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오언

 

'''마이클 오언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1997-98 · 1998-99
'''FIFA 월드컵 신인상 1998'''
'''베스트팀'''





'''리버풀 FC 앰버서더'''
'''Liverpool Football Club'''
''' 이름 '''
'''마이클 오언'''
'''Michael Owen'''
''' 본명 '''
마이클 제임스 오언[1]
(Michael James Owen)
''' 출생 '''
1979년 12월 14일 (44세) /
잉글랜드 체셔 주 체스터
''' 국적 '''
영국 (잉글랜드 )
''' 신체 '''
173cm[2] | 체중 70kg A형
''' 직업 '''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윙어[3]/ 은퇴)
해설자
''' 소속 '''
''' 선수 '''
리버풀 FC (1991~1996 / 유스)
'''리버풀 FC (1996~2004)'''
레알 마드리드 CF (2004~2005)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05~200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9~2012)'''
스토크 시티 FC (2012~2013)
''' 국가대표 '''
89경기 40골 (잉글랜드 / 1998~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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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명 '''
원더보이 (Wonder Boy)

1. 개요
2. 클럽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출전 기록
6. 논란
6.2. 대한민국의 개고기 문화 반대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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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이클 오언은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이며, 현재까지 잉글랜드의 마지막 발롱도르 수상자이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이다. 현재 해설위원으로 활동중이다.

2. 클럽 경력



2.1. 리버풀 FC


[image]
1996-97 시즌 막바지인 1997년 5월 6일 윔블던 FC 전에서 리버풀 소속으로 데뷔전을 치뤘고, 데뷔골을 기록했다.
2년차 시즌인 1997-98 시즌에는 부상을 입은 로비 파울러를 대체하기 위해 주전 공격수로 나섰다가 뛰어난 활약을 펼치면서 풀타임 플레이어가 되었으며, 결국 이 시즌에 리그 36경기 18골, 총 44경기 23골이라는 무시무시한 득점력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18세 나이에 EPL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PFA 올해의 신인상과 EPL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이어서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에서는 4위에 이름을 올렸다.
1998-99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4월에 시즌을 조기 마감했지만, 리그에서 30경기 18골을 기록하며 직전 시즌에 이어 EPL 득점왕을 차지했다. 시즌 전체를 놓고 보면 40경기 23골을 기록하며 직전 시즌과 동일한 득점을 기록했다. 이렇듯 오언은 풀타임 첫 2시즌 연속으로 EPL 득점왕을 차지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셈이다. 심지어 이때 오언의 나이는 19, 20세에 불과했다. 지금으로 치면 엘링 홀란, 제이든 산초 등을 보는 돌풍이었는데 스텟은 조금 떨어질지언정 득점왕을 2회 연속 차지한 데뷔 2~3년차 선수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기대감은 엄청났다.
1999-00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결장이 많았고, 계속되는 부상으로 경기력도 많이 떨어지면서 이전 시즌들에 비해 아쉬운 성적을 거뒀다. 성적은 리그 27경기 11골, 총 30경기 12골.
[image]
2000-01 시즌에는 리그 28경기 16골, 총 46경기 24골을 기록하며 리버풀의 3관왕[4]의 주인공 역할을 쏠쏠히 해내었다. 특히 FA컵 결승에서는 아스날을 상대로 1-0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83분과 88분에 골을 몰아넣으며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면서 해당 시즌 '''발롱도르'''까지 수상했다.[5]
그 후 03-04 시즌까지 리버풀에서 뛰면서 매 시즌 '''2경기당 1골 이상'''이라는 놀라운 득점력으로 활약했지만, 정작 리그나 챔스 트로피와는 인연이 없어서 그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04-05 시즌 8m이라는 헐값에 레알 마드리드 CF로 홀연히 이적해 팬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6]

