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르 스트라빈스키
1. 개요
러시아 출신 미국의 작곡가.[1] 현대음악 초기의 거장이자 리하르트 바그너 이후 서양 음악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고 또 아직까지도 많은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작곡가이다.
그는 88세까지 장수하였고 그의 음악 스타일도 긴 생애에 걸맞게 여러 번 큰 변화를 겪었다. 후술하는 것처럼 그의 음악은 주로 3시기로 구분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후기 낭만주의에서 시작하여 민족주의, 원시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 신고전주의, 재즈, 12음 기법, 미국의 팝 음악 등 실로 다양한 음악사조의 영향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음악언어를 자신의 음악에 접목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실험을 추구한, 현대 음악의 모든 사조를 아울렀던 거장'이라고 찬사를 보내는 반면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음악에 일관성이 없고,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하기 보다는 돈벌이를 위해 그때 그때 잘 팔리는 유행만 쫓아다닌 인기 작곡가'였다고 비판한다.[2]
한편으로 스트라빈스키는 방대한 수의 음악을 남겼는데,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대표작들이 대부분 그의 음악인생 초기에 작곡되었다는 것도 특기할만 하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그는 당대에 '''가장 급진적이고 전위적인 성향'''의 음악가로 평가받았지만, 1차 대전 이후부터는 정반대로 '''고전주의로 회귀하는 새로운 파격'''을 보여주게 된다. 이 시기에도 중요한 작품들이 상당히 많이 창작되었으나 인지도 면에서는 3대 발레음악으로 불리는 불새, 페트로슈카, 봄의 제전을 비롯한 초기작품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생애 후기에 작곡된 쇤베르크식 무조음악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발레음악 '아곤(Agon)'이나 합창음악 '트레니(Threni)' 등도 나름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나 역시 대중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3]
결국 작품성과는 별도로 초기 작품들이 그의 상징적인 음악이 되어버린 상황이며, 현재까지도 스트라빈스키는 주로 '원시주의 성향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그와 많이 비견되는 파블로 피카소가 그 방대한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입체주의 화가'로 여겨지는 것과 비슷한 상황.
2. 생애
2.1. 초기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당시 유명한 베이스 가수였는데, 때문에 일찍 음악에 재능을 보였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19살이 되어서야 피아노를 배우면서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지만 재능이 워낙 뛰어나 순식간에 악보 보는 법을 익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즉흥 연주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또한, 어렸을 때 가족들과 함께 시골에 휴가를 보냈을 때 민요를 많이 들었는데, 이때의 경험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그러나 다른 음악가들처럼 그도 부모의 권유로 법학을 전공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독학으로 화성학과 작곡법 등을 공부하였고 1900년대 초 당시 러시아의 대작곡가인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평가를 부탁했지만... 그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기초를 튼튼히 하라는 대답만 듣는다.
한편 스트라빈스키는 23살인 1905년에 오랫동안(?) 사귀었던 1살 아래의 사촌 예카테리나 노센코(Yekaterina Gavrilovna Nosenko)와 결혼한다.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에 따라 사촌지간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트라빈스키는 예카테리나가 친척이라는 것을 속이고 결혼했으며 이후 이 사촌부부는 4명의 자녀를 낳았다.
이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억지로 전공하던 법학을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음악계에 입문, 일전에 그에게 냉담했던(!)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법과 화성학, 관현악법을 배운다.[4] 그 밑에서 4년 동안 공부하면서 작곡에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을 정확하고 충분히 익힐 수 있었다. 그의 초기 작품에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경향과 현란한 관현악 수법 등은 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영향에 의한 것인데,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짧은 관현악곡 '불꽃(fireworks, Op. 4)'를 들어보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는 림스키코르사코프 외에도 러시아 5인조의 국민악파 음악과 프랑스의 낭만주의 음악, 클로드 드뷔시의 인상파 음악, 그리고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 등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작품에 이들을 반영하였다. 스트라빈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혁신적인 관현악법을 체득하며 결과적으로 그가 배출한 최고의 제자가 되었지만, 스승은 그의 성공을 지켜보지 못하고 1908년에 사망하였다. 사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었고, 그의 가족들도 스트라빈스키가 아닌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를 그의 음악적 후계자인양 여기고 있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이에 대해 깊은 실망감을 느꼈으며, 훗날 림스키코르사코프에 대해 애증어린 회고를 남기게 된다.
