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긱스

 



'''라이언 긱스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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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웨일스'''}}}
{{{-2 18대



'''클럽'''
'''맨유'''}}}
{{{-3 23대




'''라이언 긱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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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1992-93 · 1997-98 · 2000-01 · 2001-02 · 2006-07 · 2008-09

'''라이언 긱스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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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les national football team'''
<colbgcolor=#e31f2b> ''' 이름 '''
'''라이언 긱스''' '''OBE'''
'''Ryan Giggs OBE[1]'''
''' 본명 '''
라이언 조지프 긱스
Ryan Joseph Giggs
''' 출생 '''
1973년 11월 29일 (50세)
영국 웨일스 카디프 시 칸톤 구역
''' 국적 '''
웨일스
''' 신체 '''
179cm / 72kg
''' 직업 '''
축구 선수 (윙어[2] / 은퇴)
축구 감독
''' 소속 '''
<colbgcolor=#e31f2b> ''' 선수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87~1990 / 유스)[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90~2014)'''
''' 감독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14 / 감독 대행)[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14~2016 / 수석 코치)
웨일스 국가대표팀 (2018~)
''' 국가대표 '''
64경기 12골 (웨일스 / 1991~2007)
4경기 1골 (영국 / 2012)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2. 국가대표 경력
2.3.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경력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4.3. 수훈
5. 개인사
5.1. 가정사
5.2. 전설적인 불륜 행각
6. 여담
7. 라이언 긱스에 대한 헌사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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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웨일스축구 선수 출신 감독. 2018년부터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프리미어 리그 13회 우승, PFA 올해의 팀 6회 선정, PFA 올해의 선수 선정 등 화려한 수상 이력을 남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레전드다.
현역 시절 등번호는 11번, 포지션은 왼쪽 윙어였다. EPL이 출범하기도 전인 1990년 3월 2일[5] 에버튼 FC전에서 교체로 출장하며 데뷔. 당연히 2014년 당시 EPL 이전 시대의 풋볼 리그 경력이 있는 '유일한 현역 선수'였으며, EPL 최다 출장 2위 기록 보유자이다. 데뷔 때부터 은퇴를 앞둔 지금까지 임대 한 번 가지 않고 평생 맨유에서 뛰었던 진정한 원클럽맨으로 팀에게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안겨 주었다. 다만 웨일스 대표팀 소속이었기에 월드컵 본선 경력은 없다. 화려한 클럽 경력과는 달리 월드컵 본선 무대는 한 번도 못 밟아 본 슬픈 역사 때문에 이런 광고도 있다. 화분에 입 맞추는 장면에서는 그저 눈물만이...
무려 24년 간의 긴 클럽 경력에서 단 한 번도 퇴장을 당하지 않았다.[6]

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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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발의 마법사 라이언 긱스'''


