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시 프랑스

 


[image] '''비시 프랑스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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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국'''
'''État Français'''[1]

'''비시 정부'''
'''Régime de Vichy'''
나치 독일종속국
[image]
[image]
대통령기[2]
국장
[image]
1940년 ~ 1944년
표어
Travail, Famille, Patrie
(노동, 가족, 조국)
국가
라 마르세예즈(공식)
원수여 우린 여기에 있습니다[3](사실상)
위치
프랑스 남부, 해외 식민지
수도
법적 수도 파리
임시 수도 비시
정치체제
회의제
국가원수
필리프 페탱[4]
언어
프랑스어
민족
프랑스인
주요사건
1940년 건국
1942년 횃불 작전
1944년 멸망
통화
프랑
성립 이전
프랑스 제3공화국
멸망 이후
프랑스 군정청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1. 소개
2. 역사
3. 망명정부
4. 소멸 이후
5. 비시 프랑스에 대한 기억
5.1. 공통된 기억의 시대 (1945년-1970년)
5.1.1. 레지스탕시알리즘
5.1.2. 정화
5.1.3. 공식적인 기억의 파급
5.2. 레지스탕시알리즘의 문제화
5.2.1. 로버트 팩스턴의 역사관
5.2.2. 대중매체의 역할
5.2.3. 유대인들과 쇼아
6. 기타

언어별 명칭
프랑스어
État français / Régime de Vichy
독일어
Französischer Staat / Vichy-Regime
영어
French State / Vichy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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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40 ~ 1944년 사이 남프랑스에 존속한 국가이자 사실상 나치 독일괴뢰 정부. 국호는 전과 다름없이 프랑스였지만 해외 망명정부인 자유 프랑스와 구분하기 위해 비시 프랑스라 부른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비시 정권(Régime de Vichy)이라 통용.
이름의 '비시'는 임시 수도를 오베르뉴에 소재한 온천 휴양지 '''비시(Vichy)'''라는 도시에 두고 있어서 그렇다. 법적 수도는 여전히 파리였다. 국가 수반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의 전쟁 영웅'''이었던''' 필리프 페탱이다.
비시 프랑스의 깃발로 알려진 쌍날도끼[5]가 그려진 깃발은 대통령기이고, 공식적으로 비시 프랑스는 이전에 쓰이던 삼색기를 그대로 승계하였다. 참고로 저 쌍날도끼의 자루 부분은 프랑스군의 원수 지휘봉이다.[6]

2. 역사


프랑스 제3공화국은 나치의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지만 전황이 쉽게 풀리지 않고 급기야 겨울전쟁으로 핀란드마저 무너지자 에두아르 달라디에 내각이 붕괴되고 폴 레노 내각이 출범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침공의 시작으로 프랑스는 참혹하게 패배하면서 밀리기 시작했고 레노 내각은 마드리드에 파견되어 있던 84세의 노인 필리프 페탱을 부총리에 임명함으로 국가적 단결을 도모하려 했다. 하지만 전황은 계속 악화되어 6월 10일, 프랑스는 보르도로 천도하고 1940년 6월 13일파리마저 함락되었다. 통제력을 상실한 레노는 6월 16일 하야했고 이미 6월, 의회 결의를 통해 전권을 위임받은 페탱이 프랑스의 수반에 등극하게 된다. 페탱은 6월 17일, 정전을 호소하였고 독일과의 협상 끝에 매우 가혹한 조건으로 6월 22일 정전협정을 맺게 되었다. 그 결과 3/5에 해당하는 북프랑스가 통째로 나치 통치에 넘어가고 나머지 2/5의 남프랑스가 자치권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것이 프랑스에 세워진 친독정권인 비시 프랑스다.
이후 페탱은 7월 1일, 비시에서 신정부를 수립한 후 7월 10일 개헌에 들어가서 프랑스 제3공화국의 종식을 고하고 7월 11일, 신헌법을 반포, 프랑스 공화국의 명칭을 폐기하고 프랑스국으로 개칭한 후 프랑스국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표면적으로 이 신정권은 노동, 가족, 조국을 기치로 내세우며 은행가와 대지주 등 부르주아 계층의 지지를 얻고 독일과의 공조 하에 나름대로 대전기의 혼란상을 극복하는 등, 패전국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안정적인 상태였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주권이 독일에 종속되어 제 입김을 내지 못하고 내적으로도 의회기능이 멈춰버리는 등, 국가로서 불완전한 상태에 있었다.
국가 수반인 페탱은 본래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받는 인망 높은 영웅이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베르됭 전투에서 프랑스를 구원한 구국의 영웅이었고, 뛰어난 활약상에 힘입어 원수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1934년 국방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2차 대전이 터지자 격렬한 항전주의자였던 부하 샤를 드골 등에 반해, 페탱은 나치의 강성함을 인정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주화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총리였던 폴 레노(Paul Reynaud)가 페탱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사임하면서 1940년 7월 10일 페탱이 입법과 행정 전권을 쥐고 통치하는 비시 프랑스 정부가 수립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 개전 다음날 입대했던 페탱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제3의 보불전쟁이란 틀로 이해했다고 한다. 당시 프로이센군에 참패하면서 나폴레옹 3세와 20만의 프랑스군이 포로로 잡히자, 새로이 수립된 임시정부는 항복을 선언했고, 결사항전을 주장한 파리 코뮌을 독일군과 함께 공격하여 진압하였다. 이후 50억 프랑의 엄청난 배상금을 조건으로 강화협정을 체결하고 프랑스의 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 즉 자신이 이끄는 비시 프랑스는 전후 재건을 위한 발판이고 샤를 드골자유 프랑스는 현실을 무시한 몽상가들로 본 듯하다. 이탈리아 왕국까지 참전하면서 영국이 오늘 내일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영국이 그대로 함락되고 독일이 전 유럽을 장악한다는 쪽에 베팅한 것이다.