2.2. 레알 마드리드 CF


[image]
2004년 8월 13일, £8M의 이적료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등번호는 11번을 배정받았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호나우두, 라울 곤살레스같은 선수들 때문에 출장을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간간히 조커로 출장하며, 출장 시간 대비에서는 꽤 골을 넣었다. 그러나 호나우두, 라울이라는 기존의 스타들을 밀어낼 만한 활약은 전혀 보이지 못하였으며, 결국 벤치멤버로 전락하게 되었다. 레알에서의 기록은 36경기 출장에 13골.
이후 주전 출장을 계속 요구했지만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자신이 가장 바라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러 왔는데 그가 이적한 시즌에 리버풀 FC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해버렸다.'''[7]
결국 1시즌 뒤에 바로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로 약 18m파운드의 이적료로 이적. 뉴캐슬 유나이티드 FC가 종전에 가지고 있던 클럽 이적료 기록인 앨런 시어러의 16m 파운드를 뛰어넘었고, 주급도 무려 2억 가까이 수령하게 되었다. 이때 오언 본인도 리버풀로의 복귀를 바라고 있었지만 리버풀은 불과 1년 전에 떠난 선수를 재영입하는데 보낸 이적료의 2배를 지불하고 다시 데려온다는 것을 꺼려했고 결국 영입하지 않았다. 또 이 때 오언의 팬으로 유명한 알렉스 퍼거슨 감독 또한 복권을 긁어볼 계획이 있었지만, 당시 이미 박지성을 영입한 상황이라 오언을 이어서 영입할 계획은 없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2.3.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image]
하지만 뉴캐슬 시절 첫 시즌에 굉장한 연속골을 넣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귀신같이 부상을 당한 후 계속해서 부상을 달고 살아 4시즌 동안 71경기 밖에 못 나왔다[8]. 그리고 뉴캐슬이 강등당한 뒤 FA 신분으로 풀리게 된다. 당시 오언은 장기간의 부상으로 인한 기량하락으로 인하여 새로운 팀을 찾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본인을 홍보하는 브로셔(일종의 안내책자)까지 만들어 배포했었다고 하니 얼마나 접촉했던 팀이 없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긴 해도 떠나서 홀가분하다는 게 뉴캐슬 팬들 대다수의 감상. . 속쓰린 부상과 재활도 모자라 더럽게 받아먹던 주급도 그렇거니와, 뉴캐슬의 모 선수는 인터뷰에서 높은 주급을 받던 모 슈퍼스타가 팀을 떠난 후 라커룸 분위기가 너무나 편해졌다, 그는 너무나 슈퍼스타라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 거만한 태도를 취했기에 라커룸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밝혔다. 하여, 유튜브에 훈련모습을 올리는 등, 이적할 팀을 구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면서 주변에서 비록 자업자득이긴 해도 '원더보이'라 불리며 선풍을 일으켰던 그의 처지에 동정심을 유발할 정도였으며 그리스 리그로 간다는 둥의 소문이 무성하다가...'''반전이 일어났다!'''