2.1. 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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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스포츠에서 만든, 라이언 긱스에 대한 다큐멘터리 Football's Greatest - Ryan Giggs[7] EPL 역사상 가장 많은 리그 트로피를 든 선수가 되었으며 평생 하나 들기도 힘들다는 트로피들을 문자 그대로 쌓아 놓고 있다. 긱스의 전성기가 바로 맨유의 전성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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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 전설의 유스 출신 선수들인 Class of 92.[8] 어깨 동무 중인 왼쪽부터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 게리 네빌, 필립 네빌, 폴 스콜스, 테리 쿠크[9]'''
''' 2011년 게리 네빌의 은퇴 경기에 이들은 다시 모여 그때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찍었다.'''
1991년 3월 2일 에버턴과의 경기에서 데니스 어윈과 교체 투입되어 프로 데뷔전을 치렀고, 맨체스터 더비에서 프로 데뷔골을 기록했다. 1991-92 시즌에는 당시 주전 레프트윙이었던 리 샤프의 부상으로 1군 기회를 얻게 되었고, 나이를 뛰어넘은 빼어난 활약으로 주전 자리를 꿰차게 된다. 1992-93 시즌에는 등번호 11번을 받게 되었고 팀은 시즌 초반 부진했으나 후반기에 팀을 바로잡고 프리미어 리그로 새로이 출범된 리그 첫 우승을 이루게 된다. 이듬해에는 리그와 FA컵 더블을 기록하게 된다.
10대에 1군 무대에 '''데뷔했을 때부터 완성된 선수'''라는 극찬을 받았고 오랜 세월 축구계 레프트 윙어의 본좌로 군림했다. 당시 '''좌긱스 - 우베컴'''라인은 유럽 전역을 충격과 공포로 밀어넣은 라인이었고 10여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역대 최고의 좌우라인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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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긱스 - 우베컴 Before & After.
철저한 자기 관리와 뛰어난 프로정신 또한 유명하며, 수많은 팀의 동료, 후배들이 가장 본받고 싶은 선수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다만 맨유 클럽하우스에서 오랜 세월 일했던 어느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어렸을 때는 친구들하고 놀러다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고.
말쑥하고 매력적인 외모[10]에 화려한 플레이스타일, 젊은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 것 등 스타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기에 데뷔초부터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11] 이에 퍼거슨 감독은 긱스에게 '''2년 간 인터뷰 금지령'''을 내렸고 긱스는 당시엔 그걸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이가 든 후 덕분에 자신은 인기 스타가 아닌 선수가 될 수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자 "몸은 느려지는데 머리는 더욱 빨라진다."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실제로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팀의 승리에 기여하고 있다. 실제 긱스는 30세를 맞은 2002-03 시즌[12] 이후 두자리수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으며, 팀 또한 세대 교체를 위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앨런 스미스 등 신진 선수가 다수 영입되면서 긱스 또한 인터 밀란 이적 추진을 겪는 등 위기를 맞았다.[13] 긱스는 이에 맞춰 포지션을 중앙 미드필더나 처진 공격수, 혹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옮겨 다니며 풍부한 경험과 번뜩이는 클래스로 여전히 클럽의 핵심 선수 중 하나로 활약하여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축구계의 명언을 실증했다. 포지션 변경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교과서적인 사례라 극찬을 받았으며, 07-08시즌에는 리그 최종전에서 쐐기골을 기록하며 리그 우승을 확정짓는가 하면, 챔피언스리그에서는 결승전에 교체 출전하여 9년만의 우승에 기여했다. 여기에 '''08-09시즌 PFA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고 영국 BBC 선정 최고의 스포츠인 상마저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나이 36세(...).'''
2009-10 시즌 초반에는 2경기에서 무려 5도움을 기록하고 발렌시아, 나니보다 더 활발한 모습을 보여 주며(...) '''회춘 모드'''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포츠머스 FC 원정에서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며 EPL 통산 100호 골을 기록했다. 지금까지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출범 후, 매 시즌마다 득점을 한 유일한 선수다. 그리고 10-11 시즌 개막전 뉴캐슬과의 경기에서 득점하며 이 기록을 이어 나갔다.
보비 찰튼의 기록을 깨고 맨유 최다 출장 선수가 되었으며, 현재 맨유에서 경기 출장할 때마다 기록을 새로 쓰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킥에 있어서는 '''왼발신'''의 칭호가 아깝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많이 뛰어야 하는 윙 포지션에서는 세월을 이기기 어렵나보다. 하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이후 챔스에서 말 그대로 날아다녔고 8강에서는 1, 2차전에서 첼시를 무너뜨리는 어시스트 3개를 만들어보이는 미친 활약을 펼치면서 축구 커뮤니티에서 찬양을 받았다.
샬케 04와의 챔스 4강 1차전에서는 웨인 루니의 스루 패스를 받아 그때까지 엄청난 선방쇼를 보여 주던 마누엘 노이어에게 알까기를 시전, 선제골을 득점했다. '''38세에 2010-11 챔스 주간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2.1.1. 2011-12 시즌


