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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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십자군 전쟁'''('''十字軍戰爭''')은 1095년부터 1291년까지 간헐적으로 일어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일어난 전쟁이다.
1071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대패한 뒤 근동 일대에 대격변의 시기가 찾아오고,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기존 핵심 지역이던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1081년 신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하여 이를 수습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 북방의 페체네그족,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제국 등 사방에 적들이 너무 많아 약해진 제국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때문에 제국은 전쟁으로 인한 군비가 팽창하는 1040년대를 전후하여 꾸준히 해오던 지원 요청을 보다 다급하게 해오고 있었다.
그러한 요청의 일환으로 1095년 3월 피아젠차에서 열린 공의회에도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피아젠차에서 이들을 접견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이교도들에게 맞설 원군을 보내달라"정도의 내용의 요청을 듣고는 본격적으로 십자군을 위한 여론 조성에 나섰다. 그렇게 1095년 11월의 클레르몽 공의회를 기점으로 서유럽은 약 200년간 여러차례[1] 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게 된다.
2. 십자군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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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usader states : 십자군 전쟁으로 세워진 나라들을 십자군 국가라고 부른다.
- 레반트 지역: 기본적으로 제1차 십자군 원정의 결과 세워진 이 4개국을 십자군 국가라 부른다.
- 에데사 백국: 훗날 예루살렘 왕국의 첫 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보두앵 1세가 에데사 지역의 아르메니아인 통치자 토로스(Thoros)의 후계자로 낙점되면서 건설되었다.
- 트리폴리 백국: 1차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남프랑스의 대귀족인 레몽 드 생질 백작이 건설했다.
- 안티오키아 공국: 1차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남이탈리아의 노르만 귀족인 보에몽이 건설했다.
- 예루살렘 왕국: 예루살렘 공략 이후 하(下) 로렌의 공작인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사실상의 왕위인 성묘의 수호자 자리에 앉으면서 건설되었다.
- 예루살렘 왕국 속령
- 갈릴리 공국: 보에몽의 조카인 탕크레드가 불과 수십 기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던 이 지역을 점령하여 건설했다.
- 자파와 아스칼론 주
- 트란스 요르단 영지
- 시돈 영지
-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현재 터키 남부의 킬리키아 지방에 아르메니아인들을 중심으로 건국된 왕국이다. 안티오키아 공국 등 십자군 국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 키프로스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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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트 해 지역
- 튜튼 기사단 · 리보니아 연맹: 튜튼 기사단과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정복 활동으로 기사단령과 여러 주교령이 형성되었다. 튜튼 기사단은 1237년에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을 합병하였고, 1241년에 러시아로 진출하였으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게 패배하여 실패하였다. 이후 발트 해 지역의 무역을 독점하여 큰 돈을 벌었고, 한때 발트 해의 강국으로 부상하였으나, 1410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기사단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게 패배한 후 몰락하였다. 1525년에 튜튼 기사단이 프로이센 공국으로 세속화하자,[2]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은 리보니아 지방의 여러 세력들과 '리보니아 연맹'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도 1561년에 이르러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으로 세속화하였다.
3. 소속된 기사단
- 구호기사단
- 성전기사단
- 튜튼기사단
-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
- 산티아고 기사단
- 칼라트라바 기사단
4. 주요 인물
'''기독교 세력'''
- 교황
- 주교
- 몽테유의 아데마르[3]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4]
- 수도자
- 황제 · 왕
- 영주
- 생질의 레몽(툴루즈 백작 레몽 4세)[6]
- 볼로뉴의 보두앵(보두앵 1세)
- 타란토의 보에몽(보에몽 1세)
- 부용의 고드프루아(고드프루아 드 부용)
- 몽페라의 보니파치오[7]
- 플랑드르의 보두앵(보두앵 1세)
- 기사
- 도제
- 기타
5. 왜 벌어졌나?
십자군 원정의 목적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5.1. 주동기
- 1. '성지' 회복
이러한 소문들은 동로마 제국이 서방의 원군을 얻기 위한 지원 요청에 명분으로 써먹었고, 정치적 이유로 교황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과장한 부분도 있다. 정확히 따지자면 1009년에 파티마 왕조의 6대 칼리프 알 하킴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대놓고 탄압하며 예루살렘 성묘 교회를 완전히 파괴하기는 했으나,[16] 1040년대부터 동로마 제국에서 돈지랄 외교로 파티마 왕조와 타협, 기독교 신자들을 보호하며 성묘 교회를 복구한다. 어쨌거나 아랍인 왕조들은 성묘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돈을 반겨서 순례자들을 대체로 보호해주었다. 문제는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기존 동로마-파티마의 레반트 세계 질서를 파괴하고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셀주크 제국은 순례자들이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감각이 아직 없어서 초반에 순례자들을 박해했던 것이다. 성지 순례자들은 분쟁지역을 지나면서 겪은 일과 튀르크인들에게 당한 불편들을 서유럽으로 돌아와 말해주었고, 정치인들은 자신의 지위를 위해 이를 적절히 과장했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광신적이고, 현지 사정을 모르는 서유럽인들은 분노로 끓어오르게 된다.
정책적으로 순례자들이 탄압당한 적이 없다는 근거를 들어 십자군 전쟁의 명분은 거짓된 것이라는 수정주의가 한때 크게 유행했으나, 순례자가 피해를 입은 것과 예루살렘이 기독교 입장에서 모욕당한 것은 모두 사실이다보니 수정주의자들의 극단적인 해석처럼 궁색한 주장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시대의 성지는 순례하기에 위험한 분쟁지역이었다. 1070년대엔 말리크 샤가 통치하는 셀주크 제국의 에미르 아트시즈가 성지를 포함한 시리아 전체를 파티마 왕조에게서 빼앗았는데, 예루살렘의 저항을 모스크 안에서 수천 명을 학살하며 진압해버린다. 1079년엔 말리크 샤의 동생 투투쉬가 아트시즈를 처형하고 시리아를 통치하더니, 1086년엔 그 투투쉬가 형 말리크 샤에게 쫓겨난다. 말리크 샤가 1092년에 죽자 돌아온 투투쉬가 1094년에 시리아를 탈환하나 바로 다음 해에 전쟁에서 패하며 사망. 결국 1096년에 출발한 1차 십자군이 도달하기 직전인 1098년에 예루살렘은 파티마 왕조가 재정복한다. 이렇게 이슬람 세력 간에 성지를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으니, 전쟁에 휘말린 순례자들이 살해당하는 일은 적지 않았다.[17] 다만 수정주의 논쟁을 겪은 이후 학계의 관점은 기존처럼 무슬림들이 단순히 기독교에 대한 증오로 박해한게 아니라, 서유럽인들을 알리가 없었던 현지의 지극히 세속적인 지정학정 분쟁을 겪으면서 피해가 순례자들에게 튀기 시작했고, 라틴 기독교인들은 이걸 종교적 박해로 받아들였다는게 관점의 차이이다.
- 2. 서유럽의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 부족 해결과 인구감소 효과.
- 3. 교황청은 십자군을 권력 확대, 즉 세속 군주들에 대한 교황청의 위세 증진 겸 동방 교회를 누를 수 있는 기회라 판단했다.
이는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있던 교황의 연설에서 잘 드러나는데,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전까지 잘 써먹지 않던 '순교', '대사령', '구원' 등의 자극적인 단어를 쓰며 적극적으로 십자군 여론이라는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순례자들의 경험담과 동로마 황제의 지원 요청으로 불씨 자체는 존재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이로 인해 동방 황제는 1차 십자군 외에는 청한적도 없는 대규모 십자군 문제를 걱정하게 됨은 물론, 그 십자군 운동의 주체에서 객체로 밀려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18] 서방 황제를 비롯한 군주들도 십자군 문제를 중요시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교황의 권위 강화 시도는 대성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4. 교황청 재산 증대.
그런데 교황청에서 영주들의 영지에서 나오는 소득을 떼어갈 지언정, 영지 자체를 먹튀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우선 영주들은 원정 이전에 유사시에 자신이 사망할 경우를 대비하여 제2, 3, 4 상속권자까지 설정해 두었으며, 자신의 영지는 교황청이 신속하게 상속권자에게 양도할 것을 문서로서 약속해두었다. 또한 영주의 사망시 상속권자가 없을 경우에는 그냥 영주와 계약을 맺고 있는 상위의 영주에게 그 영지가 몰수되었다. 애초에 위탁만 했지 양도하겠다고는 안했으니. 그러나 영지라는게 지속적으로 세금 수입이 보장되는 물건이고 영지를 이용하여 돈 벌 방법은 많았으므로, 위탁하는 동안 교회는 짭잘한 세금 수입과 부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설사 위탁이 영주의 사망으로 해제된다 할지라도, 그동안 벌었던 돈이 어디가는건 아니었으므로 교황청의 재산은 증대되었다.
- 5. 2와 연관된 목적으로 호전적인 기사들과 영주들을 유럽 밖으로 내보냄으로써 내적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 6. 이 외에도 무장 순례 기원설이라는 것이 있다.
5.2. 기타 동기
- 1.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주는 대사#s-6(大赦)를 획득할 목적으로 참여했다.
- 3. 성지와 성인#s-2들의 묘에 대한 환상이 지원 동기로 나타난 사람도 있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성배를 찾기 위한 원정을 떠나는 셈. 애초에 성배탐색이라는 모티브 자체가 십자군 원정에서 시작된 것이다. 십자군 원정에서 (진품 여부는 상관없이) 성십자가와 성창 등 대단히 귀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이를 당대 시인들과 신부들이 미화해 모험담으로 만들면서 성지순례+성유물 획득이라는 성배탐색의 모티브가 생겨난 것이다. 아서 왕 전설 같은 대표적인 성배탐색 문학은 10세기~11세기까지만 해도 성배 탐색 같은 요소가 없이 그냥 전쟁 무용담이었는데, 이후로 수많은 모험담들이 추가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 4. 순수한 신앙으로 일어난 귀족들도 있었다. 주 동기의 1번인 성지 회복보다도 더 순수하게, 오로지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행한 일이니 어떤 의미론 영광스러운 자들. 실제로 1차 십자군 원정에서 예루살렘 입성 때 수만이나 되었던 십자군 병력들은 예루살렘 탈환 후 성지에서 예배 좀 드리고 마지막 파티마의 공격까지 막고 나서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수천 명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이것 때문에 남은 십자군 영주들은 사람이 너무 없어서 무진장 고생했을 정도. 이런 사람들은 가톨릭은 물론, 적인 이슬람도 칭송했다. 허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십자군 전쟁을 위해 많은 토지와 재산을 헌납하거나 처분했기에, 전쟁 후에는 몰락해 버리기 일수였다. 한마디로 교황청에 가진 돈을 모두 털리고 사지로 내몰렸던 것이다.
6. 본편
자세한 전개 과정은 십자군 전쟁/연표 참고
6.1. 제0차 십자군 원정
6.2. 제1차 십자군 원정(1096 ~ 1099: 3년간)
6.2.1. 롬바르디아 십자군(1101년)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에 사정상 예루살렘 원정에 참여하지 못했던 자들과 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다시 원정한 자들로 구성된 십자군. 당시 십자군 본대에 참여하지 못했던 피사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예 정부가 직접 돈을 투자하여 십자군 지원을 위한 원정대를 조직한 상황이었는데, 1098년 피사가 120척의 함대를 발진시켰고 1099년 7월에 베네치아도 200척의 함대를 발진시켰다. 덕분에 쪼그라들었던 예루살렘의 십자군은 10배로 늘어날 수 있었다. 이들 베네치아 십자군은 하이파를 점령한 다음에 귀국했다.