2.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image]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계약 제의를 한 것이다! 같이 점심 먹자고 연락해서 거기서 계약제의가 있었던 듯. 결국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깜짝 이적을 성공시켰다. 소문에 따르면 퍼거슨 감독이 리버풀 시절부터 오웬을 높이 평가해서 데려오고 싶어했다고. 2009년도 맨유 방한 당시 우연찮게 데이비드 길 단장과 와인 바에서 대화를 하게 된 한 맨유 팬의 증언에 따르면 길 단장은(당시 시점으로) 몇년 전부터 마이클 오언을 데려오라는 퍼거슨 감독의 등쌀에 시달렸다고 한다. 실제로 오언을 자유이적으로 데려오고 여러 설이 나도는 가운데서도 꾸준히 그를 출전시키면서 2011년도 여름에 계약 연장까지 한 걸 보면 퍼거슨 감독의 오언 팬설은 사실인듯. 오언 본인도 맨유에서 염원해마지 않던 정규리그 우승컵 등, 몇 개의 우승컵을 챙길 수 있었으니 서로 이득이 된 셈이다.
하지만 리버풀 입장에서는 최대 라이벌인 맨유로의 이적이라는 최악의 경우였다. 리버풀 팬들도 헤어질 때의 모습은 덮어두고 '''그래도 우리 새끼'''라고 원더보이가 늘그막에 고향 팀에서 파란만장한 커리어를 마감하길 바랐고, 실제로 프리로 풀리기 직전 2009년 봄에 뉴캐슬이 안필드 원정을 왔을 때 교체투입되는 원더보이에게 열렬한 기립박수를 보내주기도 했지만 그로부터 몇 달만에 통수를 맞은 것(...) 사실 오언은 이때도 리버풀 이적을 원했고 제라드와 토레스(!)도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에게 오언의 영입을 요청했으나 베니테즈 감독은 이번에도 영입을 거절했다.[9] 그리고 위에 언급한 대로 퍼거슨이 계약 제의하자 덥썩 물었다.
예전에는 엄청난 순간 스피드와 주력, 드리블링으로 득점을 하는 전형적인 돌파형 스트라이커였지만, 잦은 부상으로 스피드가 많이 죽어 이탈리아필리포 인자기처럼 오프사이드 라인을 무너뜨리는 움직임을 이용한 공간 침투와 문전에서의 센스로 골을 넣는 타겟 스트라이커로 변화했다.[10][11] 점프력은 뛰어나지 않지만 위치선정이 뛰어나, 작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헤딩골도 많다.
[image]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입단 후 2009-10 시즌엔 팀내 3rd 스트라이커로 주로 조커로 많이 활용되었다. 역시 그 지긋지긋한 부상 때문에 자주 발목을 잡히긴 했지만 맨체스터 더비의 결승골과 챔스 볼프스부르크전 해트트릭을 비롯한 중요한 골을 몇 골 뽑아내며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는 중이다. 다만 칼링컵 결승 이후 또 부상으로 시즌 아웃 당해서 2010 남아공 월드컵 출전의 꿈을 접어야하였다.[12]
2010-11 시즌엔 새로 영입된 치차리토에게도 밀려 팀내 4th 자원으로 밀려났다. 에르난데스가 전성기 오언을 연상시키는 빠른 발과 위치 선정, 골 결정력에 특화된 선수라서 스타일마저 겹쳐버린 것이 큰 듯. 덕분에 맨유에선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7번을 달고 있는 선수면서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들어졌다. 이 시즌 뉴캐슬 원정경기에서는 현지팬들이 세인트 제임스 파크 개장 이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야유소리(...)라고 평가할 정도로 극심한 야유를 받고, 교체투입 이후 수 분 동안 모든 홈 팬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there's only one greedy bastard"를 연호했다. 심지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흔드는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
[image]