시즌 시작 전 문제의 외도 스캔들이 터졌다. (후술) 선수 본인이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떠난 상황에서 스캔들이 미친 듯 터져 나온 탓에 사실 여부를 떠나 긱스 본인의 마음 고생은 장난이 아니었던 듯, 공항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10년은 더 늙은 듯한 모습이였다. 팬들은 "긱옹 제발 아니라고 한 마디만 해줘요"라며 피눈물을 흘렸으나 당사자 긱스와 구단 측에서는 일언반구 없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아 사실로 굳어지는 분위기.
맨유 그 자체이자 EPL 역대 최고의 레전드로 칭송받던 선수의 말년이 이렇게 망가지는 것에 대해 맨유 팬들은 혼돈의 카오스에 빠졌고 타 팀 팬들은 아주 신나게 까고 있다. 때마침 폴 스콜스에드윈 반 데 사르의 은퇴가 겹쳐 일각에서는 "그냥 조용히 은퇴나 하셈"이라며 까고 있으나 2011-12 시즌이 개막된 현재까지 맨유 1군 스쿼드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사생활이 깨끗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으나 경기장에서만큼은 프로 선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 긱스였기에, 최소한 경기장에서라도 마지막까지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떠나는 것이 남아 있는 팬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될 것이다. 그리고...
2011-12 시즌 2라운드 토트넘 홋스퍼 FC와의 경기에서 후반 80여분 교체되어 들어오더니, 들어오자마자 무심한 듯 시크하게 띄운 로빙 크로스로 웨인 루니의 헤딩 골을 어시스트하는 위엄을 보였다.
3라운드 아스날 FC와의 경기에서도 교체 투입된 후 애슐리 영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이어서 챔스 조별리그 벤피카전과 칼링컵 리즈전에서 2경기 연속 전성기 빙의 골을 만들어 내는 위엄을 보여 주고 바르셀로나전에서도 촌철살인 킬패스로 2도움을 찍어 주시는 활약을 보였다. 시즌 초반의 활약상만을 두고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경기장 밖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 것과는 달리 경기장 안에서만큼은 변함없을 것 같아 팬들은 그나마 미소를 머금고 있다 카더라입니다.
경기장 밖에서는 가루가 되도록 까였으나 "그래 까라. 난 축구 하련다"라는 모드인 듯 경기장에만 서면 클래스 인증 샷을 찍었고 전 시즌부터 이어진 전성기 빙의 활약으로 2011 골든 풋을 수상했다. 그리고 맨유 측에서는 1년 재계약 떡밥을 뿌리고 있다.
그러나 11월 들어서며 팀의 중원과 수비진이 부상 크리 및 컨디션 난조로 대붕괴되는 상황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아무래도 부상 재발과 로테이션으로 돌려야 할 수준의 체력에 몇 경기를 풀타임 출전하다 보니 무리가 간 듯. 단적인 예가 챔스 조별예선 최종전 바셀 전이었고, 풀타임 출전하여 피를 토할 듯 뛰어 다녔으나 별다른 성과는 올리지 못하고 팀의 패배와 챔스 탈락을 지켜봐야 했다. 그 날의 경기는 로이 킨의 한 마디로 정리된다. '''"제일 나이 많은 긱스가 제일 뛰어 다니더라."'''[14]
그리고는 분노가 폭발했는지, 17라운드 풀럼전에서 풀타임 출장하며 1골 2어시를 찍어버렸다.
22라운드 아스날전에서도 선발 출장해, 전성기 빙의 드리블로 아스날 수비진 4~5명을 순식간에 농락하더니 전반 내내 크로스 띄운다고 삽질하던 나니를 보다가 짜증났는지 무심한 듯 시크하게 올린 크로스 한 방에 발렌시아의 헤딩 골을 어시스트하는 위엄을 보여 줬다. 이로써 이번시즌 3골 10도움, 어시스트 수 팀 내 2위. 이 양반, 한국 나이로 39세(...). 다만 리버풀과의 FA컵 경기에서는 그답지 못한 플레이를 보여 주며 데 헤아, 웰백과 함께 팀 내 워스트 3인방에 꼽히는 굴욕도 당했다. 확실히 매 경기 날아다니지는 못하는 듯.
25라운드 리버풀전은 파트리스 에브라루이스 수아레스에 의해 최고의 관심을 받은 경기였다. 맨유는 긱스, 스콜스를 동시에 투입하며 템포를 늦추며 점유율을 가져가는 작전을 세웠다. 이에 리버풀은 거의 공을 못잡으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 결국 후반전에 루니가 멀티골을 기록했다. 그 후 수아레즈에게 한골을 내주긴 했지만 그렇게 2:1로 맨유가 승리. 이로서 맨유와 리버풀은 이번시즌 1승1무1패에 골득실차까지도 똑같게 승부의 균형을 맞췄다.
2월 26일, 노리치와의 26R 경기에서 자신의 '''900번째''' 경기에 출전했고, 웰벡이 경기내내 본인의 꿀패스를 날려먹는것을 지켜보다 결국 91분에 본인이 직접 극적인 결승골을 집어넣으며 자신의 기념비적인 출장기록을 자축했다.
32라운드까지 맨유는 연승을 달린 반면, 맨시티는 1승 2무 2패 부진 속에 8점이나 승점이 벌어져서 맨체스터 더비와 상관없이 리그 우승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33라운드 위건 애슬레틱 원정에선 처음으로 위건에게 0:1로 패했다. 위건 골키퍼인 알리 알 합시의 선전도 눈부셨고 위건도 심판 판정으로 날뛸 법함에도 침착하게 경길 진행하면서 승리했고 강등권을 탈출했다. 같은 33라운드 웨스트 브로미치를 4:0으로 이긴 맨시티와 승점차는 아직 5점으로 큰 걱정은 없지만 앞으로 1경기라도 진다면 맨체스터 더비 여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34라운드 아스톤 빌라를 4:0으로 이기면서 분위기가 잘 되어가나 했더니만 35라운드 에버턴과의 안방 경기에서 4:4로 비겨 버렸다. 80분대까지만 해도 4:2로 앞서다가 막판 골을 연이어 허용한 타격이 컸다. 이로 인하여 맨시티가 울버햄턴 원정에서 2:0으로 승리하면서 다음 경기인 36라운드 맨체스터 더비에서 맨시티에게 지면 리그 1위를 다시 넘겨줄 상황이 되어버렸다. 승점은 같아도 득실에서 맨시티가 앞서있기 때문이다. 결국 맨시티에 1:0으로 지면서 2위로 밀려났으며 자력 우승은 매우 힘들어졌다. 자력 우승을 위해서는 남은 두 경기에서 매우 큰 점수차로 이겨 8점이라는 득실차를 역전시키거나, 아니면 남은 스완지 시티와 선더랜드 경기를 이기고 맨시티가 뉴캐슬 원정에서 지거나 비기길 기원해야 한다. '''결국 리그 준우승을 거두면서,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2.1.2. 2012-13 시즌


