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슈트라우스
▲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Op.30. 연주는 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관현악단(Gustav Mahler Youth Orchestra).
1. 개요
풀네임은 리하르트 게오르크 슈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독일 후기 낭만파 음악의 마지막을 장식한 음악가이자 엑토르 베를리오즈,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와 함께 서양 관현악 작법의 3대 대가로 손꼽힌다.
2. 생애
뮌헨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당대의 유명 호른 연주자로 명성을 얻은 프란츠 슈트라우스[1] 였다. 음악 교육은 당연히 아버지로부터 받기 시작했고, 불과 여섯 살 때 '재단사 폴카' 라는 곡을 처음 작곡해 신동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아버지가 재직하던 뮌헨 궁정오페라 관현악단의 리허설도 자주 참관했고, 단원들과 지휘자로부터 음악 이론과 관현악 편곡법 등을 계속 배웠다.
1874년에는 바그너의 오페라들을 처음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 다만 아버지인 프란츠와 주변 지인들이 극렬 바그너 안티[2] 였던 탓에 드러내놓고 좋았다고 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1882년에는 뮌헨 대학교에 입학했고, 여기서는 음악이 아닌 철학과 예술사를 전공했다.
이듬해에는 베를린으로 잠깐 옮겨서 당대 최고의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던 한스 폰 뷜로의 보조 지휘자로 일했는데, 뷜로가 이 후배를 좋게 봤는지 1885년에 자신의 후임으로 마이닝엔 궁정극장 음악 감독 직책을 넘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마이닝엔 재직 시절부터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시인이었던 친구 알렉산더 리터의 영향으로 점차 바그너와 리스트 류의 '신독일파' 계열 음악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작곡에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뷜로와의 관계도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3]
1894년에는 첫 오페라인 '군트람' 을 발표했지만 비평계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한 소프라노 가수인 파울리네 데 아나를 아내로 맞이하는 행운도 얻었으며, 보수적인 비평가들의 태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작곡과 지휘를 병행했다.
1905년에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오페라로 만든 '살로메' 가 당시로서는 극단적인 잔인함과 외설성으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어 작곡한 '엘렉트라' 도 전작에 뒤지지 않는 파격성을 보여주면서 '무서운 신예' 로 자신의 이미지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엘렉트라' 에서부터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대본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은 1932년의 '아라벨라' 까지 모두 여섯 편의 오페라 대본을 제공하면서 명작 오페라들의 양산에 큰 몫을 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부터 독일에 득세하기 시작한 나치와 영 좋지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명성에 흠이 가기 시작했고, 괴벨스의 선전성 휘하에 만들어진 '제국 음악국(Reichsmusikkammer)' 의 총재로 취임하자 좌파/반나치 인사들이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슈트라우스와 나치의 관계는 원만하기는 커녕 계속 삐걱댔고, 호프만슈탈에 이어 새로 받아들인 유대인 대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자 총재 직책을 사임해야 했다.
이렇게 나치와 늘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지만, 슈트라우스는 독일을 떠나지 않고 계속 남아서 음악 활동을 했다. 종전 후에는 나치 부역 문제로 군정 측으로부터 활동 제한 조치를 받았지만, 예전부터 쌓아온 명성 덕인지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미 80대를 넘긴 고령이었던 만큼 건강도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고, 대외적인 활동도 점차 뜸해졌다. 1947년 런던에서 지휘자로 마지막 공식 연주회를 가진 뒤에는 해외 여행도 하지 않았고, 독일 최남단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자택에 칩거하며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를 비롯한 마지막 작품들을 남긴 뒤 1949년에 타계했다.
성이 같은 Strauss로 스펠링까지 동일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가문과는 혈연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다.''' 헷갈리지 말 것. 애초 출신 국가부터 다르기도 하고.[4] 'Strauss'라는 단어가 '싸움'이라는 의미라 하니, 조상들 중 싸움 좀 하는 분이 계셨다는 점, 그리고 'ß'가 아닌 'ss'라는 점에서 스위스계일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의 공통점은 있겠다. 여담으로 프랑스인인 레비스트로스의 스트로스 역시 Strauss이다.