그래도 마지막 블랙풀 전에서 마지막 골을 넣고 맨유의 19번째 리그 우승이자 자신의 첫 리그 우승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2010-11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베르바토프를 밀어내고 깜짝 교체명단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퍼거슨에게 베르바토프 대신 오언을 벤치에 앉힌 이유를 묻자 퍼거슨은 "경기 막판에 정말 골이 필요하거나, 무에서 유를 창조할만한 선수가 필요하다면 마이클 오언보다 나은 선수가 있겠는가?" 라고 대답하며 오언을 추켜세워줬다. 하지만 그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FC 바르셀로나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고, 오웬의 출전 기회는 없었다. 이 날 치차리토박지성의 좋은 패스를[13] 어이없는 터치로 날려먹는 등 상당히 부진했는데 차라리 오언이 선발로 출장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충성심에 대해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철저하게 프로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는 선수고, 언론관리에 상당히 냉철한 선수였었다. 절대 인터뷰로 기자들에게 이적에 관련해 떡밥을 던져주지 않았고, 자신의 옛 소속팀에 대한 허술한 인터뷰로 기자들에게 떡밥을 제공해주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몸담았던 팀들에 대한 인터뷰 태도가 변했다.
생애 첫 EPL 우승 이후 한 인터뷰에서 "If you can't beat them, join them(이길 수 없다면 그 편에 서라)"라는 속담을 말해 리버풀 팬들의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덕분에 그 이후 별명이 '''합류왕'''이 됐다. 또한, 2011년 6월 2일 경에 자신의 트위터에 '''"매 경기 수준 낮은 팀(poor team)에서 뛰는 것보다 최고의 팀에서 종종 뛰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때는 즐겁지 않았거든요."'''라는 글을 올려 전 소속팀인 뉴캐슬 유나이티드 FC를 까내렸다. 당연히 뉴캐슬 팬들은 분노했고, 가뜩이나 고액 연봉에, 매 시즌 부상을 달고다니던 선수를 4년이나 품어왔던 그들의 어이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다. 현재 각 축구 팬덤에서도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중. 게다가 이런 합류를 제대로 한 선수가 이미 있다...[14]
비록 지금은 몰락의 아이콘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유리몸인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의 골잡이로서의 능력은 무시할 수준은 아니며, 실제로 그가 저번 시즌 맨유를 구한 골을 넣은 것을 생각하면 역시 클래스는 있다. 각주에 서술된 최대 장점인 침착함과 슈팅기술은 어디 가는 게 아니니까...이 양날의 검이 시즌 초에 부상당하지 않고 잘 쓰여진 것을 보면 맨유의 뽑기 운이 좋다고 해야하는 것인지도...
만인의 예상을 뒤엎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1년 재계약'''을 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그를 웨인 루니하비에르 에르난데스에 뒤이은 세번째 옵션으로 쓸 생각인듯. 덕분에 원기옥 모으는 2010-11 시즌 EPL 득점왕은 어디론가 떠나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2011-12 시즌에는 잦은 부상으로 입지가 워낙 줄어들어서 결국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현재 새로운 팀을 찾고 있으나 계약 제의는커녕 언론에 제대로 된 링크 하나 안 뜨고 있다.
알 샤밥과 잠시 링크가 떴으나, 알 샤밥의 칼리드 부 후마이드 부사장이 직접 나서 '''"내리막인 선수는 필요 없다"'''라고 영국 언론에 밝히면서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

2.5. 스토크 시티 FC


그래도 이적시장이 닫히기 전에 스토크 시티 FC로 이적하는데 성공했다. 2013년 1월 20일 23라운드 경기에서는 숱한 장신 수비수들 사이에서 헤딩골을 넣기도 했지만 이 골이 스토크 시티 선수로써 오언이 기록한 처음이자 마지막 골이었다.(최종 성적은 리그 8경기 1골, 컵 대회 1경기 0골.) 그리고 이 시즌을 끝으로 오언은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은퇴선언 기점으로 아직 33세라서 아깝다는 반응과 폼 저하의 상징이나 다름없어서 올 게 왔다라는 반응이 교차하고 있다.

