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파블로
1. 소개
2000년대 초반 미첼 살가도와 함께 라 리가를 대표했던 라이트 백
'''20대 초반의 나이에 카푸, 하비에르 사네티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던 비운의 수비수'''[1]
'''황금기 데포르티보의 마지막 전설'''[2]
2. 클럽 경력
1996년부터 그는 세군다 리가의 라스 팔마스에서 좌우측을 가리지 않으며 활약했고 잠재력을 인정 받아 1998년 여름 데포르티보로 이적했다.
첫 시즌엔 스페인 대표팀을 오가던 아르만도에게 밀려 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다. 그러나 1999-2000 시즌부터 팀의 주전으로 활약했는데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며 데포르티보의 역사적인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 시즌 맹활약을 바탕으로 엔리케 로메로와 함께 프리메라 리가 최고의 측면 수비진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데포르티보의 리그 우승을 이끈 뒤 마누엘 파블로는 후안 카를로스 발레론과 마우로 실바, 빅토르 산체스, 로이 마카이 등과 함께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고 유로 2000이 끝난 후 독일 전을 통해 스페인 국가대표팀에 데뷔하는 기쁨을 누렸다. 비록 스페인은 독일에게 1:4 대패를 당했지만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감독은 물론 언론은 그의 활약에 만족했다. 이후 여러번의 평가전을 통해 수비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던 미첼 살가도를 밀어내고 당당히 무적 함대의 주전으로 거듭났다. 당시 스페인 언론에선 '''무적 함대의 우측 수비는 향후 10년 간 걱정이 없을 것이다.'''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당연히 2002 한일 월드컵에서도 우측 수비 주전은 마누엘 파블로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2001년 갈리시아 더비 셀타 비고와 경기를 벌이던 중 마누엘 파블로는 지오바넬라에게 백태클을 당해 정강이가 두 동강이 나는 끔찍한 부상을 당하고 만다. 선수로서 복귀가 불투명했지만 1년 6개월 정도의 피나는 노력의 재활 끝에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하지만 마누엘 파블로는 예전의 마누엘 파블로가 아니었다.
유로 2004 예선을 통해 몇 번의 기회를 부여 받았으나 미첼 살가도, 성장세를 보인 카를레스 푸욜 보다 못한 모습을 보이며 사실상 국가대표팀과는 이별하게 된다. 부상 이후 소속팀에서의 입지도 예전 같지 않았다. 리아소르의 기적을 함께 했지만 큰 임팩트는 없었으며 이후 콜로치니, 당시 유망주로 평가 받던 안토니오 바라간에게 마져 주전 자리를 내주는 수모까지 겪었기 때문. 2007년 여름에 고향팀인 세군다 리가의 라스 팔마스 복귀설까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2007/2008 시즌을 앞두고 미구엘 앙헬 로티나 감독이 취임한 후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미구엘 앙헬 로티나는 수비진 안정 및 수비수 조율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로티나는 퇴물 취급을 받던 마누엘 파블로에게 큰 믿음을 주었고 그는 과거의 기량을 조금씩 되찾아갔다. 07/08 시즌 전반기 데포르티보는 최악의 부진을 보이며 19위까지 추락했지만 마누엘 파블로 만큼은 철벽 같은 수비를 보였다. 후반기에 이르러 5백 전환한 이후 공격적인 재능도 이따금 보여주며 유로 2008을 앞두고 스페인 대표팀 승선설까지 돌 정도였다.
이후 13-14 시즌까지 데포르티보의 우측을 책임졌고 09-10 시즌부터는 상황에 따라 왼쪽, 중앙 수비까지 소화하며 팀의 주장이자 큰 형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4-15 시즌부터는 민첩성이 현저히 떨어진 모습을 보이며 후보로 밀려났다. 그리고 만 40세가 되던 15-16 시즌을 끝으로 마누엘 파블로는 은퇴를 선언했다.
마누엘 파블로는 데포르티보 유스 출신이 아님에도 1998년부터 2016년까지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데포르티보에서만 보낸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비록 최고의 자리에서 일찍 내려와야 했지만 40세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을 만큼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 인테르에 하비에르 사네티가 있었다면 데포르티보에는 마누엘 파블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은퇴 후에는 코칭 스태프가 아닌 데포르 구단 운영진의 일원으로 일하는 중. 주로 유스 팀에 관련된 업무를 보는 듯.
3. 플레이스타일
전성기 시절 마누엘 파블로는 공격과 수비를 부지런히 오가면서도 지치는 않는 체력, 활동량 그리고 정확한 킥력까지 겸비했던 카푸, 하비에르 사네티와 함께 세계 최고의 풀백 중 한 명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리즈 시절의 라이언 긱스를 틀어막은 후 여유롭게 오버래핑까지 나갈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수비수. 미첼 살가도만큼의 공격을 하면서도 수비력까지 겸비했던 재능의 소유자였다.
허나 정강이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뒤 장점들 다수가 사라졌고 슬럼프였던 2005년부터 2007년까진 공격은 물론 믿었던 수비도 안되는 퇴물이었다. 그러다 로티나 감독을 만난 후 스타일의 변화를 가져오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공격은 아쉬웠지만 수비 하나 만큼은 탁월했다.
부상으로 잃어버린 스피드를 대신할 무기로 벌크업을 통해 몸싸움 능력을 향상시킨 것이 주효했다. 07-08 시즌을 기점으로 상체가 두꺼워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어차피 해봤자 효율도 없는 오버래핑 빈도를 상당히 줄이며 수비 중심적으로 플레이했다. 전성기 시절 스태미너가 장점이었던 선수였던 만큼 오버래핑을 자제하니 체력이 남아돌 수 밖에 없었고 이는 90분 내내 집중력을 발휘해 수비할 수 있던 원동력이었다. 왠만해선 1대1 돌파를 허용하지 않았을 정도.
오버래핑 시에는 자신이 직접 공을 운반했던 과거와 달리 빈 공간을 파고 들어 마무리 크로스만 올리는 정도로 변화를 줬다. 이상하리 만큼 투박해진 발 기술 때문에 볼 터치를 최소화한 것. 문제는 주발인 오른발 보다 왼발 크로스가 더 정확했을 정도로 킥력이 형편 없었다.
5-2-2-1 포메이션에선 중앙 지향적인 플레이를 보였다. 톱 아래에 위치한 2명의 공격형 미드필더들이 측면으로 빠지는 플레이를 주로 했기에 그 빈 공간을 메꾸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두 공격형 미드필더가 측면으로 빠지면서 생긴 상대 중앙 수비와 측면 수비의 틈을 파고 드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공 잡는 위치가 사이드 라인이 아닌 페널티 구역이라 그런 지 보다 4백에서 보다 쏠쏠한 공격 가담 보이곤 했다. 이는 유로 2008 승선설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 동료였던 알바로 아르벨로아의 존재로 설에만 그쳤다.
[1] 실제로 세리에 A의 AS 로마, 인테르를 비롯해 레알 마드리드 등 빅 클럽들의 구애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01-02 시즌 갈리시아 더비 도중 정강이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하면서 일찍 져버린 케이스[2] 팀의 전성기와 리아소르의 기적을 경험했고, 팀의 강등당할 때에도 함께 다시 승격을 이뤄내었으며 팀의 주장을 수행하였고, 마지막까지 데포르티보를 지키며 데포르티보에서 은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