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포로스 3세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두카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키포로스 3세의 본명은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Νικηφόρος Βοτανειάτης)다. 소아시아 서부 내륙의 프리기아에 기반을 둔 군인 가문인 보타니아티스 출신이다. 오랫동안 제국군 장교로 복무하며 수많은 공훈을 올리며 여러 요직을 도맡아 했고, 최종적으로는 미하일 7세를 몰아내고 황제 자리를 차지해 니키포로스 3세(1078년 ~ 1081년)로서 재위하기도 했다. 결혼을 이미 두 번이나 했지만 제위에 오른 뒤에는 미하일 7세의 아내인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결혼하였다.
2. 즉위 전
2.1. 배경
보타니아티스 가문은 니키포로스 2세를 배출한 명문 군인 가문인 포카스(Phokas)의 후예를 자처했으며,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전쟁에 종군하여 성장하였다. 니키포로스 3세의 조부뻘인 테오필락토스 보타니아티스(Theophylaktos Botaneiates)는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세살로니키 둑스로 임명되어 불가리아 원정에 종군하던 중 클리디온 전투 직후에 전사하였고, 테오필락토스의 아들인 미하일은 아버지를 이어 바실리오스 2세를 따라 불가리아 전쟁과 아바스기 전쟁(1021년 ~ 1022년)에 종군하였다.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와 이들 간의 혈연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1] . 하지만 니키포로스는 기본적으로 바실리오스 2세의 전쟁에 종군하여 성장한 다른 군인 가문의 구성원들[2] 처럼 친족인 테오필락토스와 미하일의 후광에 기대어 제국군의 주요 장교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오랫동안 제국군에 장교로서 복무한 것으로 보이지만 최초로 주목할 만한 기록을 남긴 것은 이미 50살을 넘긴 페체네그 전쟁 당시였다. 오래 지속된 전쟁을 마침내 종결내고자 1053년에 모이시아(Moesia, 불가리아 도나우 강 유역)로 파견된 제국군 대군에 종군하고 있었다. 이 대군은 모이시아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 수뇌부의 혼선과 페체네그 군대의 매복으로 궤멸되었다. 원정군이 붕괴하여 상당 규모의 병력이 전사하는 와중 휘하의 부대를 노회하게 이끌며 페체네그 군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비교적 온전하게 제국 영토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실은 제국 측과 페체네그 측 양측에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전해지며, 페체네그 전쟁이 1053년 마침내 정전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페체네그 전쟁이 1053년 종결된 이후 동부군으로 보직이 이동된 것으로 보인다. 마이기스트로스(μάγιστρος, Magistros : 최고위급 품계)이자 동부군의 주요 장성으로 1057년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의 반란에 수뇌부 역할을 하며 적극 관여했다. 이사키오스가 이사키오스 1세로서 제위에 오른 뒤, 이사키오스의 페체네그 전쟁에 재차 종군하였다. 전쟁 중 페체네그에게 포로로 잡혔지만 석방되었다.
콘스탄티노스 10세 치세에는 제국군의 주요 요직에 줄곧 보임되었다. 1061년 - 1063년에는 테살로니키의 둑스를, 1064년 - 1065년에는 파라두나본(Paradounavon, 도나우 강 하류)의 둑스(Doux)를, 1065년 - 1067년에는 키프로스의 둑스를, 1067년에는 안티오히아의 둑스를 역임하였다. 파라두나본의 둑스를 지낼 때에는 임지를 침범한 튀르크계 유목민인 오우즈족과의 전투에서 포로로 사로잡혔으나 오우즈족이 전염병으로 인해 붕괴되면서 다시 제국군에 복귀하였다.
콘스탄티노스 10세가 사망한 1067년에는 황후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의 재혼 상대로 고려되었다. 셀주크 제국과 튀르크 유목민들이 제국령 아르메니아를 침탈하고 아나톨리아 전역을 공격하는 심각한 안보적 위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뛰어난 노장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브도키아 황후는 보다 젊은 카파도키아 출신의 장군 로마노스 디오예니스와 결혼하였다. 1068년 황후와 결혼한 로마노스 디오예니스가 로마노스 4세로서 즉위한 이후에는 군직에서 물러나 프리기아의 영지로 은퇴하였다.
