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에반스
1.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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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의 에반스.
1948년에 머지사이드 주 부틀에서 태어나 17살 때인 1965년부터 리버풀에 데뷔했지만, 잦은 부상으로 9경기밖에 뛰지 못하고 1974년에 불명예 은퇴했다.
2. 감독 시절
2.1. 리버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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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까지 리버풀 최고의 코치진의 본거지로 통했던 '부트 룸'에서 밥 페이즐리를 비롯한 코치진들의 모습. 왼쪽 아래가 에반스 코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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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니 달글리시 감독, 로니 머랜 코치와 함께.
은퇴 이후 1974년부터 코치로 변신하여 밥 페이즐리부터 그레이엄 수네스까지 4명의 감독을 모시면서 팀의 흥망성쇠를 겪어오다가 1994년 1월에 수네스 감독이 갑자기 사임하자 바로 감독직에 부임하였다. 그가 리버풀의 감독직에 어울리는 이유는 팀 선수로 9년간 몸담았기 때문도 아니고, 1974년부터 2군과 1군을 오가며 선수들과 많이 활동했기 때문도 아니라 수네스 시절의 삐걱거리던 팀을 안정시킬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상냥한 마음씨를 지닌 그는 선수들에게 미소를 되돌려주었으며 스티브 맥마나만을 중심으로 새로이 3-5-2 포메이션을 구축하여 1994/95 시즌에 리그컵(당시 코카콜라 컵) 결승전에서 볼턴 원더러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당시 맥마나만과 제이미 레드냅, 롭 존스, 로비 파울러 등의 젊은 선수들은 고참인 이안 러쉬, 존 반스, 마크 라이트와 한 몸을 이루었고, 다음 시즌 역시 전망이 좋았다고는 하다만 1990년대 EPL의 끝판왕이자 숙명의 라이벌인 맨유의 아성을 이기지 못했다. 이러한 모습은 1996년 FA컵 결승에서 드러났는데, 당시 두 팀은 빈약한 경기 내용을 보여주었는데도 트로피는 퍼거슨의 아이들이 훔쳐버렸다.
이후 에반스는 1996/97 시즌에 맨유의 아성에 도전하면서 좋은 경기를 펼쳐내었는데도 그걸 뛰어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이클 오언과 제이미 캐러거가 데뷔한 것도 그 때였고, 1997년에 폴 인스를 영입하고 신인인 오언이 골폭풍을 터뜨렸지만 이마저도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리더십이 부족하여 선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스티브 맥마나만, 로비 파울러 등 주축 선수들은 훈련에 빠지는 일이 많았고 머리, 여자, 클럽 등에 관심을 가졌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가리켜 당시 영국에서 대인기였던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를 본따 '스파이스 보이스'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결국 1998년 리버풀 보드진이 에반스와 감독 자리를 공유할 인물을 물색하였는데, 그 사나이가 바로 제라르 울리에였다. 당시 울리에는 선수 훈련과 관리 등을 맡고 에반스는 경기 지휘를 맡는 공동 감독 체제가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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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감독 시절 에반스와 울리에. 한 눈에 봐도 사이가 안 좋아보인다.(...)
그러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공동 감독 체제는 리버풀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두 사람은 팀 운영의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권한을 내세우며 대립했다. 두 사람이 어찌나 대립했는지, 식사도 따로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듯 두 감독이 자리 다툼을 했으니 성적이 제대로 나올리 있나? 리버풀은 공동 감독 체제에서의 4개월 동안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고 급기야 UEFA 컵에서 두 수는 아래로 평가받았던 셀타비고에게 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1998년 11월 토트넘 핫스퍼에게 홈에서 3:1로 패한 뒤 결국 공동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2.2. 풀럼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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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99년에 막 강등당한 노팅엄 포레스트의 감독직 물망에 올랐으나 결국 무산되었다가 2000년에 잠시 풀럼의 공동 감독대행으로 카를하인츠 리들레와 같이 팀을 지휘한 바 있었다.
2.3. 스윈던 타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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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스윈던 타운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자신의 제자였던 닐 러독을 플레잉코치로 부임시켰으나, 별 성과를 못 내고 그해 12월 21일에 쫓겨났다.
3.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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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4년부터 존 토샥 감독의 부름을 받고 웨일스 국대 코치로 3년간 일하다가 2007년에 렉섬의 코치로 잠깐 활동하다 현재는 리버풀 FC의 라디오 해설위원으로 재직중이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