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시벨리우스

 



[image]
1949년 85세의 모습.
'''Johan Julius Christian Sibelius
장 시벨리우스
'''
'''본명'''
'''요한 율리우스 크리스티안 시벨리우스'''
'''출생'''
1865년 12월 8일 핀란드 대공국 해멘린나
'''사망'''
1957년 9월 20일 핀란드
'''국적'''
핀란드 [image]
'''직업'''
작곡가
'''대표작'''
'''핀란디아'''

'''교향시 "핀란디아"(Finlandia).
지휘는 핀란드 태생의 유카-페카 사라스테'''
1. 개요
2. 생애
3. 작곡 특징
4. 사생활
6. 작품 목록
6.1. 오페라
6.2. 관현악 작품
6.2.2. 교향시
6.2.3. 부수음악
6.2.4. 기타 작품들
6.4.2. 기타 작품들
6.5. 피아노
6.6. 가곡
6.7. 합창
7. 기타 사항


1. 개요


핀란드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본명은 Johan Julius Christian Sibelius. Jean프랑스어Johan와 같은 의미이며 예명으로 사용한 이름이다. 친척 중에 Johan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어서 (...) 어렸을 때부터 장이라고 불렸다고... 그가 모국어로 사용한 스웨덴어핀란드어식으로 읽으면 '''얀 시벨리우스'''가 되지만 Jean은 프랑스어식 이름이므로 보통은 프랑스어식 발음법을 따라 '장'이라고 읽는다.

2. 생애


시벨리우스는 1865년 핀란드의 타바스테후스[1]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핀란드계 군의관[2], 어머니는 스웨덴계였는데, 2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피아노와 작곡을 배워 9살때부터 작곡을 시작했으나, 특별한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후에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작곡에 소질을 보이기 시작하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음대 대신 법대에 입학한다.
하지만 법대에 입학하자마자 헬싱키 음악원에도 입학,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고, 법대는 중퇴했다. 1889년 음악원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갔지만, 낯선 환경과 스승의 성향에 적응하지 못한데다 당시 그곳 음악계를 휩쓸던 리하르트 바그너, 구스타프 말러 등의 음악 사조에 상당한 부담을 느껴 으로 떠난다. 빈에서 시벨리우스는 그가 존경하는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1892년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헬싱키 음악원의 교수로 취임하고, 결혼도 하게 된다. 같은 해 쿨레르보 교향곡[3]을 완성, 초연하여 인정을 받기 시작한 후 연달아 교향시 '엔 사가'(전설), '카렐리아 모음곡', '네 개의 전설'을 발표, 명성을 쌓아갔고, 1899년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교향시 ''''핀란디아''''를 발표하게 된다.
핀란디아의 성공으로 그는 국민 작곡가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국가로부터 연금도 지급받게 된다. 그가 말년에 창작활동을 중단한 이유로도 제기되고 있다. 생활이 안정되자 교수직에서도 물러나고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교향곡 1,2번의 완성으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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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아이노 시벨리우스 Aino Sibelius 1871.08.10~1969.06.08 아내는 남편보다 더 오래살았다. '''98세''' 근데 사진은 젊은 시절 게 대부분이다. 현재 사진은 1888년 18세 당시.
그러나 갑작스레 귓병을 앓았고, 귓병은 4년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1904년 헬싱키 교외의 얘르벤패로 집을 옮기고, 저택의 이름을 아내 '아이노(Aino)'의 이름을 따 아이놀라로 한다. 이후 핀란드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면서 꾸준히 교향곡 3,4번, 현악사중주 D단조 등을 작곡하고, 영국, 미국으로 연주여행을 다니며 전세계로 이름을 알렸다.
1915년, 그의 50세 생일을 맞아 핀란드 전국에서 축하를 받았고, 연금도 50,000마르카로 증액된다. 교향곡 제 5번도 완성되어 탄생 축하 공연에서 초연된다. 그러나 그는 기존 교향곡 형식을 벗어나 새로운 형식을 지향하였고 5번 교향곡도 개정을 거듭하였다. 한편, 교향곡 6,7번 역시 구상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핀란드가 독립을 하게 되고 이때의 혼란 속에서 그는 잠시 창작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생활도 다시 안정되었고, 다시 창작 활동을 시작, 1923년 교향곡 6,7번을 잇달아 완성한다. 특히 7번은 기존의 교향곡 형식을 탈피, 시벨리우스만의 형식으로 그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걸작으로 불려진다.
그리고 1925년, 그의 나이 60세를 기념, 연금이 다시 증액되었고 국민들의 모금으로 '''27만 마르카'''가 모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훈장도 받았고, 전 세계로부터 축하 메세지도 받았다. 그리고 1930년, 그의 나이 65세에 마지막 교향시 '타피올라'를 끝으로 그는 '''이후 27년간 창작활동을 중단한다.''' 다만 30년대 중반까지도 시벨리우스가 교향곡 8번을 만들려고 시도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의 인기는 식지 않아 70세, 80세 생일에도 큰 환영을 받았으며, 1957년 자택에서 92세의 장수를 누리고 숨을 거둔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뤄졌으며, 성대한 장례식을 치룬 후 그의 자택 앞뜰에 묻혔다.

