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슬라우 전투
[image]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7년 11월 22일 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이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슬라우의 지배권을 놓고 맞붙은 전투. 오스트리아군이 막심한 희생을 치른 끝에 브레슬라우를 장악했다.
2. 배경
1757년 6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오스트리아의 보헤미아를 침공해 프라하를 포위했다가 프라하를 구하고자 달려온 적과 맞붙었다가 콜린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라하 포위를 풀고 작센으로 퇴각했고, 10만에 달하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며 슐레지엔 탈환에 나섰다. 여기에 러시아군이 동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으며, 프랑스군은 독일 서부의 하노버 공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에 나섰다. 여기에 1757년 8월 75,000명에 달하는 러시아군이 동프로이센을 전격 침공했다. 동프로이센에 주둔한 프로이센군 2만 5천 명이 러시아군을 습격했으나 끝내 패퇴했고(그로스-야거스도르프 전투), 뒤이어 9월 7일에는 26,000명에 달하는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 13,000명을 모이에서 격파했다.(모이 전투) 이제 프로이센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에게 삼면에서 협공당할 위기에 몰렸다.
그나마 프로이센에겐 다행히도 러시아군은 동프로이센 공략을 도중에 중단하고 본국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의 공세가 여전히 강성한 상황이었고 프로이센군은 연이은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되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어떻게든 전황을 뒤집을 결정적인 전투가 필요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을 향해 진군하기로 마음먹고 작센을 침공한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과 맞붙은 11월 5일 로스바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 무렵, 로트링겐 공작 카를 알렉산더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센에 가 있는 틈을 타 슈바이드니츠 시를 점령하고 하부 슐레지엔의 핵심 도시인 브레슬라우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브레슬라우를 둘러싼 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의 대결이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군
- 총사령관: 로트링겐 공작 카를 알렉산더
- 부사령관: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르다시
- 병력
- 주력군: 보병 38,270명, 기병 8,230명, 대포 220문
- 나르다시 군단: 보졍 24,200명, 기병 4,200명
- 나르다시 군단: 보졍 24,200명, 기병 4,200명
3.2. 프로이센군
-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공작 아우구스트 빌헬름
- 병력: 약 28,000명(40개 보병 대대, 102개 기병 대대)
4. 전투 경과
4.1. 양측의 배치
브레슬라우를 가로지르는 오데르 강은 브레슬라우를 침공한 군대에게는 상당히 성가신 장애물이었다. 로허 마을에서 오데르 강 하구까지 이어지는 지대는 습지대가 가득했기 때문에 다리를 통해서만 통과할 수 있었다. 브레슬라우 근처 필츠니츠는 습지대가 많지 않은 유일한 곳이었지만 경사가 가팔랐다. 또한 슈미데펠트에서 그로브센에 이르는 프로이센군의 중간 지점은 로허 동쪽 약 1,500m에서 2,000m에 이르는 일련의 고지대였다.
베베른 공작은 브레슬라우 남쪽에 프로이센 군대를 배치했다. 우익은 코젤까지, 좌익은 클라인-모흐베른 마을까지 뻗어있었으며, 로허 강과 필츠니츠, 슈미데펠트, 마리아 호프첸 마을들이 군대와 앞에 있었다. 군대 오른쪽 측면의 울타리는 필츠니츠에서 오데르 강까지 이어졌다. 이 울타리는 예거 분대와 6개의 척탄병 대대에 의해 보호되었다. 그리고 코젤과 클라인-모흐베른 사이에 10개의 연대로 구성된 제1 전선이 형성되었고, 필츠니츠, 슈미데펠트, 마리아 호프젠 마을에서는 3개의 연대가 배치되었다으며, 좌익 측면에 척탄병 2개 대대와 척탄병 5개 대대가 배치되었다.
제2 전선엔 코젤과 클라인-모흐베른 마을 사이에 40개 흉갑기병 대대가 배치되었다. 전 진영은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필츠니츠와 슈미데펠트 사이에는 4개의 보루가 있었으며, 슈미데펠트와 마리아 호프젠 사이에는 2개의 보루가 있었고, 마리아 호프젠과 클라인-모흐베른 사이에 참호가 설치되었다. 오데르 강 반대편에는 크로코우 대령 휘하의 1개 보병대대가 10개 기병 대대와 함께 배치되었다. 그들은 프로츠치, 후네란, 로젠카 마을을 배후지로 삼아 브레슬라우로 진군하는 오스트리아군을 저지할 예정이었다.