권위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페탱에게, 비시 정권은 평소에 페탱이 바라던 프랑스의 상을 실현할 기회였다. 독일군이 휴전협정을 폐기하기 이전의 비시 내각진을 보면 태반이 테크노크라트, 즉 관료들과 교수들로 전쟁 이전부터 활동하던 파시스트는 보이지도 않으며 기껏해야 왕당파 정도나 듬성 듬성 보인다. 프랑스 제3공화국에 대해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부정적인 입장이 팽배한 터여서, 패전을 기회로 프랑스를 개혁하자는 여론이 매우 강했다. 여기에 패전 책임을 공화정에 떠넘기려는 프랑스 군부의 의도는 덤. 페탱에게 프랑스 민주 정치의 몰락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결국 페탱 정권은 인권을 탄압하는 독재 정권이 되었다. 페탱의 노력으로 비시 프랑스 지역 거주민들이 독일군에게 살육당하거나 전쟁 수행에 징발당하는 사태는 일단 모면할 수 있었지만 물자를 빼앗겼다. 독일군 점령 이후인 1943년에는 독일의 전쟁 수행을 위해 일할 노동자들을 선발해서 독일로 보내는 강제 노동 제도(STO)가 시행되었다. 그나마 독일은 200만의 노동자를 요구했는데, 협상을 통해 프랑스 전쟁포로 11만명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60만의 노동자를 보내는데 그치긴 했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숫자가 징용된게 사실이라 이 때문에 비시 정부의 인기는 더 떨어지고 레지스탕스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도 이루어졌다. 비시 프랑스는 유대인의 사회참여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고 페탱은 이것은 독일이 명령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비시 정부의 자발적인 법령이라고 증언했다. 다만 유태인들이 해외로 탈출하는 것 자체는 막지 않았고 유대인의 가슴에 부착하는 노란 별은 금지했다. 영문 위키피디아 비시 프랑스 부분을 참조하여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이미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프랑스 '국내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보호를 하려 했으나,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한 이후로 프랑스로 망명을 신청한 '외국 유대인' 등에 대해서는 별로 보호할 의지가 없었다. 타 독일 점령지들 중에서는 그나마 상식적인 정부가 남아있는 셈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도 학살이 아닌 추방 등으로 대체되었고, 주민들도 유대인들을 게슈타포와 독일군으로부터 숨겨주는 데 협조했다. 결과적으로 유럽 내 독일 점령지에서 가장 적은 유대인 희생자를 내었다.[7]
기존 공화정과의 단절을 위해 프랑스 혁명 이래의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가 폐지되고 '노동, 가족, 조국'이라는 새 구호가 등장하였으며[8] 혁명과 공화국을 상징하는 마리안도 각종 상징에서 사라졌다. 반영국 정서를 고양시키기 위해서인지 잔 다르크 숭배 열풍도 불었다는데 웬일인지 우리가 잘 아는 갑옷입고 칼 든 모습이 아니라 농가 처녀처럼 차려입은 모습으로 숭배되었다고 한다. 이는 점령자인 나치 독일을 자극하는 것에 대한 우려와 '여자는 집에 있어야지'라는 고루한 사상의 짬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군이 포함된 연합군이 루앙을 폭격하자 영국에게 화형당하는 잔 다르크가 그려진 포스터를 붙이며 잔 다르크를 죽인 그들이 또 온다면서 반영감정을 부추겼다. 영국으로 망명한 자유 프랑스 측도 프랑스 국기에 잔 다르크의 십자가를 넣어서 잔 다르크를 숭배했다. 자유 프랑스측은 잔 다르크가 영국에 맞선 건 영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했을 뿐이며 지금의 프랑스에 쳐들어온 적은 백년전쟁 때처럼 영국이 아니라 독일임을 강조했고 비시 프랑스는 잔 다르크를 적에게 팔아넘긴 부르고뉴파와 똑같다고 주장했다.