3. 주요 작품들
3.1. 관현악곡
3.1.1. 교향곡
'''교향곡 1번 D단조 AV.69''' (1880)
'''교향곡 2번 F단조 Op.12''' (1883)
'''가정 교향곡 F장조 Op.53'''(1904)
'''알프스 교향곡 B플랫 단조 Op.64'''(1915)[5]
3.1.2. 교향시
'''이탈리아에서 G장조 Op.16''' (1886)
'''돈 후안 E장조 Op.20'''(1889)
맥베스 Op.23 (1888. 1890 개정)
'''죽음과 변용 Op.24''' (1888-89)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Op.28''' (1895)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Op.30''' (1896)
'''돈 키호테 Op.35''' (1898)
'''영웅의 생애 Op.40''' (1899)
3.1.3. 서곡
'''연주회용 서곡 B단조''' (1876)
서곡 E단조 (1876)
서곡 E장조 (1878)
서곡 A단조 (1879)
연주회용 서곡 C단조 (1883)
3.1.4. 그 외 관현악곡
세레나데 G장조 (1877)
안단테 B플랫 장조 (1877)
'''축전 행진곡 E플랫 장조 Op.1''' (1881)
축전 행진곡 C장조 (1888)
'''축전 전주곡 Op.61'''
'''장미의 기사 모음곡 AV.145'''
3.1.5. 편곡 작품, 부수음악
부수음악 '평민 귀족' (1917)
프랑수아 쿠프랭의 하프시코드 소품에 의한 무용 모음곡 (1923)
프랑수아 쿠프랭의 하프시코드 소품에 의한 소관현악을 위한 '디베르티멘토' Op.86 (1940-41)
3.2. 현악합주
23명의 현악 주자[6] 를 위한 '''메타모르포젠''' (1945)
3.3. 관악합주
13개의 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Op.7 (1881)
13개의 관악기를 위한 모음곡 Op.4 (1884)
3.4. 협주곡
클라리넷과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E플랫 장조 (1879)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Op.8''' (1881-82)
'''호른 협주곡 1번 E플랫장조 Op.11''' (1882-83)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로망스 (1883)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부를레스케 D단조''' (1886-90)
피아노(왼손 피아니스트)와 관현악을 위한 '가정 교향곡 부록' (1925)
피아노(왼손 피아니스트)와 관현악을 위한 '파나텐 축제 행렬' (1926-27)
'''호른 협주곡 2번 E플랫장조''' (1942)
'''오보에 협주곡 D장조''' (1945)
'''클라리넷, 바순과 현을 위한 이중 소협주곡'''(1947)
3.5. 실내악
'''현악 4중주 C단조''' (1875)
'''피아노 3중주 1번 A장조'''(1877)
'''피아노 3중주 2번 D장조'''(1878)
'''현악 4중주 E플랫 장조'''(1879)
'''현악 4중주 A장조 Op.2''' (1880)
'''첼로 소나타 F장조 Op.6''' (1880-81)
'''피아노 4중주 C단조 Op.13'''(1883-85)
'''바이올린 소나타 E플랫 장조 Op.18''' (1887)[7]
피아노 4중주를 위한 2개의 소품 (1894)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알레그레토 E장조 (1948)
3.6. 피아노
'''피아노 소나타 B단조 Op.5''' (1880~1)
'''5개의 피아노 소품 Op.3''' (1882)
모음곡 '''인상집 Op.9''' (1882-84)
3.7. 가곡
헤르만 길름의 시집 '마지막 장' 에 의한 8개의 가곡 Op.10(1885)
5개의 중성(中聲)용 가곡 Op.15 (1886)
아돌프 프리드리히 폰 샤크 백작의 시에 의한 6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17(1886-87)
아돌프 프리드리히 폰 샤크 백작의 시집 '연잎' 에 의한 6개의 가곡 Op.19 (1888)
펠릭스 단의 시집 '소녀의 꽃' 에 의한 4개의 가곡 Op.22 (1888)
