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 그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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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웨이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2. 생애
1843년에 베르겐의 스코틀랜드 혈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1] 1849년에 6살 때 악보 읽기와 짧은 피아노 연습곡을 배웠다. 하지만 그 과정이 힘들었는지 일기에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노 연습에 염증을 느꼈다. 그때 조금만 더 열심히 피아노를 배웠더라면 음악의 본질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라고 썼다. 1858년에는 노르웨이 바이올리니스트 올레 불이 그리그와 만났는데, 그는 그리그에게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라이프치히 음악원으로 간 그리그는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교육환경에 실망했다. 게다가 담당교수가 쇼팽을 비난했기 때문에 쇼팽을 흠모했던 그리그는 음악원을 더 싫어하게 되었다. 이 시절에 일시적으로 건강이 나빠지기도 했지만 1861년에는 스웨덴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기도 했다. 그리그는 1862년에 3년 반에 걸친 학업을 마치고 음악원을 졸업했다.
초기에는 주로 피아노곡을 작곡했는데, 이 시기에 나온 작품으로는 '3개의 피아노 소품'(1860), '4개의 피아노 소품, Op.1'(1861)이 있다. 1863년에는 음악적으로 뒤떨어진 베르겐을 떠나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옮겨서 약 3년을 보냈다. 여기서 유명한 덴마크 작곡가 닐스 가데(1817~1890)[2] 를 만나 조언을 받기도 했다. 1864년에는 같은 노르웨이 출신의 작곡가 노드라크(1842~1866)를 만난 것도 이곳에서였다. 노드라크는 그리그에게 민족음악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같은 해에 사촌동생이었던 니나와 약혼을 했는데, 그 때 나온 작품이 가곡 '그대를 사랑해, Op.5-3'이다.
노드라크와 그리그는 노르웨인 민족음악의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약속했으나, 노드라크는 2년 뒤인 1866년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 때 그리그가 쓴 작품이 '노드라크를 추모하는 장송행진곡 A단조'이다.[3] 그리그는 노드라크와의 약속을 지킬 것을 결의하고, 훗날 그것을 지켰다. 그리그는 '''“노드라크는 음악을 뛰어넘어 무엇이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고 평가했을 정도로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그리그는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헨리크 입센에게 극장의 일을 부탁한다. 그러나 극장주 비외르손은 거절한다. 이 사건은 노르웨이 국민주의 음악의 발전을 늦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노드라크가 사망한 해인 1866년에 그리그는 노르웨이 음악만으로 이루어진 연주회를 가졌는데, 이 때 나온 작품이 '바이올린 소나타 1번 F장조'였다. 이 작품을 접하고 감명을 받은 리스트는 이후 그리그를 꾸준히 후원해 주었다. 1867년에는 니나와 결혼했으며, 이후 니나는 반려자로서 그리그를 충실하게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성악가로서도 남편의 작품을 꾸준히 노래했다. 한편 그리그는 2년 뒤인 1869년에 노르웨이 민요의 악보 “고금의 산중음악”을 입수했으며, 이를 면밀히 연구해 훗날 진정한 민족음악을 작곡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했다.
1868년에는 '''피아노 협주곡 A단조'''를 작곡했는데, 이 곡은 그리그의 유일한 협주곡이 되었다. 이 작품을 접한 리스트는 '''"이것이야말로 스칸디나비아의 혼이다."'''라고 극찬하면서 그리그에게 '''"지금 잘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는 대로만 계속 하십시오."'''라고 격려했다.
1874년에는 입센에게서 그의 희곡 '페르 귄트'에 들어갈 연주용 부수음악 작곡을 의뢰하는 편지를 받았다. 그리그는 이 난해한 희곡에 대하여 상당히 고민했으나[4] 작곡하기 시작했는데, 그 작품이 극부수음악 '''페르 귄트'''였다. 그 후 1876년에 이 부수음악을 가지고 각각 4개의 곡을 가진 2개의 모음곡으로 만들게 되었다. 이 작품의 초연에는 입센과 그리그 모두 불참하였으나 이후 이 곡이 성공하자 입센은 그리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이 곡은 후에 그리그를 평생 먹여 살리는 곡이 되었다.
1877년에는 '현악 4중주 G단조'를, 1883년에는 '첼로 소나타 A단조'를 작곡하는 등 실내악 부분에서도 작곡을 진행하였다. 2년 뒤인 1885년에는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홀베르그 모음곡'을 작곡하였다. 1887년에는 '바이올린 소나타 3번 C단조'를 작곡하였다.