그 후 스트라빈스키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그가 파리 땅을 밟았던 20세기 초, 예술의 도시 파리에는 새로운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세기말의 어두운 그림자는 물러가고, 새로 도래한 20세기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팽배해 있었다. 예술의 새로운 경향을 추구하는 독창적이고 자유분방한 음악가, 화가, 무용가, 작가, 철학자들이 모두 파리로 몰려들었고 이들은 이 최첨단 예술의 도시에서 20세기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스트라빈스키는 매우 독창적인 예술가에 속했다. 훗날 프랑스 작곡가 메시앙은 스트라빈스키를 '1001개의 스타일을 가진 작곡가'라고 평가했다. 그만큼 그는 일반의 상식을 뛰어넘는 너무나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음악을 만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예술에 대해 혜안을 가진 사람들은 이 젊은이가 앞으로 '큰일'을 낼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습작을 통해 작곡에 어느 정도 자신을 얻은 스트라빈스키는 3막의 오페라 나이팅게일(The Nightingale)의 작곡에 착수하고 있었는데, 이 때 그는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던 러시아 출신의 발레 연출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에게 발견된다. 디아길레프는 단번에 이 무명의 젊은 천재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유명한 기성 작곡가인 랴도프 대신 스트라빈스키에게 발레용 음악의 작곡을 맡기는 모험적인 수를 둔다. 스트라빈스키는 열심히 작곡에 착수하여 1910년에 이를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의 출세작이자 필생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된 '''불새(fire bird)'''이다.[5] '불새'는 파리 초연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드뷔시 등 당대 대작곡가들의 호평도 받았다. 일약 프랑스 음악계의 유망주로 부상한 그는 아르놀트 쇤베르크, 모리스 라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만남을 갖기도 했고,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을 바이로이트에서 관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관람 이후 그는 바그너 반대파가 되어 버렸다고....[6]
불새의 성공으로 디아길레프는 다시 그에게 발레음악을 의뢰하는데 두번째로 작곡된 작품이 바로 페트로슈카. 이 페트로슈카도 호평을 얻었고 이에 힘을 얻은 스트라빈스키는 그가 구상하고 있던 파격적인 발레음악 '''봄의 제전'''을 작곡한다. 이 봄의 제전은 당시 유행했던 강렬한 리듬과 타악기의 역할을 강조하는 소위 '원시주의' 경향을 갖고 있었는데, 공연 준비도 매끄러웠고 리허설에도 문제가 없어서 이 작품도 성공하리라 믿었지만 그 결과는.....단순한 실패나 야유를 넘어 거의 폭동 수준의 난리가 벌어졌다. 자세한 사항은 '봄의 제전'항목을 참조.
하지만 초연 때의 이 소동을 통해 오히려 봄의 제전의 유명세는 높아져 갔고, 세계 각지에서 빠르게 초연되면서 스트라빈스키는 31세의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들어선다. 이후 그의 행보는 모든 젊은 작곡가들이 주시하는 뜨거운 이슈가 되기 시작했다. 봄의 제전 이후에도 그는 발레 음악 '결혼(les Noces, 1917)'[7] , 오페라 '나이팅게일(1914)'[8] 등 민족주의적인 경향에 입각한 작품을 다수 내놓는다. 이 시기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가장 러시아적 정서가 강한 시기였다.
2.2. 신고전주의 시기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에 있던 스트라빈스키는 모국의 혼란스러운 정치상황 때문에 남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으로 피난을 다녔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에 있는 그의 재산이 몰수당하는 바람에 한때 생계의 곤란을 겪기도 했다. 그는 결국 귀국을 포기하였으며, 이후 1962년에 공식 초청을 받기 전까지 러시아(정확하게 말하면 소련) 땅을 밟지 못한다.[9] 이와 같은 불안정한 생활이 지속되고 경제적 곤란을 겪은 스트라빈스키는 점차 돈문제에 민감해졌고, 나중에는 '스크루지를 능가하는 구두쇠'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금전관계가 철저해진다.
한편 1차 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등 바로크와 고전기 작곡가들의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재즈 등의 새로운 음악사조들도 접하게 된다. 이런 영향 덕분에 1910년대 후반부터 그의 작풍은 점차 급진성이 약해지고 신고전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되며, 1917년 작곡된 발레음악 '결혼'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민족주의/원시주의적 경향의 작품은 작곡하지 않는다.
이 신고전주의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재즈(래그타임)의 영향을 받은 '병사 이야기'(1918), '관악기를 위한 교향곡(1920)', 발레음악 '풀치넬라(1920)'[10] , 오페라-오라토리오 '오이디푸스왕(1927)', 종교음악 '시편 교향곡'[11] (1930, 1948년 개작),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1931) 등이 있으며 이들 작품이 모두 성공을 거두면서 스트라빈스키는 당대 최고의 거장의 반열로 올라섰으며 재산의 몰수를 딛고 큰 돈을 벌었다.