펠릭스 단의 시집 '소박한 가락' 에 의한 5개의 가곡 Op.21( 1889-90)
니콜라우스 폰 레나우의 시에 의한 2개의 가곡 Op.26(1891)
'''4개의 가곡 Op.27'''(1894)
오토 율리우스 비어바움의 시에 의한 3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29(1895)
칼 부세와 리하르트 데멜의 시에 의한 4개의 가곡 Op.31(1895-96)
5개의 가곡 Op.32(1896)
관현악 반주에 의한 4개의 가곡 Op.33(1896-97)
4개의 가곡 Op.36(1897-98)
6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37(1896-98)
이노크 아든 Op.38 (낭독자와 피아노를 위한 멜로드라마,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에 의함)
5개의 가곡 Op.39(1898)
5개의 가곡 Op.41(1899)
옛 독일 시인들의 시에 의한 3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43(1899)
관현악 반주에 의한 2개의 저성(低聲)용 가곡 Op.44(1899)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에 의한 5개의 가곡Op.46(1899-1900)
루트비히 울란트의 시에 의한 5개의 가곡 Op.47(1900)
오토 율리우스 비어바움과 칼 헹켈의 시에 의한 5개의 가곡 Op.48(1900)
8개의 가곡 Op.49(1901)
관현악 반주에 의한 2개의 저음 베이스용 가곡 Op.51(1902/06)
6개의 가곡 Op.56(1903/05-06)
알프레트 케어의 시에 의한 12개의 가곡 '상인의 거울' Op.66(1918)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 과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서동시집' 에 의한 6개의 고성(高聲)용 가곡 Op.67(1918)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시에 의한 6개의 가곡 Op.68(1918)
아힘 폰 아르님과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에 의한 5개의 작은 가곡 Op.69(1918)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시에 의한 3개의 고성(高聲)용 찬가 Op.71(1921)
한스 베트게의 페르시아와 중국 번역시집 '동양의 노래' 에 의한 5개의 가곡 Op.77(1928)
4개의 고음 베이스용 가곡 Op.87(1922/29/35)
3개의 가곡 Op.88(1933/42)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4개의 마지막 노래''' (1948)
가곡 '아욱꽃' (1948)[8]
3.8. 오페라
'''군트람 Op.25'''(1892-93. 1940 개정)
불의 결핍 Op.50(1900-01)
'''살로메 Op.54'''(1903-05)
'''엘렉트라 Op.58'''(1906-08)
'''장미의 기사 Op.59'''(1909-10)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Op.60'''(1911-12. 1915-16 개정)
'''그림자 없는 여인 Op.65'''( 1914-17)
인테르메초 Op.72(1918-23)
이집트의 헬레나 Op.75(1923-27)
'''아라벨라''' Op.79(1929-32)
말없는 여인(1933-34)
평화의 날 Op.81(1935-36)
다프네 Op.82(1936-37)
다나에의 사랑 Op.83(1938-40)
'''카프리치오 Op.85'''(1940-41)
3.9. 발레
요셉의 전설 Op.63(1914)
발레 '요셉의 전설' 에 의한 교향 단편 (1947) 위의 작품에서 발췌한 것.
휘핑크림 Op.70(1920-21)
4. 창작 시기별 성향과 관현악법
4.1. 창작 시기별 구분
대체로(임의로 나눈 것으로, 절대적인 구분은 아님)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전 생애를 통해 초기에는 교향시를 비롯한 표제음악, 중후기에는 오페라에 전념한 것을 볼 수 있다.