만지케르트 전투로 로마노스 4세가 실각하고 미하일 7세가 제위를 차지하면서 다시 군직으로 돌아왔다. 미하일 7세는 니키포로스에게 고위 품계인 쿠로팔라티스(Kouropalates)를 하사하고 니키포로스를 소아시아의 최선임 군관구인 아나톨리콘(Anatolikon)의 둑스로 임명하였다.[3]
1073년, 제국군에 복무하던 프랑크인 용병 루셀 드 베이율(Roussel de Bailleul)이 아르메니아콘(Armeniakon)과 파플라고니아(Paphlagonia) 일대를 장악하고 독립적인 노르만 정치체를 세우자 미하일 7세 정권은 미하일 7세의 각각 숙부이자 사촌인 부제(Kaisar) 요안니스 두카스#s-1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4] 부자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동부 야전군 부대를 내주고 루셀을 진압하도록 했다. 더불어 아나톨리콘의 둑스인 니키포로스도 미하일 황제의 명령으로 소아시아에서 토착민으로 구성된 마지막 관구군을 이끌고 요안니스 두카스 부제의 제국군을 조력하였다. 제국군은 도릴레온(Dorylaion) 인근 상가리오스(Sangarios) 강을 가로지르는 좀부(Zombou)라는 다리에서 루셀의 군대와 마주했다. 그러나 제국군 예하의 프랑크인 용병 부대가 루셀 측으로 변절하면서 제국군은 패배하였고, 부제와 안드로니코스는 사로잡혔다. 이를 관망하던 니키포로스는 전세가 기울자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콘으로 퇴각하였다. 이 전투로 인해 니키포로스의 아나톨리콘 병력을 제외하고서는 소아시아에서 운용할 수 있는 마지막 제국 야전군 부대가 궤멸되었다. 루셀과 그의 정치체는 이후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활약으로 붕괴된다.
다시 아나톨리콘으로 돌아간 후에는 자신의 위수 지역과 서부 아나톨리아를 튀르크 유목민으로부터 방어하는 데 힘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병력 부족으로 이코니온 평원 일대 등 아나톨리콘 동부 지역을 포기하고 프리기아에 위치한 람피(Lampe) 등 아나톨리콘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지역을 방비하던 와중, 1077년 10월, 내우외환을 정상적으로 수습하지 못하고 있던 두카스 왕조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고 미하일 7세 정권을 몰아내기로 결심하였다.
2.2. 반란
1077년 10월, 반란을 선언하고 콘스탄티노플을 향한 진군을 시작하였다. 아나톨리아 지역 유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단] 니키포로스가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은 고작 300명에 불과했다. 그 타개책은 아나톨리아의 튀르크 부족과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아나톨리아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튀르크 부족장 아리시기(Arisighi, 그리스어로는 흐리소쿨로스Chrysokoulos로 불렸다)는 아나톨리아의 유서 깊은 도시인 니케아를 차지하는 조건으로 보타니아티스와 동맹을 맺었다. 보타니아티스의 군대와 아리시기의 군대는 미하일 7세의 정부군과 미하일 7세가 고용한 셀축 망명자 쉴레이만 쿠탈미쉬오울루(Suleyman Qutalmishoglu)[5] 의 군대를 포섭하고 니케아를 점령하였다. 보타니아티스는 니케아에서 스스로를 황제로 선언하였다. 보타니아티스 자신은 니케아에 잠시 체류하는 한편 군대를 콘스탄티노플 건너편 소아시아 해안의 흐리소폴리(Chrysopolis)로 진격시켜 진지를 마련했다.
이 시점에서 수도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흐리소폴리 일대는 완전히 무인지경의 상태에 놓여있었다. 튀르크 무리들이 지역을 완전히 황폐화시킴으로써, 시민들이 해협 건너편에서 마지막으로 로마인을 본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던 것이다. 보타니아티스는 의도적으로 휘하의 부대를 로마인과 튀르크인, 용병들로 혼성시켰다. 보타니아티스의 반란군이 흐리소폴리에 이르렀을 때, 해안에 숙영지를 차린 혼성 부대는 로마군의 기치를 휘날렸다. 로마인이 각 부대에 편제되어있었기 때문에 로마군의 기치가 온 숙영지에 휘날릴 수 있었다. 이미 보타니아티스의 반란 소식을 듣고 행복에 차있었으며 계속되는 패전과 기근, 정권의 정치 실패로 정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있던 도시의 시민들은 오랜만에 해협 건너편에서 휘날리는 로마군의 기치를 보고 용기와 승리에 대한 희망을 얻었다. 일부 시민들은 심지어 위험을 무릅쓰고 보타니아티스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해협을 건너 니케아까지 움직였을 정도였다.