한편 로이팅겐 공작 카를 알렉산더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로허 반대편의 스트라흐비츠와 그로스 마셀위츠 사이, 그리고 골드슈미덴과 슈타벨위츠 사이에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그로스 마셀위츠와 클라인 마셀위츠 사이에 경보병대가 배치되어 좌익의 측면을 보호했으며, 근위 보병 군단은 스트라흐비츠와 그로스-모크베른 사이에 배치되었다. 그들의 전면에 네우크리츠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은 오스트리아군이 파놓은 참호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또한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르다시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베들른과 오페라우 사이 우익에 배치되었으며, 일부 경기병대는 로허 강 상류까지 나아가 크리테른근처에 초소를 설치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 근위 보병 군단은 주력군과 나르다시 군단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그로스-모크베른과 오페라우 사이에 좀 더 오른쪽으로 재배치되었다.
4.2. 나르다시 군단의 이동과 전초전
11월 22일 6시 30분경, 나르다시의 군단은 네 개의 다리를 거쳐 로허 강을 도하해 크리테른과 하틀리브 사이를 진격할 준비를 갖췄다. 날이 밝을 무렵, 베베른 공작은 그라슈첸과 가비츠 사이의 고지로 올라갔다가 오스트리아 탈영병들과 만나서 그들로부터 나르다시의 군단이 진군을 개시했으며 오스트리아 주력군 역시 로허 강을 건널 것이라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하지만 베베른 공작은 적이 곧장 로허 강을 가로질러 공격하리라고는 믿지 않고 카를 폰 베베른 왕자의 여단을 한스 요아힘 폰 치텐에게 보내 병력을 충원하게 하면서 클라인-모크베른과 그라슈첸 사이에는 4개의 보병 대대만 남겨뒀다.
한편 강 도하 작전을 완료한 나르다시 군단은 건널목에 포병 기지를 설치했다. 오전 8시경 안개가 널리 퍼졌으나 오스트리아군이 로허 강을 건너 동쪽으로 뻗어나가는 광경은 프로이센군에게 고스란히 목격되었고, 베베른 공작은 이에 따라 치텐 백작에게 5개의 보병 대대와 50개의 드라곤 및 후사르 대대를 이끌고 헤르단 남쪽으로 진격하여 나르다시 군단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치텍 백작이 출격한 뒤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가비츠 남쪽의 2개 대대를 그쪽으로 배치하고 드라이센의 중기병 여단은 그라슈첸 마을 서쪽의 참호와 마을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나르다시는 당초 가비츠 근방의 적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이 동쪽 방면에 군대를 강화하는 걸 확인하자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크리테른과 하틀리브 사이에 두 개의 대열을 편성하기로 했다. 치텐 백작은 휘하 포병대에게 포격을 퍼부어 적의 이같은 진군을 억제하게 한 뒤 드래곤 및 후사르 대대를 출격시켜 오스트리아 후사르 2개 분대와 맞붙어 그들을 격퇴하고 약 100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치텐은 더이상의 공격은 수적으로 열세한데다 적이 위치한 지형이 기병 돌격에 부적절하다고 판단하고 베베른 공작의 거듭된 공격 명령에도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기병대를 투입시키지 않았다.
나르다시는 두 개의 대열로 전 병력이 편성되자 올베스도르프 소장에게 척탄병 16개 부대와 보병 3개 대대를 이끌고 클라인베르크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곳에 주둔했던 프로이센군 경보병대는 상당한 시간 동안 클라인베르크를 지켰으나 결국 수적 열세로 밀리고 후퇴했지만 멀리 물러서지 않고 참호 뒤편에 자리를 잡고 저항을 지속했다. 이에 베베른 공작의 동생 베베른 왕자 카를은 레스트비츠 보병대 지휘관 클리츠링 대령에게 클라인베르크의 경보병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클리츠링 대령은 즉시 그의 첫 대대의 4개 사단 중 1개 사단을 가비츠 남쪽의 참호에 남겨두고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경보벼앧와 합세한 뒤 오스트리아 척탄병들을 클라이베르크에서 몰아냈다. 그 후 클리츠링 대령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질서정연하게 후퇴했으나, 오스트리아 척탄병들은 완전히 타버리지 않은 마을을 다시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오후 4시, 보른스테트 소장은 치텐 백작으로부터 휘하 병력을 이끌고 클라인베르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접수받았다. 이에 보른스테트는 클라인베르크로 이동해 총검돌격을 감행, 오스트리아 척탄병 4개 부대를 마을에서 쫓아내고 대포 13문과 여러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이후 그는 마을을 완전히 불태우고 철수했다. 여기에 베르너 후사르 분대와 치텐 후사르 분대는 도주하는 오스트리아 척탄병들을 추격해 추가 손실을 입혔다. 이후 나르다시는 병력을 수습한 뒤 더 이상 공세를 가하지 않았지만 치텐 백작은 적이 다시 공격할 거라고 믿고 브레슬라우 전투가 끝날 때까지 나르다시의 군단과 대치했다.