- 아버지+뷜로의 영향을 받은 시기(24세까지): 주로 피아노곡, 실내악, 교향곡, 협주곡 등 절대음악 중심
예: 피아노&관현악을 위한 불레스케, 두 개의 교향곡,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호른협주곡 1번 등
- 교향시, 오페라 작곡 시기(25세~78세): 교향시 같은 표제음악이나 오페라와 같은 무대 음악 중심
예): 돈 후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돈키호테, 가정교향곡, 알프스교향곡, 영웅의 생애,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등
오페라 창작 시기: 음악 자체보다는 표제나 가사를 통해 내용을 전달하는데 도가 튼 탓인지, '영웅의 생애' 이후 작곡한 오페라들도 주목할 만한 걸작들이 꽤 많은 편이다. 특히 호프만슈탈과 작업한 오페라들은 지금도 독일어권 뿐 아니라 전세계의 오페라극장들에서 상시 상연작으로 공연되고 있다. 하지만 교향시에서 보여준 대담한 성향은 '엘렉트라' 이후 많이 완화되어 있으며, 빈 왈츠에 대한 오마주를 보여주는 '장미의 기사' 나 모차르트 오페라의 영향을 반영한 '그림자 없는 여인' 에서처럼 신고전주의 계통의 사조로 경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 군트람, 카프리치오,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엘렉트라, 살로메, 장미의 기사, 그림자 없는 여인 등
- 말년(79세~죽음): 가곡, 실내악 등 소규모 음악 중심
예): 오보에 협주곡, 메타모르포젠, 4개의 마지막 노래, 호른협주곡 2번,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알레그레토 등
4.2. 관현악법과 성향
관현악 작품에 있어서 그야말로 동시대 다른 작곡가들의 열폭을 자아낼 만큼 숙련된 솜씨를 보여주었는데, 대규모 편성을 때려박더라도 각 파트를 잘게 쪼개서 실내악에 가까운 정밀한 음색을 얻어내거나 새롭게 개발된 악기[11] , 이미 사장되어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악기들[12] 까지 동원하는 캐근성을 발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베를리오즈의 명저 '관현악법' 을 개정한 책도 썼을 정도이다. 이처럼 악기의 구석구석까지 연구한 결과 때때로 악기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발휘하도록 작록하여 연주자로서 웬만한 관록의 음악인들도 종종 절망에 빠뜨리는 엄청난 난이도를 보이기도 했다.
기악에서는 호른, 성악에서는 소프라노를 꽤 편애했다.[13] 아버지가 본좌 호르니스트였고 아내가 소프라노 가수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아들의 곡에서 호른이 두드러지는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아들의 작곡 능력은 하나님이 주셨지만, 호른에 대한 애정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리하르트가 기준으로 삼았던 기준이 바로 그의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였다는 점이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품의 난이도는 어느 악기에서나 쉽지 않지만, 특히 호른 파트는 매우 까다롭다. 또 두 곡의 호른 협주곡은 완성 직후 몇몇 호른 주자들로부터 연주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는 아버지라면 자다가 일어나서도 이 작품을 연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협주곡이 아닌 일반 관현악곡의 호른 패시지도 무척 어렵다. 심지어 빈 필하모닉 호른 단원들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 때문에 독일 오케스트라에서 보다 연주하기 용이한 현대적 호른으로 악기가 바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오페라 레퍼토리 대다수의 소프라노 주역 가수들은 아무나 도전했다가는 제대로 피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까다로운 레퍼토리들로 손꼽힌다.
4.3. 가곡
하지만 교향시나 오페라 같이 몸집 큰 편성과 규모의 곡들 외에 가곡을 높이 사는 사람들도 많다. 가곡의 경우 큰 단절 없이 평생 동안 작곡한 탓에 작곡 기법의 변천사를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고, 목소리와 피아노 반주법에 대한 진지한 접근 자세도 관현악 작곡 못지 않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서 많은 성악가들의 리사이틀 무대에서 애창되고 있다.
5. 사생활
오페라 가수였던 아내 파울리네는 슈트라우스와 기본적으로는 궁합이 잘 맞는 사이였지만, 슈트라우스가 파격적인 음악을 쓴 경우 자필보에 멋대로 비판하는 글을 마구 끄적여 놓는 등 남편까(?)의 면모를 공공연히 보여줄 정도였다. 하도 지배적이고 불같은 성질이다 보니 부부싸움도 심심찮게 일어났다고 하는데, 슈트라우스 자신은 이런 가정사를 감추기는 커녕 '가정 교향곡' 이나 오페라 '인테르메초' 등에 대놓고 보여주어 대인배 기질을 과시했다. 심지어 그의 마지막 곡인 '4개의 마지막 노래'에서는 파울리네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썼다고 한다.
