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르 울리에
1. 개요
프랑스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0년부터 2011년까지 아스톤 빌라 FC 감독을 맡았고, 2016년부터 올랭피크 리옹 이사를 맡고 있다.
그는 리그앙의 여러 명문팀을 맡으면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을 때도 좋은 리더십을 보여줬다. 그러나 프랑스 안에서는 명장이었던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프랑스 밖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리버풀 시절은 컵 대회 우승을 거두고 스티븐 제라드, 마이클 오언 등을 길러내어 리버풀의 중흥기의 기초를 다지는데 기여했지만 리그에선 기복을 보였고 영입한 선수들이 모조리 실패하는 등의 실책을 범해 리버풀 팬덤에선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고 있다. 그 후 은퇴를 번복하고 맡은 아스톤빌라에서는 '''모든 팬들의 원성을 사고 만다.'''(...) 그래서인지 EPL를 주로 접하는 반면 리그앙엔 별로 관심이 없는 한국 해외축구 팬들은 이 감독을 그저 그런 감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 그가 명장인 것은 분명하다.
2. 선수 경력
1947년 9월 3일 프랑스의 테루안에서 태어났다. 울리에는 1959년에 12살의 나이로 위케이어 축구 클럽에 소속되어 1968년까지 유스팀에서 활동했다. 릴 대학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1학년 때 그의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시간 강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돈을 벌어야 했다. 1969~70년에는 리버풀의 얼솝 중학교에 들어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대학의 아마추어 축구팀에서 미드필더로 뛰었다. 열정이 넘치는 선수였지만 단 한번도 프로 축구 팀에서 뛰지는 못했다. 이후 울리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위케이어 축구 클럽에서 아마추어 선수로 활동하다가 1971년 르 투게 클럽으로 이적했다. 그후 1973년, 울리에는 선수 겸 감독으로서 감독 커리어를 시작했다.
3. 감독 경력
3.1. 리버풀 이전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르 투케에서 선수겸 감독으로서 활동하며 감독 수업을 받았다. 그 후 울리에는 1976년 뇌레맹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1982년까지 맡았다. 1982년, 팀을 2부리그로 승격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의 실력을 주목한 RC 랑스에서 그를 감독으로 선임한다.
당시 랑스는 리그앙에 승격된 지 얼마 안된 팀이었는데, 울리에는 랑스를 3년간 이끌며 리그앙에 자리를 잡게 했고 1985년에는 UEFA컵에 진출시키는 파란을 일으킨다! 그의 활약을 주목한 파리 생제르맹 FC는 1985년 울리에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울리에는 선수단을 장악하고 팀의 기반을 다졌고 1년차인 1985-86시즌에 바로 리그앙 우승을 차지한다.
그후 PSG를 이끌고 계속 호성적을 거두던 울리에는 1988년에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로 선임되었다. 수석코치로서 4년간 활동하다가 1992년에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었지만 1993년 11월 프랑스가 1994 FIFA 월드컵 미국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이때 울리에는 1993년 11월 17일 프랑스가 파리에서 불가리아에게 2:1로 패한 뒤 윙어 다비드 지놀라가 경기 종료 직전 상대의 역습을 허용하여 실점했기 때문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며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프랑스 국민들 또한 울리에의 주장에 동감했고 지놀라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다가 끝내 1996년 유로 대회를 끝으로 국가 대표팀을 은퇴했다. 훗날 지놀라는 자신을 공개적으로 매장시킨 울리에에게 근거없는 중상을 하여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며 그를 고소했다. 이 법정 싸움은 2012년 4월에 프랑스 법정에서 취하될 때까지 장기간 진행되며 울리에를 괴롭혔다.
