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에드 랑고르

 

Rued Langgaard
(1893-1952)
덴마크의 음악가 겸 작곡가. 덴마크의 국민음악가로 불리는 칼 닐센에게 가려져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음악가이기도 하다.
1. 생애
2. 작품 경향
3. 여담


1. 생애


1893년 7월 28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음악가들이었는데 아버지 지그프리트 랑고르는 리스트의 제자로 피아니스트겸 왕립음악학교의 교수로 꽤 지위가 있는 인물이었으며 어머니 엠마 랑고르도 피아니스트였다. 부모가 사회적으로 꽤 성공을 거둔 인물들이었던터라 랑고르는 부족할게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역시나 음악가 집안의 환경덕인지 랑고르는 어릴때부터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5살부터 어머니 엠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 지그프리트가 이후 아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해 7살에 무려 슈만의 "다비드 동맹 무곡집"과 쇼팽의 "마주르카"를 연주하게 될 정도가 되었다. 쇼팽이나 슈만 모두 피아노곡에 있어서는 상당히 고난도 축에 드는 음악가들인지라 랑고르의 재능이 얼마나 일찍부터 뛰어났는지를 짐작할수 있는 대목.
이후 10살에는 덴마크 발비의 예수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였던 구스타프 헬스테드에게서 오르간을 배웠으며, 왕립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였던 크리스티안 페테르센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11살에는 프레데릭스 교회에서 처음으로 오르간 연주회를 열었다. 12살에는 크리스티안 프레데릭 에밀 호네만과 빌헬름 로젠베르크에서 음악 이론등을 배운뒤에는, 더이상 다른 이에게서는 배울게 없다고 선언하고서는 아버지에게 음악적인 의논이나 자문을 구하는거 외에는 스스로 음악을 연구해나가게 된다.
13살부터 본격적인 작곡에 들어갔는데 피아노곡 두곡과 가곡 두곡을 이때 출판했다. 그리고 이시점에 랑고르에게는 평생 악연(?)이게 되는 덴마크의 국민음악가 칼 닐센을 처음으로 만나 닐센에게서 한달정도 대위법을 공부한게 랑고르가 남에게서 음악을 배운 마지막이 되었다.
14살이 된 1908년, 랑고르는 첫 대규모 작품인 칸타타 "개선하는 여신들"을 코펜하겐에서 초연해 작곡가로서 정식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랑고르는 자신의 첫 교향곡의 작곡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바로 이곡이 교향곡 1번 "벼랑의 목가"이다. 개선하는 여신들은 대중적인 호평을 얻긴 했지만 비평가들에게는 미숙한 작품이란 평가를 얻게 되었고 이때부터 시작된 음악계와의 갈등탓인지 교향곡 1번 "벼랑의 목가"를 3년간 작곡한 끝에 완성했지만 덴마크 내에서는 "곡이 너무 길다"라면서 초연을 거절당했다.
분노한 랑고르 부자는 크리스마스 여행으로 베를린에 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당대 독일의 명지휘자인 아르투로 니키쉬와 막스 피들러를 만나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들은 랑고르의 교향곡에 대한 평가를 부탁받고 호평을 했으며 막스 피들러는 자신이 직접 지휘를 해주겠다고 나서기까지 하면서 마침내 1913년 4월, 피들러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해 랑고르의 교향곡 1번 "벼랑의 목가"와 관현악곡 "스핑크스"를 초연해주었다. 피들러의 초연은 성공적이었고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랑고르에게는 이 성공이 도움이 되지 못했다. 1914년 덴마크에서 교향곡 2번 "봄의 각성"을 자신의 지휘로 초연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큰 비판만 들어야 했다. 애초에 이건 랑고르의 약점탓이기도 했는데 랑고르는 지휘는 제대로 배운적이 없고 재능도 부족했는지 자신의 작품도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던게 컸던것 같다. 지휘자로서 활동을 시도했지만 재능의 문제로 인해서 이마저도 성공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해에 랑고르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버팀목이었던 아버지 지그프리트가 사망하면서 랑고르의 인생은 급전직하하게 된다. 음악가로서 재능은 있었지만 아버지의 후원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던 차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랑고르는 온실속 화초가 갑자기 폭풍우치는 들판으로 나가는것과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것.