콘스탄티노플의 미하일 7세 정권은 이제 완전히 궁지에 몰려 있었다. 서쪽에서는 디라히온 둑스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s-2가 반란을 일으켜 서부군과 디라히온부터 아드리아노플, 스라키까지 제국의 서부 절반을 장악하고 있었고, 동쪽에서는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가 소아시아를 휩쓸고 콘스탄티노플 바다 앞까지 진출해있었다. 레디스토스(Raidestos)의 곡물 저장소와 물가 폭등으로 대표되는 환관 니키포리치스의 경제 실패는 수도 시민들의 불만을 불러왔다.
결국 미하일 7세 정권을 무너트린 것은 마치 1057년 이사키오스 1세의 쿠데타 당시처럼,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었다. 1078년 3월 하순 성수태 고지(The Annunciation to the Mother of God) 전날, 안티오히아 총대주교 에밀리아노스(Aimilianos) 등 교회 세력의 도움 속에 수도 시민들은 투표로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를 황제로 선출하였다. 원로원 또한 보타니아티스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시민들은 이어 대황궁을 장악했다. 미하일 7세는 블라헤르네(Blachernai) 황궁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퇴위를 결정하고 스투디온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었다. 수도 시민들은 여전히 니케아에 머무르고 있던 보타니아티스를 도시로 초청하였다.
보타니아티스는 곧 사람을 보내어 황궁을 장악하였고, 1078년 3월 24일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여 시민들의 축복과 기대 속에 '''니키포로스 3세'''로서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수도 시민들은 두 니키포로스 중 서쪽의 브리엔니오스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 제위에 올린 사람은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였다. 이는 반란 중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도시 교외의 별궁들을 방화하여 시민들의 지지를 상실한 브리엔니오스와는 달리 보타니아티스의 반란은 시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기 때문이었다. 보타니아티스의 정권은 이렇듯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막을 올렸다.
3. 재위 기간
3.1. 전반적 치세
1078년 3월 24일, 막 제위에 오른 보타니아티스는 관대한 정책을 시행했다. 두카스 가문의 요인들은 큰 보복을 당하지 않았다. 수많은 관직과 품계들이 말 그대로 뿌려졌고, 많은 명사들의 부채도 탕감되었다. 이 시기 킬리키아와 북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튀르크인의 공격으로부터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아르메니아인 장군 필라레토스 브라하미오스(Philaretos Brachamios, 아르메니아어 이름은 바흐람 바라즈누니)도 사면되고 안티오히아의 둑스로 임명되었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일부 잔존 동부 타그마군과 테마군을 흡수하고 자치적으로 지역을 통치하던 브라하미오스의 세력은 십자군 전쟁 시기를 거쳐 소아르메니아 왕국으로 발전한다.
또한 미하일 7세의 황후인 알라니아의 마리아(Maria of Alania, 1050년 ~ 1103년)[6] 와 결혼하였다. 이는 마리아가 아직 젊어 로마노스 4세의 미망인 에브도키아 마크렘볼리티사 등 다른 결혼 후보자들에 비해 외모적으로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구 두카스 정권 구성원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타니아티스는 마리아와 결혼함으로써 두카스 왕조 지지자들의 불만을 가라 앉힐 수 있었고, 본인에게 다소 부족한 정통성도 제고할 수 있었다. 다만 에브도키아는 오히려 아들 미하일 7세 재위기에 비해 처우가 큰 수준으로 개선되었으며, 콘스탄티오스 등 미하일 7세의 형제 자매들의 처우도 이전보다 개선되었다.[7]
