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1. 개요
웨일스의 축구 국가대표팀.
홈 구장은 카디프에 위치한 카디프 시티 스타디움이며 감독은 라이언 긱스이다. 용(웨일스어 Y Dreigiau)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웨일스인들은 럭비에 더 환장하는 탓에 축구의 인기와 성적은 안습 신세.
현재 유니폼 스폰서는 아디다스다.
2. 역사
축구가 영국의 전국구 스포츠로 발돋움하기 전인 1876년 2월, 웨일스의 몇몇 사업가들은 축구 발전에 시간과 돈, 열정을 투자했다. 슈롭셔 원더러스의 선수이자 변호사인 르웰린 캐릭을 중심으로 그들은 이웃 지역인 스코틀랜드와 국제 경기를 치르고자 머리를 맞댔다. 대표팀 선수를 모으고, 경기 세부 일정을 논의했다. 훗날 웨일스는 국가대표팀 창시의 기틀을 마련한 '렉섬 미팅'을 웨일스축구협회의 창립 시초로 보고 있다.
요크셔, 랭커셔, 스코틀랜드 등지에서 넘어온 노동자들은 타지의 수준 높은 축구를 웨일스에 유입했다. 북웨일스 지방에 먼저 축구 붐이 일었고, 남웨일스 지역에도 축구 붐이 일기 시작했다. 1902년에는 프로 리그까지 발족했으나 웨일스가 배출한 첫 스타인 빌리 메러디스를 위시한 여러 정상급 선수들이 웨일스보다 수준 높은 잉글랜드 리그에서 뛰면서 웨일스 국대 차출에 난색을 표했는데, 그럼에도 1920~30년대에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여섯 번이나 차지한 걸 보면 웨일스는 꽤나 잠재력이 있는 팀이었다. 그리고 1910년 이후 스완지 시티와 같은 남웨일스 팀과 함께 잉글랜드 리그에 참가한 카디프 시티 역시 1926/27 시즌 FA컵에서 우승하여 자신들의 저력을 영국 전역에 알리기도 했다.
한동안 럭비에 밀려 침체에 빠진 웨일스 축구는 1950년대에 꽃을 피웠다. 지미 머피 감독의 지휘 하에 주장 데이브 보웬, 에이스인 존 찰스를 필두로 하여 웨일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스웨덴으로 날아간 '드래곤 군단'은 개최국 스웨덴에 전 대회 준우승을 기록한 헝가리, 그리고 당시에는 최약체인 멕시코랑 같은 조가 되어 멕시코를 빼면 고전이 예상되었으나 3경기 모두 비기고 승점 3점으로 같은 3점인 헝가리를 제치고 8강에 올라갔다. 다만 당시에는 승리가 2점이었기 때문에 1승 1무 1패에 골득실에서 앞선 헝가리가 지금이라면 2위가 되었을 것이다. 골득실에서도 헝가리가 +를 기록하여 0인 웨일스에 앞섰지만 이 대회까지만 해도 골득실도 따지지 않았다. 어쨌든 같은 3점이라서 재경기를 하여 이보르 알처치와 테리 메드윈의 연속골에 힘입어 헝가리를 2-1로 이기고 대회 준우승한 스웨덴에 이어 2위로서 8강에 올라갔다.