상술된 것처럼 여자는 집에서 가정을 돌봐야 한다는 사상으로 제3공화정 후반기에 그나마 향상되었던 여성의 노동 조건을 도로 악화시켰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엄청난 재앙이 되었다고 한다. 왜냐면 수백만의 포로들이 그대로 독일에 남아 있었으니 가정을 먹여살리려면 누군가는 나와서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는데 그게 바로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노동 조건이 매우 악화되었으니 여자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결국 점령국인 독일군 밑에서 부역해야 할 때가 많았다. '정상적인' 직업을 얻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독일군을 상대로 매춘을 해야 한 사례도 많았다. 이는 전후 처벌한 나치 부역자 중 여성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이와중에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일부 프랑스인들은 나치 독일이 이끄는 반공 십자군에 참여하기 위해 의용군인 LVF(Légion des Volontaires Français)에 가담하기도 하였고 비시 정부가 레지스탕스를 진압하기 위해 창설한 친독 반공 민병대(Milice)에 가담하기도 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전후에 숙청당한다. 특히 수장인 조세프 다르낭은 전후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아예 독일군에 자원 입대한 프랑스인들도 있었다. 그 중 하나인 기 사예르라는 사람이 '잊혀진 병사'라는 회고록을 남겼는데, 국내에도 번역 출판되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읽어보자. 어머니가 독일계이며, 알자스 로렌에 살던 사람이다. 후일 포로로 잡혀 연합국에 조사받을 때 징집이 아니라 자원입대라고 하자 프랑스 조사관들이 배신자라며 광분하다가 독일계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을 듣고 대충 이해해주는 모습을 보인다. 순수 프랑스인이었다면 전후 처리에서 크게 피를 봤을 듯하다.
한편 1942년 2월부터 1943년 5월까지 프랑스 중부의 도시 리옹(Lyon)에서 특별 재판을 벌였다. 이는 1940년 패배의 책임을 죄다 프랑스 제3공화국에 떠넘기기 위한 목적으로 열린 것이다. 가믈랭을 제외하면 군인 신분으로 피고가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9] 전 총리인 에두아르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 앙드레 레옹 블룸(André Léon Blum), 폴 레노, 전 내무장관 조르주 망델(Georges Mandel), 전 항공장관 기 라상브르(Guy La Chambre), 전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귀스타브 가믈랭(Maurice Gustave Gamelin) 등이 '피고'가 되었다. 한창 재판을 하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재판은 중단되고 피고들은 독일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버렸는데 조르주 망델은 예외였다. 이 사람은 휴전협정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모로코로 피신했다가 결국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어 재판에 넘겨졌는데 재판이 중지된 이후 레지스탕스가 친독 인사들을 연이어 암살하자 인질로서 총살당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사람이 '''유대인'''이기도 했고.
연합국이 횃불 작전을 발령하여 비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고 프랑스군이 항복하자 빡친 히틀러의 명령으로 1942년 11월독일군이 비시 프랑스 관할지역을 점령하면서, 비시 프랑스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3. 망명정부