하지만 보타니아티스는 마리아 황후와 두카스 가문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하일 7세와 마리아의 유일한 아들인 포르피로예니토스 콘스탄티노스를 황궁에는 놔둘지언정 후계자로 삼지는 않았다. 점차 나이가 들어가던 보타니아티스는 콘스탄티노스가 아닌 다른 후계자를 찾기 시작했다. 보타니아티스는 마리아와의 결혼까지 총 3번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었으므로 조카인 니키포로스 시나디노스(Nikephoros Synadenos)를 후계자로 삼고 보타니아티스 혈통에 기반한 왕조를 세우려는 계획을 갖는다. 이는 후에 알라니아의 마리아 황후가 아들 콘스탄티노스의 계승권을 보장받기 위해 콤니노스 가문 및 두카스 가문의 쿠데타 모의에 동참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알라니아의 마리아와 결혼하고 두카스 가문과의 불안한 공생 관계와 함께 시작된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티스의 치세는 전반적으로 두카스 왕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미하일 7세 정권이 중용한 많은 인사들이 니키포로스 3세 정권에서 다시 중용되었다. 특히 미하일 7세 정권에서 동부군 총사령관(Stratoperdakhes)을 지낸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보타니아티스 정권 아래에서 서부군 총사령관(Domestic of the Schools of West)를 지내며 두 차례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했다. 두카스 정권의 재정 정책과 품계를 돈을 받고 팔아 재정을 확충하는 정책 또한 유지되어 제국 기축금화 노미스마의 금 함량은 지속적으로 감소되었다. 미하일 7세 정권의 수상 노릇을 했던 환관 니키포리치스의 자리는 보타니아티스 가문의 슬라브인 노예인 보릴라스(Borilas)와 예르마노스(Germanos)가 대체하였으며, 니키포리치스의 대두 이전까지 두카스 정권을 운영했던 시디(Side,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의 도시) 주교 요안니스도 다시 입각해 민간 행정을 이끌었다. 마케도니아 왕조 말기부터 두카스 왕조에 이르기까지 줄곧 제국 정부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던 원로원도 그 힘을 유지하였다. 원로원은 이미 미하일 7세 정권을 붕괴시키고 보타니아티스가 제위를 차지하는 데 크게 일조한 세력이었다. 보타니아티스는 원로원에 막대한 보상을 내리고 원로원, 나아가 도시 시민 계층을 지지층으로 흡수하였다.
여러 차례의 반란을 겪으면서도 제국의 내우외환을 수습하려 애썼다. 군 부대가 여러 번 동원되어 소아시아와 유럽에서 군 작전을 수행하였고, 페체네그족에 대한 제국의 종주권을 확인하였다.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명예 작위를 판매하는 정책은 더욱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키포로스 3세의 치세가 끝난 1081년에 이르면 제국 정부는 소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였으며, 페체네그의 분탕질도 점점 담대해졌다. 노미스마 금화의 금 함유량은 33% 수준까지 감소하였고, 영토 상실과 지방 통제력 약화로 인한 세수의 감소와 기근, 방대한 전비 부담은 재정을 완전히 소진시키고 있었다.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에게 해의 도서에는 소아시아에서 몰려든 피난민이 혼란을 가중시켰다. 니키포로스 3세의 정권은 결국 산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쿠데타로 붕괴하였다.
3.2. 주요 내전
3.2.1.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의 반란
1077년 10월, 미하일 7세가 선임한 디라히온 둑스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s-2는 군을 경시하는 콘스탄티노플 정부를 비난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브리엔니오스는 아무런 군대도 대동하지 않고 디라히온을 출발했다. 대신 브리엔니오스는 테살로니키에서 니키포로스 바실라키스를 포섭하고, 동생 요안니스의 도움을 얻어 운용 가능한 최후의 제국 서부 타그마군을 접수함으로써 순식간에 세력을 크게 불릴 수 있었다.
디라히온에서 시작된 반란의 불길은 테살로니키를 거쳐 마케도니아와 스라키로 번져나갔다. 1077년 11월 브리엔니오스는 마케도니아 해안가에 위치한 트랴아누폴리(Traianoupoli)에서 서부 타그마군, 프랑크인, 페체네그인, 바랑인 용병들로 구성된 동생 요안니스의 군대를 접수하고 황위를 참칭하였다. 이후 고향인 [[아드리아노플]에서 개선식을 연 브리엔니오스는 동생 요안니스에게 군대를 맡겨 수도로 진군시켰다. 수도를 포위하고 시민들을 설득하려던 요안니스의 군대는 도시 교외를 방화하면서 민심을 잃었다. 겨울을 나기 위해 브리엔니오스의 군대가 포위를 거두고 아드리아누폴리로 퇴각했을 무렵,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가 제위에 올랐다.