이렇게 예루살렘의 정복과 베네치아 십자군의 성공에 망설이던 예비 십자군들이 곳곳에서 조직되었다. 블루아의 에티엔도 그 중 하나였다. 에티엔은 귀국하여 비겁자라고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고 심지어 그의 부인조차 그를 경멸했다. 교황은 그에게 순례를 완수하란 명령을 내렸고 에티엔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떠나야 했다. 안티오키아 공략 직후 회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렀던 베르망두아의 위그도 귀국했다가 다시 프랑스에서 합류해왔다. 예루살렘 공략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던 레몽 백작도 있었다. 그들 말고도 밀라노 대주교가 지휘하는 롬바르디아 십자군이 1100년에 출발했다(그 외에도 부르고뉴, 느베르, 아키텐, 바이에른 등지에서 참여했다). 1차 십자군만큼 크지도, 정예하지도 않은 롬바르디아 십자군은 니코메디아에서 부르고뉴 십자군 및 잔여 1차 십자군과 합류했다. 알렉시오스 황제가 지원한 병력까지 받은 십자군은 레몽 백작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1101년 5월에 출발했다. 1차 십자군의 행군로를 따라 도릴레온을 지나 앙카라에 이른 십자군은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1세가 다니슈멘드에게 잡혀갔단 소식을 듣고 그를 구출하려 했다. 마침 원정기간은 여름이었는데, 건조한 아나톨리아의 무더위에 노출된 십자군은 곧 지쳐버렸다. 파플라고니아의 강그라(Gangra)를 지나 카스타모뉘(Kastamonu)를 공격하던 십자군은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의 공격을 받았다. 덥고 지친 차에 보급도 어렵고 끊임없이 공격을 받던 십자군은 1101년 8월에 메르시반(Mersivan)에서 룸군, 다니슈멘드군 등 튀르크 연합군에게 공격당해 궤멸되었고, 레몽, 에티엔 등 고위층 일부만 살아남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이후 느베르, 바이에른, 아키텐 그리고 베르망두아의 위그가 이끄는 십자군이 니코메디아에 도착했다. 이들은 선발대를 따라가거나, 해로를 택하거나, 1차 십자군의 행군로를 따라가는 등 다 따로노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당연히(...) 클르츠 아르슬란의 룸군에 의해 죄다 각개격파 당하고 아키텐군 일부만이 레반트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베르망두아의 위그는 콘야 동쪽에 있는 헤라클레아 키비스트라(Heraclea Cybistra)에서 부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그해 10월 타르소스에서 사망했다.
6.2.2. 노르웨이 십자군(1107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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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이 끝난 직후 노르웨이 국왕 시구르드 1세가 일으킨 1107~1110년까지의 장거리 원정이다. 자그마치 노르웨이에서 중동 팔레스타인까지 원정을 했는데 바이킹의 원정에 버금가는 대원정이었다. 또한 시구르드 1세는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최초의 국왕급 인물이기도 하다.
1107년 노르웨이 국왕 시구르드 1세는 5,000명의 병력과 60척의 갤리를 타고 노르웨이를 출발하여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환대 속에 겨울을 보내고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시칠리아로 가게 된다. 와중에 해적의 습격을 격퇴하고 오히려 해적들을 약탈하는가 하면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주변의 이슬람 소국들을 습격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점령한 뒤 보물들을 약탈하고 개종하지 않는 무슬림들을 학살했다.
노르웨이 군은 1109년 시칠리아에 도착해서 국왕 루지에로 2세의 환대를 받은 뒤 키프로스를 거쳐 1110년 마침내 예루살렘 왕국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1세의 따듯한 환대를 받은 뒤 예루살렘 왕국군과 합세하여 시돈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성 십자가의 파편을 받는 등 많은 선물과 보물을 받았다. 이후 육로로 귀환을 선택, 동로마 제국으로 가서 황제 알렉시오스 1세와 면회했다. 이때 많은 부하들이 바랑인 친위대로 복무하길 원해 남겨졌고 해군과 보물들을 황제에게 바친 대가로 튼튼한 말을 얻어 불가리아-헝가리-오스트리아-독일을 주유하며 육로로 북상했다. 그 와중에 시구르드 1세는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로타르 3세와 면회하기도 하였고, 이후 덴마크에 도착해서 국왕 닐스의 도움을 얻어 배를 빌려 1113년, 6년 만에 노르웨이로 귀환했다.
6.2.3. 베네치아 십자군(1122년)
안티오키아의 섭정 루지에로는 1119년 6월 27일에 알레포를 공격했다가 참패했고, 엄청난 병력 손실 때문에 안티오키아와 에데사가 동시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이 사태를 수습한 보두앵 2세가 안티오키아의 섭정이 되었다.
1122년에는 알레포의 발라크가 에데사를 공격하여 조슬랭을 포로로 잡았는데, 보두앵 2세는 그를 구하기 위해 1123년 4월에 알레포를 공격했다가 도리어 포로가 되고 말았다.
한편 교황 칼릭스투스 2세는 성직 서임권 논쟁에 바빠서 예루살렘의 구원 요청을 베네치아에 위임한 상황이었다. 베네치아는 120척의 함대와 1만 5천의 군대를 파견했다. 1122년 8월 8일에 출발한 베네치아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2세가 부황 알렉시오스 1세가 부여했던 무역 혜택을 연장하지 않자 자신들의 손으로 탈환하여 동로마에 양도한 바가 있는 코르푸 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두앵 2세가 포로로 잡혔단 소식에 그들은 공성을 포기하고 레반트로 향해 5월에 이집트의 대함대를 격멸시켰다. 1124년 7월 7일 그들은 아스칼론과 더불어 예루살렘 왕국에 속하지 않은 유일한 팔레스타인 도시인 티레를 함락시켰다. 보두앵 2세는 발라크가 죽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6.3. 제2차 십자군 원정(1145 ~ 1149: 5년간)
해당 항목 참조.
6.4. 살라딘의 예루살렘 원정: (1187)
트리폴리, 티레, 안티오키아를 제외한 모든 영토가 살라딘의 손에 떨어진다.[19]
6.5. 제3차 십자군 원정 (1189 ~ 1192년)
해당 항목 참조.
6.5.1. 독일 십자군 (1197년)
3차 십자군을 이끌다 터키에서 익사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6세가 제창하였다. 1191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그는 1193 ~ 1194년 귀국하던 리처드 1세를 감금한 후 충성 서약을 받고 나서야 풀어주기도 하였고 1194년에는 아내 콩스탕스의 권리를 주장하며 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교황에게 남부 이탈리아의 점유를 인정받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미 살라딘은 1193년에 죽었고 그의 사후 아들들이 제위 계승 분쟁을 일으키며 시리아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1195년 라믈라 평화 협정에 명시된 십자군과 아이유브 왕조 간의 휴전이 끝나자 하인리히 6세는 그해 부활절, 이탈리아의 바리에서 첼레스티노 교황에게 십자군 종군을 서약하였다.
하인리히 6세는 우선 자금 마련을 위해 막 쿠데타를 통해 즉위한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3세를 협박, 5천 파운드의 금을 얻어내었고 키프로스 왕국 및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과 동맹을 맺은 후 군대 편성을 위해 1195년 여름 독일로 향하였다. 12월 보름스 제국 의회 등의 소집령에 3차 십자군 때 활약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던 많은 귀족들이 호응하였다. 마인츠 대주교, 브레멘 대주교를 시작으로 브라반트 공 하인리히, 오스트리아 공 프리드리히, 튀링겐 변경백 헤르만 등이 종군을 선언하며 당초 하인리히의 목표였던 1천 5백의 기사와 3천의 용병을 뛰어넘는 4천의 기사와 1만 2천의 병사들이 소집되었다. 1196년 3월 뷔르츠부르크 제국 회의에서 하인리히가 제안한 황제위 세습안 (Erbreichsplan)[20] 이 부결되며[21] 출정은 연기되었다.
1196년 7월, 하인리히는 이탈리아로 향하여 이 문제에 대해 교황과 협상하려 하였으나 역시 결렬되었고 그해 10월 에르푸르트 제국회의에서 대다수의 제후들이 황제 세습안을 거부하였다. 하인리히는 십자군의 출정일로 정해진 크리스마스에야 아들 프리드리히를 독일 왕으로 선출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남부 이탈리아의 카푸아에서 겨울을 보낸 하이리히는 1197년 3월,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도착하여 십자군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하인리히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한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비록 카타니아의 반군은 독일군에 의해 잔혹히 진압되었지만 남편의 무관심에 시달리던 황후 콩스탕스가 반란군에 가담하자 규모가 확대되어 하인리히를 포위하기까지 하였다.
조약을 맺고 겨우 이를 진정시킨 하인리히는 다시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던 중 1197년 8월, 메시나 인근에서 사냥을 하던 중 감기에 걸린 후 29일 병사하였다. 항간에는 콩스탕스가 그를 독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번에도 황제가 성지에 가기도 전에 사망하였지만 이미 대부분의 십자군은 마인츠 대주교의 인솔 하에 메시나를 출항한 상태였다. 독일 십자군은 9월 22일 아크레에 닻을 내렸고, 곧 브라반트 공작 하인리히를 대장으로 삼아 진군하였다. 그들은 어렵지 않게 시돈을 점령하였고 10월 24일 베이루트에 입성하였다. 이듬해 초 키프로스의 왕 아말릭은 예루살렘 왕국의 이사벨 여왕과 결혼한 후 예루살렘의 왕 아말릭 2세로 등극하였다.
1198년 3월, 독일 십자군은 비블로스를 점령하여 예루살렘 왕국과 트리폴리 백국 간의 육상 통로를 확보하였다. 이때 1190년 설립된 튜튼 기사단이 정식 기사단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자신감이 생긴 십자군은 다마스쿠스로 진격하기 위해 티레에서 그 방향에 위치한 토론 (테브닌)을 포위, 알 아딜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때 하인리히 6세의 부고가 독일 십자군에게 전해졌고 1198년 7월까지 대부분의 제후들은 새 황제에게서 영지의 승인을 받기 위해 귀국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 알 아딜은 십자군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그들이 취득한 영토의 점유를 인정하였다. 한편 아말릭 2세는 발리앙의 아들 장 드 이벨린에게 베이루트를 맡겼다.
6.6. 제4차 십자군 원정(1202 ~ 1204, 3년간)
해당 항목 참조.
6.7. 제5차 십자군 원정(1217 ~ 1221, 5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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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에타 공방전
1차 이집트 원정이라고도 한다.[22]
원정기간은 1217년에서 1221년의 4년간. 가라는 성지는 안 가고 엉뚱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한 제후들의 4차 십자군에 실망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자신이 직접 주도하여 일으킨 십자군이다. 하지만 준비 와중에 인노첸시오 3세가 죽으면서 새로운 교황 호노리오 3세가 본격적으로 원정을 준비해 각국의 지원을 받아 1217년 원정군을 출발시켰다.
이에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6세, 키프로스 왕 위그,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이 참가했다. 당시 독일 왕으로 몇 년 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프리드리히 2세는 참가를 수차례 재촉 받았으나 장기간의 해외 원정을 꺼려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다.