3. 작곡 특징


국민악파 음악가답게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민족적 소재들을 많이 사용했다. 특히 핀란드의 민족 서사시인 칼레발라에서 따온 내용들을 주제로 한 곡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포횰라의 딸>, <레민캐이넨 모음곡> 등.
그가 일생의 3분의 2가까이를 20세기에 살았음에도 불구, 그는 후기 낭만주의에 기반한 국민악파 특유의 음악만을 작곡했다.[4] 화성이나 기타 음악적 형식에서 현대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유일하게 그가 거부한 전통이 있었으니 그게 소나타 형식이었다.
그는 기존의 소나타 형식이나 교향곡 형식을 거부, 하나의 선율을 바탕으로 음악을 전개, 장대한 피날레로 이르는 자신만의 형식을 발전시켜 나갔고, 교향곡에 있어서도 점차로 형식을 파괴, 7번에 이르러서는 아예 4악장을 포기하고 1악장으로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5]
이렇게 봐서는 시벨리우스는 20세기에 한물간 낭만파와 국민주의 음악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한 구태의연한 작곡가로 보이지만, 자신만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는 당시 음악계와는 다른, 독특한 작곡가로 봐야 할 것이다.
후술된 것처럼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꿨던 만큼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4. 사생활


술, 담배를 매우 좋아하여 항상 손에서 떼지 않았고, 그 결과 43세에 후두암 진단을 받았다. 이 때 금주, 금연을 선언했으나, 수술로 암이 완쾌되자 바로 다시 술, 담배를 시작했다고.
음악원에 있을 때, 원래는 바이올리니스트를 목표로 작곡보다는 바이올린을 주로 했고, 교내 현악사중주에서 제2바이올린을 맡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바이올린을 그만둔 일화가 있었다. 교내 연주회에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독주를 맡게 되었는데, 너무 긴장한데다 흥분한 탓에 공연을 망친 것. 결국 자신은 바이올린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고 작곡과로 과를 옮겼다.

