴스였던 "우크라이나의 진실(Українська правда)"을 창설하면서 정부 내 부패나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의 고문 사건 등을 중점적으로 보도했다. 2000년 9월 16일 집으로 귀가 도중 납치된 뒤 두 달 뒤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5] 본 동영상에서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우크라이나 의료진은 유셴코 측과의 어떠한 검사 결과, 치료 과정 자료 공유도 거부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로의 긴급 후송은 단순히 우크라이나 의료진의 의술 실력이나 장비에 대한 불신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크라이나 의료진이 정부의 협박, 혹은 회유에 넘어가 유셴코를 일부러 방치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측근들의 판단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우크라이나 의료진의 석연찮은 태도는 본 독살 기도 사건의 배후에 한때 정치적인 스승이었지만 정적으로 돌변한 레오니드 쿠치마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 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리잡고 있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준다.[6] 유셴코 자신이 쿠츠마 시절 총리이기도 했으니 이러한 한계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7] 물론 둘 다 인기는 지지리도 없었지만.[8] 하지만 이후 티모셴코와 거의 척을 지게 된다.[9] 이런 적대관계는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이 된 이후 티모셴코를 살해 혐의로 '''투옥'''시키고, 반대로 유로마이단 때 티모셴코의 지지세력이 야누코비치를 적극적으로 '''전복'''시키면서 정점을 찍게 된다(...).[10] 당장 대통령제가 가진 취약점을 이용해 '''권위주의적''' 정치를 펼친 러시아보리스 옐친블라디미르 푸틴, 벨라루스알략산드르 루카셴카, 카자흐스탄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우즈베키스탄이슬롬 카리모프, 타지키스탄에모말리 라흐몬, 투르크메니스탄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 아제르바이잔알리예프 부자(父子) 등을 생각해보자. 발트 3국조지아, 아르메니아, 몰도바, 키르기스스탄 정도를 제외한 옛소련권 국가 대부분이 독재로 흘러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크라이나는 지금까지 민주주의가 (조금 많이 삐걱거려도) 작동하는 몇 안되는 케이스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