교황은 명목상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23] 을 사령관으로 삼아 시리아를 공격하게 했으나 원정은 지지부진하여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다만 예루살렘의 성벽은 파괴되었는데, 이슬람 측이 미리 겁 먹고 도시를 비우고 허물어버린 탓이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설레발이긴 했지만, 십자군 역시 성벽 없는 예루살렘을 차지해서 방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218년 이에 실망한 제후와 왕들이 하나둘씩 귀환해버렸고, 이에 제노바 함대의 제안으로 아이유브 왕조가 다스리는 이집트의 항구 도시, 다미에타를 공략하기로 하였다. 십자군은 술탄 알 카밀의 반격을 격퇴하고 2년간의 장기간의 포위 공격에 다미에타를 함락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미 전력 소모가 심해 더 이상 공세로 전환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이들은 1221년까지 다미에타에서 웅거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의 지원을 기다렸으나 휘하의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의 지원군만이 왔다. 십자군은 그래도 지원군에 힘입어 공세로 전환하여 카이로로 진격하였으나, 나일강이 범람하는 우기에 공격을 고집한 교황 사절인 페라기우스의 실책으로 대패하여 원정군은 괴멸했다. 이후 포로들은 다미에타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석방되고 5차 십자군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 시점쯤에는 '동방의 수수께끼의 기독교 왕국인 프레스터 존이 십자군을 도운다'는 전설이 퍼져있었으나 그 정체는 사실 몽골군이었다.
6.8. 제6차 십자군 원정(1227 ~ 1229, 3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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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기간은 1227년부터 1229년까지 약 2년 동안. '원정'이라고는 하지만 협상단 겸 상단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재위 1227~1241)는 십자군 파병을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프리드리히 2세(1220~1250)를 밀어줬다.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원정을 재촉했으나, 실리주의자였던 황제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따르려고 하지 않았고, 이에 분노한 교황이 황제를 파문했다. 사실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당하기 전에 이미 원정에 나섰으나, 항해 도중 병에 걸려 일시 귀국하자 파문을 당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두 번이나 파문되고 나서야 겨우 십자군을 일으켰으며, 미리 건조했던 함선들을 이끌고 무슬림 권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는 당시 아이유브 왕조의 알 카밀 무함마드 빈 알 아딘(살라딘의 조카)과 여러 번 교섭하고, 마침내는 예루살렘 일부의 통치권을 양도받는 성과를 이룬다. '''간단히 말해서 예루살렘을 돈 주고 산 것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모스크는 여전히 무슬림의 관리하에 두고, 예루살렘에 군대를 상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정이었으나, 당연히 교황이 납득할 리는 없었고, 술탄 알 카밀도 성지를 팔아넘겼다는 이유로 이슬람권에서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미 알 카밀에 대항해 시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형제 알 아시라프는 물론, 이슬람권 내에서도 이를 '굴욕'으로 간주해 큰 저항이 일었으며, 그레고리오 9세를 비롯한 교황측에서도 프리드리히에게 크게 분노했다. 당시 교황측은 이슬람 쪽이 약세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전투를 하면 옛 예루살렘 왕국령 전역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협정 조건에서 이미 성벽이 존재하지 않던 예루살렘에 새로 축성하지 않는다는 조약도 있었기 때문에 도시를 탈환해봤자 지키기 어렵다는 비판도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이내 교황 측 군대에게 공격[24] 을 받으나 돌아와서 이를 간단히 격퇴한다. 결국 교황은 다시 한번 제후들을 선동해서 십자군을 재파병했다. 나바라 왕국 국왕 테오발트 1세,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3세의 남동생 콘월 백작 리처드 등이 이에 호응해서 갔으나, 재원정군은 소규모였다. 그들이 도착했던 시기는 프리드리히 2세와 아이유브 왕조 간 휴전 협정 기간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전투는 하지 않았고 성지 순례와 아스칼론 쪽에 축성을 한 뒤 다시 돌아왔다.
결국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파문을 취소하였으며, 조약이 만료된 1239년까지 이후에도 5년간(즉, 1244년까지) 예루살렘은 기독교 세력의 영향권에 드는 등, 이 6차 원정은 십자군 중 2번째(평화적으로 첫째)이자 마지막 성공한 사례가 되었다.
6.8.1. 귀족 십자군
1239 ~ 1241년간 이루어졌으며, 시몽 드 몽포르도 참전하였다. 아스칼론과 예루살렘 인근 내륙을 점령하여 1187년 이후 최대 영토를 확보하였다. 비록 1244년에 예루살렘을 빼앗기고 재차 쇠퇴하지만, 짧은 중흥기로 평가받는다.
6.9. 제7차 십자군 원정(1248 ~ 1254, 7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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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에타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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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루이의 진군로 (다미에타 ~ 파리스쿠르 ~ 만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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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라 전투
제2차 이집트 원정이라고도 부른다.
원정 기간은 1248년부터 1254년까지 약 6년간으로서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주도하여 일으킨 십자군이다.
당시 아이유브 왕조는 '시리아 아이유브'와 '이집트 아이유브'로 분열되어 있었다. 1244년, 예루살렘은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은 '호라즘 용병들'의 군대에 점령당했고, 이에 맞서기 위해 '시리아의 아이유브 왕조'와 동맹을 맺은 '십자군'은 라 포르비에(La Forbie) 전투에서 이집트와 호라즘 연합군에게 포위섬멸 당한다. 라 포르비에 전투는 하틴의 뿔 전투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즉 유럽에서의 원정군이 아닌) 십자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인 유일한 사례였으며 최후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2세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에 예루살렘이 넘어가자 이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 왕 루이 9세(1226~1270)는 친동생들인 앙주 백작 샤를,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푸아투 백작 알퐁스, 성전 기사단 등과 함께 제 7차 십자군을 일으킨다. 하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출발을 연기하려고 했다. 프레드리히 2세와의 대립이 이유였다.루이 9세는 꿈에서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출발한다.
1248년 가을, 3만6천 십자군은 키프로스 섬에 도착하여 겨울을 보낸다. 그 동안 이란과 몽골에 사절을 보내 합동 전쟁을 논의하나 진전되지 않았다.겨울을 보내고, 태풍을 보내고, 1249년 6월 나일강 하구 항구도시 다미에타를 점령한다.
오랜기간 대비했던 아이유브 왕조는 충격에 빠졌고 카이로까지 점령당할까봐 두려움에 떤다. 알 살리흐는 투병 중인 몸을 이끌고, 민심을 잡기 위해 다미에타 방어에 책임이 있는 장교 50명을 처형하고, 다미에타 함락 4일만에 만수라(Mansura)로 군선을 타고 출정했다. 그리고 십자군에 전갈을 보내어 5차 십자군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과 다미에타의 교환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한다.
루이 9세는 나일강의 범람기에 공격했다가 참패한 5차 십자군전쟁을 생각하여, 다미에타에서 주둔했다가 1249년 11월 20일 카이로를 향해 진군한다. 그리고 2일 뒤, 11월 22일 알 살리흐가 오랜 병으로 병사한다. 알 살리흐의 임종을 지켜본 왕비 샤쟈르 알 두르는 사령관 파크루딘과 술탄의 죽음을 숨기기로 하고, 영토의 북방을 통치하고 있던 후계자 투란샤를 불러들인다.
십자군은 3개월에 걸쳐 천천히 진군하여 만수라와 운하를 사이에 두고 포진하였다. 이윽고 1250년 2월 8일 이른 아침, 운하의 얕은 지역을 건넌 로베르 백작의 290기 정예 기마부대가 아이유브군을 기습했고, 아침에 목욕하다 갑옷도 입지 못하고 말에 올라타 뛰쳐나온 사령관 파크루딘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만수라 전투 그림의 1)
루이 9세는 운하 건너편에서, 기습의 성공을 보고 로베르에게 철수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로베르는 단숨에 적진을 돌파해 열려있는 만수라의 성문으로 들어갔다. (만수라 전투 그림의 2)
만수라 시내로 돌입한 기마대는 혼비백산하는 시민들을 학살하며 술탄이 위치한 궁으로 돌격했다. 하지만 궁 근처에서 바이바르스(Baibars)의 술탄친위대가 사방에서 공격해오면서 퇴각하려했으나 로베르 백작은 전사하고 돌입한 290기 기마부대 중 5기만 탈출했다. (만수라 전투 그림의 3)
바르바로사의 술탄친위대는 그대로 아이유브군으로 달려가면서 로베르 백작이 루이 9세의 동생이었고, 왕가의 문장을 붙이고 있었기에 "프랑스 왕을 죽였다"는 소리쳤고(만수라전투 그림의 4) 운하를 건너 전면전을 걸어온 루이9세의 군을 격파했다.(만수라 전투 그림의 5)
공격 실패로 동생을 잃은 루이 9세의 프랑스 군은 다시 아이유브군과 대치상태가 되었는데, 북방을 지키던 투랸샤가 도착하면서 다미에타와 만수라 사이의 프랑스군 나일강 보급로를 끊어버린다. 보급도 끊기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아 십자군은 퇴각하는데, 아이유브군의 추격에 이기지 못하고 1250년 4월 다미에타에서 약 20km 떨어진 파리스쿠스에서 루이 9세가 항복한다.
결국 '''루이 9세는 포로가 되어 발을 사슬에 묶인 채 만수라로 옮겨진 뒤, 유폐되었다가 배상금을 지불하고 석방'''된다. 여담이지만 루이 9세는 만일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면 로베르를 이집트 왕으로 옹립하려 했었다고 한다.
여하간 석방된 루이 9세는 남은 원정군의 몸값을 지불하느라고 꼬박 4년 동안이나 중동에 머물렀고, 이 일이 끝난 뒤에야 겨우 프랑스로 귀국했다. 물론 잡병들은 어림도 없었고 노예가 되느냐 이슬람으로 개종하느냐의 선택을 강요받았다.하지만 승리자 아이유브 왕조의 끝 역시 불행했다.
그 해(1250) 5월 2일는 술탄에 즉위한 지 2개월만에 알 투랸샤가 바이바르스의 맘루크군에 살해당하고, 아이바크(Aybak)가 맘루크 왕조(1250~1517)를 열었으며[25] 만수라 전투를 지휘하고 군대의 지지를 얻은 바이바르스는 10년 후에 술탄이 된다.
6.10. 제8차 십자군 원정(1270년, 1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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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스 공방전
13세기는 몽골 제국의 시대였고, 호라즘 왕조부터 룸 술탄국, 아바스 왕조를 줄줄이 박살내며 달려오는 몽골 제국은 유럽 세력에게 큰 기대를 안겨주었다. 안티오키아 공국은 1260년 몽골군이 쳐들어 왔을 때 몽골 편을 들어 이슬람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 몽골군이 패배하고 물러나자 완전히 궁지에 몰렸고, 바이바르스는 1268년 자신에게 반기를 든 대가로 안티오키아를 함락시킨 뒤 대학살과 파괴를 자행하여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중동의 대도시였고, 아시아(중동) 교회의 중심이었던 안티오키아는 가뜩이나 십자군에게 점령되던 순간부터 꾸준한 하락세였다가 이때 결정타를 입어 지금까지 시골도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에 자극 받은 루이 9세는 1270년 다시 십자군을 결성하여 자신의 아들 필리프 3세와 함께 동생인 시칠리아 왕 샤를(카를로 1세, 앙주의 샤를)의 제안을 쫓아 북아프리카 튀니지를 공격한다. 지원군으로 샤를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였고, 사위인 나바라 왕국의 국왕 테오발트 2세의 군대 등이 합세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식수 부족과 진중에 전염병이 돌아 루이 9세는 튀니스에서 병사한다.
이처럼 2차례나 십자군 원정에 직접 가담하고, 2번째 원정에서는 왕 자신이 병사까지 했기 때문에 교회에서 즉각적인 보답을 하여 루이 9세는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루이 9세는 '성왕(聖王)'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한편 진중에서 필리프 3세는 왕위를 이어받고 대관식을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고, 또 나바라 왕 테오발트 2세도 귀국한 후 이내 병으로 사망했다. 남겨진 샤를은 튀니지와 그리스도인의 보호와 무역재개, 배상금 지불 등의 조건으로 화친하고 뒤늦게 지원군으로 온 에드워드 1세와 아크레로 향했다.