3. 국가대표


[image]
오언은 어렸을 때부터 특출난 수준이었다. 이미 U-17, U-19 등에서의 활약이 워낙 좋았기에 스티븐 제라드보다도 이른 나이에 성인 무대에 데뷔했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오언은 글렌 호들이 이끄는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승선해 튀니지와의 1차전에 교체로 출전해 잉글랜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최연소 출전 선수가 되었다.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 오언은 또다시 교체로 출장했으며 동점골을 넣어 18세 190일로 잉글랜드의 월드컵 최연소 득점자로 이름을 올렸다.[15] 하지만 팀은 2:1로 패해 빛이 바랬다. 루마니아전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오언은 잉글랜드가 콜롬비아와의 조별 리그 최종전을 치를 때 선발로 출전했다. 잉글랜드는 경기에서 승리했고, 오언은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에도 선발로 나섰다.
아르헨티나가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6분 선제골로 앞서나간 와중에 오언은 페널티 구역에서 로베르토 아얄라에 걸려넘어졌고,[16] 앨런 시어러페널티 킥 주자로 나서서 동점골을 기록했다. 16분, 오언은 개인기로 전진 쇄도해 역전골까지 성공시키며[17] 잉글랜드를 하드 캐리했다. 물론 잉글랜드는 연장 접전 끝에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패해 대회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오언은 역전골의 임팩트로 '''원더 보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축구팬들에게 본인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오언은 UEFA 유로 2000 예선전 초반에 잉글랜드의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잉글랜드는 예선전 기간 동안 부진했고, 호들이 지휘봉을 내려놓고 케빈 키건이 감독이 되었다. 1999년 9월 4일, 오언은 6-0으로 이긴 룩셈부르크와의 경기에서 자신의 웸블리 첫 골을 기록했다. 대회 본선에서 오언은 조별 리그 세 경기에 모두 출전했지만 루마니아를 상대로 한 골을 넣는데 그쳤으며[18] 잉글랜드는 조별 리그에서 일찍 떨어졌다.[19]
앨런 시어러가 은퇴하고, 스벤예란 에릭손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오언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주 공격수로 발돋움했다. 그는 뮌헨올림피아슈타디온에서 열린 독일과의 2002년 한일 월드컵 예선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것을 포함해 6골을 넣었고, 잉글랜드는 예선전에서 조 1위로 본선에 진출했다. 2002년 4월, 그는 파라과이와의 친선전에서 부상으로 빠진 주장 데이비드 베컴을 대신해 잉글랜드의 주장 완장을 찼다. 오언은 1963년의 바비 무어 이래 최연소 주장이었고, 이후에는 베컴이 부재할 경우 주장을 찰 부주장으로 정식 활약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에서 오언은 조별 리그에서 무득점으로 침묵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에게 걸려 넘어지는 할리우드 액션을 보여서 페널티 킥을 유도했고 베컴페널티 킥 결승골로 1대 0으로 승리했다.[20] 이렇게 졸전을 벌인 끝에 겨우 16강에 올라가긴 했지만 오언은 덴마크와의 16강전에서 기어이 첫 골을 넣었으며, 브라질과의 8강전에서 잉글랜드의 선제골을 기록하는 활약을 보여[21] 본인의 실력을 다시금 입증했다.
이후 UEFA 유로 2004 예선전에서 5골을 기록했지만 대회 본선에서 오언은 조별 리그에서 또다시 골을 신고하지 못했다. 그리고 포르투갈과의 8강전에서 3분만에 골을 기록해 잉글랜드 최초로 4번의 주요 대회 본선에서 골을 넣은 선수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승부차기에서 패해 탈락했다.
오언은 2006년 독일 월드컵 예선전에서 5골을 넣었다. 2005년 5월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열린 콜롬비아와의 친선경기에서 국가대표팀 경기 두 번째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2005년 11월, 오언은 숙적 아르헨티나와 치른 친선경기에서 막판에 2골을 추가해 잉글랜드에게 3-2 승리를 선사했다. 2006년 5월 25일, 오언은 벨라루스와의 친선경기에서 경기를 치러 2006년 독일 월드컵과 현장 복귀를 앞두고 몸상태 점검을 했다. 그는 이 경기에서 주장을 맡아 61분을 뛴 후 교체되어 나갔다.
오언은 2006년 독일 월드컵 파라과이트리니다드 토바고와의 1, 2차전 경기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선발로 출전했지만, 한 골도 기록하지 못했다. 개인 80번째 출전 경기이자 스웨덴과의 조별 리그 최종전에서 51분 출전한 오언은 오른쪽 무릎이 틀어지는 중상으로 들것에 실려 경기장을 나갔다. 6월 21일에 진행한 부상 진단을 통해 오언 무릎의 전방 십자 인대가 파열된 것으로 밝혀졌고, 조기 귀가 조취가 내려져 대회에 더 이상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 경기가 오언이 뛴 축구 메이저 대회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22]