비시 정부의 수반인 페탱과 요인들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국의 진격을 피해 도망치다가 결국 비시 프랑스 정부를 해산시키고[10] 1944년 8월 독일의 지그마링엔(Sigmaringen)으로 압송되었다. 게슈타포는 지크마링엔 성에 살고 있던 구 호엔촐레른 공가를 다른 성으로 내쫓고 이 성에다가 페르낭 드브리농(Fernand de Brinon)을 수반으로 한 망명정부를 세워 약 7개월간 더 존속하지만#, 사실상 기능정지가 되어 버린다.[11] 이 망명정부 영역의 인구는 6천 명이었으며, 병력 5백명 외에 프랑스인 슈츠슈타펠 7백 명이었고 자체 라디오 방송과 신문까지 운영했다. 그리고 이 성채에 추축 3개국(나치 독일,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일본 제국) 대사관도 있었다.
페탱은 이 망명정부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한 채 억류 내내 아돌프 히틀러에게 조국으로 보내줄 것을 청원했지만 묵살당했다. 1945년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면서 비시 프랑스는 완전히 소멸한다.

4. 소멸 이후


당신이 실제로 적의 선전에 봉사하지 않고 또한 당신의 글이나 연설, 행동이나 제스처를 통하여 적극적인 부역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수치스런 패배 뒤에 물리적이고 도덕적으로 고약한 점령기간 중에, 협력을 가장하여 우리나라를 타락시키고 우리 국민들을 굶기고 우리의 생각과 문화, 자유를 질식시키고, 우리의 동족을 고문하고 인질을 총살하고 우리의 천재들과 문명의 지독한 적에 대항하여, 사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당신은 우리 국민들이 준 신뢰에 기초한 프랑스의 지성으로서 당신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거나, 진실로 가슴속 깊이 우리가 지켜야 할 애국적 위엄에 부합하는 언동을 하였다고 느끼는가?

