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제이 덴노
1. 개요
일본의 제63대 천황. 무라카미 덴노의 차남. 이름은 노리히라.
2. 행적
제1황자였던 히로히라(廣平) 친왕을 밀어내고 태어난지 얼마 안 돼서 황태자가 되었다. 이것은 당시 권력자였던 후지와라노 사네요리(藤原實賴)·모로스케(師輔) 형제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호(康保) 4년(967년), 무라카미 덴노가 사망하자 18세로 즉위하였다. 이 때 처음으로 시신전(紫宸殿)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정신병이 있어 황태자 시절부터 문제가 되었기에, 후지와라노 사네요리가 관백(關白)이 되었다. 무라카미 덴노의 제4황자였던 타메히라(爲平) 친왕과 제6황자였던 모리히라(守平) 친왕 사이에 레이제이 덴노의 황태제 자리를 둘러싸고 '''안나(安和)의 변'''이 일어났다(969년). 이후 엔유 덴노(모리히라 친왕)에게 양위했으며 '레이제이 상황'으로 칭해졌다. 1011년 62세에 사망했으며 사인은 이질로 되어 있다.
이후 68대 고이치죠 덴노의 즉위까지 50여 년 동안 엔유 덴노계 황위 계승이 계속되었고, 엔유계를 부계, 레이제이계를 모계로 하는 증손 고산죠 덴노(71대)의 즉위로 두 황통은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3. 정신이상 증세
그는 용모가 단정하고, 대단히 아름다웠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황태자 시절부터 정신병이 있었고 그에 따른 기행들이 빈번히 목격되었다. 당시 조정의 구교(公卿)였던 오에노 마사후사(大江匡房)가 쓴 《에기(江記)》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다.
- 다리를 다쳤는데도 아무 일이 없는 듯이 하루종일 축국(蹴鞠)을 즐겼다. 혹시 고통을 못 느끼는 증세라도 있던 걸까?
- 부황(무라카미 덴노)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남자의 음경을 크게 그려서 보냈다.
- 청량전(淸凉殿) 근처 반고야(番小屋)의 지붕에 올라가 앉았다.
- 병상에 누워서도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 퇴위 후에 살던 고쇼에 불이 나서 무너지고 피난하는데 우차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 의식 중에 "이런 무거운 것, 더는 못 쓰고 있겠다"며 갑자기 관을 벗어 던지더니 가까이 섬기던 궁녀 우마노 묘부(馬命婦)을 억지로 장막 안으로 끌어들여 성관계를 가졌다.
하지만 퇴위 후에는 재위하던 때에 비해 부담이 줄었는지 62세까지 살았는데,[1] 모로사다 친왕(카잔 덴노)을 비롯한 자녀와 동생 엔유 덴노, 그 황자 이치조 덴노 등 많은 친족들이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의 혈통은 손녀 사다코 내친왕(禎子內親王)을 통해 사후 엔유계와 합쳐진다.
4. 원호院號
상황이 되었을 때의 명칭은 현재의 교토 니조 성 동북쪽에 사가 덴노가 지었던 별궁 레이제이인(冷然院)이 후에 상황의 거처가 된 데에서 유래한다.
5. 가족관계
- 중궁(中宮) 마사코 내친왕(昌子 内親王) (950~1000) - 스자쿠 덴노의 외동딸
- 여어(女御) 후지와라노 치카코(藤原 懐子) (945~975) - 후지와라노 코레타다(藤原 伊尹)의 딸
- 장녀 무네코 내친왕(宗子 内親王) (964~986)
- 차녀 토모토코 내친왕(尊子 内親王) (966~985)
- 장남 카잔 덴노
- 여어(女御) 후지와라노 토코(藤原 超子) (?~982) - 후지와라노 카네이에(藤原 兼家)의 딸
- 3녀 히카루코 내친왕(光子 内親王) (973~975)
- 차남 산조 덴노
- 3남 타메타카 친왕(為尊 親王) (977~1002)
- 4남 아츠미치 친왕(敦道 親王) (981~1007)
- 여어(女御) 미쿠시게도노벳토(御匣殿別当) 후지와라노 요시코(藤原 怤子) - 후지와라노 모로스케(藤原 師輔)의 딸.
[1] 당시에 60 넘어 살았다는 것은 대단한 장수였다. 거기다 일본 황실은 근친혼 때문에 평균 수명이 30~40대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더 빨리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