보타니아티스는 브리엔니오스에게 부제(Kaisar) 품계를 내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대신 반란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브리엔니오스는 이를 거절하고 다시 수도로 진군하였다. 이에 보타니아티스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를 서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브리엔니오스를 진압할 것을 명했다.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미하일 7세 정권에서 육성된 '불사조(Immortals)' 부대의 편린들과 소아시아 서부의 요새인 호마(Choma)에서 전출된 제국군 부대, 프랑크인 용병 부대를 당장 동원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보타니아티스와 동맹 관계에 있는 소아시아의 튀르크인 토후 쉴레이만 쿠탈미쉬오울루와 그의 형제 만수르가 2,000명의 병력 파견을 약속한 상태였다. 하지만 브리엔니오스의 군대가 빠른 속도로 기동하였기 때문에 알렉시오스는 튀르크 동맹군을 기다릴 여지가 없었다. 알렉시오스는 튀르크 동맹군을 제외한 부대를 이끌고 스라키의 알미로스(Halmyros) 강 유역으로 진군해 브리엔니오스의 군대와 대치하였다.
기록에 따르면[8] 브리엔니오스의 군대는 알렉시오스의 군대보다 만 명 이상이 많았다. 병사 개개인의 질도 브리엔니오스의 군대가 앞섰고, 장교진의 경험도 마찬가지였다. 전면전으로는 반군에 맞설 수 없다고 여긴 알렉시오스는 반군을 인근의 계곡으로 유인하여 매복하여 반군을 기습하였다. 기습에도 불구하고 반군은 다시 규율을 되찾고 정부군을 압박하였고, 이에 정부군이 붕괴하려던 참에 알렉시오스는 개인의 기지와 막 도착한 쉴레이만의 튀르크 병력의 도움으로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를 사로 잡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자세한 것은 칼라비레 전투 참조.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실명 당하고 반란에 실패하였지만 니키포로스 3세에게 사면받았다. 그러나 그의 서부 반란 세력은 니키포로스 바실라키스가 접수하여 또 다른 반란을 낳았다.
3.2.2. 니키포로스 바실라키스의 반란
니키포로스 바실라키스는 테오도시우폴리(Theodosioupoli) 둑스로서 만지케르트 전투에도 종군한 경험이 있는, 아르메니아 혈통의 장군이었다. 만지케르트 이후에는 파플라고니아의 군관구장을 지냈고, 브리엔니오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미하일 7세에 의해 디라히온 둑스로 임명되었다. 바실라키스는 새로운 임지인 디라히온으로 이동 중에 테살로니키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브리엔니오스의 반란에 합류하였다.
브리엔니오스의 몰락 이후 바실라키스는 서부 군인들의 지지를 받고 브리엔니오스의 잔존 반란 세력을 흡수하고 마케도니아 일대를 장악하였다. 바실라키스는 테살로니키를 근거지로 하고 약 1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니키포로스 3세는 막 브리엔니오스의 반란을 제압하고 콘스탄티노플에 복귀한 알렉시오스 1세를 다시 반란 진압에 파견하였다. 바실라키스의 군대와 정부군은 테살로니키 인근의 바르다리오스 강(Bardarios)에서 대치하였다.
바실라키스의 군대는 콤니노스의 정부군에 비해 숫적으로 우세에 있었지만 알렉시오스의 기민한 전술로 인해 이어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바실라키스는 겨우 몸만 빼내어 테살로니키로 피신하였지만 테살로니키 시민들은 도주해 온 바실라키스를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에게 인계하였다. 바실라키스는 이후 니키포로스 3세의 신하들에 의해 실명하였다. 이로써 제국 서부의 반란은 일단락이 되었다.(1080년)
3.2.3.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의 반란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는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당대 제국에서 가장 오래된 아나톨리아 군인 가문인 멜리시노스의 일원이었다[9] . 멜리시노스는 마이기스트로스의 품계를 가지고 있었고, 트레디차(Traiditza, 현재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둑스를 지냈었다. 멜리시노스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누이 에브도키아와 결혼했기 때문에 콤니노스 가문과 혈연 관계에 있기도 했다. 멜리시노스는 처남인 마누일 콤니노스(알렉시오스 1세의 큰 형)과 동서인 미하일 타로니티스(알렉시오스의 누이인 마리아의 남편)과 아나톨리아에서 대 튀르크 원정에 종군하기도 했었다. 멜리시노스는 다른 아나톨리아 지역 유지들과 달리 1078년 니키포로스 3세가 두카스 정권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킬 때도 반란에 참여하길 거부하였고, 이에 따른 미하일 7세의 보상으로 아나톨리콘의 둑스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멜리시노스는 보타니아티스가 즉위하자 아나톨리아 연안의 코스(Kos) 섬에 그의 가족들과 함께 유배되었는데, 이는 상기했듯 반란을 거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080년 가을 코스 섬을 탈출해 아나톨리아로 건너간 멜리시노스는 쉴레이만 쿠탈미쉬오울루의 세력 등 튀르크 세력을 포섭하고 서부 아나톨리아를 장악하였다. 지역 주민들의 환영 속에 멜리시노스는 서부 아나톨리아의 도시들을 무혈 통과하면서 튀르크인 수비대를 배치하였다. 이윽고 멜리시노스는 동년 니케아를 점령하였다. 보타니아티스는 환관인 황실 의상 실장(Protovestiaros) 요안니스에게 군대를 맡겨 니케아를 탈환하고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하였다. 요안니스는 도시를 포위하였으나 튀르크 대군이 멜리시노스를 지원하기 위해 니케아로 접근하자 퇴각하였다.