6.11. 제9차 십자군 원정(1271 ~ 1272, 2년간)
루이 9세가 튀니스 공격에 실패하고 병사하자, 지원군으로 오고 있었던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왕자[26] 는 뒷북을 친 격이 되었다. 늦게 도착한 이들 지원군들은 남겨진 시칠리아 왕 샤를과 함께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아콘/아코)로 진군하였고, 키프로스 왕 위그 3세가 해군 지원을 해주었다. 이들은 또한 일 칸국에 원군을 요청하여 기병대를 지원받는다.
1271년 연합군은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바이바르스가 키프로스 본토를 공격하자 키프로스 해군이 철수하게 되고 에드워드의 군대는 아크레에 고립되고 만다. 여기에 더해 술탄은 자객을 보내 에드워드를 습격하기도 했는데, 에드워드는 암살자를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그 역시 작은 부상을 당하게 된다. 결국 갖가지 악전고투속에 에드워드와 샤를은 바이바르스와 10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고 1272년 철수하고 만다.
6.12.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 아크레 함락: 1291년 5월 18일
아크레 공방전
이후 십자군은 맘루크 왕조의 거듭된 공격으로 토르토사, 트리폴리#s-3 등을 잃었다(1289년). 또한 십자군을 지원한 일 칸국의 몽골군은 아파미아, 알레포 등을 함락시키며 서남쪽 방향으로 진격, 많은 무슬림들을 학살했으나 이집트 술탄 칼라운이 반격을 개시하여 몽골군을 몰살시킨다. 결국 1291년, 예루살렘 왕국은 쿠칸에 이어 5월 18일에 아크레가 함락당하면서 멸망하였고 8월 14일에 토르토사가 함락되어 트리폴리 백국도 멸망하였다. 비록 1299년 ~ 1301년간 일 칸국의 도움과 키프로스 왕국의 활약으로 일부 해안 도시들을 되찾지만 맘루크 왕조가 모두 수복하였고 1302년에 최후의 거점인 루아드 섬이 함락되며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7. 외전
십자군 시기 (1095 ~ 1291년)에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으나 동방 (아나톨리아/레반트/마그레브/이집트)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
7.1. 소년 십자군의 원정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프랑스와 독일에서 소년 소녀들의 신앙의 힘으로 무슬림을 기독교로 개종시킨다는 목표로 유럽 각지 수만 명의 소년들이 십자군을 조직하였다. 성지 탈환의 기치를 걸고 배를 타고 출발하였으나, 그 후 오랫동안 이들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결국 한참 후 이 계획 자체가 어른 사기꾼들이 꾸며낸 낚시로 밝혀졌는데, 배를 모집한 상인들이 이들을 알렉산드리아에 노예로 팔아 넘긴 것이다. 물론 성지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들 중 불과 수십 명만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소년 십자군의 대표주자는 독일의 니콜라스와 프랑스의 에티엔이 있다. 이들은 모두 사적계시에 의한 십자군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의 니콜라스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가 어른들의 영적 불결함에 있다고 보았고 성경의 계시대로 천국이 아이들에게 열려있듯이 성지도 아이들에게 열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니콜라스는 또 다른 사적계시를 받아, 지중해가 갈려서 도보로 성지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 무리는 이탈리아로 가던 도중에 대부분이 공중분해되었으며,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교황의 명령에 의해 남은 무리는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약속한 지중해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닷길은 갈리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상당수의 무리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니콜라스와 남은 극렬 빠돌이들이 배를 얻어타고 성지로 가려고 했으나, 그때 노예 상인의 떡밥에 물려서 노예가 되었다.
그 후 니콜라스의 아버지는 자녀가 돌아오지 못하여 분노한 동네의 다른 부모들에게 구타당한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프랑스의 에티엔은 자신을 십자군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신저로서 어느날 예수가 자신에게 나타나 프랑스 왕에게 편지를 전하라고 한 메시지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에 따라 자신은 프랑스의 왕 필리프에게 편지를 전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고 다니며 추종자들을 모았고, 이 추종자들과 함께 필리프에게 편지를 전해줬다. 그게 끝이다. 에티엔은 자신의 편지가 필리프에게 전해지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해산되었으며 "이게 다야?" 하며 실망한 추종자들은 알비 십자군에 참전했다.[27] 사실 소년 십자군의 기록은 그렇게 많지 않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피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그분의 영을 받은 용맹한 기사가..." 하는 식의 감상적 기록을 남긴 수도자들의 기록인지라 자료로서 객관성이 부족하다. 그러다보니 양치기 소년으로 위장한 노예상의 부하가 프랑스 북부에서부터 마르세유까지 소년 소녀들을 낚아서 끌고 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유명한 이야기인 피리부는 사나이는 이 사건을 풍자한 것으로 추측된다.[28]
7.2. 알비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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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후반부터 남프랑스의 도시 알비(Albi)를 중심으로 금욕주의와 청빈사상을 내세운 알비파(카타리파)가 창궐했다. 가톨릭 교회를 거부하는 그들은 이단으로 선언되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비파를 토벌하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켰다. 주로 프랑스 북부의 기사들이 참가했으며, 남프랑스의 알비파 영주들이 대항해서 싸웠다. 십자군은 남프랑스를 깡그리 엎어서 알비파의 씨를 말려버렸다.
첫 공격 대상이 된 베지에(Béziers) 시[29] 를 점령한 후, 병사 하나가 도시 안에 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와 알비파를 어떻게 구별할지 물었다. 이때 교황 특사 아르노 아모리(Arnaud Amalric)[30] 의 대답이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이렇게 베지에 시의 학살로 2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긴 했으나, 그 후의 알비 십자군은 교황과 교황 특사란 작자가 단단히 미친 놈이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무조건 학살이 아닌 항복 권유와 목에다 칼을 들이댄 채 개종을 권유했다. 물론 그래봤자 자기들도 미친 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개종을 거부하면 '''얄짤없이 화형에 처했다.'''(...)
카타리파는 당시 기준으로 보나 지금의 기준으로 보나, 정통 기독교보다 마니교에 가깝다. 그들은 구약의 성부를 육신을 만든 거짓 신으로 보았고 영혼을 중시한 신약의 예수를 진짜 신으로 보았다.[32] 그들이 금욕주의와 청빈사상에 지독하게 목매단 이유는 육체적 세계는 거짓이기에 육체를 즐겁게 하는 쾌락 역시 거짓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는 육체라는 감옥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천시받았으며 성관계는 철저하게 금지당했다.(!) 항문을 통한 섹스를 뜻하는 은어 BUGGER도 알비파의 한 분파에서 나왔을 정도니... 다빈치 코드를 인용하여 알비파가 여자에게 글도 가르친 현대적인 계몽운동가라고 주장도 있지만, 알비파가 여자에게 글을 가르친 건 "니들이 왜 임신을 하면 안 되는지 알려줄게. 이 감옥 공장아!" 하며 여자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카타리파는 남프랑스 지방에서 인기를 끌었고, 이후 알비파 영주들이 늘어나자 카타리파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성경을 엉터리로 번역 해석하기도 하여서[33] , 후에 프랑스의 툴루즈에서 이와 관련된 지역주교회의(시노드)가 열렸다.
한편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방의 아라곤 왕국은 아이러니하게도 국토회복운동의 선봉이면서도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찍힌 알비파의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의 후원자였으며, 또한 툴루즈의 카타리파 영주들[34] 을 자신의 보호령으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레스터 백작이 아라곤 왕국의 보호령들을 이단이라는 이유로 차례차례 뺏어가자,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는 레몽과 동맹을 맺고 3만의 군사로 레스터 백작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것이 바로 1213년의 뮈레 전투(Battle of Muret)다. 나머지 유럽사에서야 이런 일도 있었다 주석으로 넘기는 수준이지만, 스페인과 아라곤 연합 왕국, 그리고 카탈루냐의 역사에선 이 사건을 기점으로 아라곤의 왕들의 영향력이 피레네 산맥 이북으로 완전히 끊겨버리는 나름 중대한 사건이었다.[35]
당시 레스터 백작의 군대는 고작 870명의 병사(270명은 중기병)로 3만의 군대와 맞서 싸운다는 비교도 안 되는 숫적 열세에 처하였으나, 알비파와의 전쟁으로 단련된 그들의 정예 중기병들은 순식간에 아라곤 왕국군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서 아라곤 왕국의 왕, 하이메를 죽이고 겁을 먹고 도망치는 아라곤군을 신나게 썰어댄다. 결국 이 전투는 레스터 백작의 승리로 끝났다(레몽은 영국으로 도망쳤다). 알비주의 십자군의 리더였던 이 백작의 이름은 바로 시몽 드 몽포르 (Simon de Montfort).[36] 동명이인이자 영국의 왕 헨리 3세에 대항하여 남작전쟁을 일으킨 시몽 드 몽포르의 아버지이다.
베지에 시의 학살과 뮈레 전투의 여파로 1215년 즈음 십자군은 남부 프랑스를 거의 평정하지만, 알비파는 일시적으로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전향한 척 했던 알비파는 레몽 백작의 아들(툴루즈의 레몽 7세) 지휘 아래 다시 봉기하여 툴루즈를 되찾았다. 1218년엔 십자군의 리더 시몽 드 몽포르가 툴루즈 공성전에서 전사하기까지 한다. 결국 알비 십자군은 십수년의 악전고투 끝에 1245년에야 남부 프랑스를 완전히 평정하고 카타리파는 멸망했다. 그리고 사실상 독립국이던 툴루즈 백작국이 국영화 되며 필리프 2세 - 루이 9세 시대의 프랑스 왕권 신장에도 큰 도움을 준 사건이었다.
7.3. 아라곤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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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4년경의 시칠리아 왕국
이 전쟁은 크게 시칠리아 만종 사건의 한 부분으로 다뤄진다. 위에도 설명한 7, 8, 9차 십자군에 참가한 시칠리아왕 샤를(앙주의 샤를)은 프랑스왕 루이 9세의 동생으로 원래 앙주와 프로방스의 백작이었다. 근데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다스리던 신성 로마 제국의 호엔슈타우펜 왕조 계열이었던 섭정 만프레디[37] 가 조카 콘라딘의 시칠리아 왕위를 강탈하고[38] 이탈리아 남부를 넘어서 기벨린파(황제파)의 수장으로 중북부까지 세력을 뻗게 된다.
이에 크게 위협을 느낀 교황 우르바노 4세는 만프레디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를 파문한다. 또 샤를에게 접근에 시칠리아 왕위를 제안했고[39] , 샤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형의 지원에 힘입어 시칠리아를 침공,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만프레디를 패사시키고 왕권을 강탈하였다.
이듬해 호엔슈타우펜의 정통 계승자였던 콘라딘이 쳐들어왔지만 쉽게 격파하고 붙잡아 나폴리에서 공개처형해 버린다. 이때 사실상 호엔슈타우펜의 정통 계승자가 모두 사망하여 대공위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된다.[40]
야심에 불타던 샤를은 시칠리아 왕위에도 만족하지 않고 형과 함께 십자군에 참가하고 헝가리, 제노바와 동맹을 맺은 뒤 크게는 동로마 제국의 제위에도 욕심을 내어, 이미 붕괴해버린 라틴 제국을 지원해 알바니아로 침공을 가하는 등 종횡무진 활약했다. 그러나 이를 우려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미하일 8세는 시칠리아 현지에 요원을 파견하여 밑작업을 해놓는 한편, 아라곤의 페드로 3세에게 군자금을 지원해주며 샤를을 치도록 종용했다.
한편 아라곤의 페드로 3세는 만프레디의 딸 콘스탄체와 결혼한 상태이므로 자신이 시칠리아의 적법한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동로마 제국의 지원금까지 받자 샤를을 치고 시칠리아 왕위를 되찾을 계획을 확정하게 된다.