5. 미스터리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시벨리우스는 1930년 이후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곡을 발표하지 않다시피 했는데, 그가 왜 작곡을 중단했는지는 아직도 논란거리이다. 소나타 형식을 능가하는 자신만의 형식을 만들고자 했으나 한계에 부딪혀 작곡을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연금만으로도 생활이 안정되자 작곡을 그만두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설로는 말년에 들어서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한데다가, 결정적으로 자기 작품에 대한 자신감도 줄어 창작 의욕이 감퇴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가설은 '''당시 급변하던 음악계의 격랑에 시벨리우스가 따라가지를 못해서'''라는 설명이 뒷받침한다. 실제로도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구스타프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세사르 프랑크, 에릭 사티, 파울 힌데미트, 벨라 바르톡 등 오늘날 20세기 초중반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진 음악가들의 음악과 시벨리우스의 후기 낭만파적, 국민악파적 음악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6] 시벨리우스와 그나마 비슷한 성향을 보인 음악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정도지만, 라흐마니노프는 후기 낭만파라는 공통점은 있어도 시벨리우스와는 색채가 다른 편이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20세기 대편성 관현악의 대가로서 상당히 혁신적인 음악을 다수 작곡했다는 점에서는 구스타프 말러와 비슷하다.
한편으로, 시벨리우스는 급변하는 조류들을 이끄는 음악가들을 부러워하기도 한 듯하다. 자신의 일기에 '''"누구나 다 혁신적인 천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쓴 것을 보면, 역으로 늙은 자신은 이제 시대를 선도하는 천재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탄한 것으로 보인다. 시벨리우스가 장수한 것도 있지만, 똑같이 장수했으며 후기 낭만파에서 출발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창작 성향이 시대를 따라 변화해 간 것을 보면, 확실히 시벨리우스는 20세기 초중반에 태동하기 시작한 현대음악과는 성향도 맞지 않았고, 따라가 보려고 해도 순탄치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시벨리우스의 아내 아이노의 회고에 의하면 1940년대 초에 시벨리우스가 갑자기 카렐리아 모음곡의 일부를 비롯한 다수의 악보들을 마당으로 들고 나가서는 '''불싸질러버렸다'''고 한다.
또한 시벨리우스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을 몹시 부담스러워했는데, 핀란드의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은 것은 물론 미국에서도 열광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이것이 되려 창작의지를 꺾어버린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에서의 시벨리우스의 인기는 비유하자면 스타의 인기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었고,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은 여러 오케스트라들에서 단골로 연주할 정도였다. 얼마나 연주가 많았는지 "로라"라는 영화에서 다나 앤드류스가 연기한 탐정 왈, "그들은 연주 직전에 프로그램을 바꿔서 '''오직 시벨리우스만''' 연주했다구요!"라는 대사가 나왔을 정도다.
특히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였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는 시벨리우스 스페셜리스트로, 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을 연주했을 정도였다. 이런 미국의 시벨리우스 인기에는 난해한 현대음악[7]에 대한 반동적인 성격도 어느 정도 있었다. 이를 간파한 (말러 - 쇤베르크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시벨리우스 음악이 훌륭한거면 음악의 표준을 바꿔야 된다'''라고 대차게 깠을 정도였다. 너무 과격하게 깐 나머지 같은 시벨리우스까들이 '''님아 그렇게 까면 님만 욕먹으니 수위좀 낮추삼'''하고 충고했을 정도였다고.
쿠세비츠키는 1930년부터 32년까지 시벨리우스에게 8번 교향곡이 언제 완성되느냐고 들들 볶았다. 실제로 시벨리우스는 8번 교향곡을 완성하려고 시도했고, 쿠세비츠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교향곡의 저작권 문제를 걱정할 정도였다. 31년에는 베를린에 다녀온 후에 새 교향곡을 32년 봄에 연주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이 정보가 새서 보스턴 언론에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그 소식을 접한 시벨리우스는 공황상태에 빠졌고 8번을 만들려던 생각을 접은 것으로 보였다.
결론적으로, 시벨리우스의 창작 중단에는 현대음악의 조류에 대한 갈등, 미국의 엄청난(지나친) 인기에서 비롯된 고뇌가 가장 중심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시벨리우스 자신이 침묵한 탓에 정확한 진상이야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6. 작품 목록



6.1. 오페라


  • 탑 속의 처녀

6.2. 관현악 작품



6.2.1. 교향곡


  • 교향곡 1번 E단조
  • 교향곡 2번 D장조
  • 교향곡 3번 C장조
  • 교향곡 4번 A단조
  • 교향곡 5번 E플랫 장조
  • 교향곡 6번 D단조
  • 교향곡 7번 C장조
  • 소프라노, 바리톤, 남성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 '쿨레르보' [8]

