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리자베타 여제

 


[image]
'''이름'''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로마노바
(Елизаве́та Петро́вна Романова)[1]
'''출생'''
1709년 12월 29일
루스 차르국 모스크바 콜로멘스코예
'''사망'''
1762년 1월 5일 (향년 52년 7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장례식'''
1762년 2월 3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재위'''
러시아 제국의 여제
1741년 12월 6일 ~ 1762년 1월 5일
'''배우자'''
알렉세이 라주몹스키 (추정)
'''아버지'''
표트르 1세
'''어머니'''
예카테리나 1세
'''형제'''
안나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1741, 32세 쿠데타로 대권 장악하다.
2.3. 1742, 33세 제위 계승자로 조카를 임명하다.
2.4. 1744, 35세 조카며느리(예카테리나)를 들이다.
2.5. 1754 ~ 1763, 45 ~ 54세: 7년 전쟁
2.5.1. 아프락신 스캔들
2.5.2. 내각 회의 폐지
2.5.3. 교육, 예술 장려
2.6. 사망
2.6.1. 표트르 3세
2.6.2. 예카테리나 2세의 쿠데타
3. 평가


1. 개요


표트르 대제예카테리나 1세 사이의 차녀.

2. 생애



2.1. 즉위 이전


옐리자베타는 황실 친위대에게는 인기가 높았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렇게 강력한 정치적 힘은 발휘할 수 없었다.

2.2. 1741, 32세 쿠데타로 대권 장악하다.


갓난아기에 불과한 이반 6세가 즉위하자 그녀는 자신에게 기회가 왔음을 느꼈다. 1741년 옐리자베타는 근위병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대권을 장악하였다. 이 부분에서 이반 6세단종처럼 무정하게 폐위시키는 게 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섭정을 맡은 이반 6세의 어머니가 옐리자베타를 강제로 몰아내려고 했던 것의 반격으로 몰아내려 한 것이다.
그렇게 옐리자베타는 32세의 나이로 러시아 제국을 통치하는 여제가 된 것이다. 이반 6세 이전 안나 여제 시절에는 발트 해 부근 독일계 귀족들이 득세했기 때문에 독일계 귀족들을 숙청하고 독일풍을 일신하고 러시아 전통 귀족들을 등용한다. 이때 스웨덴이 기회를 노리고 침공했지만 20만 대군으로 무찌르고 핀란드 남부를 손에 넣는다.
상당히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했으며 결혼 전 애인이 많았던 걸로 유명하나 즉위 후 신하와 귀천상혼 한데다가, 자식이 없었다.[2] 사실 젊은 시절에는 독일인 카를 아우구스트[3]와 약혼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으나 카를 아우구스트가 병에 걸려 요절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2.3. 1742, 33세 제위 계승자로 조카를 임명하다.


결국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742년 조카[4]표트르를 차기 제위 계승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표트르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데다가 지능도 낮아서, 러시아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신하들의 건의에도 후계자 변경은 없었는데, 엘리자베타가 아버지 표트르 대제의 혈통에 매우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2.4. 1744, 35세 조카며느리(예카테리나)를 들이다.


여제는 1744년 독일 안할트-체르프스트 가문의 딸인 '조피 프레데리케'를 불러들여 황제 계승자인 '카를 울리히'와 결혼시켰다. 러시아로 와서 예카테리나로 불린 이 여성이 선택된 건 오래전 엘리자베타와 안할트 가문 혼담이 오가서 약혼할 뻔했던 인연도 있었고, 카를과 혈연이 가깝기에 잘 돌봐줄 거라는 믿음 때문.[5]
후계자였던 표트르 3세는 이후로도 정신적인 문제를 드러냈고, 신하들은 여러 번에 걸쳐 후계자 교체를 건의했지만 못 들은 척 넘겼다. 엘리자베타의 비호가 없었으면 표트르는 차르에 오르기 어려울정도의 상태였다.
조카며느리 예카테리나를 총애했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사실과 다르다. 표트르의 정신이상은 사실이지만 옐리자베타가 며느리에게 황위를 부탁(?)했다는 일화라든지 사랑을 받았다는 일화는 예카테리나 시절 조작된 것이 상당하다. 오히려 여제는 조카며느리였던 예카테리나를 항상 의심했고, 불신했다. 신하들이 모자란 자신의 후계자를 제쳐놓고 조카며느리에 선을 대는 것을 대단히 경계하고 이런 정황이 발각되면 격노했다.

