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토 무솔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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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왕국의 군인, 파시스트, 정치가였다. 1922년부터 1943년까지 장장 21년을 이탈리아 왕국의 수상으로 재임했다.[3] 짧게나마 죽기 전까지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북이탈리아에 위치한 괴뢰정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수장도 역임했다.
일명 Il Duce(두체, 지도자 또는 영도자). 동의어인 독일어 퓌러(Führer, 총통)도 지도하는 사람이라는 뜻.[4]
2. 생애
베니토 무솔리니는 평생 ‘장엄함과 소극(笑劇)’(grandeur and farce) 사이를 불안하게 떠돌았다.
― 폴 존슨 #
2.1. "파시스트"가 되기 전
베니토 무솔리니는 사회주의를 신봉했던 대장장이 알레산드로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까지만 해도 열렬히 사회주의를 신봉했다. 이는 베니토 무솔리니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는데, 그의 이름인 베니토는 멕시코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스의 이름을 따 붙인 것이다.[5] 나머지 이름인 안드레아(Andrea)와 아밀카레(Amilcare)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인 안드레아 코스타(Andrea Costa, 1851년 11월 30일 ~ 1910년 2월 19일)와 아밀카레 치프리아니(Amilcare Cipriani, 1844년 10월 18일 ~ 1918년 4월 30일)의 이름에서 따왔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도 독특하게 유아 세례는 물론 거의 평생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돈보스코 수도회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다. 무솔리니는 미사 후에 학교 건물에 돌을 던지거나 다른 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교사에게 잉크병을 던지는 등 반항적인 학생이었으며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퇴학당하였다. 그러나 새로 입학한 학교에서는 우등생이 되었다. 대학 졸업장은 없었으나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초등 교사 자격을 얻은 후 교사로서 생활했다. 1902년 육군 입대 영장(이탈리아는 당시 징병제)이 나오자 병역을 기피하고 스위스로 도주하였으나[6] , 1904년 탈영병 사면령이 내려지자 육군 병으로 자원 입대하여 2년간 병역 의무를 마쳤고, 교사로서 복직했다.[7]
1908년 베니토 무솔리니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트렌티노(독일명 트리엔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그런 탓에 민족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범세계적인 노동자 연대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는 뛰어난 연설 실력과 카리스마로 대략 5년 만에 일약 이탈리아 사회당의 기관지 <아반티(Avanti!/전진!)>의 편집장이 되었다.
2.2. 참전 상이용사에서 파시스트로
그는 초기에는 반전주의자였으나, 점차 전쟁을 옹호하는 쪽으로 신조가 바뀌었다. 1914년 10월 당시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중립을 지키던 이탈리아가 "중부 제국의 침략"에 맞서 협상국으로 참전할 것을 주장하며 편집장을 사퇴할 때부터 이런 변화가 두드러졌다. 이런 행보로 당시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던 이탈리아 사회당으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받아 당에서 제명되자[8] , 같은 해 11월 15일에 자신의 독자적인 신문사인 <Il popolo d'italia(이탈리아의 인민)>을 창간해 시위를 선동하는 기고를 이어갔다.Tutto nello Stato, niente al di fuori dello Stato, nulla contro lo Stato.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어떤 것도 없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무솔리니는 프랑스 측에 매수되어 주장을 번복했다는 의혹까지 들었으며, 새로 차린 신문사도 프랑스로부터 몰래 지원받은 자금으로 세웠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변신은 기회주의적 행보나 금전적 이유보다는 "언제나 사회주의자이고자 했던 그 자신이 어쩌다 보니" 하게 된, 즉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화된 것에 불과했다고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후 1916년 총동원령이 내려지자 예비역 육군 병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9개월 동안 참호전이 한창인 전선에서 복무했으며, 상병(corporal)으로 진급하였다. 이 사이에 장티푸스 열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박격포탄(혹은 수류탄) 폭발로 인해 몸에 40여 개의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고 전역하게 된다. 그런데 일설에 따르면 이 폭발은 훈련 중에 있었던 일이며 사실 무솔리니는 실전에 나간 적이 없었다는 말도 있다. 여하튼 무솔리니가 전쟁기간 중 군대에서 복무한 것은 사실이므로 그가 상이용사임을 자처하는 것에 별 문제는 없었다.
전역 후에는 다시 신문사에 복귀해 이곳에서 계속 논설활동을 해나간다. 그는 어느 순간 사회주의를 실패한 이념이라고 보기 시작하면서 점차 자신만의 사상을 구체화하는데, 사회주의를 신봉할 때나 파시스트일 때나 의회를 증오하고 민주주의를 반대하면서 폭력을 옹호하는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9]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로 전향하면서부터 영국의 정치가 사무엘 호르의 도움으로 영국 정보부 MI5로부터 주당 100파운드의 보조금을 받으며 정치 행보를 넓혀갔다.
2.3. 이탈리아의 전후 혼란
이탈리아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존경하던 프란치스코 크리스피 내각 집권기(1887~1891, 1893~1896)에 프랑스의 튀니지 합병에 맞서 독일과 동맹(삼국동맹)을 맺었으나, 이탈리아 통일기에 죽도록 치고받았던 오스트리아 제국과는 전혀 친하게 지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삼국동맹이 범게르만주의로 흐르자 이탈리아는 점차 독일, 오스트리아와의 관계에서 멀어져만 갔고,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중립을 지키면서 형세를 관망하다가 런던 밀약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도와서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이렇게 이탈리아군은 떡고물이라도 좀 얻어먹을까 하여 거액을 들여 참전했지만,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전후 협상국의 논공행상(베르사유 조약)에서 참전 이전에 협상국에게서 약속받았던 영토를 거의 얻지 못했다. 물론 독립 반세기만에 종주국과 맞서싸운다는 자체가 대단한 것이며, 당시 세계 5위 수준의 이탈리아 해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에게 승전을 거두었고, 육군 면에서도 계속 공세를 유지했지만 말이다.[10] 이런 분전에도 불구하고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지방 밖에 얻지 못한 이탈리아는 내부적으로 거대한 혼란에 빠졌다. 이 상황을 절묘하게 활용한 것이 바로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2.4. 국가 파시스트당 창립과 로마 진군
베니토 무솔리니는 1919년 불공평한 전후 처리에 분노하는 베테랑들을 모아 '전투 파쇼'[11] 를 창설하였고, 이는 1921년 국가 파시스트당으로 발전하였다. 이때 당의 친위대라 할 수 있는 검은 셔츠단을 조직했는데 이 셔츠는 이탈리아군 돌격대의 복장인 검은 셔츠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검은 셔츠단은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들을 테러하는 정치깡패질로 세력을 키웠다. [12]"사보이 왕가는 우리의 강령이 무엇인지 물었다. 우리 강령은 단순하다. '''이탈리아를 통치하고 싶을 뿐이다.'''"
1922년 9월 20일, 나폴리 대회에서의 연설.