울리에는 실패한 감독이라는 비난에 시달렸지만, 그는 1994~1996년 프랑스 U18 대표팀을 이끌었고 1996~1997년 프랑스 U20 대표팀을 이끌며 프랑스의 재능이 있는 유망주들을 길러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98년 프랑스가 월드컵을 우승한 후, 울리에는 선수들을 길러낸 공을 인정받아 메달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그의 활약을 주목한 리버풀은 팀의 미래를 맡기기로 하고 1998년 울리에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3.2. 리버풀
1998년 7월, 울리에는 리버풀 FC의 레전드인 로이 에반스와 함께 공동 감독으로서 리버풀을 이끌게 된다. '공동 감독'이라는 보기드문 일이 벌어진 것엔 이유가 있었다. 로이 에반스는 전임 감독 그레이엄 수네스가 망쳐놓은 팀을 잘 수습하고 컵 대회를 우승하여 클럽에 활력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리더십이 부족하여 선수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고 스티브 맥마나만, 로비 파울러 등 주축 선수들은 훈련에 빠지는 일이 많았으며 머리, 여자, 클럽 등에 관심을 가졌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가리켜 당시 영국에서 대인기였던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를 본따 '스파이스 보이스'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그래서 이사회는 유스들을 잘 통제하여 기량을 터트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울리에에게 선수 관리를 맡겼다. 하지만 로이 에반스를 경질하기엔 레전드를 홀대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두려워 그 또한 붙잡아둔 것이다. 이리하여 울리에는 선수 훈련, 관리 등을 맡고 에반스는 경기 지휘를 맡는 공동 감독 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공동 감독 체제는 리버풀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두 사람은 팀 운영의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권한을 내세우며 대립했다. 두 사람이 어찌나 대립했는지, 식사도 따로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듯 두 감독이 자리 다툼을 했으니 성적이 제대로 나올 리 있나? 리버풀은 공동 감독 체제에서의 4개월 동안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고 급기야 UEFA 컵에서 두 수는 아래로 평가받았던 셀타비고에게 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1998년 11월 토트넘 핫스퍼에게 홈에서 3:1로 패한 뒤, 로이 에반스는 자진 사임했고 울리에는 비로소 리버풀의 정식감독으로 부임했다.
울리에는 팀의 리빌딩을 위한 5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는 '스파이스 보이스'라는 조롱을 받는 선수들의 정신상태를 바로잡고 유스들을 키우는 데 전력을 다했다. 1999년 여름, 울리에는 폴 인스, 데이비드 제임스, 제이슨 맥디어, 롭 존슨, 토니 워너, 그리고 스티브 할킨스를 방출했고 리버풀의 레전드였던 스티브 맥마나만마저 자유계약으로 보내버리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다. 울리에는 방출한 선수들의 빈자리를 유스들로 채웠다. 사미 히피아, 디트마어 하만, 블라디미르 스미체르, 산데르 베스터벨트, 티티 카마라, 에릭 메이저, 그리고 지미 트라오레 등이 이 시기에 리버풀에 입단했다. 또한 리버풀의 훈련장인 멜우드가 이 시기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스티븐 제라드가 이 시기 유스에서 1군으로 올려져 무궁한 기회를 부여받으며 성장했다.
리빌딩은 2000년에도 계속되었다. 2000년 여름, 울리에는 마르쿠스 바벨, 닉 밤비, 페기 아르펙사드, 에밀 헤스키, 개리 맥칼리스터, 크리스티안 지게를 대거 영입했다. 반면 데이비드 톰슨, 필 바브, 도메니크 마테오, 스티브 스탄턴, 브래드 프리델 등을 방출했다. 이러한 리빌딩 작업은 2000-01 시즌에 성공을 거두었다. 리버풀은 이 시즌에 리그에서 3위를 기록했고 리그 컵, FA컵, 그리고 UEFA 컵을 모두 우승하며 트레블을 이룩했다. 하지만 맨유 팬들은 1999년 리그, FA컵, 챔피언스리그를 싹쓸이한 자신들에 비하면 리버풀이 거둔 트레블은 별거 아니라며 '미키마우스 트레블'이라고 조롱했다.[2]
2001년 10월, 울리에는 리즈와의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지휘하고 있던 도중 하프타임 때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그는 당시 은퇴까지 고려했지만 필 톰슨 코치의 보조를 받으며 잔여 시즌을 무사히 치뤘고 리버풀은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래 최고 순위인 2위를 기록하며 고대하던 리그 우승을 곧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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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심장발작을 겪은 뒤의 그는 사람이 달라졌는지 그때까지 쏠쏠하게 잘하던 영입 분야에서 큰 실책을 연이어 저지르고 만다. 2002년 여름, 울리에는 이른바 '프랑스 커넥션'으로 불리는 영입을 단행했다. 그는 천만 파운드에 랜스로부터 엘 하지 디우프를 영입했고 세단으로부터 500만 파운드에 살리프 디아오를 영입했으며 릴의 선수 브루노 셰루를 40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반면 리버풀로 임대되어 좋은 활약을 보여주던 니콜라 아넬카를 원 소속 팀인 PSG로 되돌려보냈다.