1944년 해방 직후 프랑스의 '작가 및 극작가 협회'가 그 회원들에게 답변을 요구한 다음과 같은 질문서의 일부

전범 재판에서 페탱은 조국에 남아 어떻게든 국가와 민족을 보전하고 국민을 전쟁의 참화에 휩쓸리지 않게 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였다고 항변했다. 페탱은 국가 반역죄(제75조)와 '의회제도를 멸시하고 히틀러에 협조한 간첩죄(제87조)'로 기소되었으나, 육군 원수 정복을 입고 재판정에 서는 등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가 재판정에 입장하기 전까지 방청객들은 "반역자 페탱을 죽여라"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으나, 재판장에 입장한 페탱이 그가 청중을 향해 경례를 하자 청중들이 모두 일어서서 답례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소식을 들은 드골은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어쩌다가..."라고 촌평. 영관급 시절 드골의 직속상관이 페탱이었고 페탱은 드골을 매우 아꼈으나, 결국 두사람은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판결은 끝내 사형으로 났다. 일설에는 14대 13이라는 간발의 차로 났다고 한다. 사형을 선고받은 페탱은 너무도 충격을 받고 기절했다 한다. 1차대전에서 구국의 영웅이고 고령인 점 등을 감안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페이드라루아르 지방 방데 주 서쪽에 위치한 절해고도인 일드외 섬으로 유형에 처해졌다. 그곳에서 페탱은 1951년에 95세의 고령으로 생을 마감했다.
비시 프랑스가 무너지고 임시정부를 거쳐서 성립된 제4공화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비시 정권에 대한 숙청을 시작했다. 비시 정부의 총리이자 2인자였던 피에르 라발, 내무장관이자 반공 민병대장 조제프 다르낭, 점령지 정무관 페르낭 드브리농이 총살당했다. 우선 페탱을 비롯해 독일에 부역한 중죄가 있는 인사들이 가차없이 처단당했다. 이때 피에르 라발은 조국의 총탄에 죽을 수 없다며 사형을 거부하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중태에 빠진 상태에서 총살장으로 끌려갔다.
프랑스의 권위있는 연감인 퀴드(Quid) 2003년판의 조사에 따르면 사형이 선고된 나치 협력자 6,763명, 실제로 사형이 집행된 나치 협력자가 782명, 징역형(강제노동형, 징역형, 금고형을 포함)을 선고받은 나치 협력자는 89,779명에 실제 징역형이 부과된 자는 3만 8천여 명에 이른다.
전후의 안습한 경제, 군사적 상황과 몇달마다 내각이 갈려나가는 정치적 혼란, 식민지 전쟁으로 나름 힘들었던 제4공화정에게 비시 프랑스의 멍에는 그 어떤 명분보다 강력한 당위성이었다.
전쟁 초반 프랑스 식민지 대부분은 비시 프랑스를 지지했고 자유 프랑스는 별로 지지를 받지 못했다. 비시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본토를 통제하고 있었고, 프랑스 군대 대다수가 비시 프랑스 정부에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식민지 관료 중에는 파시즘 사상에 호의적인 인물도 적지 않았고, 다당제 폐지·노동 3권 부정·엄벌주의 등 비시 프랑스 정부의 강력하고 억압적인 사회통제 정책에 호의적인 사람도 많았다. 여기에 더해서 지역에 따라서 일부 가톨릭 성직자들이 현지 식민지 관료에게 '비시 프랑스를 지지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는 경우도 있었다.[12] 1940년 8월 차드 총독 펠릭스 에부에가 자유 프랑스 지지를 선언한 것을 시작으로, 1942년까지 서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일부 식민지가 자유 프랑스 측으로 넘어왔을 뿐이다. 이런 상황은 1942년 연합군이 알제리를 탈환하고 알제가 자유 프랑스 수도가 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전쟁 중 자유 프랑스가 많은 지지를 받지 못한 점을 들어 '나치의 압제에 용감히 저항한 프랑스 인민들과 레지스탕스' 이미지를 선전하는 프랑스를 까는 사람들도 있다. 당장 자유 프랑스와 레지스탕스가 수를 불리고 활발하게 군사 작전을 하기 시작한것도 독일이 패퇴해가고 ''''프랑스가 확실히 해방될 조짐''''이 보이고 나서부터였지, 그 전까지 레지스탕스는 좌파 성향 공산주의자[13]와 사회주의자[14] 또한 친(親) 파시즘 성향 비시 프랑스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고 탄압받았기 때문에 같은 좌파 성향인 공산당[15]과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16]
사실 비시 프랑스 외에도 나치 치하의 프랑스인들은 레지스탕스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보다는 역사에 기록된 것과 같이 점령군인 독일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려 노력하는 자들이 훨씬 많았다. 독일 군인들과 어울려 한자리에서 파티를 하는 프랑스인들의 사진이 공공연히 발견되는 판. 그것이 전후에는 자존심 강한 프랑스의 상당한 굴욕이자 불편한 진실이 되었기에 비시 프랑스 관련 인물들을 일종의 희생양 삼아 가혹할 정도로 처벌했다는 주장이다.[17] 이는 전쟁 중 똑같이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슈츠슈타펠만 희생양 삼아 군적 말소를 비롯해 큰 처벌을 내리고 독일 국방군은 '나치에 이용당한 정직한 군인들' 정도로 정상참작하다시피 했던 독일에 대한 비난과 비슷하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비시 정부의 하급 관료였고 심지어 페탱에게 훈장까지 받았다는 것이 그가 죽기 직전인 1994년 밝혀졌으나, 그 자신은 1943년부터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였고 페탱의 무덤에 꽃을 두는 관례를 폐지하는 등 다른 면모를 보였다. 언론플레이에 노련한 미테랑은 청년 시절 실수할 수도 있고,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전력이며, 젊은 시절의 작은 일탈이 대통령 직무 수행에 차질을 빚을 만큼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의연한 태도를 취하여 불길을 끌 수 있었다. 그의 지지자들도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5. 비시 프랑스에 대한 기억


비시 프랑스의 역사는 프랑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굉장히 심도 있게 다뤄지고 있다. 현대적 사건이고, 나치 정부에 협력했다는 워낙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까, 단순히 사건의 전개를 배우는 것보다 "역사가 비시 프랑스를 어떻게 기억했냐"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배운다.[18]
이원복 교수 교양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19]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자면, 프랑스 국민들 입장에선 알제리 전쟁처럼 뿌리깊은 흑역사로 여기기 때문에 이때 얘기는 사적으로도 꺼내지 않는 편이다. 그러므로 만일 프랑스인과 역사 얘기를 할 때 비시 프랑스나 페탱 원수 얘기는 절대 꺼내지 않는 게 예의이다.