샤를은 계속된 원정을 하는 중이었는데 이 때문에 중과세의 세금을 물리고 시칠리아인들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이에 시칠리아인들의 불만이 크게 고조된 상태였고 결국 반란을 배후조종하던 아라곤의 페드로 3세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바치기로 하고 1282년 일제히 봉기하여 프랑스 군인들을 학살하였다(시칠리아 만종 사건). 샤를은 동로마 제국을 치려던 군대를 돌려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페드로 3세가 다른 명분으로 준비한 대군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직접 쳐들어오자 대패하고 나폴리로 퇴각했다. 분노한 샤를은 교황과 프랑스 왕인 조카 필리프 3세와 동맹을 맺고 아라곤과 전쟁에 돌입했고 교황은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샤를의 군대를 십자군으로 격상시켰다(1284년).
그러나 전쟁은 아라곤군의 강력한 공격에 샤를의 뜻대로 풀리지 않아 프랑스 함대가 아라곤 해군에 대패하고 나폴리를 봉쇄해 샤를의 아들 샤를 2세가 포로로 잡히는 등 악화일로에 빠졌다. 이에 마요르카의 왕이자 페드로 3세의 조카인 하이메 2세를 지원해 아라곤 내부 붕괴를 노리는 등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결국 육전에서도 프랑스-나폴리 연합군이 패퇴하여 샤를은 1285년 실의에 빠진 채 죽었다. 이후로도 분쟁은 계속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샤를 2세가 1291년 시칠리아 섬을 포기하고 나폴리 왕위만 차지하게 됨으로서 아라곤의 승리로 끝났다.
7.4. 국토회복운동 (레콩키스타)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 왕국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벌였던 수백 년간의 전쟁. 엘 시드 등이 활약했다. 아라곤, 카스티야-레온, 포르투갈, 나바라 등의 국가가 참가했으며 결국 아라곤과 카스티야-레온의 동군연합으로 설립된 스페인이 그라나다까지 쓸어버리고 국토회복운동을 완료한다. 보통 현대의 시점에서는 십자군에 포함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국토회복운동에 종군하는 것도 십자군과 대등한 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때 산티아고 기사단이나 칼라트라바 기사단이 맹활약했다.
7.5. 동방 십자군
동유럽의 프로이센 일대에 잔존하고 있던 이교도를 상대로 한 토벌 겸 개척전쟁. 주로 튜튼 기사단이 싸웠다. 튜튼 기사단은 프로이센을 정복한 후 기사단령을 세웠고, 이후 전쟁, 영토 확장, 무역 등으로 부흥하였다. 14세기의 전성기 무렵에는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소규모 영지, 프로이센 전체, 리투아니아 일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대부분을 점유한 발트 해의 강자로 거듭났다. 그러나 기사단을 경계한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동군연합을 결성하였고, 이후 이들의 연합군에게 그룬발트 전투에서 무참히 박살나며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자세한 것은 튜튼 기사단국 참조.
7.6. 북방 십자군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작센, 튜튼 기사단,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 등이 주축이 되어 스웨덴 북부의 사미족, 핀란드, 독일 북부와 엘베강 동부, 폴란드 서부와 북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발트해를 둘러싼 지역을 공격한 십자군을 말한다. 발트 십자군으로도 부르며 동방 십자군이 포함되기도 한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가 1193년 북방 지역의 이교도를 공격하라고 촉구한 것이 공식적인 시작이지만, 그 이전인 12세기 중반에도 이미 성전을 명분으로 한 공격이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엘베강과 오데르강 사이에 있던 슬라브족을 동방식민운동, 벤트 십자군 등의 이름으로 공격해 정복했고, 핀란드에 살던 핀족들은 1154년에서 1249년 또는 1293년까지 거의 100년이나 스웨덴의 공격을 받고 정복당한다. 튜튼 기사단은 1226년, 마조비아 공작 '콘라드 1세'의 요청에 따라 폴란드 북부의 프루센을 공격하여 정복했고, 1230년에 튜튼 기사단국을 건국한다.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은 1193년에서 1227년까지 리보니아인, 에스토니아인을 공격해 정복했고, 기사단령과 여러 주교령을 세웠다. 북방 십자군의 공격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한 것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으로, 개종을 가지고 북방 십자군을 여러 차례 낚기도 했으나 폴란드와의 동군연합을 위해 결국은 완전한 카톨릭 국가로 스스로 개종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개종하면서 궁지에 몰린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리투아니아과 그룬발트 전투를 벌여 몰락하고 잇따른 전쟁으로 폴란드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이처럼 다른 북방십자군 원정이 13세기 말에는 종결된 것과 달리 리투아니아 십자군은 13세기 말이라는 늦은 시점에서 시작해 15세기 초까지 이어졌고, 그나마도 리투아니아의 승리로 끝났다.
러시아 정교회 국가들도 이 지역을 개종이란 명분으로 자주 침략하였다. 그 와중에 가톨릭 세력과 정교회 세력이 충돌하기도 하였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문서 참고.
오늘날 북유럽 하면 떠오르는 십자가 국기가 바로 이 시기에 정립된 것이다. 심지어 독일에서도 1919년과 1948년에 국기를 십자가로 바꾸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7.7. 보스니아 십자군
1235–1241년 까지 있었던 헝가리 왕국의 주도로 보스니아 독립교회를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이다. 보스니아 교회는 보고밀파 이단으로 취급 되었다.
언드라시 2세의 둘째 아들인 갈리치아의 칼만이 이끄는 헝가리군은 헝가리령이었으나 사실상 반독립 상태였던 보스니아 자치주를 공략하여 상당부분을 점령하고 이단자들을 화형에 처했다. 그렇게 전쟁에서 거의 이길 뻔 했으나 하필이면 그때 몽골군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칼만은 급히 철수하고 보스니아 교회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모히 전투에서 칼만과 벨라4세의 연합군은 몽골에 대패하고 헝가리 왕국은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이후 보스니아는 정치적-종교적으로 상당한 독립과 자유를 누렸다.
7.8. 스미르나 십자군
후기 십자군 전쟁의 하나로 1343년~1351년 교황 클레멘스 6세 에 의해 제창 된 두 차례 열린 십자군 원정의 총칭이다.
대상이 된 국가는 소아시아에서 번성한 튀르크계 국가 아이든 에미리트였다. 이 국가의 주요 해안도시인 스미르나를 목표로 했다. 당시 에게 해를 장악하고 있던 튀르크 계열 해적들의 토벌이 목적이었다.
1차 스미르나 십자군은 목표로 한 스미르나를 훌륭하게 공략했지만 도시 중심부의 적병이 모두 없어진 줄 알고 성급히 십자군 지도자들이 들어가서 의식을 치를려고 하던 와중에 숨어있던 아이딘 군병들의 기습을 받아 대거 전사하고 만다.
그러나 이 비보를 들은 교황은 새로운 원정단을 파견하고 다시 스미르나를 점령했다. 스미르나를 점령한 십자군은 밖으로 진출하지 않고 그냥 스미르나에서 웅거하면서 간간히 오는 적의 습격을 격퇴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1351년 교황 클레멘스 6세는 스미르나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그렇게 50 년 정도가 경과한 1402년 티무르 제국에 의해 스미르나는 포위되어 함락되고 만다.
7.9. 알렉산드리아 십자군
키프로스 왕국의 국왕 피에르가 주도한 1365년 10월에 있었던 십자군으로 정치적-종교적 목적보다는 경제적 목적의 약탈원정이었다. 키프로스 국왕 피에르 1세는 165척의 배에 다수의 키프로스 병력과 베네치아 용병, 성 요한 기사단을 대동하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습격하여 도시를 함락시키고 3일간 닥치는 대로 약탈을 했다. 이때 죽은 사람만 2만명이 넘고 5000명이 노예로 붙잡혀 갔다고 한다.
물론 이 같은 공격은 맘루크 왕조에서 계속 키프로스를 위협하고 있었고 공격을 한다는 정보를 먼저 입수하고 선제 공격을 할려는 목적도 있었다. 또 알렉산드리아를 파괴하면 무역거점이 키프로스로 옮겨올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 피에르 1세는 좀 더 알렉산드리아를 오래 점령해서 이집트 공략의 근거지로 삼고자 했으나 맘루크의 지원군이 각지에서 몰려오고 가신들은 철수를 주장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가장 늦게 알렉산드리아에서 철수 했다. 유럽의 군주들은 피에르 1세만이 진정한 십자군이었다고 칭송했다.
7.10. 바르바리 십자군
바르바리 해적 토벌은 중세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계속 있었기 때문에 이후의 싸움도 십자군 취급을 받았지만 보통 중세의 바르바리 해적 십자군은 1390년 7월 1일에서 10월 1일까지 세달간 있었던 프랑스와 제노아 연합 함대의 마흐디아 공략을 말한다.
바르바리 해적은 유럽국가들을 대상으로 계속 약탈과 해적질을 해왔기 때문에 전유럽의 어그로를 한몸에 사고 있었다. 이때 제노아 함대가 참다못해 십자군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교황과 프랑스에 보냈고 샤를 6세는 왕족인 부르봉 공작 루이 2세를 지휘관으로 삼아 6000명의 병력을 보내 제노아 함대와 같이 튀니지 마흐디아를 공략하라고 하였다.
마흐디아를 포위 공격한 십자군은 하프스 왕조의 술탄 아부 알 아바스 아흐마드 2세와 전투를 벌였다. 도시를 포위 중인 십자군에게 바르바리측에서 왜 공격을 하냐고 묻자 프랑스-제노아군은 "신의 아들 예수를 죽인 불신자 이단자들을 처벌하려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바르바리측은 그건 우리가 아니라 유대인들 짓이라며 웃었다.
십자군은 용맹하게 싸워 많은 무슬림 병력을 죽였으나 도시는 함락될 기미가 안보였고 질병이 돌아 보급이 어려워젔다. 결국 양측은 휴전을 하기로 하고 10년간의 휴전조약에 서명 한뒤 철수하여 십자군은 별다른 성과없이 종료되었다.
7.11. 대오스만 제국 십자군
오스만 제국이 성장하여 팽창함에 따라 그들을 막기 위한 전쟁도 십자군 취급을 받았다. 술탄 바예지드 1세가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기독교 연합군을 격파하기도 했는데, 이는 니코폴리스 십자군으로 불린다. 이후 1443년에 있었던 바르나 전투의 바르나 십자군, 1481년 오스만 제국이 남이탈리아를 침공한 오트란토 전투도 십자군에 포함된다. 물론 그 후의 계속된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막기 위한 크고 작은 전투들도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당대에는 십자군과 동등하게 여겨졌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제2차 빈 공방전를 계기로 결성된 신성동맹이 벌인 '대(大) 투르크 전쟁(1683~1699)' 까지도 십자군으로 보기도 한다.
- 니코폴리스 십자군(1396)
- 바르나 십자군(1443)
- 오트란토 십자군 (1481)
- 신성동맹 십자군(1683 ~ 1699)
7.12. 후스파 십자군
얀 후스의 사상을 따르는 보헤미아의 후스파를 토벌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지기스문트 황제와 교황 마르티노 5세가 5차례에 걸쳐(1420∼1431) 보낸 십자군. 후스 전쟁이라는 이름이 더 알려져 있다. 황제와 교황은 후스파를 몰아내고 헝가리까지 아울러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당한 패배를 설욕하는 야망을 품었던 모양이지만, 얀 지슈카가 이끄는 후스파에게 십자군은 처참하게 털렸고 후스파는 보헤미아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모라비아 등지까지 진격하게 된다. 얀 지슈카의 사망 이후에야 전장이 교착 상태에 빠졌고, 1436년 프라하 조약에서 보헤미아에서 후스파를 인정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교황과 황제와 기사들의 십자군이, 조잡한 화약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는 농민군에게 완벽하게 패배한 것은 '''중세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 중 하나였다.