무솔리니는 플라톤의 철인 정치론, 니체의 초인론, 20대 80 법칙으로 유명한 파레토 등의 사상을 종합하여 자신의 파시스트 사상을 구성하였는데, 이는 당시 좌우파가 아닌 새로운 "제3의 위치"로 취급되었다.[13] 무솔리니는 1932년에 이미 'Doctrine of Fascism', 곧 '파시즘의 이념'이라는 저서 등을 썼으며, 이미 수많은 정치 전문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등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최소한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같이 대놓고 과대망상성을 띠는 오류투성이의 책을 쓰진 않았다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점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로마 제국의 부활을 내세우는 반동적 흐름은 뚜렷했지만, 유럽 전체에 광범위했으며 후에 나치에 의해 정형화되는 반유대주의는 없었다는 점이다. 도리어 무솔리니는 유대인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마게리타 사르파티와 함께 일했는데 이 때문에 그녀는 "파시즘의 유대인 어머니"라 불린다(사르파티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첫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이들의 동행은 2차대전 직전인 1938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정치판은 강한 지도력이 없었고 내각제 하에서 단명하는 행정부가 나와 정국은 혼란하였다. 이때 협상국이 약속한 이탈리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도시인 피우메 (Fiume)[14] 를 이탈리아가 아닌 새로 건국된 유고슬라비아에 넘기기로 결정하자 이탈리아 전역에 큰 항의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항의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아닌 언론인 출신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le D'Annunzio: 1863~1938)였다. 무솔리니는 단눈치오를 질투하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단눈치오를 열렬히 지지하는 척 했다. 무솔리니는 자신의 신문사를 통해 단눈치오의 운동을 후원하는 모금운동을 벌였으나, 실제로 그 돈은 슬그머니 무솔리니 자신의 사조직 확충을 위해 쓰였다. 덤으로 무솔리니는 단눈치오 조직의 여러 행태를 모방했는데, 여기에는 (훗날 '나치식 경례로 더 잘 알려지게 되는) 로마식 경례, 파시스트식 구호, 그리고 피마자 기름 먹이기[15]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전후 경제난과 연합국의 이탈리아 푸대접 등으로 혼란이 지속되자 무솔리니는 1922년 10월 27일 도박성을 띤 로마 진군을 감행했으며, 당시 사회주의에 반감을 품고 있던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눈에 들어 총리로 취임하여 집권하였다. 그리하여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수립되었으며, 그는 이와 동시에 '이탈리아 최연소 총리 취임' 기록을 세웠다.
2.5.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개최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의 개최권을 따낸 베니토 무솔리니는 월드컵에까지 마수를 뻗쳤다. 심판을 따로 불러서 독대를 여러차례 한 것. 게다가 원래 아르헨티나 선수인 루이스 몬티, 엔리케 구아이타, 라이문도 오르시에게 귀화 요청을 해서 이탈리아 유니폼을 입혔다.[16] 물론 이탈리아가 우승하자 베니토 무솔리니 본인이 죽을 때까지 이들에게 거액의 연금을 줘가면서 우대했다.
무솔리니는 이렇게 월드컵에서 우승해 놓고 그것을 파시즘 홍보에 대대적으로 활용했다. 그렇게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이용당했다고 평가받는 막장 월드컵이 되었다.
이런 스포츠를 이용한 국가적 홍보와 위상강화는 무솔리니를 모방하던 나치 독일이 또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그대로 따라한다.
2.6. 초기 대외 정책
국가주의를 앞세운 베니토 무솔리니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이탈리아 국민에게 늘 호언장담했다. 이런 적극적인 복고적 팽창주의 행보는 지중해를 로마 제국 시절의 명칭인 라틴어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의 바다), 군대의 사단(Divisione)을 군단(Legione)으로 바꾼 것이 대표적이었다. 이탈리아는 스스로를 "신 로마제국"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중해 연안에는 이탈리아가 집어삼킬 만큼 호락호락한 나라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1차 대전 당시 아드리아해 바다 건너의 소국 알바니아에 괴뢰정부를 세우고[17] 그리스에 찝적거리는 정도(1923년 무솔리니는 케르키라 섬을 침공하여 코르푸 사건을 일으켰는데, 국제 연맹은 이미 이름뿐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는 이탈리아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의 실상은 그 정도였다. 상당히 의외지만 무솔리니는 30년대 초반까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움직였다. 분배된 몫이 적긴 했지만 이탈리아는 명백히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 취급받으며 대전 직후 5대 강국이자[18] 국제 연맹의 상임 이사국으로 대접받았다. 물론 해외 식민지 문제로 투닥거리긴 했지만 단지 그정도일 뿐, 처음부터 영국, 프랑스와 각을 세우면서 침략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도 성실히 이행했다. 심지어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협력하여 독일을 견제하는데 나섰으며 패전국 오스트리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사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관계는 30년대 초만 하더라도 히틀러의 일방적인 선망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원래 무솔리니를 열렬히 추종했고 무솔리니의 정치 기법을 배우고 본받았다. 따지고보면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총리 자리를 차지했을 무렵, 나치, 그러니까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은 그저 세계 각국에 있는 파시즘 정당의 하나에 불과했고 히틀러도 베니토 무솔리니 워너비일 뿐이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초상화를 얻고자 이탈리아에 신청했다가 거절당하기까지 했고, 로마 진군을 흉내내서 벌인 뮌헨 폭동이 실패하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여하튼 베니토 무솔리니는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에도 그를 '''저 시골뜨기 듣보잡 (히틀러와 가까워지기 전에 사석에서 정신나간 미치광이 혹은 위험한 바보로 칭했다고 한다)''' 정도로 간주했다. 일례로 1934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의해 오스트리아 연방국의 수상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히틀러가 이것을 기회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려고 하자 무솔리니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하면 전쟁을 불사할 것'''이라는 초강경한 경고 전언을 날렸고 히틀러는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의 희망은 4년 후인 1938년에야 안슐루스로 이루어졌는데, 이것도 무솔리니가 침략의 길을 걸으며 독일과 손을 잡은 뒤였다.[19] 히틀러의 이런 애정은 훗날 전쟁이 진행되면서 무솔리니의 돌출행동에 따른 짜증, '''애증'''으로 변하게 되었고, 이런 관계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반공주의를 내세운 만큼 소련과의 사이는 나빴으나 30년대 초 잠시 관계가 좋았던 적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자본주의 부르주아들을 적으로 여기고 경계했는데 포드, 테일러로 대표되는 미국의 대량 생산체제를 '미국주의(Americanism)'라 부르며 비판했다. 미국의 대공황이 세계를 뒤흔들며 자본주의 국가들은 위기에 빠졌는데, 소련은 상대적으로 멀쩡하여서 소련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하였다. 이탈로 발보를 소련으로 보냈고, 이탈로 발보는 볼셰비키들과 서로 '동무'라 부르기도 하며 자본주의를 같이 까댔다. 이런 우호 관계는 오래지 않아서 끊어졌는데 소련에게서 '대도시, 대형 공업단지' 같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봤기 때문이다.
그래도 식민지에 대한 정책이 악랄한 건 다른 제국과 차이가 없었다. 골칫거리가 바로 리비아였는데 1911년 이탈리아-오스만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이기고 리비아를 차지한 이탈리아였지만 오마르 무크타르(1862~1931)가 주축이 되어 독립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리비아는 에티오피아보다 비참할 수준 무장이었거늘 20년이나 이탈리아군을 괴롭혔고 이런 패배에 대한 책임을 물어 10여년동안 리비아 전선 주둔 사령관이 6명이나 모가지되었을 정도로 지리적 요건을 살려 게릴라전으로 잘 버텼다.