파울리네도 슈트라우스에게 다소 까칠하고 괄괄하게 굴기는 했지만, 평생 바람피지 않고 철저한 내조를 통해 대작곡가의 아내로서 임무를 다했다. 슈트라우스가 죽자 실의에 빠져 거의 매일매일 울며 지내다가 8개월 뒤 남편 곁을 따라간 것을 보면 대단한 조강지처.
물론 슈트라우스 자신도 초기부터 별의별 비평가들의 공격을 당해낸 탓인지 꽤 자존심이 셌다고 하고, '살로메' 가 반사회적인 오페라라고 비난하는 이들에게도 '나는 그 오페라 공연해서 번 돈으로 집샀지롱 ㅋㅋㅋ' 식으로 조롱하기도 했다.[14] 취미가 등산이었는데, 등산 애호가들 치고 야망이 없는 사람이 드물다는 속설이 슈트라우스에게도 적용된 모양이다. '알프스 교향곡' 도 알프스 등산 체험에 기반한 작품이고, 자택도 산장 수준으로 높은 고도에 지어놓은 것을 보면 극렬 산덕후.
나치 시대에는 괴벨스와 종종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고, 유대인 며느리를 두고 있던 탓에 며느리가 종종 게슈타포의 먹잇감이 되는 등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강하게 항의해 다시 데려오는 개김성도 보여주었다. 전쟁 말기에 자신의 별장을 부상병 수용과 치료를 위해 징발하겠다는 당국의 명령에도 '나는 이딴 전쟁 원하지 않았으니 못빌려주겠음 깝ㄴㄴ' 식으로 대응하다가 강제로 압류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6. 정치적 논란
나치에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미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던 시기에 독일 음악계를 대표하는 명사였던 탓에 나치가 대내외적으로 내세우는 '독일 음악의 우월성' 이라는 떡밥투척용 기믹에도 곧잘 이용되기 시작했다. 슈트라우스 자신도 초기 나치 정권에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으로,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보낸 서신에서 '음악을 후원하는 나치 정권을 나쁘다고 볼 수 없다' 라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15]
이외에 나치 정부나 관련 단체의 의뢰로 작곡된 작품들도 떡밥으로 자주 던져지는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 작곡한 '올림픽 찬가' 나 1940년 일본 기원 2600주년 기념 봉축곡인 '일본 축전음악', 1943년 나치 빈 대관구 주최의 행사를 위해 작곡한 '빈 시의 축전음악' 같은 곡들은 지금도 슈트라우스의 흑역사격 작품으로 간주되어 연주/녹음이 대단히 뜸한 편이다. 대략 1950년대 이후로 독일과 일본(일본 축전음악)을 중심으로 리바이벌되고 있기는 하지만, 상설 레퍼토리의 경지에는 절대 이르지 못할 것 같다. 슈트라우스 자신부터 작품의 질이 낮음을 인정한 바 있고, 과거 나치나 일본 제국에게 피점령국 신세를 당한 나라들로부터도 결코 좋은 대접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 며느리와 자신의 손자, 손녀 등 주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협력자의 자세를 취해야 했다는 동정 여론도 있고, 제국 음악국 총재로서 공공연한 반유대주의를 표명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치 부역자' 로 모는 것을 부당하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실제로 슈트라우스는 총재를 역임할 동안 나치의 반유대주의 캠페인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았고, 오히려 나치의 신경을 거슬렀던 파울 힌데미트 같은 음악인들을 옹호하는 등의 행동으로 괴벨스를 자주 빡돌게 했다.
슈트라우스 자신 외에 흔히 '슈트라우스의 제자' 라고 종종 얽히는 안익태와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떡밥들이 최근 발굴되고 있는데, 실제로 안익태는 슈트라우스 전기를 집필할 정도로 슈트라우스빠였고 한국환상곡 등 그의 작품에서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향이 깊게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유럽 현지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안익태는 그리 일찍부터 슈트라우스에게 배우지도 않았고, 그저 '일본 축전음악' 의 지휘자로 슈트라우스와 접촉하기 시작했을 뿐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친일반민족행위자 논쟁에 불을 붙여준 꼴이 되었다.