8.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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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십자군의 유럽 귀환
8.1. 교회의 권위상실
십자군 전쟁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9차까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함으로써 유럽권이 패배한 전쟁이 되었다. 전쟁이 교황의 예상과 달리 실패했기 때문에 교황권의 몰락과 신앙의 약화를 가져와 결과적으로 교회의 권위가 떨어졌다. 신이 기독교를 버렸다고 여긴 일부는 무함마드를 숭배하기까지 하였다. 카타리파가 잔존했던 프랑스 남부에서 가끔 일어났던 일.
8.2. 장원경제의 붕괴와 화폐 경제 발달
한편으로 기사와 영지를 기반으로 한 장원경제의 붕괴가 찾아왔고,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동방으로 향하는 무역로를 새롭게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도시경제와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한편, 기존에 화폐 거래가 일반적이지 않던 서유럽이 동로마와 이슬람 권에서 화폐 거래를 채험하여 서유럽 세계가 자본주의와 시민 계급의 성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평가도 있다.[41]
8.3. 국가들의 정세
십자군은 동방의 문물이 서방에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반대로 서방의 문물이 중동으로 전해지는 계기도 되었다. 서유럽과 중동 지역의 무역로가 뚫리면서 지중해 무역을 하는 이탈리아의 국가들의 경제적 이윤이 컸고 중동식 성곽 건축을 본 유럽의 제후들은 앞다투어 장점을 포용해 자신들의 성을 개량했다.
서유럽 국가들의 중무장한 기사에 크게 패배한 초창기 중동의 이슬람 군주들은 서유럽식 중장기병과 갑옷,장비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한편 이 전쟁 와중에 이슬람과 기독교는 종파와 이해관계로 사분오열되어 서로서로 싸우는 일이 빈번했다. 이슬람의 영웅이라던 살라흐 앗 딘조차도 다른 종파에서 고용한 자객들에게 죽을 뻔했다. 십자군이 헝가리로 쳐들어갔다가 되려 깨져버린 일이나, 알비주의 십자군처럼 내부의 충돌도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 손을 잡고 적을 공격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8.3.1. 러시아 공국들의 쇠퇴
그 외에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의 공국들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키예프 공국 같은 러시아 공국들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제국이 북아프리카를 장악하고 사라센 해적들이 판을 쳐 지중해 무역이 불가능하자 아예 흑해와 러시아 공국들을 지나 발트해로 가는 무역이 성행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으로 이탈리아 상인들이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고 상권을 장악해 러시아를 지나는 물류의 양이 급감해버리자, 대부분의 수익을 교역에 의지하는 러시아 공국들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42] 4차 십자군 직후 몽골이 침공해오자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제외한 모든 러시아 공국들은 멸망당하거나 칸국의 봉신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8.3.2. 이탈리아 공화국의 이득
반면에 이탈리아의 공화국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은 십자군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었다. 베네치아는 직접 그리스의 상당 부분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제노바 역시 그에 못지않은 힘을 얻게 되었다. 이들의 경쟁 관계는 키오자 전쟁이 베네치아의 승리로 끝나기 전까지 지속된다.
8.3.3. 이슬람권의 상당한 충격
하지만 이슬람권에서는 분열된 상황에서 갑자기 유럽이 쳐들어와 개박살을 냈기 때문에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몰아낸 유럽이 제국주의 시대에 다시 돌아와서 중동을 공격해 식민지로 만들고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제2의 십자군'''이라고 자화자찬하자, 이슬람은 십자군을 사악한 악의 화신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가 현대 중동의 시대정서를 형성하는 데 이바지하였고 지금도 이슬람은 이스라엘과 미국을 제2의 십자군으로 여기게 되어 증오와 폭력을 더욱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8.3.4. 동로마 제국: 몰락의 길
동로마 제국의 경우에는 초반에는 룸 술탄국에 빼앗겼던 아나톨리아 동부 해안 등을 대거 수복하는 등 어느 정도 이익을 보았지만, 십자군 깽판으로 경제적, 안보적 피해 역시 많이 입었고 무엇보다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수도가 털리면서 결국 강대국 대열에서 영원히 탈락하였으며 이후 이백 수십 년간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8.3.5. 에티오피아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에티오피아 제국도 십자군 전쟁에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권에 포위된 유일한 기독교 국가였던 에티오피아는 십자군 국가들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하려고 했고 실제로 소규모의 지원병을 보내기도 하였다.[43] 한편 살라딘이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에 상주하고 있던 에티오피아 정교회 사제들을 초청해 회담을 나누고 순례세금을 면제시켜주기도 했다.
이 시기 에티오피아는 랄리벨라라는 곳에 제2의 예루살렘을 건설한다고 여러 건축물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웨뎀 아라드 황제가 교황에 사절을 보내 로마, 아비뇽, 스페인, 포르투갈을 둘러보고 프랑스와 같이 이집트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이미 십자군 전쟁이 거의 끝을 보는 상황이었고, 또 대립교황과 교황이 서로 반목을 하는 등 유럽 교회도 혼란이 극심한 상황이었던지라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8.4. 몽골 제국의 영향
한편 몽골 제국이 1200년대 후반에 이슬람권을 공격하면서 유럽에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퍼졌다. 십자군 국가들은 일 칸국과 연합하여 이슬람 국가들에 대항을 꾀했고 네스토리우스파를 믿었던 몇몇 몽골 군주와 그 아내의 영향으로 교황 및 프랑스왕과 서로 사신을 주고 받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일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맘루크 왕조의 맹활약으로 몽골이 발리자 그 연합도 점차 쇠퇴하게 된다.
8.5. 흑사병과 대항해시대의 서막
결국 이러한 십자군 전쟁의 여파는 그 당시 창궐하던 흑사병과 맞물려서 유럽 인구를 급격하게 줄이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자연적으로 농노들의 가치가 올라가는 결과를 낳았다.[44] 또한 예루살렘을 기점으로한 실크로드를 결과적으로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향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유럽인들은 실크로드를 대체하는 다른 길을 찾게 되었으며, 이는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되었다.
8.6. 중세의 끝
이와 같은 여파는 십자군 전쟁으로 실추된 교황권에 맞물려서 유럽 구성원의 머릿속에 '개인의 욕구, 권리' 등에 대한 인식들을 크게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르네상스의 발판이 되어 결과적으로 '''중세가 끝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고대시대 수준의 풀무를 사용하던 서양에 동양의 최신식 풀무가 십자군 전쟁 혹은 몽골의 정복전쟁으로 서양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강철의 대부분을 무역으로 충당하던 서양은 자체적으로 생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수력 풀무질 까지 발명하면서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독일 등지는 강철제품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게 된다. 그런데 풀무만 넘어가고 강철의 대량생산에 필요한 초강법은 넘어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45]
9. 유대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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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정화'의 일환으로 화형에 처해지는 유대인들?
십자군 전쟁은 당시 유럽 각지에 살고 있던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에게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종교적 광기로 이성을 상실한 병사들, 민중들이 게토로 쳐들어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 이후 12세기와 13세기 초까지 빈번히 일아났다.
민중 십자군 때에는 주로 독일 (쾰른, 마인츠 등지)에서 학살이 집중되었고 2차 십자군 때에는 프랑스와 독일, 3차 십자군 시에는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대관식이 겹친 잉글랜드의 요크, 런던 등지에서 수백명이 화형당하였다. 유대인들은 무기를 들고 저항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집단 자살로 소멸하는 경우가 많았다.[46] 13세기 초, 제5차와 6차 십자군 때에 재차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지만 이번에는 그 주모자들이 처형당하는 벌을 받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실은 기본적으로 유대인을 제국의 신민으로서 존중해 주었다.
이렇다보니, 현대 이스라엘이나 유태인들에게도 십자군이라는 이름은 달가운 이름이 아니다. 그래서, 조지 워커 부시가 크루세이더라고 미군을 십자군인양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파병한 것을 이야기하자, 부시 측근 유태인 정치인들도 그런 명칭은 좀 삼가달라고 충고하며 미국 내 유태인들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름이라고 우려했을 정도였다.
10. 평가
10.1. 미화
전쟁이 끝난 후 기독교 세계에서는 기사도적인 일화로 인해 영웅서사시처럼 미화되어 낭만적인 영웅담으로 전해졌다. 성전에 참가한 사람은 크게 존경 받았고 성지순례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꿈이었으므로 기독교 세계가 이 전쟁을 완전히 잊어버린것은 아니다. 또 오스만 제국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은 유럽국가들에게 보편적이었으므로 십자군 전쟁은 중세 이후로도 계속 유럽인들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실제로 포르투갈의 국왕 세바스티앙 1세는 십자군을 동경해 북아프리카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도 신성동맹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을 계획하기도 했다.
한편 19세기 전까지는 이슬람권에선 이 전쟁에 큰 관심이 없었다. 무슬림들은 일단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이고, 곧이어 터진 몽골 제국의 침략이 더 관심을 기울일 만한 큰 사건이었다. 근대 계몽주의 학자들은 십자군 전쟁을 중세의 암울한 역사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십자군 전쟁은 재조명받게 된다. 오스만 제국을 이긴 유럽 국가들이 중동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위에 '영향' 항목에 나온 대로 명분을 위해 자신들을 '''제2의 십자군'''이라 자화자찬한 것이다. 서구 국가들이 이렇게 중동 침략을 십자군 전쟁의 이미지로 차용하자 이슬람 측에서도 그에 맞서기 위해 살라흐 앗 딘 등 영웅을 재발굴해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십자군 전쟁은 순식간에 역사의 화두로 떠올랐다.
이러한 기류는 현대에도 이어져와서, 걸프 전쟁으로 시작해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의 전쟁에 서방세계의 다국적군이 중동으로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하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서양인들이 십자군 전쟁을 또 벌이고 있다!"라고 호도하며 언플을 시도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십자군 전쟁에 대한 밑의 이해타산적 재평가와 맞물려서 '테러와의 전쟁'은 핑계고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이 실제로는 석유를 노리고 중동을 침략하는 거라는 음모론 내지 선입견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더불어 이라크 전쟁을 두고 조지 워커 부시가 십자군을 가리키는 크루세이더라는 이름을 쓰던 것도 문제였다. 결국 결과도 십자군 전쟁 꼬락서니가 났지만. 미국에서도 이 말에 유태계 정치가들이 매우 언짢아했는데 십자군은 십자군 전쟁 당시, 종파가 다른 그리스도인이나 유태인들도 마구 학살하고 약탈했기 때문이다. 민중 십자군 항목을 봐도 십자군이 억울한 유태인을 죽여놓고 되려 적반하장으로 유태인이 그리스도인 죽였다고 소문내며 유럽 각지에서 유태인 집단 학살을 일으키게 했다. 동로마와 중동에 살던 정교회의 기독교인들 역시 이단이라며 십자군한테 학살당했다. 그러다보니 정교회는 "이슬람보다 더 악랄한 놈들"이라며 십자군을 증오할 정도. 이렇게 서구권은 십자군 전쟁을 잘난 듯이 종교 드립을 쓰거나 이렇게 멋지듯이 썼다.