8강에 진출한 웨일스의 상대는 곧 이 대회의 우승팀이 될 브라질이었다. 웨일스는 예상외로 선전했으나, 후반 21분에 당시 17살 된 앳된 소년에게 결승골 한방을 얻어맞으며 석패했다. 그리고 이 결승골을 넣은 선수가 훗날 축구황제가 되는 '''펠레'''였다.[4] 이때 머피 감독은 부상으로 결장한 찰스가 출전할 수만 있다면 웨일스는 이겼을 것이라고 하여 두고두고 에이스의 부재를 아쉬워했다.[5]
이후 1960~70년대 내내 겨울잠을 자던 드래곤 군단은 1979년에 마이크 잉글랜드 감독을 맞아들인 뒤 1980년대에 이르러 스타로 떠오른 이안 러쉬와 마크 휴즈라는 당대 영국 최고의 골잡이를 앞세워 부활을 꾀했다. 그러나 다른 선수들의 기량이 뒷받침되지 않은 탓에 번번이 메이저 대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이후 존 토샥 감독, 라이언 긱스, 크레이그 벨라미로 대표되는 1990~2000년대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특히 긱스는 우크라이나의 안드리 셰브첸코와 더불어 국대 잘못 만나 메이저 대회에 못 나간 스타로 알려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2011년에 웨일스 축구계의 레전드 중 하나인 게리 스피드 감독의 갑작스런 자살이 전해지자 축구계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2012년부터 스피드의 후임으로 부임한 크리스 콜먼 감독은 부담감이 커지게 되었다. 하지만 가레스 베일과 아론 램지, 조 앨런, 애슐리 윌리엄스의 등장으로 웨일즈 축구가 황금세대에 돌입했다는 평가가 많으며, 유로 2016 예선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이스라엘, 벨기에, 키프로스, 안도라와 속하게 되었는데 당당히 조 1위로 본선에 진출하였다. 웨일즈로써는 감격인것이 무려 '''58년만에''' 메이저 대회 본선에 진출이다.
유로 2016 본선 진출을 계기로 2015년 10월 현재 역대 최고 순위인 피파랭킹 8위를 기록하는 등 내심 2018 러시아 월드컵까지 노려보는 분위기다. 유로 2016 본선에선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며 메이저 국제대회 토너먼트 진출 기록도 58년만에 다시 이뤘다. 16강전에선 본선 내내 10백 수비로 무장한 북아일랜드에 자책골로 겨우 1-0으로 이기며 공격력에서 의문이 생기는 듯 했지만 8강에선 뛰어난 조직력을 앞세워 황금세대로 무장한 벨기에에게 선제골 실점 이후 내리 3골을 넣어 4강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웨일스 역사상 최고 성적을 기록한 것은 물론 16강에서 낙마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대신해 영국 축구의 자존심을 지킨 순간이었다. 이어진 준결승전에선 7월 6일(한국시간 7월 7일,) 포르투갈에게 0-2로 패하면서 결승진출은 무산되었지만 뛰어난 투지와 조직력을 바탕으로 아이슬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과 함께 이번 대회 최대 이변의 팀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했다.웨일즈 돌아가서는 버스 퍼레이드까지 했을 정도.
유로 2016의 기세를 이어 2018 러시아 월드컵 예선에서도 선전중인데 역대 최고 순위의 피파랭킹에 힘입어 무려 톱시드(!)를 받고 D조에 편성, 세르비아, 아일랜드, 오스트리아, 조지아, 몰도바와 같이 싸우게 되었다. 조지아와의 홈경기를 1-1로 비기는 등 발목을 잡혔으나 가장 유력한 경쟁자로 평가받는 세르비아와의 두 번의 경기를 지지 않고 끝냈고, 또다른 난적 오스트리아를 홈에서 1-0으로 잡아내는 등 유로에서 보여준 끈끈한 경기력을 다시한번 보여주며 4승 5무 무패로 2위에 랭크되어있다. 이러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1위 세르비아와 1점차, 3위 아일랜드와도 1점차로 촘촘히 붙어있어 남은 1경기에 사활을 걸어야 할 판. 그래도 팀의 지주이자 에이스인 가레스 베일이 부상을 달고 다니며 팀에 공헌을 많이 못한 상태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온 여정이라, 가레스 베일의 원맨팀이 아니냐는 세간의 이미지는 확실히 털어버렸다. 그러면서 리버풀 출신 벤 우드번과 해리 윌슨, 맨유 유스 출신 톰 로렌스, 첼시 출신 에단 암파두, 맨유의 측면을 담당하는 다니엘 제임스, 본머스의 센터백 크리스 메팜 등을 기용하면서 황금 세대 이후의 세대교체도 염두하는 장기적인 팀 운영을 겸하고 있어 미래는 밝은 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일랜드에게 마지막 경기를 패하면서 조 3위로 예선 탈락해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유로 2020 예선에서는 치열한 순위 경쟁 끝에 헝가리와의 최종전에서 2-0 승리를 거두면서 극적으로 지난 대회에 이어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참가국이 24개국으로 증가한 덕택을 톡톡히 보는 중.