1929년에 7번째 주둔 사령관이 된 인물이 바로 로돌포 그라치아니(1882~1955) 원수였는데 그야말로 피비린내나는 무차별 학살로 리비아에서 악명을 날렸다. 우물을 시멘트로 매립해 물을 먹을 수 없게 만들고 거대한 철조망을 곳곳에 설치하며 이동도 막게 했고 리비아 민간인에 대한 학살 및 여성 겁탈, 약탈도 허용했다. 당연하지만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런 정책을 적극적으로 옹호했고 리비아에서는 지금도 무솔리니와 그라치아니를 히틀러같은 인간말종이라고 치를 떨게 되었다. 이런 정책이 힘을 받았는지 골칫거리이던 무크타르를 사로잡아 1931년 교수형시켰지만 그는 일절 굴하지 않고 당당히 이탈리아는 스스로 교수형을 당할 것이며 결국 리비아에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이 공로로 그라치아니는 진급했고 이후 에티오피아 전선 사령관이 된다.
2.7. 침략으로 선회하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침략 노선을 본격으로 걷게 된 것은 1935년 3월, 나치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 선언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엔 무솔리니는 독일을 대상으로 한 승전국 간 연합 전선을 여전히 유지하고자 했고, 영국과 프랑스와 합의하여 대독 공동 대응 전선인 스트레사 체제를 형성했다. 그러나 그 직후 영국이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뒤통수를 멋지게 쳤다.
이때부터 무솔리니는 기존 승전국과의 공조, 특히 영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했고 "어차피 나치 독일 재군비도 묵인했으니 우리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는 것도 넘어가 주겠지?"라는 생각으로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 에티오피아는 당시 아프리카에서 사실상 유일한 독립국[20] 이었기에 이탈리아가 넘볼 거의 유일한 침략 대상이었다. 또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현 소말리아 중부와 남부)와 이탈리아령 에리트리아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고, 19세기 말에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하려다 패배한 것에 대한 명예회복의 필요성도 있었다.
무기라야 외국에서 수입한 소총이 전부였고 아예 창과 칼로만 무장한 부대까지 있었던 에티오피아군은 전차와 전투기로 무장한 이탈리아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35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자그마치 병력 50만 명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군은 1년간의 격전 끝에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이탈리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아 약 만 명이 전사했으나 무솔리니가 이에 대해 한 말이 걸작이다. '''"파시즘을 강화하려는 희생으로서 전사한 만 명은 너무 적다."''' 그래도 자기 아들들은 여기 참전하게 하여 최전선으로 보내긴 했다.
문제는 에티오피아 침공을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생각처럼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을 묵인했지만, 이로 인해 히틀러의 라인란트 재점령에 대응하지 못하며 영프와의 대독 공동전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어설픈 에티오피아 침략으로 이탈리아는 국제적 왕따가 되었고, 무솔리니는 외교상 고립을 탈피하고자 독일과 밀착하는 오판을 저지른다.
이후 무솔리니는 착실히 주변 파시즘 국가에 우호적인 행보를 보인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팔랑헤당을 편들며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이탈리아가 획득한 쥐트티롤 지방 포기를 조건으로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인정하였다.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 위기 때에는 전쟁 직전에 중재자를 자처하면서 독일 측에 유리하게끔 뮌헨 협정을 성사시켰으며 1939년 4월에는 아드리아해 건너편의 소국 알바니아 왕국을 병합했다.[21]
2.8.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무솔리니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스페인 사이에서 어느 정도 설 자리가 있었다. 당장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직후에는 친독 정책을 잠시 멈추고 중립을 지켰다. 영국과 프랑스도 굳이 적을 늘릴 이유가 없었기에 중립을 인정했던 것. (사실 독일의 베네룩스-프랑스 침공 전까지는 서부전선 자체가 고요했다.) 그러나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의 패배가 명확해지자 짧은 중립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영국에 선전포고한다.
이때 무솔리니의 논리는 '''어차피 승패가 갈린 전쟁, 전리품(식민지)을 조금이라도 획득하려면 우리도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였는데, 이 논리 자체는 (당장 1차 대전 때 이탈리아가 중립을 깬 결과 얻은 이득을 생각해보면) 틀리지 않았다. 특히 이탈리아가 참전했던 1940년 6월 기점에서 생각하면 더더욱 그런데, 이때는 영국과 사이 좋았던 스웨덴을 위시해 유럽 내 여러 중립국마저 영국에게 독일과의 평화 협정을 중개해 주겠다고 나서던 시점이었다.[22] 전쟁의 승패가 끝났다는 오판은, 결과를 아는 후대에 사는 사람들만이 내릴 수 있는 것으로 당시 기준으로는 지극히 상식에 기초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전쟁의 첫 행동인 남프랑스 침공은 르네 앙리 올리 대장이 이끄는 프랑스 알프스군에게 참패한 덕분에 프랑스에서 얻은 영토는 쥐꼬리만했다.[23] 무솔리니는 프랑스령 튀니지나 알제리 일부를 원했으나 정작 그 지역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의 영토 아주 약간밖에 못 얻은 것. 결국 무솔리니는 이걸 만회하겠답시고 북아프리카 전역을 개시하여 40년 8월 이집트 왕국 침공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의 포문을 열었다.[24]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독일 공군의 물량에 영국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고전하고 있었으나 차츰 전세가 뒤집어지면서 승리하여, 항복하기는커녕 대영제국의 일체를 긁어모아 독일과의 결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리비아까지 쭈르르 밀리면서 에르빈 롬멜에게 징징거리며 후일을 부탁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동맹 독일의 전황까지 힘들게 한 것.
게다가 무솔리니는 북아프리카 전역이 열심히 붕괴 중인 와중에 능력도 안 되면서 또 다른 전선을 열어제낀다. 처음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략하기 위해 독일에 의사를 타진했으나 유고슬라비아를 추축국으로 끌어들이려고 애를 쓰던 독일은 "싫어. 하려면 혼자 해보시던가" 라며 거절했다. 결국 베니토 무솔리니는 아예 새로운 침략 대상을 몰색했고 그렇게 시작된 것이 그리스 침공으로, 딱히 친영도 친독도 아니었던 군부 정권하의 그리스가 이렇게 연합국에 가담해버렸다. '''물론 이탈리아는 여기서도 참패한다.'''
결국 무솔리니가 거하게 친 사고를 수습하고자 나치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2달간 늦추면서 전광석화 같은 공세를 다시 폈다. 그렇게 독일의 뒤통수를 친 유고슬라비아를 정복하고 이어 발칸 반도 끝까지 내려와 그리스군을 격파하면서 이탈리아군을 구원했으며, 북아프리카에 룸멜과 귀중한 기갑부대를 파병했다. 그러나 이렇게 연기한 두 달 때문에 결과상 모스크바를 칠 수 있는 시간을 날려 버렸고 이것은 결국 독소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25]
'''뭐 그 후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이탈리아도 소련에 선전포고하고 원병을 보냈는데 동서부전선 어디서나 이탈리아군은 연합국의 동네북 신세였다.