훗날 제라드는 자서전에서 아넬카를 내보내고 엘 하지 디우프에게 공격수 자리를 맡긴 것은 울리에의 최악의 실수였다고 비판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가 영입한 '프랑스 컬랙션'들은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특히 엘 하지 디우프는 팀의 공격수를 맡은 주제에 첫 시즌에 29경기 3골만 기록했고 두 번째 시즌엔 33경기 0골을 기록하는 위대한(...) 성적을 거둔데다 허구헌날 타팀 관중에게 침을 뱉고 훈련은 제대로 하지 않는 등 온갖 말썽을 저질렀다. 또한 울리에는 팀의 주축인 미드필더 게리 맥칼리스터와 스트라이커 야리 리트마넨을 처분해놓고 그들을 대체할 선수를 구하지 못해 거센 비난을 받았다. 영입정책의 참담한 실패는 성적에 악영향을 끼쳤다. 2002-03시즌, 리버풀은 초반 12경기에서 8승4무로 선두를 독주했지만 곧바로 11경기 연속 무승이라는 충격적인 부진을 겪었고 결국 최종전 단두대매치에서 첼시에 패해 5위로 떨어져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또한 울리에는 유스 정책에 있어서도 거센 비난을 받았다. 울리에의 유스 정책은 기본적으로 프랑스 위주로 이루어졌다. 사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그는 감독 인생을 시작한 이래 프랑스 리그에서 줄곧 일했기에 그가 아는 선수들은 대부분 프랑스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는 'B급'이라 평가받는 선수들을 무턱대고 영입했고 그 중 몇몇을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실패했다.(...) 심지어 멘탈에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월드컵에서 활약했다는 이유로 영입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영입한 선수가 바로 위에서 설명한 엘 하지 디우프다.(...) 결국 울리에는 팬들의 신임을 잃었고 2003-2004 시즌에 4위를 기록하며 챔스에 진출시켰으나, 라이벌 맨유보다 13점이나 밀리고 우승팀 아스날과는 25점차나 뒤처졌다. 이에 따라 팬들이 격노해 연습구장에 스프레이로 "울리에는 에이즈나 걸려라" 같은 비난 문구로 도배했고, 팀 관계자들이 그를 옹호하느라 진땀을 뺐다. 울리에 본인도 "우리 전력상 4위 정도면 잘한 거 아니냐"며 버티다가 팬들의 분노가 더해지자, 팀은 마음을 바꾸고 그를 쫓아냈다.
리버풀에서의 그의 활동에 대한 리버풀 팬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일부 팬들은 제라드와 오언 등 팀내 유스들을 잘 키우고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컵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을 거머쥔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비판자들은 2002년 이후 그의 실책으로 팀의 전력이 약화했고 70,80년대나 통할 전술을 계속 고집하는 바람에 리그 우승을 거두지 못하고 갈수록 성적이 나빠졌다며 그를 실패한 감독으로 낙인찍었다. 이렇듯 울리에는 리버풀에서 공과가 극명하기에 그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
3.3. 올랭피크 리옹
2005년 5월 29일, 울리에는 리그앙에서 우승을 차지한 올랭피크 리옹과 2년 계약을 맺었다. 그는 리옹을 이끌고 리그에서 순항했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선 AC밀란과의 8강전에서 패하고 말았다. 울리에는 2005-06 시즌과 2006-07 시즌 모두 우승을 차지하여 리그 2연패를 이룩했고 프랑스 컵에서도 2005년과 2006년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2007년 5월 25일, 그는 챔피언스리그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리옹 구단주인 장 미셸 올라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감독직을 사임하고 2년간 휴식을 취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던 중 핌 베어벡의 후임감독을 찾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 감독 1순위 후보로 대한축구협회가 접근했으나 본인이 거부했다고 하였다.