이후 오언은 알바니아와의 경기에 복귀한 후, 신축한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릴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와 에스토니아와의 UEFA 유로 2008 예선전을 앞두고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복귀했고 “저는 예리해진 것 같고, 기회를 잡았을 때, 문전에서 편안함을 느낌니다.”라고 감정을 드러냈다. 오언은 두 경기에 모두 출전해 에스토니아전에서 득점을 올렸고, 게리 리네커가 종전에 세웠던 잉글랜드의 역대 최다 공식대회 득점 기록을 경신했다.
2007년 9월 12일, 오언은 3-0으로 이긴 러시아와의 경기에서 2골을 추가해 구 웸블리 경기장과 신 웸블리 경기장에서 열린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모두 득점을 올린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 UEFA 유로 2008 본선행에 오르지 못하면서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이 경질되고 파비오 카펠로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오언은 파비오 카펠로 부임 후 2008년 3월의 프랑스와 치른 친선경기에 한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하는데 그쳤고 더이상 국가대표에 뽑히지 못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천성적인 피니시 능력을 가졌던 스피드스타'''[23]
전성기 시절 플레이 스타일은 스피드스터가 보여줄수 있는 최선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주력부터가 최고수준이며 볼을 가지고 움직일 때 쓸데없는 움직임이나 리스크 없이 지혜롭게 볼을 운반하기 때문에 현란한 발동작 없이도 수비수 하나 둘은 무리없이 제치고[24],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침착하게 슈팅해 강한 킥력 없이도 최고의 골 결정력을 보여줬다. 위치 선정이 뛰어나서 작은 키로도 헤딩골을 많이 넣었다. 그러나 오언은 잦은 부상으로 악명이 높았고[25] 그 때문에 2006년 월드컵에서 당한 십자인대 부상 이후 본인의 장기이던 속도를 잃어버렸고 잦은 부상의 여파로 30대 이후에는 급격한 기량 저하를 보이고 만다. 은퇴하기 전 마지막 약 6년 동안은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머리에서는 '지금 스프린트를 해서 공간 침투를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또 동시에 본인의 몸상태를 잘 알기 때문에 머리의 다른 한쪽에서는 뛰지 말라고 명령을 했다고... 결국 이처럼 머리 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면서도 부상 위험때문에 그러한 플레이를 하지 못하여(달리는게 너무나 무서웠다고 함) 점점 폼이 떨어졌고 나중에는 뛰어 들어가면 되는 포지션 자체를 안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리그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6/97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2
1
0
0
0
0
0
0
1997/98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36
18
0
0
4
4
4
1
1998/99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30
18
2
2
2
1
6
2
1999/00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27
11
1
0
2
1
0
0
2000/01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28
16
5
3
2
1
11
4
2001/02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29
19
2
2
0
0
10
5
2002/03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35
19
2
0
4
2
12
7
2003/04
리버풀 FC
프리미어 리그
29
16
3
1
0
0
6
2
2004/05
레알 마드리드
라리가
36
13
4
2
-
-
5
1
2005/06
뉴캐슬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11
7
0
0
0
0
0
0
2006/07
뉴캐슬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3
0
0
0
0
0
0
0
2007/08
뉴캐슬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29
11
3
1
1
1
0
0
2008/09
뉴캐슬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28
8
2
0
2
2
0
0
2009/1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19
3
1
0
4
2
6
4
2010/1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 리그
11
2
2
1
1
2
2
0
2011/1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잉프리미어 리그
1
0
0
0
2
3
1
0
2012/13
스토크 시티
프리미어 리그
8
1
1
0
0
0
-
-