그래도 랑고르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독립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이듬해인 1915년부터 코펜하겐의 가르미손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취직하게 되지만 1917년에 그만두게 되었고, 1917년부터 랑고르는 코펜하겐 각지의 교회들에서 오르간 연주자로서 근무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작곡가로서의 커리어도 순탄하지 못했는데 이런 어려움속에서도 1916년부터 18년까지 심혈을 기울인 관현악과 성악,합창을 동원한 "천체의 음악"을 작곡했으나 덴마크에서는 공연조차 되지 못했으며, 겨우 독일에서 두번 공연하는데에 그쳤다. 1920년에 내놓은 교향곡 제6번 "천상의 공격"을 코펜하겐에서 초연했으나 이것도 실패를 거두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음악적 진가를 알아봐준 곳은 조국 덴마크가 아니라 독일이었다. 연주조차 되지 못하던 덴마크와는 달리 독일 각지의 오케스트라에서 그의 교향곡 제4번 "낙엽"과 교향곡 제6번이 연주되었으며 그외에 실내악곡,피아노곡도 연주되어 호평을 받고 성공가도를 걸을수 있던 여건이 조성된 터라 독일에서 활동할것을 권유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끝내 랑고르는 독일에서의 성공도 뒤로하고 1924년 덴마크로 돌아와 은둔해버리면서 모처럼 조성되던 독일에서의 성공의 기운도 결국 끝이 나버리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무렵 랑고르는 콘스탄체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었고 어머니가 사망한 1926년에 둘은 결혼하게 된다.
3년여간 은둔하던 랑고르는 1927년 다시 활동을 재개하지만 작품활동이 아닌 음악계 내에서의 논쟁이나 단체활동에 전념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창작열이 꺾이고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다. 이시기 랑고르는 칼 닐센의 음악을 추종하는 덴마크내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닐센의 추종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가 하면 당시 유럽을 강타하며 덴마크에까지 밀려오던 재즈음악과 가벼운 유흥음악을 견제하고 순수 클래식 음악을 발전시킨다는 목적으로 직접 "클래식음악협회"라는 단체를 창설하지만 랑고르 본인의 독선적인 성격과 여러가지 내부 구성원들의 갈등이 폭발하며 결국 클래식음악협회는 공중분해 되버리고 말았다. 일련의 실패를 겪으면서 랑고르는 결국 덴마크 음악계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일련의 사태로 랑고르는 거의 작곡을 하지 못하고 이전의 자신의 교향곡들을 비롯한 작품들을 개작하는 정도의 작업만 겨우 하게되었다. 그나마 30살부터 국가보조금을 받게 되었던게 다행이었을 정도. 구직활동도 여전히 난항을 겪다가 47살이 된 1940년이 되어서야 랑고르는 유틀란트 반도 끝에 위치한 유서깊은 작은 소도시 리베의 대성당에서 종신 오르간 연주자로 채용되게 되었다.
하지만 랑고르는 자신의 고향인 코펜하겐에서 쫓겨났다는 생각때문인지 리베에서도 사람들과 불화하며 지냈다. 리베의 오르간 연주자들도 외지에서 온 랑고르를 별로 반기지 않았고 이때문에 랑고르와 리베 사람들은 으르렁거리기 일수였다. 더욱이 이때 랑고르는 말년의 베토벤처럼 외모나 옷차림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아 헝클어진 머리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다니면 리베의 아이들은 미친사람이 돌아다닌다고 놀려대곤 했다고 한다. 또한 성당의 신부들과도 이런저런 문제로 다투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리베 사람들과의 불화가 랑고르에게는 다시 창작열을 돌아오게 했는지, 랑고르는 리베에서 말년까지 새로운 작품들을 다수 작곡했다. 이후 오르간 연주자와 작곡을 병행하다가 1951년 갑작스럽게 찾아온 뇌졸중으로 쓰러진후 건강이 악화된 랑고르는 이듬해인 1952년 7월 10일, 59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랑고르는 사후 십수년여간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가 1968년 우연히 랑고르의 작품을 접하고 발굴해낸 스웨덴의 음악학자 보 바르너에 의해 재조명되면서 사후에서야 어느정도 인정을 받는 음악가가 되었다.

