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미에르 형제
오귀스트 마리 루이 니콜라 뤼미에르 Auguste Marie Louis Nicholas Lumière 1862년 10월 19일 - 1954년 4월 10일
루이 장 뤼미에르 Louis Jean Lumière 1864년 10월 5일 - 1948년 6월 6일
발명가이자 영화 감독.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기계 제작자인 동시에 제작・흥행・배급 등 현재의 영화제작 보급형태의 선구적 역할을 한 영화의 시조이다. 그러나, 1990년대 와서 1888년 프랑스인 루이 르 프랭스(Louis Le Prince)가 촬영한 12프레임짜리 단편영화 《라운데이 정원》(Roundhay Garden Scene)이 있어서. 여기서 볼 수 있다. 이쪽이 맞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루이 드 프랑스가 1890년 원인 모를 행방불명을 당해서 묻혀졌던 것. 그리고 라운데이 정원은 내용이 있는 뤼미에르 형제 영화랑 달리 2 초짜리 클립인데다 개인 소장품이라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어 발표한 영화의 형태하고는 거리가 있다.
브장송 태생이지만, 어렸을적인 1870년 리옹으로 이사해 기술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아버지가 사진 회사를 운영해서 그런지, 사진에 익숙했다고 하며 오귀스트는 경영자로, 루이는 기술자로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은퇴한 후, 사진을 가지고 발명품을 시도하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영화 필름이었다. 1895년 2월 13일에 시네마토그래프 특허를 얻고, 1달 뒤 영상을 찍기 시작해 공개했다.
이전에도 영상이라는 개념은 발명가 사이에서 알음알음 존속해왔고 이들이 만든 필름도 발견되었지만, 그 결과물을 대중에게 공개한 건 이들이 최초다. 뤼미에르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이나 열차의 도착 같은 영화들은 공개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켜 영화의 도래를 알리게 했다. 극영화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전에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다큐멘터리의 선조로도 불린다.
그러나 정작 영화 산업에는 끼어들지 못하고, 파테에게 찍었던 영화 필름을 매각했다. 이후 컬러 및 입체 사진 연구로 넘어갔다.
말년은 그리 좋지 못했다. 형제 모두 파시스트와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다고 알려져 있다. 루이스는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파시스트 국가가 미국 영화에 대항하길 요청했다고 한다. 오귀스트 역시 동생에 동조했으며 비시 프랑스 하에서 공직에 선출되기도 했다. 출처 이런 사실들은 해외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프랑스에서는 상당히 논란이 많다. [1] 공식적으로는 쉬쉬하는 분위기가 강하다.[2]
만든 영화들이 초분 단위 클립 수준이기 때문에, 유튜브에서 짜잘히 올라와있다. 공식적으로는 이 필름들을 엮은 뒤 생애와 활동에 대한 나레이션을 덧붙인 2016년 뤼미에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성의 '뤼미에르 Lumière'는 프랑스어로 빛을 의미한다. 영화가 빛하고 연계가 있다는걸 생각해보면 우연의 일치지만 의미심장한 부분.
루이 장 뤼미에르 Louis Jean Lumière 1864년 10월 5일 - 1948년 6월 6일
발명가이자 영화 감독.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기계 제작자인 동시에 제작・흥행・배급 등 현재의 영화제작 보급형태의 선구적 역할을 한 영화의 시조이다. 그러나, 1990년대 와서 1888년 프랑스인 루이 르 프랭스(Louis Le Prince)가 촬영한 12프레임짜리 단편영화 《라운데이 정원》(Roundhay Garden Scene)이 있어서. 여기서 볼 수 있다. 이쪽이 맞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루이 드 프랑스가 1890년 원인 모를 행방불명을 당해서 묻혀졌던 것. 그리고 라운데이 정원은 내용이 있는 뤼미에르 형제 영화랑 달리 2 초짜리 클립인데다 개인 소장품이라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어 발표한 영화의 형태하고는 거리가 있다.
브장송 태생이지만, 어렸을적인 1870년 리옹으로 이사해 기술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아버지가 사진 회사를 운영해서 그런지, 사진에 익숙했다고 하며 오귀스트는 경영자로, 루이는 기술자로 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은퇴한 후, 사진을 가지고 발명품을 시도하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영화 필름이었다. 1895년 2월 13일에 시네마토그래프 특허를 얻고, 1달 뒤 영상을 찍기 시작해 공개했다.
이전에도 영상이라는 개념은 발명가 사이에서 알음알음 존속해왔고 이들이 만든 필름도 발견되었지만, 그 결과물을 대중에게 공개한 건 이들이 최초다. 뤼미에르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이나 열차의 도착 같은 영화들은 공개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켜 영화의 도래를 알리게 했다. 극영화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전에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다큐멘터리의 선조로도 불린다.
그러나 정작 영화 산업에는 끼어들지 못하고, 파테에게 찍었던 영화 필름을 매각했다. 이후 컬러 및 입체 사진 연구로 넘어갔다.
말년은 그리 좋지 못했다. 형제 모두 파시스트와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다고 알려져 있다. 루이스는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파시스트 국가가 미국 영화에 대항하길 요청했다고 한다. 오귀스트 역시 동생에 동조했으며 비시 프랑스 하에서 공직에 선출되기도 했다. 출처 이런 사실들은 해외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프랑스에서는 상당히 논란이 많다. [1] 공식적으로는 쉬쉬하는 분위기가 강하다.[2]
만든 영화들이 초분 단위 클립 수준이기 때문에, 유튜브에서 짜잘히 올라와있다. 공식적으로는 이 필름들을 엮은 뒤 생애와 활동에 대한 나레이션을 덧붙인 2016년 뤼미에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성의 '뤼미에르 Lumière'는 프랑스어로 빛을 의미한다. 영화가 빛하고 연계가 있다는걸 생각해보면 우연의 일치지만 의미심장한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