3.4. 아스톤 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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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아스톤 빌라 FC는 마틴 오닐을 경질한 뒤 울리에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그는 초반부터 잡음을 겪어야 했다. 그가 기자회견을 가졌을 때, 그는 아직 계약에 서명하지 않았고 프랑스 축구 협회가 이를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울리에는 9월 15일 블랙번 로버스와의 리그 컵 경기에서야 비로소 팀을 지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울리에는 아스톤 빌라에서 매우 고전했다. 가브리엘 아그본라허, 스틸리얀 페트로프, 니겔 리오-코커, 그리고 에밀 헤스키 등 팀의 주축 선수들이 모조리 부상당하고 만 것이다. 그는 이 여파로 아스톤 빌라 부임 이래 10경기를 치루는 동안 단 한 경기만 이기는 부진을 겪는다. 2010년 11월, 울리에는 이 초유의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아스날의 미드필더였던 37세의 노장 로베르 피레스를 자유계약으로 영입했다. 하지만 팀의 부진은 그것으로 극복되지 않았고 2011년 1월에 20경기를 치루는 동안 고작 승점 21점을 기록하는 부진에 시달렸다. 빌라는 18위에 머무르며 강등을 당할 위기에 직면했다. 팬들은 팀의 부진에 화가 나 울리에를 향해 "넌 아침에 해고되어 있을 거다"는 야유를 퍼부었다.
울리에는 1월 이적 시장 때 팀의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토트넘 핫스퍼로부터 수비수 카일 워커를 임대하고 선더랜드로부터 공격수 대런 벤트를 영입했으며 리옹으로부터 장 마쿤을 영입하고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부터 마이클 브래들리를 영입했다. 2011년 2월, 아스톤 빌라는 9경기에서 5경기를 이기고 3경기를 비기며 12위로 상승하며 영입효과를 톡톡히 봤다.
그러나 3월 초순, 울리에는 맨시티와의 FA컵 경기때 주전 선수들을 대거 명단에서 제외시키는 결정을 내렸고 결국 팀은 맨시티에게 3:0으로 패했다. 언론은 경기를 일찌감치 포기한 울리에를 거세게 비난했다. 또한 이 시기 빌라의 주전 수비스 제임스 콜린스와 리차드 던이 클럽 스탭과 싸우는 일이 벌어져 팀의 상승세에 찬물을 뿌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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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 아스톤 빌라는 홈에서 지역 라이벌인 울버햄튼 원더러스와 맞붙었다. 이때 팬들은 "이젠 충분하다. 울리에는 나가라!"라는 배너를 들어올리며 울리에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울버햄튼은 이날 맷 자비스의 골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아스톤빌라를 상대로 31년 만에 거둔 것이었다.(...) 이 경기 직후, 팬들은 울리에를 향해 "우리는 울리에가 나가는 걸 원한다.", "우리는 네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야유를 퍼부었다.
4월 20일, 팀의 부진과 팬들의 야유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울리에는 밤중에 심장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는 의사로부터 더이상 감독직을 맡아서는 안된다는 선고를 받았다. 결국 그를 대신해서 게리 맥칼리스터 수석코치가 잔여 경기를 치러야 했다. 6월 1일, 울리에는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지옥과도 같았던 아스톤 빌라에서의 1년을 마무리지었다.
4. 은퇴 이후
올랭피크 리옹과 프랑스 축구 국가 대표팀 기술이사로 일하고 있다. 건강이 건강인 만큼 현장에 복귀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심장 수술을 받았다가 한국 시간 2020년 12월 14일 향년 73세에 세상을 떠났다.[3]
5. 수상
- 파리 생제르맹
- 리그 1 우승 1회 (1985-86)
- 리버풀
- UEFA컵 우승 1회 (2001)
- UEFA 슈퍼컵 우승 1회 (2001)
- 잉글랜드 FA컵 우승 1회 (2001)
- 풋볼 리그 컵 우승 2회 (2001, 2003)
-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1회 (2001)
- 올랭피크 리옹
- 리그 1 우승 2회 (2005-06, 2006-07)
- 트로페 데 샹피옹 우승 2회 (2005,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