나이도 나이인지라, 이제 슬슬 스쿼드 멤버로서 후반 교체나 로테이션 멤버로 쓰이는 듯 했으나, 시즌 중반을 넘어서며 여러가지 악재가 겹치며 거의 대붕괴 수준으로 추락한 맨유 미들진을 마이클 캐릭과 함께 먹여살리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나이 마흔하나 먹은 아저씨가 경기장 헤집는 모습을 보며 해설자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 시즌 초반에 잠시 보여줬던 경기력 하락으로 이제 정말 은퇴할 때가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어느새 싹 사라져 버렸고(...).
2월 10일 26R 에버튼 전에서 이번시즌 리그 마수걸이 골을 터뜨렸다. 이어서 펼쳐진 QPR전에서는 나니의 패스를 받아 2-0을 만드는 득점을 기록하면서 팀 승리에 기여했다.
2013년 3월 1일, 팀과 1년 재계약을 하면서 2014년까지 올드 트래포드에 선수로서 남게 되었다. http://www.manutd.com/en/News-And-Features/Football-News/2013/Mar/ryan-giggs-agrees-new-one-year-deal.aspx
3월 15일. 본인의 성인무대 커리어 1000경기 및, 라울 곤잘레스와 함께 챔피언스리그 역대 최다출장 공동 1위(144경기)를 달성하는 대기록의 역사를 세웠다. 상대는 챔스 16강 2차전 레알 마드리드. 본인도 선발출장하여 풀타임 소화하면서 공수 양면에서 그 후덜덜한 레알 미들진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팀에 해가 되는 행동은 그 어떤것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선수의 이단옆차기로 인하여...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는 2014년 11월 27일 바르셀로나의 챠비 에르난데스가 아포엘 니코시아와의 경기에서 61분 이반 라키티치와 교체되며 깨진다. 샤비는 총 151경기 출장으로 1위로 올라섰고, 이에 대해 긱스는 "사비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단독으로 보유했던 기록이 깨진 건 아쉽지만, 그 기록을 깬 주인공이 사비여서 아픔이 덜한 게 사실"이라고 했지만....
시즌 종료와 동시에 은사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폴 스콜스의 은퇴, 그리고 데이비드 베컴과 필립 네빌마저 은퇴를 선언함에 따라,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수놓았던 "퍼거슨의 아이들"은 이제 정말 긱스만 남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합류했던 긱스가 가장 마지막까지 현역으로 남는 모습은 축구팬들에게 상당한 아이러니함을 가져다 주었다. 데이비드 모예스 체제로 재편될 13-14시즌 맨유에서는 플레잉 코치를 맡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나 현재로서는 확정된 것이 없는 상태. 하지만 팬들로서도 아마 다음 시즌이 "선수" 라이언 긱스를 보게 되는 마지막 시즌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2.1.3. 2013-14 시즌