2.5. 1754 ~ 1763, 45 ~ 54세: 7년 전쟁



2.5.1. 아프락신 스캔들


7년전쟁 말기 아프락신 스캔들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장군들과 귀족들이 예카테리나에게 충성한다는 편지를 보냈다가 장군들은 처형되고, 예카테리나는 황태자비 자리에서 쫓겨나 수녀원에 유폐될'''(!)'''[6] 뻔했다.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무고를 여러번 울며 간청해서 위기를 넘어갔는데 신하들의 변호로 폐비까진 가지 않았으나 옐리자베타 여제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옐리자베타 여제와 예카테리나 2세의 긴장 관계는 2014년작 러시아 사극 예카테리나(드라마)에서 아주 잘 묘사되고 있다.

2.5.2. 내각 회의 폐지


이 시기, 옐리자베타 여제는 곧 원로원을 재구성하고 내각 회의를 폐지한다.

2.5.3. 교육, 예술 장려


옐리자베타 여제는 교육과 예술의 발전을 장려했다.
러시아 최초의 대학교인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를 세웠으며 예술 아카데미를 건립하고 겨울궁전을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극과 무도회를 좋아하고 서유럽에서 비싼 옷을 사들이는 등 낭비가 심해 러시아의 재정 상태를 악화시켰다. 특히 사치스런 옷을 1만 5천 벌이나 사고도 계속 주문해서 재정 상태가 거의 파산에 가까웠다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반프로이센 정책을 추진했다. 옐리자베타 여제는 개인적으로 안나 여제 시절 영향을 받아 독일계 발트인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으며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2세를 매우 싫어하여, 스웨덴과 오스만 투르크[7]라는 공동의 적과 혐오 대상을 공유한 신성 로마제국마리아 테레지아와 성향이 맞았기 때문에 곧 동맹을 맺고 7년전쟁에 참가했다.
러시아의 전쟁 목적은 사실상 점유하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 리보니아와 쿠를란트-젬갈렌을 정식으로 러시아 영토로 편입시키는데 있었는데, 프로이센의 동프로이센을 할양받아서, 리보니아-쿠를란트와 교환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동맹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7년전쟁 때에는 이미 폴란드를 위성국으로 만들고 스웨덴은 오히려 프로이센의 적국으로 참전하는 등 프로이센에 이겨봤자 별로 얻을 게 없는 상태였고 러시아군이 프로이센의 군대에 몇 번 타격을 주고 베를린을 일시적으로 함락[8] 시키는 등 선전도 했지만 러시아의 피해도 막심했다.
러시아의 승리라고 주장하는 조른도르프에서도 프로이센군은 3분의1 정도의 손실, 러시아군은 병력의 절반의 손실을 입었다. 콜베르크 요새를 공략하기 전에는 보급의 어려움으로 겨울마다 폴란드로 철수해서 월동을 지내야 했다...

2.6. 사망


암튼 러시아군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과 함께 프로이센을 거의 몰아붙였으나 승리 직전에 사망하고 만다. 다 이겼는데 갑자기 죽은 건 아니고 건강이 매우 안 좋아서 2~3년 전부터 병세가 오늘 내일 했었다고 한다.

2.6.1. 표트르 3세


이후 로마노프 왕조는 단절되었고, 표트르 1세의 외손자인 표트르 3세가 즉위하여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9]를 열었으나 프로이센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는 무조건 평화 협정을 맺어버린다.

2.6.2. 예카테리나 2세의 쿠데타


결국 표트르 3세는 6개월 이후에 쿠데타로 실각해 표토르의 아내 예카테리나 2세가 즉위하였다.
결국 7년전쟁후 예카테리나 여제는 프로이센과 강화하였다. 러시아는 프리드리히와의 협상 끝에 1차 폴란드 분할에서는 실패했고, 1793년 2차 폴란드 분할에서 목표를 이루었다.