2. 작품 경향


랑고르가 조국 덴마크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데에는 후기 낭만파 음악과 신고전주의 음악의 양대산맥으로 갈등을 빚었던 리하르트 바그너요하네스 브람스의 갈등이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수있다. 이는 본의아니게 랑고르를 묻어버린 닐센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지는데 닐센은 애초부터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고전주의 음악을 이상으로 삼았고 안티 바그너쪽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닐센의 음악적 성향은 브람스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반면 랑고르는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후기 낭만주의쪽의 영향에서 자신의 음악적 기초를 시작했다. 문제는 덴마크의 음악적 기류가 닐센을 더 우위에 둔 탓에 랑고르의 음악은 저평가를 받게 되었다고 볼수 있다.
랑고르의 음악은 이런 후기 낭만주의 음악을 기반으로 두고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하게 된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어느정도 유사해보이기도 하지만 차이점은 랑고르는 스트라빈스키처럼 어느 한 시점에서 한 스타일적 음악만을 집중적으로 파기보다는 다양한 스타일들을 후기 낭만주의 음악에 녹여내는 실험을 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랑고르의 음악에서 리스트,바그너,슈트라우스의 후기 낭만주의부터 20세기 중후반에 등장하기 시작한 미니멀리즘적 요소에 뉴에이지적 요소까지 있는 이유가 이런 까닭이라 볼수있다.
한편으로 랑고르의 음악은 종교적인 색채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부분도 독특한 측면이다. 랑고르는 기본적으로 개신교 신자였으나 랑고르의 아버지 지그프리트는 19세기말에 대대적으로 유행하던 헬레네 블라바츠키의 신지학과 가톨릭의 신비주의의 영향력하에 있었고 랑고르도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신지학과 가톨릭 신비주의를 결합한 자신만의 독특한 신비주의적 종교성을 자신의 음악에 있어서 철학적인 토대로 삼았다. 이런점에서 신지학과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음악을 정립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스크랴빈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 현대의 뉴에이지 음악을 닮은 요소가 있는것도 이런 탓이라 할수 있다.
이런 이유인지 랑고르는 작곡도 인간의 영적 본질을 탐사하는것이라 여겨 작품활동이 일정치가 않았다. 말 그대로 영감을 받아야만 작곡이 가능했기 때문에 그의 작곡 패턴을 보면 불규칙적이고 일정치가 않은 특징을 보인다. 이런 그의 독특한 사고로 인해 그는 음악관 또한 독특했는데 음악이 영적인 본질을 탐사하고 그 본질을 추구하도록 하는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당연히 재즈나 대중적인 유흥을 위한 음악은 이런 영적이고 신비적인 본질을 탐색하는 음악의 본질에 어긋난다고 여겨서 반대한것이라 할수있다. 결국 그로 인해서 어찌보면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다는 측면도 있어보인다.
그의 음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것은 16곡에 달하는 교향곡들이다. 10대에 처음 교향곡을 작곡해 죽기 직전까지 작곡했고 개정과 보완을 수도없이 거친 교향곡들은 랑고르 음악의 거의 모든것이라 할수있는 작품들인데 앞서 설명한것처럼 후기 낭만주의부터 미니멀리즘,뉴에이지에 이르는 광범위한 요소들이 16곡의 교향곡들에 드러나고 있으며 각각의 교향곡들은 동일하다 싶은 유형이나 패턴도 존재하지 않을정도로 매우 폭이 넓은편이다. 예를 들어 교향곡 1번 "벼랑의 목가" 같은 경우는 장대한 스케일의 후기 낭만주의 음악적인 작품이라면 교향곡 3번 "청춘의 활기" 같은 경우는 사실상 피아노 협주곡이나 다름없는 작품이다. 그런가하면 교향곡 4번 "낙엽"은 장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번을 연상시키는 단악장 작품이며, 교향곡 6번 "천상의 공격"은 일종의 스토리가 있는 교향시 형식의 변주곡이다. 그외에도 불과 7분짜리의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키는 교향곡이 있는가하면 고전적인 4악장 형식의 교향곡도 있고 스타일도 중기 낭만주의의 슈만이나 멘델스존을 떠올리게 하는 듯한 교향곡까지 다양하다.
이런 랑고르를 두고 음악학자 벤드 트빈홀트 닐센은 '''낭만주의적이지만 동시에 낭만주의적이지 않은 음악"'이라고 한마디로 정의를 내린바가 있다. 그의 음악들을 전반적으로 들어본다면 매우 정곡을 찌른 정의라 할수 있을것이다.

3. 여담


  • 랑고르를 본의 아니게 묻어버린 닐센과 비교되는 편인데 둘은 가정환경이나 음악적 성향등에서 차이가 컸다. 닐센은 소도시의 가난한 대가족의 12남매중 7째라는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난 반면, 랑고르는 수도 코펜하겐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음악가 부부의 아들로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다는 차이가 있다. 더욱이 닐센은 고전주의를 자신의 음악적 본류로 여기고 바그너의 음악에는 반대를 분명히 했으며 브람스의 영향을 받은 반면, 랑고르는 리스트와 바그너,슈트라우스의 영향을 받았다. 물론 두 사람 모두 나중에는 현대적인 요소들을 자신의 음악에 녹여냈다는 공통점은 있다. 닐센은 신고전주의의 기반하에서 민족주의적 성향과 다조음악등을 수용했다면 랑고르 또한 후기 낭만주의의 기반하에서 현대적인 미니멀리즘과 뉴에이지적 성향을 일찌감치 표현했다는 특징이 있는것. 오늘날 덴마크에서는 닐센이 더 유명하고 랑고르는 재조명을 받긴 했지만 닐센만큼의 위상은 아니라고 할수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것은 그런 닐센도 소위 북유럽 국가의 다른 음악가들인 에드바르 그리그, 장 시벨리우스와 비교하면 인지도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 닐센과 랑고르는 한국에서도 역시나 인지도가 낮아서인지 백과사전이나 인터넷 사전등에서도 설명이 빈약하다는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고 있다. 그나마 닐센은 음악책이나 사전등에서 몇줄 설명하지만 랑고르는 아예 설명조차 없는편이다. 그나마 이영진의 "마이너리티 클래식"에서 한 챕터를 할애해 그의 일생과 음악적 성향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 랑고르의 작품은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권에서도 연주가 드문편이다. 그나마 랑고르의 교향곡 제1번 "벼랑의 목가"가 2017년 4월 27일, 구자범의 지휘로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되었는데 이 연주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초연이다. 이날의 연주는 상당한 호연으로 찬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