6.2.2. 교향시


  • 엔 사가 Op.9
  • 봄노래 Op.16
  • 핀란디아 Op.26
  • 밤의 기행과 일출 Op.55
  • 포횰라의 딸 Op.49
  • 판과 에코 Op.53a
  • 바드 Op.64
  • 타피올라 Op.112
  • 레미케이넨 모음곡 Op.22
  • 드라이어드 Op.45-1

6.2.3. 부수음악


  • 죽음(Kuolema) [9]
  • 펠레아스와 멜라장드[10]
  • 벨사자르의 향연
  • 백조공주
  • 스카라무슈
  • 누구든지
  • 템페스트
  • 크리스챤 2세
  • 외들란

6.2.4. 기타 작품들


  • 오케스트라를 위한 '카사치오네'
  • 카렐리아 서곡
  • 카렐리아 모음곡
  • 멜로드라마 '숲의 정'
  • 역사적 정경1 Op.25
  • 역사적 정경2 Op.66
  • 서곡 A장조 Op.114
  • 칸초네타 Op.62-a
  • 대학의 행진곡 JS115
  • 관현악을 위한 3개의 소품 Op.96
  • 예거 행진곡

6.3. 협주곡


  •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2개의 세레나데 Op.69
  •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2개의 소품 Op.77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6개의 유머레스크
  •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 D단조 Op.117

6.4. 실내악



6.4.1. 현악 4중주


  • 현악 4중주 E플랫 장조 JS184
  • 현악 4중주 A단조 JS183
  • 현악 4중주 D단조 '친근한 목소리' Op.56
  • 현악 4중주 B플랫 장조 Op.4
  • 안단테 페스티보

6.4.2. 기타 작품들


  • 피아노 3중주 D장조 '코르포'
  • 피아노 3중주 A단조 '하프트라스크'
  • 바이올린 소나타 F장조
  • 피아노 5중주 G단조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소품 Op.115

6.5. 피아노


  • 피아노 모음곡
  • 6개의 즉흥곡 Op.5
  • 피아노소나타 F장조 Op.12
  • 피아노를 위한 3개의 소품 '퀼리키' Op.41
  • 10개의 소품 Op.24
  • 10개의 바가텔 Op.34
  • 10개의 소품 Op.58
  • 3개의 소나티나 Op.67
  • 4개의 서정적 소품 Op.74
  •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 "나무" Op.75
  • 5개의 소품 “꽃” Op.85
  • 8개의 짧은 소품 Op.99

6.6. 가곡


  • 5개의 크리스마스 노래 Op.1
  • 5개의 노래 Op.38(1-가을 저녁, 2- 바다 옆의 발코니에서, 3-밤에, 그 외 2곡)
  • 3월의 눈 위의 다이아몬드 Op.36-6
  • 일출 Op.37-3
  • 아리오소 Op.3
  • 쿨레르보의 탄식 Op.7
  • 7개의 노래 Op.13
  • 7개의 노래 Op.17
  • 2개의 노래 Op.35,60
  • 6개의 노래 Op.36,50,72,86,90
  • 5개의 노래 Op.37,38
  • 8개의 노래 Op.57,61
  • 연가곡 Op.88

6.7. 합창


  • 사랑하는 사람 JS160b
  • 레미케이넨의 노래 Op.31/1
  • 불의 기원 Op.32
  • 대지의 노래 Op.93
  • 대지의 송가 Op.95
  • 즉흥곡 Op.19