하지만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인생이 무조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1차 대전 이후 그는 자신에게 출세의 길을 마련해준 디아길레프와 점차 갈등을 빚기 시작했는데, 음악에 대한 견해차이와 작곡료 등의 문제로 틀어진 두 사람은 1920년대 중반에 완전히 결별한다.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더러 보란듯이 새로운 루키 작곡가들을 찾아 성장시키려 했지만, 그 중 스트라빈스키를 뛰어넘는 재목은 없었다. 이후 디아길레프가 1929년에 급사하여 결국 두 사람은 화해하지 못했는데, 그의 사망소식을 들은 스트라빈스키는 그 냉정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또 이 시기 사생활에도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는 예카테리나와 어렵게 결혼한 후 16년간 4자녀를 낳으면서 금슬을 과시했으나 1921년 공연무대 디자이너였던 세르게이 수데이킨(Sergey Yurievich Sudeikin)의 부인이자 무용수였던 베라 드 보세(Vera de Bosset)와 눈이 맞아 급격하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가족이 있던 남프랑스의 앙레(Anglet)와 베라가 있는 파리(Paris)를 오가면서 이중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카테리나는 1939년 폐결핵으로 죽을 때까지 남편의 불륜을 묵인하고 굳이 문제삼지 않았으며, 한편으로 베라의 남편인 수데이킨도 당시에 부인과 별거상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별다른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12]
2.3. 미국 이주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1934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1939년 부인이 사망한 직후에 자식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듬해인 1940년 1월 스트라빈스키의 연인이었던 베라가 미국으로 건너왔으며 두 사람은 그해 3월에 메사추세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문제는 베라가 수데이킨과 정식 이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분상으로 유부녀였다는 것. 이 때도 스트라빈스키는 미국 당국에 베라가 유부녀라는 것을 속이고 결혼을 강행하였다. 결국 그는 두 번의 결혼을 모두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한 셈인데, 신부의 나이가 나이니만큼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지만 어렵사리 이뤄진 재혼인 만큼 부부간의 금슬은 좋았다고 한다.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1945년에 미국에 귀화하여 미국시민이 된다.
음악 이야기로 돌아와서, 스트라빈스키는 미국 망명후 한때의 침체기를 거쳐 '3악장의 교향곡'(1945)과 '미사'(1948) 등으로 다시 재기한다. 이 때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받아들이며 '7중주'등의 작품을 발표하고[13] , 종교음악에 관심을 가져 '미사', 칸타타 '아브라함과 이삭'등을 발표한다. 이후에도 지휘활동과 연주활동과 작곡활동을 병행한다. 그는 미국의 명사들과도 친분을 쌓았는데, 특히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스트라빈스키의 80회 생일파티를 열어줄 정도로 거장에 대한 경의를 표해주었다. 1963년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스트라빈스키는 그를 위한 일종의 진혼가인 '케네디를 위한 애가'를 작곡하기도 한다.
라흐마니노프도 그의 집 근처에 살았다. 두 작곡가 모두 러시아 혁명의 망명자로서 친해질 법도 하지만, 그렇게 친밀한 교류는 없었다고 한다. 스트라빈스키는 미국에서도 대단한 명성을 누리던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 대해 고리타분하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그의 행동 양식에는 상당한 흥미로움을 느꼈고 비범하다고 평가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그는 급격히 쇠약해져서 더 이상 작곡을 하지 못했는데, 작품을 쓰지는 못했지만 죽기 직전까지도 일어나면 피아노 앞에 앉아서 음악을 구상했다고 한다. 1971년 4월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스트라빈스키는 88살의 나이로 뉴욕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특이하게 그는 미국이 아니라 디아길레프의 묘가 있는 베네치아의 산 미켈레 성당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였으며, 이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베네치아로 옮겨져서 디아길레프 옆에 묻혔다.
한편 스트라빈스키와 재혼한 베라는 남편과는 사이가 좋았지만 남편의 전처가 낳은 의붓자식들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스트라빈스키 사후 막대한 유산의 분배를 놓고 베라와 의붓자식들간에 법적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베라는 1982년 94살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유언에 따라 베네치아에 있는 남편의 묘지 옆에 묻혔다.
3.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경향
보통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은 세 시기로 분류하는데, 이는 편의적인 분류에 가깝고 실제로는 다양한 음악사조를 자신의 작품에 접목시켰다.
