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탄 전투
1. 개요
1966년 8월 푸옥 투이 성[1] 의 롱탄 고무농장에서 벌어진 전투. 롱탄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있었던 플랜테이션 농장이 펼쳐진 마을이었다. 호주군은 1호주 특임부대 소속으로 1개 중대급 병력이었고 수색정찰 임무를 수행중이던 도중에 베트콩을 상대로 치뤄진 전투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호주군이 치뤘던 전투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전투.
2.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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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8월 경, 누이 닷에 배치된 호주군은 베트콩 275연대, 445대대가 롱탄의 북쪽 방면에서 아군의 포격범위 밖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감지하였다. 8월 16일과 17일, 베트콩이 기습적으로 박격포 포격을 가하여 호주군 1명이 전사하고 24명이 부상당했다. 다음 날 호주군은 이를 처리하기 위하여 발사 지점을 찾기 위해 수색정찰 임무를 실시하였다.
8월 18일 정찰 초기, 호주군은 베트콩의 박격포 진지 흔적을 찾아냈지만 이미 베트콩들은 철수한 후였다. 그렇게 수색 임무를 속행하던 도중 베트콩이 기습적으로 공격해 오면서 16시경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는 롱탄의 고무농장에서 벌어졌다. 공격당한 호주군의 병력은 D중대로 불과 100여명에 불과하였고 기습해온 베트콩은 적게 잡아도 700명[2] , 많으면 2,500명[3] 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병력이 턱없이 부족한데다가 3면 포위까지 당해 매우 상황이 절망적이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당시 스콜이 퍼부어지며 악천후로 인하여 항공지원이 불가능했다. 호주군은 이 상황에서 최대한 방어진지를 구성하고 베트콩의 파상공세에 맞서야 했다.
원체 정예군인들만 선발해서 파병된 호주군이었기에 훌륭한 개개인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병력과 화력의 열세가 너무나 명백했기에 중과부적으로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구원요청 통신을 받은 누이닷 기지의 뉴질랜드군이 포병으로 화력지원을 실시하여 간신히 버텨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지속된 전투로 D중대의 탄약은 거의 바닥나기 시작했다.[4]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생각한 호주군이 진내사격을 요청했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
이들이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깨달은 호주군 지휘부는 무리해서라도 지원 작전을 하기로 결정하고 미 항공세력의 지원 요청을 하고, M113 장갑차와 탄약 보급을 위한 UH-1 헬리콥터를 동원했다.[5] 또한 가용한 중대를 모조리 D중대를 지원하도록 작전에 투입시켰다.
누이 닷에서 퍼부어지는 포격과 F-4 미 전폭기의 네이팜탄 세례를 맞은 베트콩의 공세여력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월등한 수적우위를 배경으로 공세를 지속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연합군의 화력지원이 퍼부어지자 초조해진 베트콩은 아예 기도비닉을 무시하고 불을 켠 채 기관총을 사격하며 돌격을 시도하였는데 호주군의 필사적인 방어와 화력지원에 모두 막혀버렸다.
전투가 생각보다 힘겨워지자 베트콩은 추가로 병력을 우회시킨 뒤 남은 1면까지 모두 포위해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화력지원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에 처해 있던 D중대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할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이 때 쯔음 B중대 지원부대와 장갑차 7대의 지원이 도착하여 베트콩의 측방을 치기 시작했다.[6] 이 장갑차부대의 등장은 전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베트콩은 장갑차부대와의 교전으로 공세역량이 파괴되는 와중에도 근성있게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장갑차들은 아예 원형 방어진을 구성하고 공격해오는 베트콩들을 죄다 박살냈다. 베트콩은 더 이상 공격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19시 10분의 반격 시도를 마지막으로 공세를 중단하고 후퇴하였다.
전투가 종료된 후 호주군은 계속 경계태세를 유지하다가 22시 경부터야 전장정리를 시작하고 철수하였다.