7. 지휘/피아니스트 활동
작곡 다음으로 슈트라우스가 명성을 얻은 것이 지휘 활동이었는데, 만년에 남겨진 동영상 등을 보면 '정말 재미없게' 지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팔의 움직임을 넥타이 폭으로 한정하는 등 극도로 최소화한 탓에 보기에는 대단히 무미건조하게 보인다.
음악이 커지건 작아지건 동작 변화도 거의 없어서 '박자 기계' 라고 까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화려하고 강한 연출이 담긴 지휘를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정말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다. 연주가 끝난 후에도 전혀 땀을 흘리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본인이 보낸 편지에는 최근 지휘의 폭을 적게 했더니 지휘를 끝낸 후에 피곤함이 덜하다고 씌어 있다.[16]
교항시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을 지휘할 때의 모습. 슈트라우스가 얼마나 '재미없게' 지휘하는지 잘 보여준다.[17]
하지만 청년 시절에는 '마치 발작이라도 난 듯 지휘한다' 는 평이 있었을 정도였고, 자작곡 보다는 모차르트를 비롯한 대선배들의 작품을 지휘할 때 꽤 강도높은 리허설을 했다는 기록을 봐서 절대 건성으로 임하지는 않은 것 같다. 만들어내는 음악 스타일은 가볍고 경쾌하면서도 탄탄한 구조를 보여주는 스타일이어서, 자기 주장을 작품에 많이 이입시키는 낭만주의 지휘 양식과 대척점에 있다는 평을 받는다.
후배 혹은 제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인 지휘자 조지 셀은 슈트라우스를 회고할 때 '지휘자로서는 별로 훌륭한 인물은 아니었다' 고 장난스레 회상하기도 했다. 특히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 를 지휘할 때 공연 끝난 뒤에 있을 회식이나 게임에 정신이 팔려 회중시계를 꺼내보며 갑자기 템포를 확 올려 지휘하는 등의 기행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관객들이 박수를 하면서 커튼콜을 할 때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고.
이런 조지 셀의 평가가 너무 널리 알려지면서 인해 지휘자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으나 지휘자로서도 결코 우습게 볼만한 인물은 아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에서 보여주는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탄탄한 해석은 열악한 녹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 시대를 풍미했던 낭만주의적 해석의 지휘자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해석이며, 2010년대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더 높이 평가받을 여지가 있는 지휘자다. 조지 셀의 언급 때문에 빠른 템포의 지휘자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이 역시 온당한 평가는 아니다. 슈트라우스는 빠른 곡에서는 빠르게, 느린 곡에서는 느리게 하는 지휘자였다.
현재 남아 있는 녹음의 상당수가 자작 관현악곡이라서 슈트라우스가 지휘자로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을 관찰할 수 있는데, 이 때도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과장이나 가식이 별로 없는 엄격한 면모를 보여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년에는 자작 연주회에서 리허설도 안하고 바로 본 공연이나 녹음에 임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로서도 뷜로의 지휘로 모차르트 협주곡을 연주할 정도로 꽤 전문가급 솜씨를 자랑했다고 하는데, 특히 자신의 가곡 리사이틀에서 반주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 곡이 끝나고 가수가 박수를 받고 있을 때 전혀 신경쓰지 않고 멋대로 즉흥 연주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고 하는데, 얼핏 보기에는 장난인 것 같았지만 각 곡 사이의 분위기나 가사를 암시하는 연주를 들려주면서 가수와의 교감을 극대화시키려는 행동이었다고 한다.
8. 대중 매체의 사용
아마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인용된 가장 유명한 슈트라우스 작품을 꼽으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의 초반부 대목일 것이다. 조용하게 밑에 깔리는 오르간 저음 위에서 떠오르듯이 나오는 트럼펫의 팡파르와 팀파니의 강타부터 굉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는데,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에서 쓰여 히트했다. 이 때문에 조로아스터교나 프리드리히 니체와 관련되어 이야기되던 이 곡이 단번에 '우주음악' 이나 'SF음악' 으로 이미지 체인징이 되기도 했을 정도.