이런 개삽질의 연속은 외형상 '뽀대'에 치중해 이탈리아의 국력도 제대로 가늠하지 않은 채 맨땅에 헤딩하듯 저지르고 본 대가였다. 이탈리아는 열강임에도 다른 강대국에 비해 공업 기반이 한심할 정도로 빈약했다. 어떤 사단은 19세기 말에 제작된 화포를 장비할 정도였고, 이것도 수량이 매우 부족해서 투석기를 제작해서 전투에 사용을 하자는 문제도 있었다. 기술력은 그나마 다행인데, 기술력을 바탕으로 양산할 총력전의 설비가 태부족인 상태라는 것이다. 덤으로 앞서 언급했듯이 부족한 전력으로 남들보다 앞서서 침략 전쟁을 수행한 결과 있던 장비와 물자도 신나게 바닥낸 뒤였다는 점도 한몫했다. 심지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밀집대형으로 부대를 진군시켜서 적 영국군의 포격과 폭격의 제물이 되게 했다.
제대로 변명하자면 사실 이탈리아 국민과 경제, 사회 입장에서 진짜 2차 세계대전은 1939년이 아니라 에티오피아 침공인 1935년에 시작해서 스페인 내전 참전기인 1930년대 후반 내내 지속되다가 1939년이 되니 스케일이 한층 더 커진 것뿐이었다. 에티오피아 침공에서도 솔직히 적은 비용으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효율적인 전쟁을 했다고 하기 힘들고, 스페인 내전에서도 막상 투자는 콘돌 여단을 제외하면 대대적인 전투 병력보다는 소수의 군사 고문, 기술자 파견에 주력했던 히틀러와 달리 이탈리아에서 보낸 지원병 군단 (Corpo Trupo Volontarie, CTV)은 5만명이나 되는 완편 군단급 규모에, 전투기도 700대 씩이나 동원했고, 예산적인 측면에서도 3년 내내 이탈리아 일년 예산의 14%~20%라는 거대한 돈을 잡아 먹으며 본판인 2차대전에 대비할 이탈리아군의 전쟁 준비 계획, 신무기 개발, 편제 재편 등을 완전히 아작내면서 쏟아 부었다.[26][27] 이탈리아의 전쟁은 사실상 독일보다 3년하고도 반이나 일찍 시작했고, 에티오피아나 스페인 같은 '전초전'에서 국력과 군사력을 까먹은 이탈리아는 막상 2차대전 본편에 대비하여 다른 열강들 처럼 제대로 된 군비 경쟁과 전쟁 준비에 들어 갈 여력이 못 되었다. 애초에 지지기반 자체가 외국의 전쟁에서 조국 이탈리아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안겨주자는 호전적인 팽창주의를 매게로 치열하게 좌우익과 지역주의로 분리되어 있던 민심을 땜빵했던 것이니 이렇게 이탈리아가 졸전을 경험할수록 한동안 철퇴를 맞고 수그려 있었지만 원래 거대한 조직이었던 이탈리아 공산당, 사회당 같은 좌파 반체제 운동들이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파시즘을 지지했던 기존 보수우익 내에서도 "무솔리니는 안 돼..."라는 식의 분위기가 퍼졌다.
이렇게 되자 무솔리니는 전쟁에 완전히 환멸을 느끼고 침략에 흥미를 잃었다. 집무도 대충대충 하는 때가 잦아졌고 정부(情婦) 클라라 페타치와의 연애나 모르핀 중독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히틀러에게는 스탈린과 강화하고 지중해 방면에만 공세를 집중하라고도 부탁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이렇게 왕년 자신의 영웅이었던 독재자 동지가 의욕을 잃자 크게 실망했고, 무솔리니를 독일로 초청하여 설득, 계속 이탈리아를 동맹국으로 붙들어 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권력 자체에도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괴벨스의 일기를 보면, 당시 독일을 방문한 무솔리니는 얼빠진 늙은이 같았다고.
2.9. 몰락과 최후
이런 지리멸렬한 전과 탓에 이탈리아 국민이 베니토 무솔리니 체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1943년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점령하여 이탈리아 본토 상륙이 임박하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뿐만 아니라 국가 파시스트당 내부에서도 '''"이제 무솔리니로는 안 되겠어..."'''하는 분위기가 임박했다. 파시스트 당 대회에서 무솔리니는 매도의 대상이 되었고 이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위인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마저 등을 돌리고 무솔리니 해임 음모에 가담했다.
이 대화에서 보듯 무솔리니는 매일 거듭되는 패전에 완전히 절망하여 권력 의지를 완전히 잃었던 듯하다. 그는 심각한 우울증 증세도 보였고, 나치 독일의 공군 최고 사령관 헤르만 괴링처럼 자주 모르핀과 메스암페타민을 과다 복용했으며, 샴페인과 브랜디와 같은 독한 술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1943년 국왕은 무솔리니를 불러 말했다.
"이보게나, 두체, 이탈리아는 지금 군대도 경제도 모든것이 처참하게 완전히 박살이 났네...."
"전 국민이 자네를 미워하고 있어...짐의 신하들도, 자네를 믿고 지지했던 장교들과 군인들도, 심지어 자네의 사위마저도...."
"모두가 자네에게 크게 실망하고 등을 돌렸단 말일세....."
그러자 무솔리니는 혈색이 없는 얼굴을 고개를 푹 숙이고 크게 한숨을 쉬면서 힘 빠진 목소리로
"....폐하.....중요한... 결정이라도 내리셨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러자 국왕은
"그래... 자네는 이미 지도하는 사람으로서 완전히 실격이야... 자네에게 실망이 매우 크네... 그만두는 게 어떤가?"
무솔리니는 여기에 대항 한 마디 못하고
"후임자의 행운을 빕니다... 폐하...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말한 후 조용히 궁정을 나왔다고 한다.
무솔리니는 사임한 후 국왕의 명령으로 전범 혐의로 체포되어 애인과 함께 알프스의 한 산장에 연금되었지만, 오토 슈코르체니 SS 보병대위가 지휘하는 SS와 루프트바페 공수부대의 합동 특공대가 무솔리니를 구출해 독일로 호송했다. 뒤이어 히틀러의 지시를 받은 공군 야전원수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은 이탈리아 주둔 독일 국방군을 동원하여 연합군이 아직 진격하지 못한 나머지 이탈리아 북부 본토를 재장악하게 했다.
히틀러는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밀라노에다가 괴뢰정부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살로 공화국)을 세우게 했다. 또 국가 파시스트당의 후신인 공화 파시스트당도 새로 창당한다. 베니토 무솔리니는 먼저 국방장관에 로돌포 그라치아니를 임명하고, 자신을 쫓아낸 사람들에게 자신의 손이 닿는 한 피의 복수를 했고 사위인 치아노도 총살형에 처했으나[28][29] 이탈리아 전선의 전황이 악화하자 결국 국외 탈출을 꾀했다.