10.2. 비판 및 격하
식민지 시대가 저문 이후,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드러낸 대표적인 전쟁이며 하느님의 뜻이란 이름하에 벌어진 종교적 광기의 전쟁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2000년 3월 5일 교황청은 <회상과 화해: 교회의 과거범죄>라는 문건에서 십자군을 "교회가 저지른 범죄"라고 공식 인증했다. 또한 같은 해 3월 12일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집전된 미사에서 십자군 전쟁을 교회의 잘못으로 거론하며 용서를 구했다. 1년 후 2001년, 교황은 그리스를 방문하여 십자군의 침략과 약탈과 학살 등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했다. 9.11 테러가 터진 이후엔 미국과 서방에서 "무슬림들이 어째서 우리를 이렇게 적대하는가?"라는 의문이 던져졌고 이에 서방-이슬람 관계의 역사에 대한 전체적인 고찰이 이루어졌는데 십자군 전쟁이 서방-이슬람 관계 악화의 첫 타자로 지목되어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기류에 편승한 것이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류의 저서와 "관대한 이슬람" 떡밥이다.[47]
한국에서도 기독교 쪽이라고 종종 편들어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래도 가톨릭이 벌여놓은 전쟁이라 가톨릭의 학살극이라고 비난하는 개신교 측 의견도 많다. 기독교 죄악사란 책을 쓴 한 목사는 십자군 전쟁을 "예수님 얼굴에 똥칠한, 기독교 최악의 광란"이라고 분노 어리게 비난하기도 했다. 다만 알아둘 점은, 가톨릭만 깐 게 아니라 이 책자에서 근현대 필리핀에서 벌인 필리핀인 학살을 두고 종교적 이념으로 정당화한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를 현대판 십자군으로서 역시 개신교도 예수님 이름을 더럽힌 학살을 저질렀기에 이를 옹호하면 안 된다고 다같이 까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십자군을 고등스러운 해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깠다.
10.3. 현대 역사학계의 평가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원인과 내용에 대한 다른 해석들이 나오고 있는데, 십자군 전쟁을 이해타산[48] 으로 일어난 것으로 봤으면 봤지 단순히 종교적 광기로 일으킨 전쟁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계속 나오고 있다. 사실 마르크스주의 쪽에서는 특유의 사적 유물론 탓에, 처음부터 대부분 경제적인 원인으로 설명해왔다.
왜 이런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우선 십자군의 종교적 광기 운운하는데 맨 처음으로 성전 드립을 쳤던 것은 서유럽도 이슬람도 아닌 동로마의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로마를 침공해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아넣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털어먹고 성십자가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가 신흥세력으로 일어났고, '종교적 동기'에 의해 사산 왕조 페르시아,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티나를 털어먹고 이베리아 반도까지 차지한다. 그리고 서유럽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서 프랑스로 몰려오는 무슬림들을 막기 위해 '종교적 동기'로 전쟁을 해야 했다. 여기서 십자군만 똑 떼어내어서 '종교적 동기로 전쟁을 일으켰으니 미친짓이네'라고 할 이유가 없다.
십자군 전쟁은 단순한 '기독교 vs 이슬람' 전쟁이 아니었고 조금만 파고들면 기독교인끼리도, 무슬림끼리도 죽어라 싸운 전쟁이다. 예를 들면 정교회 나라인 동로마 제국에선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십자군을 사람으로 생각하느니 차라리 이단자인 이슬람인들이 더 사람이고 십자군은 짐승이라고 증오하는 기록까지 가득 남겼을 정도. 하지만 십자군들도 동로마가 자신들을 야만인 취급하고 투르크와 협상으로 뒤통수 친 일 때문에 이를 갈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황제는 같은 황제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자신에게 충성을 강요하기도 하여 십자군이 펄쩍 뛰기도 했다.[49] 그 유명한 민중십자군의 헝가리 공격이나 4차 십자군의 자라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서로가 서로를 엿먹였다는 얘기이다.
한편 이슬람 세계에서는 기독교 세계가 내분하는 것 보고 열심히 자극받아 자기들도 시아파, 수니파, 아랍계, 페르시아계, 튀르크계, 나중에는 몽골계로 막 나누어져 서로 잘 싸웠다(...) 특히 이슬람 내부의 민족, 종파 간의 분쟁은 기독교의 분쟁보다 더 심했다.[50] . 기독교 측에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정치적 계기가 동로마 제국의 지원 요청이었다면, 이슬람 쪽에서는 아바스조 치하든, 우마이야조 치하든 예전의 안정된 통합 칼리파 제국 시절에는 이슬람 내부적인 '성서의 백성' 전통에 따라 적당히 돈만 받고 성지 인근의 기독교인, 유대인들을 알아서 살게 내비두던 걸 중동 세계가 시아파 파티마조와 튀르크계 수니파인 셀주크 제국으로 양분되면서 각기 다른 성향의 군벌들이 예루살렘을 번갈아가며 지배하면서 기존의 기독교도, 유대인들과 유지하던 첨예한 관계가 깨져 유럽의 귀에 들어갈 만큼 무슬림 군주들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자기들끼리 싸워댔고 배신과 뒷치기도 흔했으며 시리아에선 아예 영주들이 반대 세력 없애겠다고 줄줄이 예루살렘 왕국에 동맹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걸 단지 기독교-이슬람 전쟁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거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고 십자군 전쟁을 아주 잘못 본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훨씬 더 복잡, 다양한 뒷배경과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중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듯이 이 또한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토머스 매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계의 기독교 침공에 따른 반작용이라고 한다. 무어인들의 이베리아 반도 점령과 투르크군에 의해서 동방 정교회의 영역이 점령당해, 기독교 세계는 동서 할 것 없이 샌드위치식 압박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들의 발굴과 이분법적 시각의 분쇄로, 매든은 저런 낡은 사관은 이제 학계에서 이미 박살났다고 단언하는 입장까지 취하고 있다.
그동안 십자군 전쟁의 야만성 운운하면서 십자군의 안티오키아 학살, 예루살렘 학살, 마라트 안 누만 식인 사태 등이 거론되었지만 이런 행위를 십자군만 하지도 않았고 십자군 역시 관용을 베푼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십자군이 정복한 아르메니아, 에데사 지역이 무슬림 영토였나면 그것도 아니고 거긴 정교도들이 사는 곳이다. 또한 이슬람 군대 역시 장기나 바이바르스는 다른 이슬람 종파들을 대상으로 허구한 날 학살과 약탈을 벌여 같은 무슬림들에게 악당으로 증오받았다.[51] 이런 건 무시하는 것을 악질적 취사선택과 허수아비 찌르기라고 한다. 까놓고 말해서 십자군 전쟁은 그냥 규모가 크고 전장이 달랐을 뿐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전쟁이다. 십자군의 광기로 지목되는 성전 드립, 학살과 약탈은 이슬람이고 동로마고 십자군이고 가리지 않고 지난 수천 년간 당연하게 행해온 일이며 그 이후에도 행해진 일인데 마치 십자군만 특별했던 것처럼 비난할 수는 없다.
이는 십자군 전쟁을 중세사회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보자는 주장이다. 과거에는 십자군 전쟁을 19세기 제국주의를 보는 시각으로 해석하거나 20세기의 종교적 감수성에서 해석하는 시대착오적 해석이 난무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그 시기와 그 이전 시기의 일반적인 전쟁과 크게 다를것도 없던 십자군 전쟁만이 유독 (다른 전쟁들과 구분되는) 광신으로 빚어진 참극으로 주목받아왔다. 이러한 부분을 지적하고 보다 동시대 다른 전쟁들과 비교연구를 통해 보다 객관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것일 뿐이다.
십자군 전쟁은 영토 확장과 그에 따른 전쟁이 빈번했던 중세 유럽사의 많은 전쟁들과 규모는 다를지언정 비슷한 양상을 보였으며, 실은 복합적인 배경이 있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십자군 전쟁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는 방법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십자군 전쟁에 대한 평가는 '''사실 모든 역사적 사건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관련 역사학자, 문필가, 대중매체들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가치관, 고민, 세계관에 따라 해석 되었다'''. 서유럽 세계 전반에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기존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회의주의가 몰아 칠 때는 비이성적인 광신으로 인하여 조상들이 저지른 삽질로 평가했고, 그 이후 제국주의뽕을 쫙 빨아먹고 다른 문명과 인종을 노골적인 백인우월주의로 깔아뭉갤 때는 다시 긍정적인 평가를 받다가, 현대 사회에 들어 서구중심주의가 강력하게 도전받고, 이에 대한 대항마로 옥시덴탈리즘적 관점이 유행할 때는 다시 악랄한 유럽 제국주의의 시초로 보았다. 그러다가 현대에 들어서 기존의 서구중심주의의 대항마로 부상했던 옥시덴탈리즘적 관점도 이제 혁파 돼야할 낡은 관점이 되어버리고, 실증주의적 관점과 더불어 이슬람권 내부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면서 기독교 vs 이슬람 같은 듣기에는 빠방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거대한 단순화와 이분법적 관점 자체를 거부하고, 덤덤하게 후대의 관점에서 실제로 그 시대에 뛰며 먹고 살았던 개개인의 역사적 주체들의 (historical actors) 자발성을 (agency) 강조하는 현대의 시각이 부상한 것이다. 전공 분야에 대한 세분화가 깊게 진행되고, 역사적 사실 관계를 뭉떵그려 단순화하는 거대한 프레임 자체에 회의적인 현대 학계의 관점에서는 사실 11세기 부터 일러도 14세기, 관점에 따라 15세기, 16세기까지, 매번 이름만 '십자군'이란 상표를 걸었을 뿐이지 실제로 발생 동기, 목적, 관련 세력, 진행 방향 모두 판이하게 달랐던 300~400년에 걸쳐 터졌다가 수그러지기를 반복했던 현상을 '십자군 전쟁'이라는 하나의 관념으로만 뭉떵거리고 이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는 것 자체를 무리수로 본다.
임용한도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은 어마어마한 논란을 낳았는데, 세 가지는 말씀 드리고 가야 할 것 같아요.
첫째, 종교전쟁이라 불리는 것, 정의의 전쟁이라 불린 것, 십자군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한참 뒤의 주장이고) 그 뒤에 악용해 먹으면서 더 큰 문제가 생겼어요.
둘째,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 우리가 앞으로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하겠지만, 앞으로 나올 전쟁사의 절반은 중동이 끼어있어요. 중동은 위치상 세계문명의 교차로라구요.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십자군 전쟁의 패러다임이 계속 사용 되는 거에요. 한쪽은 성전으로, 한쪽은 우리가 당했는데 또 당한다는 식으로. 그러니 분노는 재생산되고, 여기에 대한 악용과 반감도 같이 커지고. (중략)
그리고 중세로 돌아와보면 좀 더 복합적인 일이 얽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거에요. 속죄한다고 성지 탈환한다고 (그 먼 거리까지) 가는 게 말이 되냐. 그래서 표면 그대로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침략 전쟁이었다." 또는 "종교적 광신에 의해 이교도들을 다 죽이라 그랬다."고 말하는데,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인들을) 짐승으로 보고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셋째, 돈 때문에 일어났다? 돈 때문에 간 사람도 많아요. 왜냐면 중세 사회는요, 30~40%가 극빈층이었어요. 그래서 어디에서 뭐가 났다고 하면 다 몰려가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기사들도 돈을 벌러 갔느냐? (그건 아닌 게) 자기 전 재산을 팔고간 기사들도 수두룩해요. 70년대까지 만해도 가장 유력한 가설이 상속을 못 받은 차자(次子)들이 봉건제는 장자에게만 세습이 되니까 상습 못 받은 사람들이 돈 벌러 갔다 이랬는데, 후에 자료를 확인해 보니까 상속 못 받으면 둘째는 거지가 되냐고. 둘째라도 어쨌든 귀족인데. 형네 얹혀서 살면 되지 왜 거기까지 가느냐고. 그리고 당시에는 거기까지 가는 데 2년 정도 생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돈이 필요합니다. 자기 땅 팔고 가고, 요즘 말로 하면 대부 받아서 평생을 갚아요. 물론 돈을 벌러 간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그 하나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라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37부 십자군 원정 1부.'''영상 13분 11초부터.