7. 기타 사항


보통은 음악시간에 '국민악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배우게 되는데, 이 시기에 이 사람의 이름이 으로 사용되는 불상사를 겪는다. 물론 현악 전공자 입장에서도 저 바이올린 협주곡의 난이도 때문에 욕처럼 자주 읊는다.
딸 다섯(원래 여섯이었으나 한 명(3녀 크리스티)은 어린 나이에 사망)을 두었고 국내에서 Forever라는 발라드곡으로 유명한 핀란드의 파워 메탈 밴드 스트라토바리우스로리 포라가 그의 손자이다.(Lauri Porra는 2006년에 스트라토바리우스에 참여했고 Forever는 90년대에 제작됐으므로 로리 포라가 Forever를 작곡하지는 않았다.) 장녀 에바는 사업가 아르비 팔로헤이모(Arvi Paloheimo)와 결혼하여 남편 회사의 CEO가 되었고 차녀 루스는 루스 스넬만으로 알려진 배우, 4녀 카타리나는 에로 일베스(Eero Ilves)라는 변호사와, 5녀 마르가레타는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유시 얄라스(Jussi Jalas, 본명은 아르마스 유시 베이코 블롬슈타트Armas Jussi Veikko Blomstedt)와 결혼했다. 디자이너 막내 하이디는 유시 얄라스의 형제인 건축가 아울리스 블롬슈타트(Aulis Blomstedt)의 아내.
아내 아이노 예르네펠트의 오빠들인 아르비드는 작가, 아르마스는 시벨리우스의 친구이기도 한 작곡가이자 지휘자, 에로(Eero)는 사실주의 화가로 핀란드 문화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녀의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많이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정신의학자였던 남동생 크리스찬 시벨리우스는 핀란드 현대 정신의학의 확립자라고 한다. 그의 아내 카이노 이하넬마 스완(Kaino Ihanelma Swan)은 작가이다.
아내 아이노를 흠모했던 소설가 유하니 아호(Juhani Aho)와는 말년에 친한 친구이자 이웃으로 지냈다고 한다.
작곡가의 기념비가 헬싱키에 있고, 이름을 딴 박물관이 투르쿠에, 생가가 해멘린나(Hämeenlinna)에, 아이놀라가 얘르벤패(Järvenpää)에 있다. 시벨리우스 기념비는 헬싱키역에서 멀리 떨어진 시벨리우스 공원에 위치해 있다. 시벨리우스 박물관은 투르쿠 대성당 주변에 위치해 있는데, 악기 전시를 지나서 안쪽에 시벨리우스 관련 전시실과 다큐멘터리 영상실이 있다. 시벨리우스 생가는 해멘린나 역에서는 20~30분 정도 걸어가야 하지만, 해멘린나 버스 터미널에서는 도보로 5분 내에 찾아갈 수 있다.[11] 아이놀라는 얘르벤패보다 아이놀라 역에서 하차하면 훨씬 가깝고, 시벨리우스의 후손이 실제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개방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홈페이지에서 확인 후 방문해야 한다.


[1] 핀란드어로는 해멘린나(Hämeenlinna).[2] 혈통은 핀란드계이나 스웨덴어를 사용했다.[3] 교향시라고 볼 수도 있다.[4] 그의 교향곡 6번과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같이 들어보자. 참고로 드뷔시는 1894년에 작곡했고, 시벨리우스는 '''1923년'''에 작곡했다.[5] 근데 이 때가 1924년이었는데, 말러는 칸타타, 연가곡 형식을 교향곡에 사용했고, 단악장 형식도 이미 칼 닐센이 9년 앞서 사용했다.(...)[6] 시벨리우스는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를 '''유치찬란하다'''고 맹비난한 바 있다고 한다.[7] 물론 리게티 죄르지, 존 케이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올리비에 메시앙, 피에르 불레즈,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같은 전후(戰後)의 진짜 난해한 음악들에 비하면 이 시대의 난해한 음악이라고 해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정도였지만, 후기 낭만파의 음악어법에 익숙한 대중들에게는 이런 음악도 충분히 당황스럽게 들렸을 것이다. [8] 교향시로 보기도 한다.[9] 이 중에서 '슬픈 왈츠'는 따로 떼어져 연주회에서 연주되곤 한다.[10] 참고로 같은 제목으로 드뷔시는 오페라를, 쇤베르크는 교향시를 썼다.[11] 배경음악으로 시벨리우스의 음악이 계속 재생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