6. 논란



6.1. 시뮬레이션 액션


아르헨티나에게 욕먹어도 할 말이 없는 천하의 개쌍놈인데, 월드컵에 참가한 1998년2002년에 모두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페널티킥을 얻어내면서 아르헨티나를 엿먹였기 때문이다. 1998년에는 로베르토 아얄라를 상대로 페널티 킥을 얻어내었고, 2002년 월드컵에서는 마우리시오 포체티노[26]에게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부당하게 페널티 킥을 얻는 바람에 베켄바워에게 거의 쌍욕에 가까운 비난을 받았다. 2002년의 행동은 대표적인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꼽혀서 KFA 홈페이지의 경기규칙강좌에서 대표적인 시뮬레이션 액션 사례로 사진이 실려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후 오언은 1998년과 2002년의 시뮬레이션 액션을 모두 스스로 인정했다.
사실, 마이클 오언의 페널티 킥이 잘못 되었다면서 포체티노가 따지려다가 말았고, 다른 아르헨티나 선수들도 항의를 하지 않았다. 오언의 연기가 워낙 좋기도 했지만, 당시의 심판이 명심판으로 유명한 피에르루이지 콜리나였기 때문에 '''콜리나 심판이라면 제대로 봤겠지?'''하고 믿은 선수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6.2. 대한민국의 개고기 문화 반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민국개고기 문화에 반대한다며 오언은 잉글랜드 대표팀과 소속팀 리버풀의 동료인 에밀 헤스키, 제이미 레드냅이 한국의 개고기 문화에 대한 반대와 압력을 넣는 서명에 참여했고, 이어서 프랑스 대표팀이자 첼시 FC 소속의 에마뉘엘 프티도 이 서명에 동참했다. 당시 기사[27]

7. 기타


  • 아버지 테리 오언은 에버튼 FC의 선수였기 때문에 에버튼의 팬이었지만 리버풀 FC에 입단해 유스시절 스티븐 제라드와 함께 훈련을 받았다.[28]
  • 11-12 시즌에는 리버풀 자선경기와 개리 네빌의 은퇴 경기를 모두 뛰었다... 또한 제이미 캐러거의 은퇴 경기도 뛰었다. 제라드도 집에 트로피와 유니폼 장식장에 오언의 레알 마드리드 CF 셔츠가 가운데에 장식되어있는 것 등을 보아[29]후에 제라드의 은퇴 경기에도 출전할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원래 같은 시기 유스생활을 보냈고 서로 친해서 오언의 이적 후에도 여전히 친하게 지낸다고.
  • 축구 외에도 경마, 사업, 부동산, 주식 등의 재테크를 하고 있고, 스타성이 굉장하기 때문에[30] 이로 인해 데이비드 베컴에 이어 영국 출신 현역 축구 선수 중 재산 2위를 자랑 중이다. 특히 손꼽히는 경마 매니아이며, 부인 또한 경마 관련 직종에 종사한다고 한다. 모 인터뷰에서 그가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가져가고 싶은 물건이 무엇인지 묻자 "경마 소식지"라고 답했던 적도 있다. 퍼거슨 감독도 경마를 좋아하기 때문에 둘이서 경마 이야기를 하는 때도 있다. 말 타는 걸 심하게 좋아하는데 돈까지 많다보니 마을의 일정 구역을 사들여서 말타고논다.
  • 2013년 트위터에서 자신의 긴 부상경력을 조롱하며 퇴물이라고 야유하는 것에 분개해 나는 세계 최고의 선수였다, 하지만 너는 뭐였냐?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라고 받아쳤으나 상대편에서 니가 6년 동안 부상에서 신음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나는 니 나라를 지켰다[31]고 응수하자 조용히 잠수를 탔다... 본인 말론 19살 이후 몸이 100%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32]
  • 은퇴 이후로는 경기 중계, 해설을 맡고 있는데 워낙 안티팬이 많아 쉴 새 없이 까이고 있는 중.[33]
  • 2002 월드컵 때 한국에서의 우스갯소리로는 차두리와의 비교가 있었다. 당시 월드컵 참가 선수 중에 가장 스피드가 빨랐던 게 오언과 차두리였는데 둘의 차이점은 '오언은 공을 드리블하며 달리지만, 차두리는 공보다 빠른 나머지(?) 공 없이(??) 혼자 뛴다'는 점이라고..
  • 2015년, 피파 온라인 3에 06년 월드컵 버전으로 재등장하였다. 높은 골 결정력, 빠른 발 등 리버풀에서의 전성기를 그대로 재현해냈다. 그런데 깨알같이 특성이 유리몸(...). 피파 온라인 4에도 국가대표 버전으로 등장하였다. 전작보다 실제 축구 구현률이 높아져 스트라이커중에서도 돋보이는 속력과 스트라이커 치고는 낮은 슛 파워, 높은 골 결정력 등. 다만 유리몸 특성은 사라졌다.[34]
  • 초창기 대표팀 시절, 베컴의 롱패스+오언의 스피드 조합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고질적인 왼발 트래핑 문제로 수비수들에게 롱패스 받는 패턴을 읽히면서 철저히 마크당해 큰 재미를 보지못했다. 마치 지단+앙리의 프랑스처럼 말이다.
  • 2016년에는 리버풀 국제 앰배서더로 선정되었는데, 데뷔 초기 놀라운 활약을 보여준 걸 제외하면 그 뒤로는 끝없는 나락만을 보여주고 구단도 저버린 선수한테 앰배서더 줬다고 까이고 있다. 한편 리버풀 앰버서더 임에도 불구하고 레알 마드리드 행사에 루이스 피구,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 등과 참여 하기도 했다.
  • 맨유에서 뛰었고 은퇴 후에도 맨유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고 있기 때문에 리버풀 팬들에게는 그다지 평가나 대우가 좋지 못하다.
  • 2017년에는 이런 헛소리를 했다. 뭔 말이냐면... "카림 벤제마가 맨유로 안 가고 레알로 간 덕에 내가 맨유 갈 수 있었다. 벤제마 고마워^^"라는(...) 사실상의 불꽃 패드립.
  • 펠레가 좋아했던 선수였다. 2000년대 초반 맨유를 방문했던 펠레가 가장 좋아하는 맨유 선수가 누구냐는 질문에 실수로 "넘버 10. 오언"이라고 답을 했을 정도. 2004년 펠레가 꼽은 세계 축구 스타 125인에 당당히 뽑혔고 리스트에 오른 선수 중에서는 4번째로 어렸다.
  • 2019년 즈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팀을 떠난 이후, 최악의 행보를 보이고 있자, "지금의 맨유는 중위권 팀인 것 같다" 라고 독설을 날리면서, "이번 시즌에는 리그 6위도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사 원문