3. 결과
호주군 D중대는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로 진지나 참호도 없이 압도적인 베트콩의 공세에 맞서 수 시간이나 버텨냈다. 이는 베트남 전쟁 참전 호주군의 교전 기록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로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당시 참전용사들은 정기적으로 롱탄 전투 기념식을 치르고 있다.[7][8]
간혹 화력지원 있는 대로 다 퍼부었으니 당연히 방어 성공한 것이라고 폄하하는 의견도 있다. 물론 화력지원과 장갑차의 증원이 없었다면 호주군은 분명히 전멸했을 것이나 애초에 박격포 전력을 잔뜩 갖춘 7~25배나 되는 적을 상대로 100명 남짓한 보병중대가 제대로 된 진지나 참호도 없이 화력지원이 올 때까지 버텨낸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깝다.[9]
당시 호주군의 기록에 의하면 베트콩이 녹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는 말이 있다. 전투 내내 베트콩이 민병대답지 않게 포격/폭격 및 적 장갑차 등장 후에도 전의를 상실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근성을 보였던 것도 그렇고 이 전투의 북베트남측 병력이 명목만 베트콩이고 실제로는 북베트남 정규군 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4. 사상자 수
베트남 전쟁이 항상 그렇듯이 양측의 손실 및 전과 기록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 호주 측의 손실 기록은 전사자 18명, 부상자 24명, 장갑차 2대 손상이며 베트콩을 상대로 올린 전과 기록은 베트콩 245명 사살, 350명 부상, 3명 포로 획득이다.
- 일단 호주군이 직접 베트콩의 시신을 확인한 것은 약 50명 가량이며 노획한 베트콩의 무기는 50정 가량.[10]
- 베트콩 275연대는 불과 일주일 후 남베트남군 18사단 공격에 투입되었고 445대대는 미군 제 11기갑기병연대와 대치하는 지역에 대놓고 재배치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베트콩의 손실은 호주군 주장만큼 크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호주군 주장대로 사상자가 600명이면 이미 연대 차원에서도 전투력 복원 및 재편성이 필요해 더 이상의 작전이 불가능한 손실인데 이 전투 직후에도 잘만 작전에 투입됐다는 것.
- 베트남 측의 기록은 이와는 매우 달라서 손실은 전사자 47명, 부상자 100명. 호주군을 상대로 올린 전과 기록은 호주군 500명 사상, 장갑차 21대 격파이다.
- 호주군에게 500명의 사상자를 강요했다는 말은 신빙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짜빈동 전투에서도 그랬지만 애초에 당시 호주군은 D중대 외 증파된 증원군 다 합쳐도 500명이 안 된다. 그리고 누이 닷 기지에 배치된 장갑차의 숫자는 12대였는데, 9대가 어디서 나온 건지 알 길이 없다.
- 어쨌든 베트남은 호주군이 결과적으로 롱탄 지역의 평정을 포기하고 철수하였고, 베트콩이 일대를 장악하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전략적 승리라 주장하는 중.
5. 대중 매체에서
- 이 전투를 배경으로 댄저 클로즈 : 롱탄 대전투 영화가 제작되었다.
- 라이징 스톰 2: 베트남에서 본 전투를 배경으로 한 맵이 존재한다.
[1] 현재의 바 리어 붕 따우 성[2] 베트남의 주장.[3] 호주군의 주장[4] 당시 호주군 소총수의 주무장은 SLR소총과 탄약 60발분에 불과했다.[5] 헬기 담당은 육군항공대가 아니라, 특이 하게 '''공군'''이 맡는다. 영국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6] 베트콩이 대전차화기와 대전차조를 조직하고 있었으나 전투 내내 내리던 폭우 탓에 장갑차가 접근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7] 이 기념식은 호주군 참전용사 외에도 당시 참전했던 베트콩 측 참전용사까지 초청하곤 했다.[8] 그런데 롱탄 전투 50주년 기념이던 2016년에 참전용사들이 기념식을 대규모로 치르기로 한 것을 베트남 정부에서 태클을 건 적이 있다. 아무래도 자신들이 패배한 전투를 가지고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게 맘에 안 들었던 모양.[9] D중대가 증원군 도착 직전까지 입은 손실을 보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거의 전멸판정이 떨어질 정도의 손실이었다.[10] 출처가 불명확하나 북베트남 측의 장군 증언으로는 당시 150명 가량이 전사했다는 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