영화 외에도 하도 간지폭발이라 그런지 엘비스 프레슬리도 자신의 콘서트에서 오프닝 음악으로 썼고, WWE의 노장 프로레슬러 릭 플레어도 '호우!' 하는 자신의 외침소리와 함께 등장 음악으로 사용했다. 이외에 다른 교향시들도 묘사적인 표현에 왔다여서 그런지 종종 광고음악으로 쓰인다고 한다. 역시 표제음악의 대가.
[1]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바이에른 왕립 오페라의 호른 수석이었다.[2]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모차르트를 위시한 고전주의 음악을 이상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바그너의 음악을 싫어했다. 그러나 당시 프란츠가 소속된 뮌헨 궁정 오페라의 주인인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가 열렬한 바그너의 애호가이자 후원자였기 때문에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바그너 중기 이후 작품 대부분을 초연했을 정도로 바그너를 자주 연주해야 했다. 더군다나 바그너가 당대 최고의 연주자인 프란츠 슈트라우스의 기량에 감탄하여 그를 염두에 두고 여러 여러운 호른 패시지들을 작곡해 나갔다. 그러나 바그너 안티였던 프란츠는 걸핏하면 연주 불가능한 패시지라고 항의하여 바그너 제자들을 애먹였다. 바그너 사망 후 추모음악회에서도 전 오케스트라가 기립하여 연주하는 가운데 프란츠 슈트라우스만 끝까지 앉아서 연주했다고 한다. 니벨룽겐의 반지 초연의 중책을 맡았던 바그너의 수제자 한스 리히터는 프란츠 슈트라우스가 연주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 본인이 직접 연주해 보이곤 했다고 한다. 한스 리히터는 호른 연주자 출신으로 훗날 빈 필, 런던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3] 참고로 뷜로도 예전에는 극렬 바그너빠였지만, 바그너가 자신의 부인이었던 코지마를 빼앗아가자 대번에 바그너까로 전향해 자근자근 씹고 있던 인물이었다.[4] 참고로 요한 슈트라우스 1세 가문은 오스트리아 출신이다.[5] 두 교향곡은 이름만 '교향곡'일뿐 교향시(자신은 '음시'라고 불리기를 바랐다.)의 일부로 간주한다. 아니면 환상교향곡처럼 표제교향곡으로 분류하기도 한다.(한국어 위키백과에는 교향곡으로 분류하지만,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교향시로 분류하는 것을 보면 교향곡과 교향시의 중간에 위치한 작품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6] 바이올린10, 비올라5, 첼로5, 더블베이스3이다. 원래는 현악 7중주 버전이었다.[7] 간혹 플룻 버전으로 연주되는 경우도 있다.[8] 이게 레알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노래다.[9] 그래서 이 두 곡은 교향곡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문헌들에서 관현악곡/교향시 영역으로 분류한다.[10]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으로 파괴된 오페라극장의 모습을 보고 작곡했다고 한다. 음반의 표지로도 나왔었다. [11] 첼레스타, 헤켈 폰[12] 바셋 호른, 오보에 다모레, D조 클라리넷[13] 호른의 경우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알프스 교향곡' 의 편성인데, 관현악단에 8대 배치한 것도 모자라 무대 뒤에 12명 더 쓰라고 지시되어 있다. 총 20명(!!!). 다만 무대 뒤의 연주자 배치에 대해서는 '정 여의치 않다면 생략해도 무방하다' 고 기입하고 있다.[14] 참고로 그 집이 바로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자택이었다. 지금도 슈트라우스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슈트라우스 관련 문서나 자료의 보관소로도 이용되는 중.[15] 그리고 듣보잡 상태지만, 가곡 '시냇물' 이나 '라플란드 평원의 비상 경보' 같은 곡들은 각각 괴벨스와 재무 장관이었던 발터 풍크에게 공식적으로 헌정되었다.[16] 그런데 이건 동시대인이자 전문 지휘자였던 구스타프 말러에게도 해당하는 사항이다. 그 역시 젊었을 때는 격렬한 지휘 동작 때문에 이를 풍자하는 그림이 있었을 정도였지만 훗날에는 점차 절제된 지휘 동작을 선보였고, 나중에는 숫제 왼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지휘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17] 영상 가장 뒤의 음성 없는 지휘 모습은 아르투어 니키슈의 베토벤 교향곡 5번 지휘 영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