그러나 도망가던 그는 변장을 알아챈 이탈리아 좌익 게릴라(빨치산/이탈리아어로는 파르티지아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무솔리니 일행은 독일군으로 위장했지만, 공교롭게도 빨치산 그룹 중에 예전에 해군 수병 시절 무솔리니에게 수훈한 사람이 있어서 들통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혹은 빨치산이 무솔리니의 정부 클라라 페타치를 알아보고 무솔리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거나, 무솔리니가 신던 값비싼 장화 때문에 위장이 들통났다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다만 이런 것들은 그저 이야기들일 뿐이고 베니토 무솔리니 본인 자체가 굉장히 아주 특징적으로 생겼다. 선이 굵은 얼굴형인데다가 파시스트 독재자들이 흔히 그렇듯 집권기간 내내 자기를 우상화하는 면상 사진을 전국 곳곳에 걸어뒀기 때문에 모르기가 어렵다.
무솔리니는 1945년 4월 28일 게릴라에게 사로잡힌 다른 측근들과 정부와 함께 즉시 총살당해 죽었다. 총살 집행 전에 골치 아픈일 생겼는데 집행용으로 쓸 총들이 대부분 이탈리아에서 제조된 총기들이라서 총알이 나오지 않거나, 계속된 작동불량, 너무 약한 화력 때문에 총알들을 맞고도 거의 대부분 잘 죽지를 않아서 다들 고통스러워했고,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성능 좋은 베레타 M1934 자동권총 2정과 베레타 M1938 기관단총 1정으로 겨우겨우 총살집행이 끝났다. 유언은 "그래도 잘 된 거야. 적어도 이탈리아 땅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죽으니까 그나마 위안이군." 혹은 "내 가슴팍을 쏘아라!" 혹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고 한손에는 묵주를 꽉 쥐고있는 손이 벌벌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유언의 신빙성에는 의문점이 있다. 미국 언론인 피터 톰킨스의 주장에 따르면, 전쟁 중 베니토 무솔리니와 윈스턴 처칠이 교환한 서신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막으려고 브루노 로나티와 로버트 마카로네에게 베니토 무솔리니를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것. 실제로 1994년에 로나티도 자신이 무솔리니를 총살했고 마카로네가 페타치를 총살했다고 밝혔다.
총살당한 후 베니토 무솔리니의 시체는 애인이었던 클라라 페타치와 측근들의 시체 3구와 함께 밀라노로 인도된 뒤 썩어서 문드러질 때까지 피아잘레 로레토 광장에 있는 어떤 주유소 기둥에 거꾸로 매달렸다. 그들의 시체에는 원한을 품던 시민의 침과 욕설 세례가 이어졌으며, 심지어 어떤 시민들은 몽둥이로 두들겨 패거나 권총으로 쏘기도 했다. 시민들의 이 같은 분노는 무솔리니의 시신에 특히 집중되었다. 주유소에 매달리기 전부터 시민들의 발길질에 차인 무솔리니의 얼굴은 심각히 훼손되었다.[30] 게다가 주유소에 매달린 클라라 페타치의 치마는 뒤집혀서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시민들은 클라라의 중요 부위에 이물질을 집어넣거나 막대기 등으로 쑤셔박기도 하였다. 그 참상을 보다 못한 어느 노파가 치마를 여며서 가랑이 사이로 끼워넣어 줬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에선 '클라라의 치마를 여며주다(자신의 소신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하다)'라는 관용어가 생겼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도 큰 충격에 빠졌다. 무솔리니가 총살당하고 이틀 후에 히틀러는 자살할 때 내 시체를 불태워 달라는 유서를 남겼는데 자신도 무솔리니처럼 죽어서 시체가 저런 꼴이 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후 유가족들은 몰래 시신을 회수하였고 아무도 모르게 프레다피오에 있는 무솔리니 가문 무덤에 안장되었다. 한동안 증오하던 몇 시민들에게 석관이 훼손당하기는 했어도 무사히 남은 탓에 저 무덤은 보수된 이후로 지금도 이탈리아 극우파들의 성지 비슷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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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토 무솔리니의 묘지. 두상이 로마 황제의 두상을 본뜬 듯 근엄한 표정이다. 두상 양쪽에 있는 파시스트의 상징인 파스케스 조각이 인상적이다.
3. 업적
베니토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을 살리겠다는 명목으로 집권했다. 집권기간 동안 공을 많이 들여 로마 시내의 여러 유적을 대규모로 발굴했다. 현대 로마 시내에 남은 여러 유적은 대부분 무솔리니 정권 시절에 발굴된 것이다. 하지만 이 로마 유적을 발굴하려면 그 위에 자리잡았던 여러 건물을 일단 철거해야 했는데 무솔리니는 독재자답게 이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마찰을 무시하고 오로지 유적 발굴에만 집중해서 르네상스 시대 이후 건립된 다른 가치있는 여러 건물도 많이 철거됐다. 그러면서도 로마 유적(포룸 로마노 등) 사이에 길을 뚫어놓고는 "황제의 거리(Via dei Fori Imperiali)"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길 때문에 많은 유적들이 파괴되고 남은 유적들도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토건으로 로마와 이탈리아의 모습을 완벽하게 뒤바꿔 놓은 사람이다. 바티칸 시국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뚫어둔 "화해의 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광장, 이탈리아 최초의 고속도로[31] 이 모든 걸 무솔리니가 만들었다. 로마 관광의 중심가에 가면 "베니토 무솔리니가 만든..."이란 말을 빼놓고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을 정도. 또한 도시계획에도 관심을 가졌는지 현대 로마에서 'EUR(에우르)'이라는 신도시 구역을 계획해 만들고 이곳에 파시즘을 상징하는 "노동문명궁"을 만들었다.#
긍정적인 평가로는 무솔리니에 의해 이탈리아의 혼란이 해결되고 경제도 발전했다는 점도 있다.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해 바티칸 시국(교황청)과의 오랜 문제를 해결한 것도 베니토 무솔리니였고 무솔리니가 집권한 기간 마피아 세력이 약화되기도 했다. 특히 마피아의 본진인 시칠리아를 북부 정권에 반항하는 남부 사람들의 기질을 제압하고자 더욱 공들여 탄압했다. 전쟁 후에도 한동안 시칠리아에 파견되는 사법 공무원들은 무솔리니 시절의 후광을 입기 위해 당시 시칠리아에서 근무한 공무원들의 자손들 위주로 뽑았다고 한다. 또한 말라리아가 창궐하던 낙후된 남이탈리아에서 말라리아를 몰아낸 것 역시 무솔리니 치세의 일이다.
상술했듯이 무솔리니의 경제 정책은 강력한 보호무역과 국책사업 투자를 통한 자급자족 지향이었다. 때문에 침략전쟁을 하지 않으면 망하는 수준이었던 나치 독일나 일본 같은 다른 추축국과 비교하는 건 실례이긴 했지만, 역시 오래 유지되긴 힘든 경제이기도 했다. 전쟁 때 중립을 유지해 장기집권했다면 프랑코 정권처럼 자본주의로 선회했을지도 모르는 일.
이탈리아가 축구 강국이 된것도 베니토 무솔리니의 공헌이라고 볼 수 있다. 1898년에 시작한 세리에 A가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인 리그로 전환된 것은 무솔리니의 공로이며,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의 성공적 개최도 무솔리니의 공로가 크다. 그 후로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정상권의 축구 강국이 된다.
4. 어록
'''타인을 믿는 것은 좋지만, 안 믿는 것은 더 좋다.'''
동시기 독재자인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도 주변에 대해 병적으로 의심했던 것을 감안하면 독재자들의 전형적인 의심을 잘 보여주는 발언.