4.3. 오스트리아군의 첫번째 공격
한편 오스트리아 주력군은 안개 속을 헤치며 3개의 군단으로 편성되어 할당된 위치로 이동했다. 오전 9시 30분경 짙은 안개가 충분히 걷혔고 오스트리아 포병대는 적 포병대를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이에 참호에 설치된 프로이센 중포병대는 즉각 반격했다. 베베른 공작은 이 포격 소리를 생생하게 들었지만 이것은 위장 공격이며 치텐 백작이 이끄는 좌익에 대한 오스트리아군 우익(나르다시 군단)의 공격이 진짜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시선을 아군 좌익쪽으로 집중시켰고 중앙과 우익 군단에게는 적이 로허 강을 건너도록 한 뒤 반격하라는 지시를 내릴 뿐 그 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전 10시 30분경, 로허 강 협곡에 있는 대부분의 프로이센 대포들이 파괴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정오까지 7개의 다리를 통해 로허 강을 건너 자리를 잡았다. 오후 12시 30분경, 카를 알렉산더는 오페라우, 그로스-모크베른, 네우키르히에 있는 적진에 포격을 가하게 한 뒤 전군에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 주력군은 진격을 개시했고 예비군단도 그 뒤를 따라 진격했다. 오스트리아군이 두 개의 대열로 진격해오자, 슐츠 중장이 이끄는 프로이센 보병 대대는 페르디난트 왕자의 보병 여단과 함께 이들에 맞서 행진했다. 이후 양측은 30분간 서로에게 일제 사격을 퍼부었고 오스트리아 포병대는 적을 향해 포도탄 세례를 퍼부었다. 결국 프로이센 병사들은 적의 결사적인 공세에 밀려났고 슐츠 중장은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자 페르디난트 왕자는 부대기를 친히 잡고 부하들을 집결시킨 후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여기에 슐츠 중장을 대신해 지휘를 맡은 린드슈타트 대령은 그라슈첸에 주둔한 휘하 부대를 이끌고 페르디난트를 지원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이들의 공세에 결사적으로 맞서 또다시 물리쳤고, 대부분 신병이었던 슐츠 보병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그라슈첸 마을로 도망쳤다. 프로이센 중기병대가 아군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척탄병들을 향해 돌격했지만 오스트리아 척탄병들은 이들을 향해 일제사격을 퍼부어 격퇴했고, 중기병대 지휘관 페니바이어 중장은 치명상을 입었다. 그 직후 코우 중장이 이끄는 또다른 프로이센 기병대가 다시 공격을 개시했으나 또다시 격퇴되었고, 결국 프로이센 기병대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적의 참호를 공략한 뒤 포대를 설치하고 슐츠 보병대를 가르슈첸 마을에서 몰아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베베른 공작은 몇 개의 기병 대대를 모아 척탄병들을 격퇴시키게 했다. 그러나 안드라우 사단 8개 보병 대대의 합세로 전력이 강화된 척탄병들은 적 기병대를 또다시 격파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은 클라인-모크베른의 적 참호를 향해 진군했으나 프로이센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인해 전황이 지지부진해졌다.
오후 2시경, 클라인-모크베른과 그라슈첸 사이의 전선을 방어하던 소규모 프로이센군이 격퇴되었다. 루체시 장군의 오스트리아 기병 3개 분대가 도망치는 적을 추격하여 7명의 장교와 100명의 병사들을 사로잡고 2개의 부대기를 포획했다. 이후 페르디난트 왕자의 보병대와 프레우센 보병대, 중기병 여단은 클라인-모크베른 참호 동쪽에 집결했고 슐츠 보병대는 가비츠 북쪽에 집결해 적의 추가 공세에 대항할 준비를 갖췄다.
4.4. 오스트리아군의 두번째 공격
이 무렵, 또다른 오스트리아군은 뉴키르흐 근처에서 로허 강을 건너 슈미데펠트 북서쪽으로 진군했다. 프로이센 포병대는 그들이 건너고 있던 다리를 향해 포격을 가했고, 이에 따라 이들의 로허 강 도하는 그로스-모크베른 방면의 아군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강을 막 건넌 적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지만, 만테펠 보병 여단은 모든 탄약이 소모될 때까지 용감하게 그 자리를 지켰고, 결국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의 도하를 막지 못했다. 하지만 레스트비츠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 10개 보병 대대가 슈미데펠트 양쪽에서 반격을 개시해 오스트리아군을 슈미데펠트 남서쪽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때마침 클라인-모크베른 방면의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을 격퇴했고, 뒤이어 위드 백작의 예비군 13개 보병 대대와 함께 좌익에 포진한 위드 백작이 보병대를 이끌고 마리아-호프첸을 공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레스트비츠 장군은 이러다간 아군 측면이 적에게 공략당할 것을 우려하여 본진으로 퇴각했다. 이리하여 오스트리아군은 슈미데펠트에서 어렵사리 적을 몰아낼 수 있었다.