3. 역대전적
3.1. FIFA 월드컵
'''역대 월드컵 전적 순위 : 54위'''
'''⑧'''
월드컵 진출 횟수는 단 한 번이지만, 이 대회에서 8강에 진출하여 총 성적은 '''1승 3무 1패, 4득점 4실점'''을 기록하여 '''54위'''에 올라와 있다. 2014년 대회 직후에는 이란과 승점이 같았지만 2018년 대회에서 이란이 승점 4점을 추가로 쌓으면서 웨일스를 아득히 따돌렸다.
다른 나라들과의 상대전적은 브라질 1패(1958), 스웨덴 1무(1958), 멕시코 1무(1958), 헝가리 1승 1무(1958)이다.
2016년 6월 현재 대륙별 상대 전적은 유럽 1승 2무, 남미 1패, 북중미 1무를 기록 중이다. 한 경기 최다 득점은 1958 플레이오프 헝가리전 2:1 승이고, 최다 실점 기록은 1958 조별리그 헝가리전 1:1 무, 멕시코전 1:1 무, 8강 브라질전 0:1 패로 단 한골에 불과하다.
2018년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4승 5무로 '''50년'''만에 월드컵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게 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아일랜드에게 당한 '''1패'''가 웨일즈를 조 3위로 떨어뜨리면서 진출 문턱에서 주저앉아야만 했다.
3.2. 올림픽
국가 단위로 참여해야 하므로 이는 4개 축구협회를 합쳐야 하는데 축구 협회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기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았다.
1900년 파리 올림픽 때 처음 참여하여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또한 1908년, 1912년 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이후 1920년, 1936년, 1948년, 1952년, 1956년, 1960년 올림픽 본선에 진출했으나 그다지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이후 1964년, 1968년, 1972년 올림픽은 지역 예선에서 탈락하였고, 그 이후에는 영국 단일 팀은 올림픽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국에서 열린 2012 런던 올림픽에서 52년 만에 영국 단일 팀(Great Britain)으로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말이 영국 대표팀이지 사실상 다수의 잉글랜드 선수 + 소수 웨일스 선수[7] 들이 포함된 팀이었고 정작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선수들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는데 '''이들 축구협회가 차출을 거부했다.''' 축구협회뿐만 아니라 선수들도 영국 단일 팀의 일원으로 뛰기를 꺼렸을 가능성이 높았으니..... 게다가 어찌 단일 팀으로 나섰건만 8강전에서 '''대한민국'''에 승부차기로 패배하는 굴욕을 맛봤다. 당연히 이길거라 여기고 4강전 브라질과의 경기에만 집중하다가 개망신당한건 덤.[8]
엔트리는 영국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의 1.1번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3.3. 유로
[1] 영어[2] 웨일스어[3] 보통 흰색과 노란색, 군청색, 검은색 중에서 제작된다. 그 밖에도 녹색, 파랑 등의 서드 유니폼이 제작된 적도 있었다.[4] 펠레가 이 경기에서 기록한 골은 현재까지 월드컵 역대 최연소 선수가 득점한 골이라는 기록을 가지고있다.[5] 이 월드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온 뒤 2018 러시아 월드컵까지 나오지 못하고 있는걸 보면 이 월드컵에서의 결과는 정말 아쉬웠다. 특히 극강의 포스를 보여주던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선전했으나 17살의 소년에게 결승골을 내줘 1대0으로 패했으니 존 찰스가 나왔다면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6] 월드컵 본선 출전 비율.[7] 웨일스 구단 몇 개가 잉글랜드에서 활동하기에 그나마 수급을 한 듯 하다.[8] 웃긴게 한국에게 실점한 것이 '''지동원의 중거리 슛 선제골'''이었던 반면 한국의 실점은 '''아론 램지의 페널티킥'''이었다. 다시 말해 '''필드골로 득점한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