'''철학적 그리고 교리적 관점에서 나는 영원한 평화 따위는 믿지 않는다.'''
'''내게는 오직 나를 승리자로서 평화 회담에 출석시킬 수 있는 수천 명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의 발언과는 정반대로 전투에서 연달아 패배해 무의미한 희생만 속출한 데다가 무솔리니 자신의 목숨까지 엇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발언이다.
'''다른 나라가 역사를 쓸 때 수수방관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누가 이길 지는 문제가 아니다.'''
'''인민을 계몽하려면 그들을 자극해 전투로 내몰아야 한다.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5. 평가
아돌프 히틀러와 도조 히데키와 함께 추축국 편으로 2차대전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만 해도 평가가 꽤 좋은 편이었다.[32] 그러나 히틀러도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는 좋은 평가를 받은걸 보면 별달리 의미를 둘 평은 아니다. 처칠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집권에 대해 '이탈리아인들이 자기들에 맞지도 않는 민주주의 놀이를 하느라 나라 망쳤었는데,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인들에게 어울리는 체제로 개선을 해줬다.'고 호평하기도 했다... 물론 이건 지도자였던 무솔리니와 그를 지지하는 이탈리아 국민을 쌍으로 비꼬는 것이고, 처칠과 아타튀르크 등은 원래부터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실체를 파악해 전간기에 부정적인 언급을 몇차례 하였다.
더욱이 이탈리아가 추축국이 된 데에는 영국의 책임도 없지 않다는 지적도 있으며[33] 2차대전 동안 독일에 비해서는 전쟁범죄를 자제하고[34] 오히려 막는 등 여러 호재가 겹친 까닭에 현재 이탈리아에서도 대놓고 위인급으로 칭송하는 인물들이 꽤 있다. 당장 전직 이탈리아 총리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대표적인 그 예. 심지어 무솔리니의 측근과 가족들은 전후 이탈리아에서 자신들의 행적을 숨기기는커녕 대놓고 활보하였고, 그 손녀는 국회에까지 입성하였다.
게다가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라는 희대의 욕받이 덕에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현재까지도 별다른 비판을 받지 않고, 소위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 등의 유머소재로서 가볍게 사용된다. 결정적으로 국내 정치에 있어서 무솔리니는 파시즘의 창시자이긴 하지만, 막상 동시대 다른 파시스트 후발 주자들에 비해선 비교도 안 되게 온건했다. 히틀러야 말할 것도 없고, 헝가리의 살러시 페렌츠, 루마니아의 이온 안토네스쿠 등은 피비린내나는 학살과 함께 홀로코스트에 동참했다. 무솔리니의 지원을 통해 정권을 잡은 프랑코도 수십만 단위의 대규모 자국민 학살을 저지르며 살벌한 국내 탄압을 저질렀다. 반면 무솔리니는 막상 집권 과정과 집권 이후에도 마테오티 살인 사건과 같은 간판 정치인, 핵심 정적들을 살해하고 탄압한 걸 빼곤 자국민 상대로 대규모 폭력적 테러를 저지르지 않았다. 심지어 이데올로기, 대중 기반 차원에선 본인도 인정한 가장 위험한 숙적인 안토니오 그람시도 감옥에 넣기만 했지 죽이지는 않았고, 내전 당시 진공하면서, 그리고 승전 후 샅샅히 공산당원, 사회당원, 아나키스트들을 잡아 족쳤던 프랑코와는 대조적으로 반대 정파를 지지했던 사람들도 대놓고 반체제 정치 활동을 계속하지 않으면 대충 그대로 두는게 일반적이었다. 이탈리아 내에서 자국민 대상 대규모 폭력적 통치가 시작된건 2차대전이 터지고 자국이 본격적으로 전장이 되고, 그리고 무엇보다 43년 강화 이후 나치스가 진주해오며 전국이 파시스트 vs 반파시스트 세력으로 똑 쪼게진 이탈리아 내전 시점에서나였다.
국내 통치란 측면에선 다른 동업자, 이웃 동맹들에 비해 덜 폭력적이고, 파시즘이 사회 일상에 깊게 침투하며 문화, 예술, 지식인 사회를 틀어막았던 나치 독일, 프랑코 치하 스페인과 달리 이탈리아에선 정권 쟁취 시기나 월드컵 같은 이벤트 몇몇 빼곤 '비정치적' 일상이 상당히 유지되어서 무솔리니의 자국 내 기억은 딱히 금기시 되지 않는다. 당장 파시스트당의 '''법적 후계'''인 FdI는 중견급 원내정당에, 주지사까지 배출하는 정당이다. 혈통으로 왕따당하는 것도 아니어서 우파 선거 연합에 공공연히 참가한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눈을 돌리면 무솔리니는 여전히 리비아, 에티오피아에서의 대규모 인종청소와 각종 범죄의 최종 책임자이며, 유고슬라비아 침공, 그리스 침공의 주모자이다.
히틀러나 도조의 경우 자국 내에서의 평판이 일부 극우들을 제외하면 매우 안 좋은 것과는 달리 이탈리아 사람들 중 상당수는 아직도 베니토 무솔리니를 좋게 평가한다. 나치 전범들의 자식들이 대체로 성을 바꾸거나 남아메리카로 이민해 은둔 생활했던 반면, 무솔리니의 자식들은 아버지 사후에도 연좌제 적용을 받지 않는 등 그다지 곤란을 겪지 않았다. 장남은 예술 평론가로서 명성을 날렸고 막내 아들 로마노는 재즈를 연주하는 사람으로 활동하면서 쳇 베이커 같은 유명한 아티스트들과 협연하고 내한 공연도 했다. 내한 당시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한국 기자들에 질문에 "멋있었던 분"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막내 아들은 정치인을 하고 있는 알렉산드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나치" 자체가 금기어가 되었고 오른손을 곧게 치켜드는 로마식 경례를 행할 경우 처벌되는 독일에 비해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를 대상으로 한 저항감은 별로 없는 듯하다. 아직도 이탈리아 정계에는 파시스트 정당이 여럿 존재하고 당 행사에서는 파시스트식으로 공공연히 경례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탈리아 파시즘 체제가 히틀러의 파시즘 체제보다 온건했던 것은 그 사람들의 선의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더 멍청했기 때문에''' 예술과 같은 고급 문화 영역에 체계 있게 손을 댈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조금 더 교활했다면 독일과 엮이고도 곱게 죽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처럼 될 수 있었을지도?
경제면에 있어서 무솔리니는 미국주의라 부르는 대량 생산체제, 소위 포디즘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고 경계하였다. 특히 미국의 대량 생산체제를 벤치마킹한 피아트와 마찰을 빚었다. 피아트가 미국식으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을 효율적으로 쥐어짜는 공장을 지으려 하자, '노동자들이 기계 옆에서 허겁지겁 도시락을 먹는 것은 안 될 일이다.'며 안락한 구내식당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넣었다. 하지만 결국 피아트를 막진 못했다. 이런 관점에서 지방의 소기업에게 일감을 나눠주고, 기술 장인들을 대우하는 등 전반적으로 자본주의의 폐해를 줄이려 하였다.
