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 피넬라

 





'''루이스 빅터 피넬라
(Louis Victor Piniella) '''
'''생년월일'''
1943년 8월 28일
'''국적'''
[image] 미국
'''출신지'''
플로리다탬파[1]
'''포지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볼티모어 오리올스 (196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68)
캔자스시티 로열스 (1969~1973)
뉴욕 양키스 (1974~1984)
'''지도자'''
뉴욕 양키스 타격 코치 (1984~1985)
뉴욕 양키스 감독 (1986–1987, 1988)
신시내티 레즈 감독 (1990~1992)
시애틀 매리너스 감독 (1993~2002)
탬파베이 데블 레이스 감독 (2003~2005)
시카고 컵스 감독 (2007~2010)

1. 개요


미국의 야구인.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돋보이는 성적을 남겼다.
특히 감독으로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시애틀 매리너스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이보다 앞선 1990년 월드시리즈에서 신시내티 레즈 최후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일궈냈다.

2. 선수 경력


1969년 캔자스시티 로열스 유니폼을 입으면서 타율 .282 11홈런 68타점을 기록하며 그해 리그 신인상을 수상하였다. 2년차에 흔히 겪는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생애 첫 타율 3할을 기록했고 1972년에는 생애 첫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영광을 얻었다. 5년간 캔자스시티에서 뛰고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됐으며 스타급 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며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월드시리즈 우승 2회, 통산 타율 0.291, 통산 1705안타, 102홈런, 766타점을 기록했다,

3. 코치 경력


은퇴 후 곧바로 양키스의 타격코치로 1984~85 두 시즌을 보냈으며 1985년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빌리 마틴을 해임시키고 루 피넬라를 뉴욕 양키스의 제28대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1986년 90승 72패, 1987년 89승 73패를 기록했으나 성질머리 하나는 급했던 조지 스타인브레너에게 해고통보를 받는다. 1988년 재임명-재해임당한 빌리 마틴의 뒤를 이어 다시 감독대행으로 취임했으나 팀을 반등시키는 데 실패하고 다시 야인이 됐다.
선수 장악력과 팀 운영능력을 눈여겨보던 신시내티 레즈에서 감독직을 제의했고 1990년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빅 레드 머신의 퇴조 이후 부진했던 레즈는 와이어 투 와이어(시즌 초부터 시즌 종료까지 선두 자리를 놓치지 않고 우승)에 성공하며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우승에 성공했다.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피츠버그에 4승 2패로 승리, 1990년 월드시리즈에서 오클랜드를 상대로 4전 전승 스윕에 성공하며 월드시리즈 우승감독이 됐다. 이는 1976년 이후 첫 우승이다.
우승의 여파인지 1991년에는 승률 5할에도 못미쳤으며 1992년에도 지구 2위에 그쳐 팀과 갈등을 빚었다. 이 와중에 팀의 주력 투수였던 롭 디블이 항명사건을 일으켰고 루 피넬라는 시애틀 매리너스 감독직을 수락하며 시애틀행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1977년 창단 이후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매년 비밀번호를 찍어댔던 시애틀로 가서 그는 엉망인 팀의 재건작업을 진두지휘한다. 패배의식에 젖은 팀 분위기를 일신하고 외부 영입, 마이너리거 콜업 등 선수단 개편을 통해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분위기를 형성시켰고 1993년 시즌에는 팀 창단 이후 첫 승률 5할 이상을 찍었다. 그러나 만족하지 않았던 피넬라는 계속 외부에서 선수를 영입하며 팀원들에게 경쟁의식과 긴장감을 유지하였다. 강타자 에드가 마르티네즈 - 알을 깨기 시작한 유망주 켄 그리피 주니어의 중심타선, 역시 포텐이 터진 랜디 존슨 등이 이 때 등장했다. 1995년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 무려 승차 10.5게임이나 뒤졌으나 후반기 대질주를 통해 기어이 동률을 이뤘고 그 유명한 단판승부(원게임 플레이오프)에서 천사들을 꺾고 창단 첫 서부지구 1위 +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디비전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까지 꺾으며 리그 챔피언쉽 시리즈에 올라갔으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패하였다. 피넬라가 집념을 가지고 추진한 개혁은 이렇게 팬들에게 반전과 전율을 선사하였고 동네북이었던 팀은 단숨에 메이저리그 최상급의 인기구단이 되었다. 그 해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고 시애틀은 이후에도 서부지구 우승 + 포스트시즌 진출의 쾌거를 이뤘다. 그러나 포스트시즌에서 번번히 발목을 잡혔고 2001년에는 메이저리그 정규시즌 최다승 타이기록인 116승, 관중동원 350만명을 거뒀어도 월드 시리즈 문턱에서 좌절하였다. 2001년에도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시애틀과도 관계가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우승청부사 팻 길릭 단장이 2003년 시즌 후 떠나고 빌 바바시가 단장으로 임명되면서 시애틀 개혁작업을 시작했고 피넬라는 고향인 탬파의 야구단인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 탬파베이에서는 시애틀에 '''감독-선수간 트레이드'''를 제안했고 시애틀이 이를 수락하면서 피넬라는 고향팀 감독을 맡게 된다.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양대 산맥에 토론토와 볼티모어까지 경쟁이 박 터졌던 AL EAST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피넬라는 양키스 - 신시내티 - 시애틀 3개팀을 지휘했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유망주를 적극적으로 키우는 노선을 택했다. 그러나 스몰마켓의 팀 특성상 과감한 투자는 언감생심이었고 상위권으로 발돋움할 원동력을 얻지 못한채 팀은 부진했다. 팀 경영진과 마찰이 많았던 피넬라는 결국 사직서를 제출한다.
다시 야인생활로 돌아간 그에게 손을 내민 팀이 있었으니 바로 시카고 컵스였다. 1908년을 끝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했던 컵스는 현질을 시전하며 거물급 선수들을 줄줄이 영입했고 그들을 지휘할 선장으로 피넬라를 임명한 것이다. 2007년 세인들의 기대와 달리 6연패를 기록했으나 이를 반전시키기 위해 피넬라 감독은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품고 팬들 앞에서 언쟁을 하며 4경기 출장정지 징계처분을 받는다. 감독의 파이팅 넘치는 모습을 본 선수들은 긴장하고 똘똘 뭉치기 시작하여 결국 시즌 말미에 디비전 우승 + 포스트시즌 진출의 달콤한 열매를 얻는다. 2003년 이후 첫 가을잔치였던 2007년 포스트시즌에서 역시나(...) 월드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컵스팬들의 마음을 어느정도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2008년에는 1945년 이후 팀 최다승인 97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가을야구에서 조기 탈락했고, 2009년에는 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시즌 중반에 팀에서 해고당했다.
그의 감독 경력을 전체적으로 되짚어보면 가진 것도 이룬 것도 하나없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팀들을 재건하는데 탁월한 수완을 보였고 우승후보급(contender)의 상위권 팀으로 키워냈다. 그러나 정규시즌의 호성적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에선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단기전에 강한 승부사의 모습보다는 리빌딩의 전문가라고 보면 될 것 같다.

4. 기타


  • 한 성격할 것 같은 외모의 소유자답게 성격이 불같아 심판들로부터 셀 수도 없는 퇴장을 당했다. 선수들한테도 할 말은 다 하는 감독이라 2009년 각 구단 선수들 상대로 진행한 투표에서 '가장 모시고 싶지 않은 감독' 1위에 오르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1] 그의 영원한 라이벌인 토니 라루사와 동향이며, 리틀야구 시절에 팀메이트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