1. '''초기 : 민족주의/원시주의'''
초반에는 림프키 코르사코프를 비롯한 러시아 5인조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민속음악적 색채가 강한 음악을 작곡하다가, '불새'에서부터 스트라빈스키 특유의 대담한 화성과 리듬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봄의 제전''''에서는 극단적인 불협화음과 강렬한 리듬을 특징으로 하는 '원시주의' 성향의 음악을 선보였다.
- 교향곡 E플랫 장조, 환상적 스케르초, 불꽃, 장송곡,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 결혼
- 병사이야기, 3악장 교향곡, 시편교향곡, 11대의 악기를 위한 래그타임, 에보니 협주곡, 피아노 래그 뮤직, 결혼, 풀치넬라,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 아곤, 트레니, 진혼 찬가(Requiem Canticles), 7중주
4. 주요 작품
4.1. 오페라
- 나이팅게일(1914)
- 마브라 (1922)
- 오페라-오라토리오 ‘오이디푸스 왕’(1927)
- 페르세포네(1933)
- 난봉꾼의 인생역정 (1951)
- 홍수 (1966)
4.2. 발레
- 불새(1910, 19, 45)
- 페트르슈카(1911, 47)
- 봄의 제전(1913)
- 결혼(1914~7)
- 여우(1916)
- 병사이야기(1918)
- 풀치넬라(1920)
- 아폴로(1928)
- 요정의 키스(1928)
- 카드 게임(1936)
- 서커스 폴카(1942)
- 단막 발레(1944)
- 오르페우스(1947)
- 아곤(1957)
4.3. 관현악
- 교향곡 E♭장조 Op.1 (1907)
- 환상적 스케르초 Op.3 (1908)
- 불꽃 Op.4 (1908)
- 장송곡 Op.5 (1908): 비교적 최근에서야 발견된 작품으로, 스승이었던 림스키코르사코프를 추도하기 위해 쓴 곡이다. 관련 기사
- 나이팅게일의 노래 (1917): 같은 이름의 오페라에서 편곡
- 모음곡 1번(1921): 피아노곡인 3개의 쉬운 소품과 5개의 쉬운 소품의 5번을 편곡한 것이다.
- 모음곡 2번(1925) 피아노곡인 5개의 쉬운 소품의 1~4번을 편곡한 것이다.
- 덤바스턴 오크스 E♭장조(1938)
- C조 교향곡(1940)
- 협주적 춤곡(1941~2)
- 서커스 폴카(1942): 같은 이름의 발레에서 편곡한 것
- 러시아 스케르초(1944)
- 3악장 교향곡(1943)
- 현을 위한 협주곡 D장조(1946)
- 변주곡(1963~4)
4.4. 협주곡
- 피아노와 관악을 위한 협주곡(1923~4)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카프리스(1929, 49)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1931)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악장(1958~9)
4.5. 실내악
- 현악 4중주를 위한 3개의 소품(1914)
- 11대의 악기를 위한 래그타임(1917~8)
- 클라리넷을 위한 3개의 소품(1919)
- 관악기를 위한 교향곡(1920)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듀오 콘체르탄테(1932)
- 클라리넷과 재즈 밴드를 위한 에보니 협주곡(1945)
- 7중주(1953)
- 플루트, 클라리넷, 하프를 위한 비명(碑銘)(1959)
4.6. 피아노
- 피아노소나타 F♯단조 (1903~4)
- 4개의 연습곡 Op.7 (1908)
- 피아노 래그 뮤직(1919)
- 다섯 손가락(1921)
- 페트루슈카의 3개의 악장(1921)
- 피아노소나타(1924)
- 세레나데 A장조(1925)
-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1935)[15]
- 탱고(1940)
- 2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1943)
4.7. 합창
- 별들의 왕(1912)
- 시편교향곡(1930)
- 미사(1944~8)
- 칸타타(1951~2)
- 성물(聖物) 칸티쿰(1955)
- 트레니(Threni 1958)
- 찬송 레퀴엠(1966)
4.8. 가곡
- 세 개의 일본 가곡(1912-13)
- 프리바우트키(1914)
- 고양이 자장가(1916)
- 아브라함과 이삭(1963)
- J. F. K.에 대한 비가(1964)
- 올빼미와 고양이(1966)
5. 기타
- 그가 남긴 자서전이 있는데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16] 다만 절판된 듯 하니 찾아보려는 위키러들은 근처 헌책방이나 도서관을 뒤져서 읽어보자.
- 독설로 유명하다. 유명 작곡가나 음악가들에 대해서 거침없는 독설을 해댔다. 이름이 알려진 작곡가 치고 그에게 비난받지 않은 작곡가는 본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을 정도다. 나름 친밀한 사이였던 파울 힌데미트에 대해서도 음악적으로는 냉랭한 평가를 했고, 고국의 후배 격인 쇼스타코비치를 만나서는 "당신은 그만 말러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며 면전에서 짓궂게 대했다고 한다.