결과적으로 당시 이탈리아 경제를 허약하게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장인들이 한땀 한땀 기술 좋은 레이싱용 차를 만들던 알파로메오는 비효율성을 견디지 못하고 망해서 무솔리니가 국영화했고, 전쟁으로 급박한 와중에 가정에서 망치로 두들겨 만든 부품을 도시의 공장으로 가져와 조립하는 식의 생산 방식 때문에 전투기 생산이 매우 지체되었다. 나중에 생산 체제를 개편해서 나아졌으나 얼마 가지 않아 이탈리아는 항복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이런 정책이 가족기업, 10인 이하 영세기업들 간의 네트워크가 중심이 된 오늘날의 이탈리아 경제구조를 형성하는 데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기쳤다. 소위 장인들이 한땀 한땀 만드는 고급제품(명품) 시장에선 이탈리아가 절대 강자이다.
2020년에는 이탈리아의 2010년대 중반부터 극우적인 행태들이 커진 상태에서 무솔리니에 대해서 19.8%가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6. 개인사
베니토 무솔리니에겐 애인이 많았는데 그중 베니토 무솔리니를 전폭 지원했던 첫 애인 이다 달세가 꽤 유명하다. 이다 달세는 무솔리니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버려졌고 무솔리니에 대항하다가 정신병자로 몰려 결국 죽는다. 2009년에 이탈리아에서 개봉한 마르코 벨로키오가 감독한 영화 '승리'는 바로 이 이다 달세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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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못지 않은 연설의 귀재다. 히틀러의 연설이 워낙 강렬한지라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긴 했지만, 퍼포먼스를 제외한 연설 내용 자체는 앞뒤가 안 맞고 견강부회로 가득차 있었서 정신병자의 히스테리라고 혹평받기도 했다. 허나 무솔리니는 히틀러와는 달리 묵직한 바리톤 목소리로 "문장이 되는" 깔끔한 연설을 했다. 이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성 차이로 환원될 수 있다. 히틀러는 고교 중퇴, 무솔리니는 고졸이라서 학력상으로는 별 차이 없었지만[35] , 베니토 무솔리니의 독서량이나 문필력, 경력은 히틀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풍부했다. 생애에 나와있듯 초등학교 교사, 잡지 편집장, 신문사 사장 경력도 있었으니.[36] 그런데다 이탈리아어의 속도가 기관총처럼 빠르고 음악성이 있기에 무솔리니의 연설도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심고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일자 무식인 히틀러와는 달리, 외국어 실력도 월등, 독일 방문 때 나치 집회에서 독일어로 유창하게 연설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어 억양이 상당히 심하지만 영어도 꽤 잘했다.[이탈리아 억양이 심하다고는 하지만, 베니토 무솔리니가 젊었을 때 병역도피를 위해 잠시 스위스에 체류한 것을 빼면, 이탈리아를 떠나본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하면, 대단한 외국어 실력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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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이나 옷 갈아입는 것을 귀찮아하던 지저분한 사내였지만, 누가 이탈리아 사람 아니랄까 봐 패션 감각은 제법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정말 옷을 잘 입는다. 1934년 베니토 무솔리니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를[38] 처음으로 방문한 히틀러는 노란색 비옷(레인코트)에[39] 줄무늬 바지를 입고 에나멜 가죽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무솔리니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근엄해 보이는 제복에 허리에는 제례용 단검을 차고 은빛 박차가 달린 검은 부츠를 신고 나타났다. 이 모습을 본 히틀러는 굉장히 창피했는지 이후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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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1]
집권하기 전에도 무솔리니는 화려한 모습을 보이고 다녔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교사가 되려는 임용고시를 치르면서도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옷을 입고 입에 담배를 문 채 등장했으며, Il popolo d'italia의 기자로 활동할 당시에는 '''수류탄을 서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자신의 '두체'로서 이미지를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홍보하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 사진을 찍을 때는 근엄한 이미지를 위해 무조건 밑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각도로 찍었고 키가 크게 보이게 키높이 구두를 신는 등 안간힘을 썼다.[42] 심지어 자신이 하루에 4시간만 자면서 이탈리아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로마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 불'''만''' 20시간식 켜놓고 자신은 낮잠까지 다 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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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11년차인 1933년에 실행된 기동훈련에서는 '''상의는 흰색 나비넥타이를 매고서 흰색 셔츠를 입은 연미복이고 하의는 기병 바지와 기병 장화, 손에는 선원들이 즐겨 쓰는 모자가 들려 있었다.''' 그야말로 균형에 맞지 않는 코디인데 이것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당시 상류층과 중산층 이하 계층 모두에게 호감을 사려고 취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해를 기점으로 무솔리니의 공식 복장은 군복으로 통일되어 갔다.)
히틀러가 나치당을 대상으로 한 통제권과 국내 자본가들을 대상으로 한 통제권을 하나씩 절차를 거쳐가면서 확실히 장악했는데 무솔리니는 불안정한 권력 기반이 있었기에 일사불란한 전체주의다운 통치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가 히틀러 치하의 독일보다 그나마 사람 살만한 곳이라고 평가받는 데에는 무솔리니가 히틀러만큼의 똘끼가 있지 않았다는 점도 있지만, '''권력의 불안정성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무정부주의도 상당히 세력이 있는 사상이었고 혁명을 지향한 사상으로 공산주의 못지 않은 파급력이 있던 사상이었던 데다가 당시에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보다 잘 조직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정부주의의 "개인의 단체를 대상으로 한 일사불란하게 자발하는 단결"이라는 부분이 파시즘의 협동주의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아직 혁명을 지향한 인민주의가 분화하지 않은 시절에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무정부주의다운 코드를 차용하는 게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무솔리니는 딱 잘라서 무정부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으로 분류될 수 없는 "혁명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베니토 무솔리니의 운동 자체가 혁명을 지향하는 보수주의이기도 하다.
나치의 군복 놀이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를 따라한 것이다. 무솔리니는 나타나는 행사의 종류에 맞게 여러 종류의 군복과 모자를 공들여서 코디했다. 두세 종류 정도의 제복(군복형 제복+양복형 제복)에다가 정모 하나로만 나타나던 히틀러에 비해 훨씬 패셔너블.
그리고 의외로 공처가였고(그런데 수많은 애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미신을 잘 믿어 누군가 사형하면 그 사람이 유령이 되어 자신을 보복한다고 굳게 믿는 겁쟁이였다.(그렇다고 안 죽이고 다닌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도 사회주의 혁명가, 좌파 사상가로 계속 회자되는 안토니오 그람시도 감방에 가둬놓기만 했을뿐 처형하지는 않았다. 물론 혹독한 감옥살이로 그람시는 거의 옥사할 때쯤 석방되었고 석방되자마자 사망한다.
부르주아 속물들이 운영하는 피아트의 자동차보다 장인들이 만드는 알파 로메오의 자동차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알파 로메오 공장을 견학 중 신형 자동차를 애무하듯 어루만지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했다고 한다. 알파 로메오의 임원진이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무솔리니는 반드시 돈을 지불하겠다고 우겼고 임원진이 의논 끝이 5리라만 받기로 하였다. 무솔리니는 10리라를 건네주었는데, 임원진들이 잔돈으로 줄 5리라짜리가 없어서 한참을 당황해하자 '두 대 팔면 되잖소?'라고 소리치고는 두 대를 가져갔다고 한다.