멜리시노스의 반란은 결국 니키포로스 3세 정권 아래에서는 종결되지 못했다. 반란은 다음 해인 1081년 4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보타니아티스 정권을 뒤엎고 알렉시오스 1세로서 즉위한 이후에야 협상을 통해 종결되었다.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의 반란이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멜리시노스가 튀르크 수비대를 배치한 서부 아나톨리아의 도시들은 모두 튀르크인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 시기 니케아는 결국 쉴레이만 쿠탈미쉬오울루가 장악하였고, 이내 룸 술탄국의 수도가 되었다.
3.3. 대 노르만 정책
1073년, 시칠리아 일대에서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노르만계 아풀리아 공작 로베르 기스카르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미하일 7세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군사 동맹을 체결하는 대가로 포르피로예니토스인 황제의 동생과 로베르의 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을 결혼시키자는 것이었다. 로베르토가 여기에 답신을 하지 않자, 미하일 7세는 또 다른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는 자신의 갓난 아들 콘스탄티노스를 장래의 신랑감으로 정하는 한편, 로베르에게는 비잔티움의 훈장을 44개나 주어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눠줄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매년 금 200파운드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로베르는 황제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킴으로써 비잔티움 제국의 제위 계승에 끼여들 여지가 생기는 것에 혹해 제안을 받아들이고 딸 헬레네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그런데 1078년 미하일 7세가 니키포로스 3세에게 폐위되었고 헬레네는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이에 격노한 로베르는 남이탈리아의 반란을 제압하는 데 2년을 소비한 후 1080년 여름에 비잔티움 침공 준비에 착수했다. 전쟁 준비가 한창일 무렵, 한 정교회 수도자가 살레르노에 와서 자신이 바로 미하일 7세이며 수도원에서 간신히 탈출해 이곳으로 도망쳤으니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로베르는 침략 명분을 제공해준 그를 융숭하게 대접해줬다.
1080년 12월, 로베르는 콘스탄티노플에 퐁투아즈의 백작 라뒬프를 대사로 파견했다. 라뒬프는 니키포로스 3세에게 헬레네를 만족스럽게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당시 제국의 수도에 고용되어 있는 상당수 노르만인들의 세력을 결집하고 당시 서부군 총사령관인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지지를 획득하고자 했다. 라뒬프는 알렉시오스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인물됨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귀환 길에 알렉시오스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브린디시에 있던 주군 로베르를 찾아가 원정을 완전히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새 황제는 노르만인들과 친해지고자 하니 침공할 이유가 없으며, 자신이 자기 눈으로 수도원에서 편안히 지내는 미하일 7세를 목격했으니 지금 로베르가 받들고 있는 '미하일 7세'는 완벽한 가짜라고 주장했다. 또한 라뒬프는 헬레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잘 대접받고 있다는 시실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로베르는 무시무시한 분노를 터트리며 라뒬프를 내쫓았다. 그는 애당초 헬레네를 구하려고 원정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딸은 여섯이나 더 있을 뿐더러 헬레네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편이 제위를 노리는 데 적합했다. 그래서 그는 1081년 5월 말에 함대를 출격시켜 비잔티움 제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했다.