5.1. 공통된 기억의 시대 (1945년-1970년)



5.1.1. 레지스탕시알리즘


비시 프랑스 이후 정권을 잡은 공산주의자와 드골파는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들이 모두 나치 정부에 맞서 싸웠다는 생각을 밀기 시작한다. 이로써 한 국가에 한 시기에 대해 다른 기억을 묵살하면서 유일한 공통된 기억을 가지게 되고, 이 기억을 레지스탕시알리즘(Résistancialisme)[20]이라 명명한다. 프랑스가 레지스탕스로 똘똘 뭉쳐있었다는 생각으로, 이 생각 덕분에 1945년에 프랑스는 패전국의 협력국에서 승전국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전쟁을 겪은 세대가 엄연히 살아있음에도 이런 기억의 변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국민, 정부와 역사가들의 암묵적인 동조 덕에 가능했다. 참고 역사가 레몽 아롱은 레지스탕시알리즘을 변호하기 위해 책 "비시의 역사"(L'histoire de Vichy)에서 방패의 설(Théorie de bouclier et de fer)를 정립한다. 페탱은 프랑스를 보호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방패 역할을 했고, 실제 프랑스는 레지스탕스의 이념으로 뭉쳐있어 프랑스 국민과 레지스탕스는 창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5.1.2. 정화


전쟁 직후에, 프랑스의 당면과제는 프랑스를 물질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정치계와 긍정적 이미지가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드골주의자들은 비시 정부와 나치와 관련된 사람들을 공개 모욕, 죽이는 "민간 정화"(épuration sauvage)를 방치하고, "법적 정화"(épuration légale)에 착수한다. 총 35만명 이상의 나치 관련 인사들이 이런 "정화"정책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중 관공서 근무자들, 독일인 연인을 둔 프랑스인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정화 작업은 경제 부문에도 미친다. 일례로 정부와 협력했던 자동차 기업 르노는 국영화된다.

5.1.3. 공식적인 기억의 파급


신문과 사진, 교과서 등의 비시 정부에 관련된 부분은 검열당하고, 장 물랭 등 레지스탕스에 앞장섰던 인물들은 국가적 영웅으로 추대되어 팡테옹(위인들의 묘지 격)에 안치된다. 책과 영화 등 미디어는 이런 레지스탕스를 추모하는 성향을 많이 보인다. 몇 가지 예로, "La bataille du rail", 그림자 군단 [21], "La Grande Vadrouille" 등의 영화가 있다.
이때 의무 노동 수용소(STO)에 징집됐던 젊은 프랑스인들과, 전쟁 당시에는 독일령이라 독일 군대로 징집되었던 알자스-로렌 지방 거주민들(Malgré-nous)의 기억은 묵살된다.

5.2. 레지스탕시알리즘의 문제화


국민들의 세대와 정치인들의 세대가 바뀌면서(조르주 퐁피두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등 전쟁 시기에 미성년이었던 대통령들의 취임) 역사가들은 국민들의 공통된 책임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런 생각의 파급은 68혁명 때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드골에 반감을 갖고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던 정치인들을 고루하고 부르주아적이라 판단한 새로운 계층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5.2.1. 로버트 팩스턴의 역사관


레몽 아롱의 역사 저술 "비시의 역사"(Histoire de Vichy, 1954)가 1세대 기억에 있어 표상적이라 볼 수 있다면, 2세대의 기억은 로버트 팩스턴(Robert Paxton)이란 미국 역사가의 "비시의 프랑스"(La France de Vichy)라는 책으로 대표된다. 당시 프랑스의 정의 검열과 감독으로 비시 프랑스에 대한 자료가 불충분했던 탓에, 팩스턴은 독일 기록보관소의 자료들을 연구해, 레몽 아롱의 역사관의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우선 비시 프랑스 정부는 확실히 나치 정부와 협력했고 비시 프랑스 소재 유대인들의 계획적 말살에 중심에 있었다는 점을 밝힌다. 팩스턴은 이러한 연구에 대한 보상으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는데, 정부가 팩스턴의 새로운 역사관을 수용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5.2.2. 대중매체의 역할