말을 무서워해서 탄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무솔리니가 말을 타고 있는 선전용 사진은 앞에서 말이 움직이지 않게 잡아놓고서 촬영한 뒤 잡아준 사람은 합성으로 지운 것이다. 실제로 보면 앞부분이 어색하다.
적국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이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한 적이 있다. '''자기 사위도 총살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라는 게 그 이유였다. 다만 이는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고, 팔불출인지 사위를 매우 싫어한 처칠에게 존경하는 정치인이 누구냐고 그 사위가 물어봤을 때 한 말이다. [43]
마오쩌둥은 에드거 스노우와의 인터뷰에서, 히틀러를 대상으로 해서는 경멸스럽게 반응했지만 무솔리니를 대상으로 해서는 꽤 높게 평가했다. (<중국의 붉은 별>에서) 그런데 2차대전 이전까지는 서구권에서도 이런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무솔리니는 파시즘을 개척한 새로운 사상가, 혼란에 허덕이던 이탈리아를 단결시킨 정치인, 전쟁위기 속에서 대타협(뮌헨 협정)을 이끌어낸 중재자 등으로 좌우익을 막론하고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많았고, 히틀러는 그런 무솔리니를 따라하는 짝퉁 정도로 폄하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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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의 막내 아들의 딸, 즉 손녀인 알렉산드라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국회의원이다. 1962년생으로, 키 174cm에 달해 지금 기준으로도 늘씬한 장신이며 젊은 시절 뛰어난 미모로 각광받았으며 유럽판 플레이보이의 표지 모델을 하기까지 했었지만, 할아버지 때문에 아직도 논란 중인 인물이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유훈을 이어받아 '''대놓고 극우 성향을 보여''' 예전에 쌓아 놓았던 이미지를 스스로 깎아먹고 있다. 2014년 현재는 유럽의회 의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전진 이탈리아(Forza Italia)당 소속이다. 뱀발로 알렉산드라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모가 바로 이탈리아 전설의 여배우 '''소피아 로렌'''이다. 거기에 알렉산드라의 아들 즉 베네토 무솔리니의 증손자인 로마노 무솔리니가 2021년 현재 SS 라치오 U-19에 뛰고 있다. 포지션은 오른쪽 풀백#
꼬꼬마가 넘쳐났던 추축국의 지도자 중에서는 키가 제법 큰 편이였다. 169cm로...[45] 덤으로 가장 작은 사람은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였다. 153cm.
베니토 무솔리니는 죽기 전에 자서전을 남겼다. 제목은 '나의 자서전'. 국내에 번역, 시판되어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찾아보길.특유의 수사법과 박력있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다만 멋모르고 읽었다간 나의 투쟁과 마찬가지로 '''독재와 파시즘을 옹호하게 될 수 있으니 충분한 역사적 지식을 갖추고 아닌부분은 걸러 읽어야 한다.'''.
그래서 번역가도 이 책은 '''거꾸로 읽어야하는 책'''이라고 말했다.
7. 미디어에 등장하는 베니토 무솔리니
1940년 찰리 채플린이 주연하고 감독한 위대한 독재자에서는 박테리아를 지도하는 '나폴리니'라는 사람으로 나와 히틀러를 희화화한 토매니아의 힌켈과 서로 무기를 자랑하면서 티격태격한다.
리비아 독립운동을 표현한 영화 사막의 라이온에서는 로드 스타이거가 열연했다.
1970년대 미국 미니시리즈에서도 등장했다. 밥 호스킨스[46] 가 열연했다. 백작 치아노가 안소니 홉킨스, 치아노 부인이 수잔 서랜든인데 시종 찌질이로 나오고 대사로만 총살당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1980년대 조지 C. 스콧이 주연한 전기 영화에서는[47] 화끈하게 총살돼서 거꾸로 매달리는 장면이 그대로 묘사되었다. 한국에서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여인들이라는 엄한 제목으로 출시되었는데 19금 영화는 아니고 꽤 꼼꼼하게 당시 사건을 다루었다는 평.
라노벨 바보와 시험과 소환수의 등장인물 무츠리니의 어원이다.
GIRLS und PANZER에서 등장하는 안치오 고교의 전차도 대장인 안초비는 팀원들에게 베니토 무솔리니의 별명인 두체(duce: 두목, 영도자)라고 불린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초반부를 보면 어린애 두 명이 쇼파에서 방석(혹은 베개)로 놀고 있는데 이름이 베니토와 아돌포다.
이터널시티의 2003년 캠페인 보스 중 하나로 나오며 이름이 "베니토 베를리니"로 개명되어 등장한다.
게임 레플리카와 관련 있다. 몇몇 엔딩에서는 무솔리니가 말했던 "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국가에 반항하는 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뜨곤 한다.
Hearts of Iron 4에서는 역사에 맞게 이탈리아의 지도자로 나온다 다만 이탈리아로 로마 제국을 재건할시 로마 황제의 상징인 월계관을 쓰게되며 이름도 베니토 무솔리니에서 아우구스투스 무솔리니로 바뀐다.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 생디칼리슴 국가인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전체주의[48] 진영 지도자로 등장한다. 1차대전까지 사회주의자였음을 감안한 듯하다. 실제 역사상 좌파에서 극우파로 전향했던 인물들은 게임상 전체주의자로 등장한다.
굽시니스트는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 이름처럼 베니토 무솔리니를 무대리로 그려서 마순신 부장[49] 에게 알밤을 맞는 걸로 그리기도 했다. 결국 회사를 그만둔 그는 '''검은셔츠 피자'''를 창업해 정신없이 먹다가 혀가 골절되는 뛰어난 맛으로 이탈리아를 장악한다. 로마 진군은 피자 배달부 5천 명이 로마로 진군하는 것으로 패러디되었다. 결국 피자집은 망하고 히틀러의 도움으로 살로만 치킨집을 오픈한다.
드골의 영국 망명 시절에 영화 놈놈놈 포스터로 패러디 되는데 처칠은 좋은 분, 히틀러는 나쁜 분, 무솔리니는 '''이상한 분'''으로 패러디되었다.
8. 여담
북아프리카 전선의 독일군에게 지급되던 전투식량 중 이탈리아군이 만든 쇠고기 통조림을 독일군들이 부르던 별명이 ‘멍청한 무솔리니(Arme Mussolini)’ 혹은 ‘무솔리니의 엉덩이(Arsch Mussolini)’였다고 한다. 통조림에 AM(Amministrazione Militare)이라고 적혀있었는데, 통조림이 하도 맛이 없어서 붙은 별명이었다. 이 외에도 ‘늙은이(Alte Mann)’라는 별명도 있었다.
비록 무신론자였지만 옆동네 친구처럼 이슬람교와 무슬림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이슬람교를 존중했다. 무슬림하면 질색하는 현대의 이탈리아 극우와는 차이점을 보인다. 파시스트 이론 정당화에 무슬림을 예시로 써먹을 정도. 물론 이슬람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것과는 별개로 리비아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혹독한 탄압을 가했으며 독립운동 진압과정에서 8만 명 이상의 리비아인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혹독환 환경에서 죽어나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