3. 평가


과거에는 독일계 귀족들을 누르고 러시아풍을 회복하여 러시아 민족사학의 영향으로 평가가 후했는데[10] 현재는 독일계 귀족들을 등용해서 그동안 저평가 되었던 안나 이바노브나가 다시 재평가받는 것과 달리 옐리자베타는 지나치게 고평가받았다는 평가를 받아 현재 학계에서는 평가가 많이 내려갔다.[11] 특히 외교 정책에서 그녀가 프로이센을 적대한 이유는 발트해에 러시아의 영향권을 두고 프로이센의 힘이 강해질까봐 오스트리아와 손잡은 것이었는데 '''정작 프리드리히 2세는 발트해에 관심이 없었다.'''[12]
무엇보다 표트르 대제의 혈통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표트르 3세를 후계자로 정하여 상술한 것처럼 표트르 3세의 무조건 평화 협정으로 인해 프로이센에 유리하고 러시아에 불리한 역사가 전개된 점은 옐리자베타 여제의 책임이 큰데, 반프로이센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 주제에 엄청난 친프로이센 성향의 후계자를 들였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오류라고 볼 수 있다. 차라리 류리크의 후손들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삼아 류리크 왕조를 부활시키거나, 로마노프 가문의 다른 방계 후손들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삼는 등 표트르 3세보다 좀 더 능력이 좋은 다른 사람에게 황제위를 물려줬다면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는 조금이라도 나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1] '''엘'''리자베타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옐'''리자베타가 맞다.[2] 재위 기간 동안 알렉세이 라주모프스키를 애인으로 뒀는데, 정식 결혼이었는지 사실혼 관계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둘 사이에 딸이 둘 있었다고 전해진다.[3] 후임 여제인 예카테리나 2세의 친척.[4] 언니인 안나의 아들이었다.[5] 카를의 고조부, 고조모인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 프리드리히 3세와 작센의 마리아 엘리자베트 부부는 예카테리나의 조상이기도 한데 근친혼으로 친가로는 1번, 외가로는 2번이나 겹친다. 카를과 같은 고조부 조상이다. 그러니 8촌이긴 한데 3겹에 걸친 8촌이다. 5촌급으로 혈통이 비슷하다.[6] 당시 러시아 제국은 황권에 문제를 일으킬 법한 고위층 여성들을 북극에 가까운 수녀원에 유폐시켰다.[7] 스웨덴은 30년 전쟁 시절 신성 로마 제국군을 쳐바르고, 러시아와는 표트르 대제 이후 계속 전쟁 상태였으며, 오스만 투르크발칸 반도와 카프카스, 크림 지역에서 신성 로마 제국, 러시아와 충돌했다.[8] 완전히 정복한 것은 아니고 베를린에 근접하자 베를린 시에 사례금을 받고 공격을 면제 했다. 야전에서 공성으로 전환하면 몇 달 간 장비배치에 배후의 위협도 있을 뿐더러 공성전에서 공격자의 피해도 많기 때문에. 어쨌든 공략한건 공략한거...[9] 원래 이름대로라면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가 되어야겠으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와 비슷하게 왕조명으로 로마노프를 쓴다.[10] 특히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러시아령 폴란드강탈당한 제1차 세계 대전독소전쟁으로 수많은 소련인들이 죽어나간 제2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러시아의 반독감정이 강해지면서 옐리자베타의 이러한 정책이 더욱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11] <러시아의 역사> -니콜라스 V. 랴자놉스키(NICHOLAS V. RIASANOVSKY)-[12] 다만 이와 별개로 옐리자베타 여제가 개인적으로 프리드리히 2세를 좋아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전통적으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선 위협이 되거나 만만치 않게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국가들은 다구리해서라도 일찌감치 밟아버리는 일종의 전통(...)에 기인한 견제 차원일 수도 있다. 실제로 7년 전쟁 이후부터 프로이센은 명실상부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