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셀 드 바이욀

 


1. 개요


프랑스 출신의 노르만인 용병으로서 동로마 제국에서 근무하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앙카라를 거점으로 아나톨리아 반도 중부를 점거한 모험가. 십자군 전쟁 이전 서아시아에 국가를 세운 중세 서유럽인으로서 유명하다. 영어식인 러셀 발리올, 그리스식인 우르셀리우스 프랑고포울로스[1]로도 불린다.

2. 생애


루셀은 프랑스에서 남부 이탈리아로 이주한 노르만인 중 한명이었다. 오트란토를 거점으로 로제르 드 오트빌 (로제르 1세)의 부하로 있던 그는 1063년의 체라미 전투[2]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이후 루셀은 아드리아 해를 건너 동로마 제국의 용병이 되어 만지케르트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하지만 그 운명적인 전투에서 루셀은 승리가 힘들다고 판단한 후 퇴각해버렸다. 동로마 조정은 기가막혔지만 중앙군이 괴멸된 상태에서 3천의 노르만-프랑크 기사들을 거느린 그를 포기하긴 힘들었는지 소아시아 방어를 맡겼다. 그러나 루셀은 로제르 1세처럼 타지에서 자립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다.
동로마가 약화된 1073년, 셀주크 제국 역시 알프 아르슬란 샤의 암살 이후 내전을 벌이며 찾아온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 갈라티아 지방에서 자립해버렸다. 동로마 조정은 황숙이자 카이사르 (부제)인 요안니스 두카스를 파견하였으나 1074년의 좀포스 강 전투에서 제국군의 프랑크 용병대가 루셀에게 투항해버리며 제대로된 싸움도 못해보고 요안니스마저 포로가 되었다. 아들 안디로니코스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부친을 구하려다 그역시 포로가 되었다. 루셀은 비티니아로 진격, 소폰 산에 주둔하였고 1075년, 요안니스를 황제로 선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의 크리소폴리스까지 함락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루셀이 제국의 정통성마저 위협하자 미카일 7세는 셀주크 제국의 투투쉬 1세에게 그가 정복한 동로마 영토의 지배권을 인정하며 루셀을 공격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용병료를 받고 파견된 아르타우치는 소폰 산의 루셀 진영을 기습, 요안니스와 루셀을 사로잡았다. 부인이 몸값을 마련하여 풀려난 루셀은 아마시아로 가서 스스로 총독이 되었다. 혹은 아르메니아 테마로 향했다고 한다. (요안니스 몸값은 미카일 7세가 지불) 그러나 얼마안가 그는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에게 사로잡혔다. (1075년) 1075년 말, 동로마 조정은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에게 루셀의 토벌을 맡겼으나 주어진 군대가 매우 적었다. 이에 그는 루셀이 동맹한 튀르크 인들을 매수하여 이탈시켰고 아마시아에서의 열변을 통해 시민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고 투투쉬 1세에게 재차 도움을 청하였다. 튀르크 기병대가 다가오자 부하들에게 버림받은 루셀은 알렉시오스에게 항복하였다. (1076년 초) 이후 아마시아에 개선한 알렉시오스는 복수를 원하는 시민들의 요구에 루셀에 대한 '가짜 실명형'을 거행한 후 해로를 통해 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하였다.
재차 몸값을 내고 석방된 루셀은 다시 용병대장이 되어 니키포로스 보타니티스의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다. (1077년) 그는 반란군을 손쉽게 패배시켰으나 이내 니키포로스 진영에 가담해버리며 제국을 2번째로 배반하였다. 이에 분노한 미카일 7세는 재차 셀주크 제국의 힘을 빌려 루셀을 패배시켰다. 니코메디아에서 사로잡힌 루셀은 동로마 측에 넘겨졌고 곧바로 처형되었다. 7년간 소아시아에 이름을 날린 노르만 모험가의 최후였다. 그를 제압한 알렉시오스 1세는 제국을 구하게 된다.

[1] 프랑크 인의 아들이란 뜻이다.[2] 시칠리아 정복에 나선 로제르 1세가 수백의 기병으로 3천의 아랍 군대를 격파한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