8. 외모


[image]
[image]
[image]
사진에서 보이듯 심각한 머리스타일(...) 을 고수하는데 그걸 청순함으로 커버해버리는 나름 꽃미남 축구선수였으나, 시대를 지날수록 심각한 머리스타일이 발목을 잡아 아저씨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좀 가꾸고 찍은 사진에선 중년미라도 보여주는 중.
[1] /ˈmaɪkᵊl dʒeɪmz ˈoʊᵻn/[2] #[3] 레알 마드리드 시절에 윙어 쪽으로 자주 출전해 좋은 모습을 보여주였다.[4] 흔히 알고있는 트레블이라고는 할 수 없다. UEFA컵 + FA컵 + 칼링컵 석권. 일반적으로 트레블이라고 하면 챔스+리그+FA컵을 뜻한다.[5] 호나우두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세 번째가 리오넬 메시. 다만 이 시즌 발롱도르는 인기투표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이 지배적일 정도로 FIFA 올해의 선수상과 통합되기 이전까지 2004년의 안드리 셰브첸코와 함께 가장 논란이 많은 발롱도르 수상으로 평가받는다. 오웬보다 라울 곤살레스 혹은 올리버 칸에게 돌아가는 것이 정당했다는 주장은 지금도 오가는 떡밥. 사실 3관왕이라는 포장지를 벗기면 결국 리그도 챔스도 못 들고 위상 낮은 컵대회 좀 우승한 수준인 오웬에 비해 라울은 리그 우승을 했고 리그, 챔스 득점왕을 동시에 기록했다. 또한 칸은 골키퍼지만 리그와 챔스 더블을 기록했고 리그에서는 4분 챔피언이라는 역대급 기적적인 우승을 경험했고 챔스에서는 특히 결승전에서 골키퍼로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결승전 MOM에 선정되기까지 하였다.[6] 이 사건을 팬들은 유다 신드롬(Judas Syndrome)이라고 부르고 오언은 유다라고 까였다.# [7] 레알 마드리드는 2001-02 시즌을 끝으로 다시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리기까지 12년이 걸렸다.[8] 그나마도 교체 출장이 많다.[9] 그리고 은고그를 취했다.[10] 사실 전성기 때도 그의 최대 장점은 돌파보다는 결정력이었기에 돌파형이라 여겨지던 시절에도 타겟 스트라이커 같은 역할도 수행하는데 능했다. 사실 당시에는 감독이었던 울리에가 오언을 타겟으로 쓰는데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다. 뭐 여하간 타겟 역할을 계속 했던 것도 사실이다.[11] 남미 선수들이었으면 오만 방정을 떨 만한 골을 넣어놓고도 손 좀 들어주고 말던 얼음같던 그 특유의 냉정함이 최상급의 슈팅능력과 결합되어서, 보는 사람도 몇 번 볼 때는 열광하지만 많이 보다 보면 기가 질릴 정도로 얼음같이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던 것이 최대의 장점이긴 했다. 허나 그가 월드클래스 공격수였던 건 그 결정력이 미친 것 같은 스피드와 세련된 기술과 결합되었기 때문이었다. 스피드가 죽자 결정력 자체를 발휘할 기회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개인기의 효과도 많이 떨어졌고, 팀 동료에게 가는 부담도 많아졌다.[12] 오언이 없는 사이 맨유가 챔피언스리그에서 바이에른 뮌헨과의 8강전에서 원정다득점에서 밀려 떨어지자 독일 킬러였던 오언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루니가 2차전에 부상 회복이 되지 않은 상태로 출전하기도 했던 상황이기도 했다.[13] 박지성이 누운 상태에서 공을 한 번 컨트롤하고 패스를 찔러 주었다. # [14] 아스날 커리어 내내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없다가 바르셀로나로 합류 후 챔스우승은 물론 트레블을 넘어선 전관왕을 했다.[15] 지금도 오언의 득점 기록은 역대 월드컵 최연소 득점자 부문 3위이다. 오언의 앞에는 펠레와 마누엘 로사스만 있다.[16] 사실 할리우드 액션이었다.[17] 2013년에 이 골은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골 3위에 올랐다.[18] 전반 막판에 골키퍼까지 따돌리고 2대 1을 만드는 추가골을 넣었다. 그리고 후반전에 두 골을 먹으며 팀은 2대 3으로 패배했다.[19] 첫 경기에서 포르투갈에게 2대 0으로 이기다가 2대 3으로 역전패를 당한 것이 패착이었다. 독일을 1대 0으로 이기긴했지만 조별리그를 2위로라도 통과하려면 루마니아에 최소한 비겨야했다.[20] 이 패배가 빌미가 되어 아르헨티나는 사기가 꺾였고, 결국 스웨덴을 밀어붙였음에도 1대 1 무승부를 기록하며 조 3위로 처진다.[21] 다만, 지금도 회자되는 호나우지뉴의 프리킥 덕분에 팀은 1대 2 역전패.[22] 2009년 3월, 오언은 자신이 자주 부상을 당하는 이유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의 부상 때문이고,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부상에서 재활하는 와중에 조급히 현장에 뛰어들지 말았어야 했었다고 인정했다.[23] 스티븐 제라드와 제라르 훌리에가 전성기 시절 오언을 회자할때 사용하던 말이다.[24] 가끔은 페인트 동작도 잘 쓰면서[25] 많은 사람들이 오언이 너무 어릴때부터 많은 경기를 뛰었기 때문에 유리몸이 되었다고 얘기하는데 오언 본인은 그것도 틀린 얘기는 아니겠지만 자기 아버지와 형제들도 부상을 달고 살은 것(축구선수였다고 함)을 보면 자신은 근본적으로 유전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부상이 많았던 것 같다고 설명한다.[26] RCD 에스파뇰의 선수였으며 감독을 역임한 레전드. 14-15시즌 이후 토트넘 홋스퍼 FC의 감독.[27] 참고로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는 이에 대해서 한국의 전통문화일 뿐이라며 개고기 문화를 지지한다고 밝히면서 영국은 여우사냥을 왜 그만두지 않냐고 비꼬았다. 그리고 당시 FIFA 회장인 제프 블라터가 반대파인 정몽준을 깎아내리기 위해 개고기를 가지고 트집을 잡도록 유도했다는 설도 있다.[28] 참고로 이 때 리버풀 유스는 제라드, 제이미 캐러거 등을 포함해 우수한 선수를 한꺼번에 대거 배출해서 황금세대라고 불린다.[29] 맨유의 셔츠는 절대 걸어놓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루니의 셔츠도 국가대표팀 셔츠로 장식되어있다.제라드 본인도 맨유와 관련된 것은 자기 집에 들이지 않는다고 인터뷰했다.[30] 이미 퇴물 취급받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 시기에도 유니폼 판매량 순위 상위에 랭크했었다.[31] 부상 하나 없이, 라고 덧붙인 것은 덤...[32] 여담으로 퍼거슨 감독은 오언이 리버풀 유스일 때부터 매우 높이 평가했는데 아직 어릴 때부터 계속 출장하는 것을 보고 성장이 완료되지 않은 선수를 혹사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고 한다. 사실 어린 나이에 혹사를 당하게 되면 부상이 빈발하는 유리몸이 되기 쉽긴하다.[33] "골을 넣는 선수가 필요해요. 그래야 이기죠" "골 포스트를 넘어갔다면 골이 됐을텐데요" 이런걸 말하니 까인다. [34] 다만 유리몸 부분은 피지컬이 절망적으로 낮게 책정되어서 없어도 부상을 잘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