"슬픔과 동정(원제: Le Chagrin et la pitié, Marcel Ophüls작, 1969년)은 전쟁을 겪은 증인들(병사, 정치인)들의 증언을 다큐멘터리로 내보낸다. 이 증언들은 레지스탕시알리즘의 환상과 상반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또 영화 "루시앙 라꼼브"(루이 말, Louis Malle 작, 1974년)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공통적으로 책임("Tous des salauds": 모두 쓰레기였다)이 있었다는 주장을 앞세운다.

5.2.3. 유대인들과 쇼아


이런 풍향에서 유대인들의 발언은 점점 주목받게 된다. 게슈타포 수장이었던 클라우스 바르비(1987년), 나치 지지 민병대의 수장이었던 폴 투비에(1994), 1,700명의 유대인을 수용시켰던 공무원이었던 모리스 파퐁(1997/1998)의 재판은 티비로 생중계된다.

6. 기타


나중에 같은 추축국이 되는 태국과 전쟁을 벌였고 코 창 해전을 벌인 전적이 있다. 해전의 결과는 비시 프랑스 해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내 일본이 개입하고 인도차이나의 영토 일부를 타이에 양도하게 되었다.
일본 제국은 1941년부터 비시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들에 군대를 보내 눈독들여왔지만, 비시 프랑스가 동맹인 나치 독일의 괴뢰국인지라 대놓고 공격하진 못했다. 대신 비시 프랑스와 일제는 협정을 맺어 프랑스 총독부와 관료를 유지하면서 일본군이 주둔하고 뒤에서 일본이 실질적인 통치만 한다는 기묘한 공존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4년 비시 프랑스가 멸망하고 나치 독일도 멸망을 앞두자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관료들은 자유 프랑스에 붙으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1945년 3월에는 일본이 대놓고 프랑스 총독부를 해체하고 베트남 제국 등의 괴뢰 정부를 직접 세우게 된다. 물론 이들도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1년 정도의 짧은 기간만 존속하게 된다.
전술한 이원복 교수 교양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 후반부의 견해처럼 비시 프랑스 얘기를 들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흔하나, 아직도 프랑스에서는 비시 정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은 프랑스의 공화국 전통을 공공연히 부정하는 세력으로 프랑스에서 상당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전선장 마리 르펜 당수 시절 비시 프랑스를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문란한 공화국을 버리고 돌아가야 할 모델'''로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후일 성 비오 10세회를 창립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를 비롯한 전통 가톨릭의 모체가 되는 강성 보수 가톨릭 세력 역시 비시 프랑스 붕괴가 프랑스 제3공화국의 잘못된 것들을 프랑스에 다시 돌려놓았다는 논리로 비시 프랑스를 두둔했다. 국민연합은 현재 당수 마린 르펜 때부터 비시 프랑스 시절로 돌아가자는 과격한 수사를 거의 쓰지 않고 있지만 내부에 예전의 당당한(?) 활동 방식을 그리워하는 당원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리슐리외급 전함 중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기 전 완성된 1번 함 리슐리외는 탈주해 미국의 도움으로 자유 프랑스의 전함으로 활동하였으나 2번 함 장 바르는 비시 프랑스가 건조하던 도중 미완성인 채로 미국의 전함과 교전하였다. 2번 함은 비시 프랑스가 멸망한 이후에 겨우 완성되었다.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BC 프랑스(...)로 등장한다.
걸즈 앤 판처BC자유 학원의 전신 BC 학원의 명칭을 여기서 따왔다.