다만 만년으로 갈 수록 그의 독설도 많이 누그러졌고, 대중으로부터 급격하게 멀어져가는 후배 작곡가들에게 격려와 지지를 적극적으로 하고 다녔다. 대표적인 예가 무명에 가까웠던 일본의 다케미쓰 도루의 재능을 알아보고 세계 음악계에 소개시킨 것.
- 민음사에서 스트라빈스키가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한 '음악의 시학'을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한번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 코코 샤넬이 말년 스트라빈스키와 자신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발언을 한 바 있는데, 그로인해 2009년 둘의 염문을 다룬 《샤넬과 스트라빈스키》라는 영화도 만들어진 적 있다. 안나 무글랄리스가 샤넬로, 마스 미켈센이 스트라빈스키로 나오고 칼 라거펠트가 영화 후원을 해준 영화다. 하지만 샤넬 발언 외에 두사람의 염문은 근거가 전혀 없다고 한다.[17]
- 봄의 제전의 서주 직후 나오는 젊은 여자들의 춤에 나오는 8비트 리듬덕에 몇몇 음악인들 사이에서 농담으로 삼아 락 음악의 선구자로 뽑히기도 한다.[18]
[1]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나 2차 대전때 미국에 귀화하였고 결국 미국에서 생을 마쳤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와 비슷한 케이스.[2] 특히 그와 평생 앙숙이었던 쇤베르크가 줄기차게 이런 식으로 그를 비난하였다. 물론 이러한 쇤베르크의 비난에는 개인적인 반감이 많이 섞여 있으니 걸러서 판단해야 된다.[3] 스트라빈스키 외에도 음악경력 초기에 급진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성향을 보였다가 점차 기성의 작법을 수용하는 경향을 보이는 현대음악가들이 상당히 많다. 리게티나 펜데레츠키, 필립 글래스 등이 대표적.[4] 당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대작곡가였을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상당히 유명했기 때문에 스트라빈스키 외에도 수많은 음악 지망생들이 그에게 지도받기를 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작곡에 대한 기초조차 잡혀 있지 않았던 스트라빈스키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5] 한편 그가 구상했던 오페라는 1914년에 완성되었으며 5월에 파리에서 공연되었다.[6] 파르지팔은 공연을 관람하는데 약 4시간30분이 소요된다.[7] 작곡은 1917년에 완료하였으나 초연은 1923년에 이루어졌으며 1917년의 악보를 많이 수정한 개작버전으로 공연되었다.[8] 전술했다시피 이 작품은 1908년에 작곡에 착수했으나 그간 디아길레프에게 의뢰받은 발레음악을 작곡하느라 1914년에야 완성되었다.[9] 스트라빈스키의 조상은 원래 폴란드계로 스트라빈스키가 태어나기 100년쯤 전에 러시아로 이주하였다. 그래서인지 의외로 그는 자신의 조국 러시아에 큰 애착을 갖고 있지 않았다.[10] 이탈리아 작곡가 페르골레지의 작품을 편곡하고 재해석한 작품. 발레음악에 일부를 발췌한 관현악곡 풀치넬라 모음곡도 같은 해에 작곡되었다.[11] 쿠세비츠키의 의뢰를 받고 쓴 작품[12] 다만 스트라빈스키의 자식들은 베라가 죽을 때까지 그녀를 증오했다고 한다. 후술되는 내용 참조.[13] 생전에 스트라빈스키는 쇤베르크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서로 꽤나 날선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 사람의 작품성향을 생각한다면...[14] 1917년에 작곡된 초판과 1923년에 개작한 판본이 상당히 다른데 현재에는 주로 개작판이 연주된다.[15] 협주곡라고 되어 있지만 통상적인 피아노와 관현악의 협주가 아니라 두 대의 피아노의 협주를 뜻한다.[16] 쇼스타코비치의 말에 따르면 다른 유명인사들의 자서전은 어린 시절 부분이 매우 재미없는데 스트라빈스키는 그 반대라고 한다.[17] 다만 샤넬이 스트라빈스키를 한동안 재정적으로 후원해준 것은 어느 정도 확인되었다. 그 이상의 썸씽이 있었는지는 물론 알 수 없지만.[18] 실제로 이러한 락 비트에 감명 받아 락 버전으로 편곡하는 경우도 있다. 데릴 브렌젤의 재즈 편곡인 Rewrite of Spring이 대표적인데 드럼의 락 비트와 기타 솔로로 락적인 요소를 끌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