4. 퇴위와 최후
니키포로스의 정권은 원로원과 도시 시민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외부의 상황은 전혀 녹록치 않았다. 1080년 튀르크 유목민들은 프로폰티스 해에 면한, 제국 해군의 요충지인 키지코스(Kyzikos)를 점령하였다. 당시 제국군은 소아시아에서 군사 활동을 재개하고 있었고, 키지코스는 반드시 수복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1081년 초 황제는 서부군 총사령관인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와 그의 형인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에게 군대를 이끌고 키지코스를 탈환하라 명했다. 콤니노스 형제는 명령을 수행하기로 하였으나, 이내 형제와 대립 관계에 있었던 보릴라스와 예르마노스에게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형제는 두카스 가문과 협력하여 키지코스를 탈환하기 위해 모인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콘스탄티노플은 성벽 수비대가 매수당함으로써[10] 성문을 반란군에 열었고, 도시에선 보타니아티스를 지지하는 시민군과 반란군의 잔혹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시민군의 일방적인 학살과 더불어 도시의 약탈이었다.
잔혹한 시가전과 나름대로 세워놓은 반란 대책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충격을 받았고,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위를 포기하였다. 제위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에게로 돌아갔고, 스스로는 페리블렙토스(Peribleptos) 성당 부속 수도원에 은거하여 1081년 말 병사하였다. 향년 80세의 일이었다.
5. 참고 문헌
- Alexandru Madgearu, "Byzantine Military Organization on the Danube, 10th-12th Centuries (East Central and Ea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 450-1450)", Brill, 2013
- Anna Comnena (2009). The Alexiad. Translated by E.R.A Sewter. Penguin Classics. ISBN 0-14-044958-2.
- Anthony Kaldellis, "Streams of Gold, Rivers of Blood: The Rise and Fall of Byzantium, 955 A.D. to the First Crusade",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 Michael Attaleiates, The History, trans. Anthony Kaldellis and Dimitris Krallis. (Dumbarton Oaks Medieval Library 16.)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12.
[1] 사료가 충돌한다. 스킬리치스는 니키포로스 3세의 조부가 테오필락토스라고 기록했지만 아탈리아티스는 니키포로스라고 기록했다. 기본적으로는 두 사가 모두 미하일이 니키포로스 3세의 아버지이며, 테오필락토스 또는 니키포로스는 미하일의 아버지라고 기록한다.[2] 로마노스 디오예니스,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요안니스 콤니노스, 콘스탄티노스 달라시노스 등[3] 아나톨리콘은 원래 군관구장(Strategos)이 관할하지만 이 시기 소아시아 전체가 전장이 되면서 둑스가 관할하는 것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4] 알렉시오스 1세의 아내인 이리니 두케나(Eirene Doukaina)의 아버지다.[단] 아나톨리아의 유력 군인이자 니키포로스 휘하의 장교였던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와 요르요스 팔레올로고스는 각각 미하일 7세 정권에 충성을 유지한 콤니노스 가문과의 혈연 관계, 두카스 가문과의 혈연 관계를 이유로 보타니아티스의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다.[5] 후에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의 반란을 지원하고 니케아를 장악하여 룸 술탄국을 세우는 쉴레이만 샤와 같은 인물이다. 대 셀축 튀르크의 방계 왕족 출신이었으나, 대 셀축 술탄 알프 아르슬란 및 말리크 샤와 앙숙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휘하의 유목 부족을 이끌고 아나톨리아로 피난하였다.[6] 조지아 왕국의 왕 바그라트 4세의 딸이다. 1056년 콘스탄티노플로 유학을 가서 테오도라 여제에게 후원을 받으면서 교육을 받았다. 유학 뒤 일시적으로 고국인 조지아로 돌아갔다가 1065년 미하일 7세와 결혼을 하였다.[7] 그러나 콘스탄티오스는 1079년 흐리소폴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고 섬으로 추방된다.[8] 소(小)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s-3의 기록[9] 단 아버지가 부르치스(Bourtzes) 가문의 일원이었고, 어머니가 멜리시노스 가문의 일원이었다. 당시에는 멜리시노스 가문의 위세가 부르치스 가문보다 더욱 강력했으므로 모계 성씨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알렉시오스 1세의 모후인 안나 달라시니도 같은 이유로 부계 성이 아닌 모계 성을 따른 바 있다.[10] 당시 기록에 바랑인 친위대를 회유하는건 불가능 하니 바로 옆 성벽의 독일 용병을 매수해서 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