이 때 즈음에 그리그는 훈장을 많이 받았으나 그는 '''“훈장은 정말 쓸모 있는 물건이야. 여행가방 위에 훈장을 올려놓으면, 세관원들이 친절하게 대해준다네.”'''라고 말을 남기며 가능한 겸손해했다.[5]
1894년에는 자신의 피아노 작품인 '서정 소품집'에서 발췌하여 관현악으로 편곡한 '서정 모음곡'을 작곡하였고, 1896년에 피아노곡 '19개의 노르웨이 민요'를 작곡하였다. 한편 1898년에는 베르겐 음악제 감독에 취임해 자신의 음악을 마음껏 뽐내게 되었고, 같은 해에 피아노곡 '3개의 피아노 소품', 관현악곡 '교향적 춤곡'을 작곡하였다. 그 후 1901년에는 합창곡 '올레 불에게', 1906년에는 합창곡 '오래된 노르웨이 교회 선율에 의한 4개의 시편'을 작곡하였으며 1907년 9월 4일에 베르겐에서 사망하였다. 노르웨이 정부는 자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작곡가를 국장으로 예우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화장된 후 그가 그리워한 어느 피오르의 바위동굴에 안치되었다.
당시 그가 남겼던 유언은 '''Well, if it must be so.'''였다[6] .
3. 작품 성향
노르웨이의 쇼팽이라 불릴 정도로 피아노곡을 많이 썼으며, 실내악, 관현악, 합창곡, 가곡 등에서도 성과를 보였다.
4. 주요 작품
4.1. 관현악
- 교향곡 C단조 EG 119[7]
- 연주회 서곡 ‘가을에’ Op.11
- 노드라크를 추모하는 장송 행진곡 A단조 EG 107
-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16
- 부수음악 ‘페르 귄트’, Op.23
- 현악합주곡 홀베르그 모음곡 Op.40
- 페르귄트 모음곡 1번 Op.46[8][9]
- 페르귄트 모음곡 2번 Op.55
- 3개의 관현악 소품 Op.56
- 교향적 무곡 Op.64
4.2. 실내악
- 바이올린 소나타 1번 F장조 Op.8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간주곡 A단조 EG 115
- 바이올린 소나타 2번 G장조 Op.13
- 피아노 3중주 안단테 콘 모토 C단조 EG 116
- 현악 4중주 1번 G단조 Op.27
- 첼로 소나타 A단조 Op.36
- 바이올린 소나타 3번 C단조 Op.45
- 현악 4중주 2번 F장조(미완성)
4.3. 피아노
- 3개의 피아노 소품 EG 105
- 4개의 피아노 소품 Op.1
- 유머레스크 Op.6
- 피아노 소나타 E단조 Op.7
- 서정 소곡집 1~10권
- 노드라크를 추모하는 장송 행진곡 A단조[10]
- 25개의 노르웨이 민요와 춤곡 Op.17
- 노르웨이 민요에 의한 변주곡 형식의 발라드 G단조 Op.24
- 두 개의 노르웨이 민요에 의한 즉흥곡 Op.29
- 오래된 노르웨이 멜로디에 의한 변주곡 Op.51
- 19개의 노르웨이 민요 Op.66
- 노르웨이 농민 춤곡 Op.72
4.4. 가곡
- 마음의 선율 Op.5
- 아이들의 노래 Op.61
- 6개의 노래 EG 177
- 연가곡 산의 요정 Op.67
4.5. 합창
- 홀베르그 칸타타
- 올레 불에게
- 오래된 노르웨이 교회 멜로디에 의한 4개의 시편
4.6. 기타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얼굴이 비슷하다는 이가 많다.
- 키가 북유럽 출신 중 유난히 작은 편인데, 그때 당시의 북유럽 출신 남성 단신들도 160은 넘는 것에 비해 152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현재의 노르웨이 여성 평균키보다도 10cm 이상 작은 키이다. 하지만 옛날 사람이라 키가 작을 가능성도 있다.
[1] 원래 성은 그레이그(Greig)로 자코바이트였던 그리그의 증조부가 1746년 스코틀랜드의 자코바이트 반란에 참가했다가 실패한 뒤 스코틀랜드를 떠나 전세계를 떠돌던 중 노르웨이에 정착했다.[2] 로베르트 슈만 및 펠릭스 멘델스존의 친구였으며 보수적인 스타일의 작품들을 썼다. 카를 닐센이 그의 마지막 제자였다.[3] 말년에 자신의 죽음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한 그리그는 여행을 다닐 때마다 항상 이 곡의 악보를 챙겼다고 한다. 자신이 언제 어디서 죽더라도 장례식에서 이 곡을 연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이 곡은 그리그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었다.[4] 그리그 자신은 이 희곡이 '지나치게 철학적이며, '''기껏해야 스칸디나비아 안에서나 먹힐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판단했기에 작곡에 주저했다.[5] 출처1 출처2[6] '''"뭐, 이래야 한다면."'''[7] 작곡가가 악보에 "연주 금지"라고 썼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연주되었다.[8] 이 곡의 두 번째 악장인 '오제의 죽음'은 박정희 대통령 10.26 사태 이후 TV에서 사용되었다. 2005년 KBS 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주요 등장인물의 죽음 장면마다 배경음악으로 쓰였다. 한때는 국립현충원에 가면 하루 종일 원 없이 들을 수 있었다고(...)[9] 유명한 곡인 산왕의 궁전에서(In the Hall of the Mountain King)'이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10] 이 쪽이 원곡이고, 관현악 버전은 나중에 편곡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