4.5. 오스트리아군의 세번째 공격
적의 전선을 밀어내는 데 오스트리아군은 뒤이어 프로이센 우측면에 위치한 필츠니츠를 공격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은 지형상 이점을 활용해 적의 공세를 번번히 저지했고, 오스트리아군은 세차례에 걸쳐 공격했으나 막심한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한편 브렌타노 장군이 이끄는 그렌저 기병 1,000명과 척탄병 몇개 부대는 코젤에서 필츠니츠에 이르는 숲으로 진군했다. 이들은 숲 속에 있는 울타리에 주둔한 적을 공격해 초기에는 승세를 잡는 듯했지만 곧 적 증원군이 도착하자 후퇴했다. 이후 브란데스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울타리들을 사수해 오스트리아군이 이 숲을 통과하지 못하게 했다.
오후 5시 30분, 오스트리아군은 필츠니츠에 대한 네번째 공격을 개시했다. 그동안 적과 맞붙으면서 많은 피해를 입었던 프로이센군은 마침내 필츠니츠 마을과 다리를 버리고 후퇴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즉시 적을 추격했지만 마을 뒤에 설치된 프로이센 포병대가 포격을 가했고 프로이센 보병대는 전열을 재정비한 뒤 줄을 지어 전진하는 적을 향해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워낙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프로이센군은 약 30분간의 전투 끝에 마침내 퇴각했고 오스트리아군은 거의 탈진한 상태인데다 날이 어두워져서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지 않았다.
4.6. 프로이센군의 마지막 반격과 후퇴
오후 5시경, 베베른 공작은 레스트비츠 장군, 페르디난트 왕자, 잉거슬벤 장군 휘하의 14개 보병대대로 하여금 오스트리아 예비군단을 역습하게 했다. 여기에 쿄우 장군이 이끄는 중기병대가 지원하기로 했지만 참호들을 가로질러 진격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오후 6시, 이들 군단이 진격하여 슈미데펠트, 마리아-호프첸, 클라인-모크베른 마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습격해 그들을 밀어내고 적 기병대의 측면을 위협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격렬한 저항을 벌였고, 오스트리아군 증원군이 신속하게 도착하자 프로이센군은 적에게 포위섬멸될 것을 우려해 성 니콜라 교외 방면으로 후퇴했다. 이 반격 공세에서 잉거슬벤 소장이 치명상을 입었고 슈미데펠트와 마리아-호프젠은 다시 오스트리아군의 손에 넘어갔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은 완전히 지쳐 적을 추격하지 않았고, 프로이센군은 클라인-간다우의 고지에 간신히 진형을 유지했다.
한편, 베베른 공작은 치텐 장군의 기병대를 동원해 또 한 번의 반격을 개시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어둠이 완전히 깔려서 적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치텐 백작의 기병대를 투입시켜 적을 몰아내려 했다. 그러나 클라인-간다우로 향하던 그는 그의 부대가 명령을 받지도 않은 채 후퇴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결국 베베른 공작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브레슬라우 요새 쪽으로 후퇴했고 자정에 치텐 백작에게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브레슬라우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로이센군은 이 전투에서 150명의 장교와 약 6,200명의 병사를 잃었다.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폰 클라이스트 소장은 전사했고 카스퍼 에른스트 폰 슐츠 장군, 페테르 에른스트 폰 페나바아르 장군, 요한 루트비히 폰 잉거슬벤 장군은 치명상을 입었다. 게다가 5가지 깃발과 22명의 장교, 600명의 병사, 대포 29문이 적에게 포획되었고 3,800명의 병사들은 탈영했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44명의 장교와 649명의 병사들이 전사하고 235명의 장교와 4,460명의 병사들이 부상당했으며, 5명의 장교와 454명의 병사들이 실종되었다.
이후 베베른 공작은 브레슬라우 요새로 진군하는 적을 살펴보고자 정찰을 나갔다가 그만 적 경기병대에게 사로잡혔다. 베베른 공작은 빈으로 옮겨졌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모친이 그와 사촌지간이었기 때문에 몸값을 지불하는 일 없이 돌려보내졌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가 의도적으로 적에게 사로잡혔다고 여겼고, 그가 돌아오자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아무튼 총사령관이 적에게 사로잡힌 상황에서 더 이상의 저항은 무리라고 판단한 브레슬라우 요새 수비군은 철수했고, 오스트리아군은 11월 28일 브레슬라우를 함락시켰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이동해 12월 5일 로이텐 전투를 치른다.슈테틴으로 가서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라! 거기에 있는 쓸모없는 수비대를 통솔하라. 너에게는 그보다 더 나은 자리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