프랑스의 2005년 영화 코러스에서 비시 프랑스의 국가가 잠시 나오는데, 단원들을 뽑을 때 오디션격으로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 나오는데, 한 아이가 '''원수여!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를 부르자 음악 선생님인 주인공이 '''케케 묵었어'''(...)라고 디스한다.[22]
[1] 공화국(République)이라는 국호를 떼버려 혁명과 기존 공화정과의 단절을 꾀했다. État(국가)라는 국호는 독일어 Reich와도 뜻이 통한다.[2] 국기는 그대로 삼색기이다. 여기선 자유 프랑스와의 구분을 위해 프랑스군 원수의 지휘봉을 자루로 삼은 도끼 문양 국장이 그려진 대통령기를 사용.[3] 원수(元首)는 필리프 페탱을 가리킨다.[4] 프랑스 국가원수(Chef de l'État français) 칭호[5] 흔히 파스케스로 알려져 있지만 파스케스가 아니라 고대 프랑크족이 쓰던 프랑시스카이다.[6] 나폴레옹 때는 별이 아닌 독수리 문장이 돋을새김된 지휘봉을 썼다.[7] 비교하자면 네덜란드 같은 경우 유대인의 75%가, 폴란드는 90%가 희생당했다. 특히 네덜란드는 주민들이 게슈타포와 독일군에 적극 협조한 터라 유대인 희생이 커졌는데, 이는 이원복 교수 시사만화 <현대문명진단> '안네 프랑크를 밀고한 사람들' 편에서 다뤄졌다.[8] 급진파 민족주의자였던 장 프랑수아 드 라 로크가 만든 어구이다.[9] 가믈랭도 페텡의 공화정 폐지에 반대했다가 미움을 받은게 커서 재판에 끌려나왔다고 한다.[10] 이에 따라 프랑스 남부까지 프랑스 군정청의 영역이 되지만, 연합군이 프랑스에 진격하고 있던 상태라 명목상으로만 군정청 영역이었다. 그리고 이미 1942년에 독일군이 쳐들어와서 비시 프랑스 정부를 한 차례 해산시켰는데 비시 정부가 뭘 더 할 것도 없었고...결국 1944년 12월 군정청이 해산되었다.[11]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민간행정은 여전히 비시 정부가 관할 중이었다.[12] 대표적으로 프랑스령 아프리카 중 서아프리카에 있는 가봉의 경우가 그랬다. 가봉 총독 마송은 처음에 자유 프랑스를 지지하고자 했으나, 가봉에 있는 프랑스인 가톨릭 성직자들이 총독에게 비시 프랑스에 충성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비시 프랑스 정부는 이전 정부의 정교분리 원칙을 내팽개치고 노골적으로 가톨릭과 유착하는 방침을 택했다. 애초에 보수적인 데다가 프랑스 정부의 정교분리 원칙에 부정적이었던 당시 프랑스 가톨릭 교회는 비시 프랑스 정부에 특히 호의적이었다.[13] 원래부터 무장 투쟁에 호의적이며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불법화된 자들. 레지스탕스의 50% 차지.[14] 전쟁 전에 공산당과 결별한 적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정치적 이상은 공산주의자와 비슷했다.[15] 레지스탕스의 30% 차지.[16] 전쟁 전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선거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긴 했다.[17] 독일 군인에게 강간당한 매춘부 등 애먼 '''피해자'''들을 머리를 강제로 깎고 폭행하는 등 정당한 전후처리가 아닌 단순 화풀이에 가까운 모습이 많이 보였다.# 도리어 비시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공화국을 배신했던 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주로 우익 진영, 심지어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였던 샤를 드골에까지 붙어 살아남았으며, 이는 68운동 때까지 계속되었다.[18] 이용우 저,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 숙청과 기억의 역사 1944-2004"를 참조.[19] 1998년 개정판부터 추가됐다.[20] 앙리 루소(Henry Rousso, 프랑스 역사학자)가 처음 사용한 용어.[21] 다만 그림자 군단은 이런 추모나 영웅화 성향하고 많이 비껴나간 영화다. 결말도 상당히 차갑고 씁쓸한 편. 감독인 장 피에르 멜빌이 실제 레지스탕스였던지라 미화랑 관련이 없었다. 때문에 당시 흥행에서는 실패했다.[22] 코러스의 영화 속 배경이 1940년대 후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나올수 있는 장면이다. 참고로 아이에게 주인공이 어디서 그 노래를 들었냐고 묻자 자기의 할아버지에게 들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