11. 대중매체 속의 십자군
십자군 전쟁은 영화의 소재로서 관심 있는 분야지만, 이슬람, 기독교와 얽혀있기 때문에 쉽게 건드리기 힘든 소재 중 하나이다.
-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이 제3차 십자군 원정 직전의 상황을 잘 그려냈다는 평을 받고 있으니, 당시의 광기와 복잡다양한 힘의 역학관계를 느껴보고 싶다면 볼 만하다. 그리고 킹덤 오브 헤븐 시청 시에는 반드시 감독판으로 찾아서 보는 것을 권한다. 무려 40여 분 가까이 차이가 나는 건 둘째치고, 그 40분이 대부분 본편(편집본)의 '엉성한' 스토리 서브플롯을 연결해주는 부분들이다.
또한, 리들리 스콧 특유의 단순한 종교관으로 인해서, 당시의 갈등 구도를 광신자와 깨어있는 근대적 인간의 이분법으로 왜곡하는 문제도 있다. 공정함을 기한답시고 기독교 측과 이슬람 측 모두에 광신자 캐릭터와 관용적인 합리주의자 캐릭터를 몇 개씩 넣었는데, 당시 상황은 절대 그렇게 단순하게 나뉘지 않는다.
- 게임 단테스 인페르노에서는 주인공이 제3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병사 출신이었다. 게임의 원작에서 십자군들이 천국의 화성천[52] 에 있는 데 반해, 여기서는 7층의 세 번째 구역[53] 에서 몬스터로 등장한다.
- 디즈니의 로빈후드에서는 히스경의 최면으로 인해 리처드 1세가 십자군에 나선것으로 각색되었고 종반부에 원정에서 돌아온 리처드 1세가 등장한다..
- 게임 어쌔신 크리드의 배경이기도 하다.
- 크루세이드 정벌기 근데 막상 이벤트 스테이지 기준 시간대와 배경이 오락가락하다. 게다가 나오는 소녀들이 과거~현대~미래 형 포스 등등..
- 미디블 토탈워 시리즈를 해보면 십자군과 지하드를 지겹게 경험할 수 있다. '할 수도 있고, 당할 수도 있고. 그리고 몽골과 티무르라는 핵폭탄이 따라온다. 아예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에서는 3차 십자군 원정을 배경으로 한 Crusades 캠페인이 추가되었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도 살라딘 미션이 있어 플레이할 수 있다.
-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는 이름 그대로 십자군 전쟁시기 왕 또는 제후를 선택해서 가문의 번영을 목표로 움직여야 한다. 당시 시대상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잘 구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물론 직접 십자군 또는 지하드에 참전이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은 DLC 발매로 인해 지역도 늘어나고, 십자군 전쟁 이전 시기인 바이킹 침공 시절과 사를마뉴 시절부터 플레이 가능해졌고, 플레이 가능한 정부체제도 늘어남에 따라 게임 제목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게임이 됐다. 제작진들도 게임 제목 잘못 지었다고 후회했다는 썰이 있어서, 게임 제목과 달리 게임내에서 십자군과 지하드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닌지라 이를 보완하는 DLC인 Holy Fury가 나왔다.
-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칠왕국이 도른을 정복하고자 공격한 도른 원정이 십자군 전쟁을 모티브로 했다. 중세 유럽을 모티브로 한 칠왕국과 중동을 모티브로 한 도른이니 십자군 전쟁이 딱 맞는다. 결과는 역사와 비슷하게 실패로 끝났다.
- 워해머 판타지에서 중동을 모티브로 한 아라비를 침공한 제국과 브레토니아의 원정이 십자군 전쟁으로 표현되었다. 물론 이는 아라비가 제국의 동맹국인 에스탈리아를 병합시키고 브레토니아를 침공하다보니 선공은 아라비가 걸었다. 실패로 끝난 역사와 달리 십자군은 성공하여 아라비 제국은 멸망시키고 원흉인 아라비 술탄 자파르도 죽인다. 특히 아라비는 제국과 브레토니아에게 철저하게 박살이 났다. 이후 아라비는 여러 도시국가들, 유목 부족들로 조각나서 두 번 다시는 통일된 제국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엔드 타임 때 그 영토까지 박살이 나면서 주민들은 용병이나 상인 노릇을 하며 떠도는 비참한 신세가 된다.
- 중세를 소재로 한 판타지 소설을 쓰는 하세쿠라 이스나의 작품에는 항상 언급된다.
- 늑대와 향신료에서도 언급된다. 20년 전 제후들이 무기를 손에 들고 성지를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 언급이 그것. 또한 작중 시점에서는 정교가 북방의 이교를 정벌하고 있는데 이는 북방 십자군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54] 자세한 내용은 늑대와 향신료/고증 항목 참조.
>"그건…. 구두 짓는 직인부터 양치기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무공을 꿈꾸었다는 전란 시대를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로렌스가 술을 홀짝이며 말하자 프리드는 "오."하는 표정이 되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어떤 불모의 대지조차 그곳을 손에 넣기 위해 제후들이 무기를 손에 들고 고군분투를 했다는 시대의 이야기일세."
>
>『늑대와 향신료』 17권. 142~143p
-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에서는 제1차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사람이 바로 신앙의 총본산에 있는 교황이며, 섬멸해야 할 대상인 이교도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
- Warhammer(구판)의 기사도의 국가 브레토니아도 중동국가가 모티브인 아라비를 상대로 십자군 원정을 한 적이 있다. 여기선 아라비가 먼저 남부 왕국들을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제국의 기사단과 브레토니아의 기사단이 연합을 하여 아라비를 공격하였다. 아라비 제국은 술탄 자파르가 전사하면서 분열되어 콩가루가 되어버렸고 제국과 브레토니아의 기사들은 현지에 식민지를 만들게 된다.
- Fate 시리즈에서도 중요한 인리의 터닝포인트로 예시된다. 여기서는 인간들과 전쟁 뿐만이 아니라 사도까지 난입하는 아비규환이었다고 한다.
- 1차 전쟁 때에는 네로 카오스가, 2차 전쟁 때에는 메렘 솔로몬의 마수들이 사막을 피로 물들였다.
- 3차 전쟁의 일부 전황은 거짓된 성배전쟁에서 소환된 사자심왕이 언급하면서 드러난다. 이때도 사도가 나타났는데, 사자심왕 & 살라딘 & 당대 산의 노인이 협공해 토벌했다고 한다.
- 9차 전쟁이 Fate/Grand Order 6장 특이점으로 중요 요소가 될 예정이었는데, 무언가로 인해 신성원탁영역 카멜롯으로 변질됐다.
- 킹덤 언더 파이어: 더 크루세이더는 십자군 전쟁을 참고한 전체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 일본 출신의 이탈리아 거주 작가이자 우리에게는 로마인 이야기로 잘 알려진 시오노 나나미는 십자군 전쟁을 다룬 소설인 십자군 이야기 3권을 펴냈다. 1차 십자군의 시작점인 클레르몽 공회의에서 부터 아크레 함락 이후 성전 기사단의 몰락과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 서술하였다.
12. 영토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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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년: 1차 십자군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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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5년: 십자군 국가의 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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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4년: 2차 십자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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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5년: 에데사 백국의 멸망과 2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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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년: 하틴 전투와 예루살렘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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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2년: 리처드 2세의 3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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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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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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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년: 프리드리히 2세의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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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0년: 예루살렘 상실과 몽골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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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1년: 알레포 상실과 9차 십자군
13. 기타
- 전쟁 때 중동에 가족까지 데리고 와서 살던 귀족과 기사들은 중동의 목욕탕 서비스에 반했는데, 특히 제모 기술에 만족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를 데려와 서비스를 받게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중동인인 목욕탕 직원들은 같은 남자라지만 치부를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 그들의 모습에 기겁하거나 외간 남자에게 발가벗은 자기 아내를 내놓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 십자군 전쟁은 유럽이 처음으로 커피를 접하는 계기가 됐다. 유럽에 전파됐을 때 커피를 이교도들이나 먹는 거라며 폄하하고 기피했지만 그럼에도 한번 커피를 맛본 사람들로 인해 커피는 묻히지 않았고, 결국은 훗날 유럽에서도 커피는 대중적인 기호품으로 자리잡았다.
14. 참고 자료
-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아민 말루프 저, 김이선 역, 아침이슬 발행, 2002년)
이 서적에 따르면 아랍인들은 십자군을 라틴인이라 칭하기보다 프랑크인이라 칭했는데, 기사의 중장갑과 서유럽 군대의 우수한 장비에 놀랐지만 가장 걱정스럽게 여긴 것은 뜻 밖에도 '법률과 행정'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슬람 학자가 말하길 "이슬람 세계는 대부분의 법률적 행정적 사안이 에미르의 독단으로 행해졌으나, 십자군들은 영주의 의견이 크더라도 '법률에 의거해' 처벌을 정한다"는 점과 "정확한 토지분배로 현지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한다. 학자는 "십자군의 군대보다, 이러한 법률과 행정제도가 이슬람의 진정한 적이 될 것"이라며 걱정했다. 로마법과 행정제도가 지금 인류의 법체계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58]
- 토머스 매든의 <십자군>
참고로 토머스 매든은 책의 끝부분에서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을 거론하고 비판하고 있는데,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이 십자군 전쟁으로 이슬람 세계가 유럽의 위협에 눌려 수세에 몰렸다고 주장하는 반면 토머스 매든은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라며 오히려 십자군 전쟁 이후에 이슬람 세계는 오스만 투르크의 등장으로 십자군 전쟁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져서 유럽이야말로 이렇게 부흥한 이슬람 세력의 위협에 시달렸다고 반박하고 있다.
- <동방의 부름: 십자군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피터 프랭코판 저/ 이종인 역/ 책과함께/ 2018년 12월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라서 기존의 학설을 부정하는 내용도 많은데, 우선 십자군 원정을 촉발시킨 계기가 이전까지의 통설인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가 셀주크 투르크에게 당한 패배 때문이 아니라 1090년대에 들어서 소아시아 반도로 몰려온 투르크족 군벌들을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새로운 학설을 제시했다. 다루는 범위는 민중 십자군에서 1차 십자군까지라 좁지만, 내용은 굉장히 깊이가 있는 편이다.
다만 이 책에도 약간의 흠은 있는데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세계사 지식이 부족했는지 16세기 멕시코의 아즈텍이 스페인에게 정복당하기 전까지 외부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작물인 옥수수를 십자군 보급 함대가 싣고 왔다고 적었는가 하면 민중 십자군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투르크군의 총검술 연습 대상이 되었다고 적었는데 총검이란 무기 자체가 17세기 말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진 물건이기 때문에 그 이전인 11세기 말 십자군 전쟁 때에는 당연히 총검도 없었고 그런 총검을 이용한 무술인 총검술 자체도 없었다. 아마 번역자가 활쏘기 연습을 총검술 연습이라고 잘못 번역한 듯(...)
- <기독교인이 본 십자군, 무슬림이 본 십자군> 김능우, 박용진 저/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 2020년 7월
- <이슬람 진영의 대 십자군 전쟁> 김능우 저/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 2016년 12월
결국 십자군 전쟁에 대해 최근 20여 년간 역사학계가 내놓은 새롭고 풍부한 연구성과를 접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영어를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영어 서적 중 유명한 책으로는 Thomas Asbridge의 <The Crusades: The Authoritative History of the War for the Holy Land> 등이 있다. 정말 전문적으로 공부하려면 라틴어나 중세 아랍어 등 당시의 언어들은 기본으로 공부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