7월 1일자로 데이비드 모예스 체제로 재편된 맨유에서, 필립 네빌과 함께 정식으로 맨유 코칭스탭 라인에 합류, 플레잉 코치(선수 겸 코치)를 맡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맨유의 코치진에 합류하면서 경기 출전을 보기 힘들 듯... 했는데 가끔씩 뜬금없이 출전해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다. 체력 문제 때문에 풀타임은 불가능하지만 킥력은 여전하다.
긱스가 가장 빛났던 순간은 다름아닌 챔스 조별예선 레버쿠젠전과, 16강 2차전 올림피아코스전. 그날 레버쿠젠의 미드필드진은 나이 41살 긱스 한명에게 완전히 관광당했고, 1차전을 승리로 가져갔던 올림피아코스 또한 미들진에서 긱스에게 휘둘리다 로빈 반 페르시에게 해트트릭을 얻어맞고 침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조금 과장 섞어서, 경기 한번 나올때마다 시즌 내내 파멸적으로 눈 썩는 경기력을 보여준 맨유 미들진에서 제일 훌륭한 활약을 보여준다 할 정도.

그리고 4월 21일 에버튼 전의 2-0 패배로 다음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물건너가면서 데이비드 모예스가 경질되었고, 긱스가 시즌이 끝날 때까지 임시감독을 맡게 되었다. #
그리고 4월 26일, EPL 36라운드, 긱스가 감독대행으로 나선 첫 경기에서 루니와 마타의 멀티골로 노리치를 4-0으로 개발살냈다. 완벽한 승리였다.
하지만 5월 3일, EPL 37라운드 2번째 리그 경기인 강등권 선더랜드와의 안방경기에서 0-1로 패하면서 올시즌 리그컵에 이어 선더랜드에게 2번째 패배를 당했다. 덕분에 선더랜드는 리그 잔류 가능성을 높였고 맨유는 12패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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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마지막 경기에서 교체 출전하는 모습'''
그리고 5월 6일, 미뤄졌던 34라운드 헐시티전은 맨유 유망주 제임스 윌슨의 두골과 반 페르시의 골로 3대1로 완승. 이 경기는 여러 가지로 의미있는 게 긱스의 올드 트래포드 마지막 경기이기도 했고, 톰 로렌스와 윌슨이라는 유망주가 데뷔했으며, 감독 긱스가 '''직접 출전하여 반페르시의 득점을 돕는 등 녹슬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현재 맨유팬들 대부분은 반 할 감독도 괜찮기는 하겠지만 퍼거슨 밑에서 제일 오래 있었고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맨유의 레전드인 라이언 긱스의 체제로 가는게 낫지 않겠느냐라는 목소리도 많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맨유의 우드워드 사장은 긱스를 바로 감독으로 올릴 생각은 없어보인다. 아무래도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인 루이스 반 할 감독이 2014/2015 시즌을 책임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에 반 페르시는 아주 좋아할 것 같다. 웨인 루니는 걱정...
시즌 최종전이 열린 5월 11일, 이날 맨유가 사우스햄튼전에서 이기고 토트넘이 아스톤빌라에게 패하면 승점은 같아지고 골득실에서 앞서 6위를 차지해 유로파리그로 나갈 수 있었으나 결과는 맨유는 1:1 무승부, 토트넘은 3:0 승리로 끝나면서 맨유는 7위가 되어 유로파리그 진출조차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4년 5월 19일에 루이 판 할이 차기 감독으로 선정되었고, 긱스는 수석 코치직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긱스는 '''마침내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러나 맨유와 EPL을 통틀어 역대 최고였던 선수의 현역생활이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맨유 통산 963경기 출장.

2.1.4. 긱스가 세운 기록들


  • 한국시각으로 2011년 1월 17일 토트넘 핫스퍼와의 EPL 경기에 출장하면서 리그 6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1991년 3월 17세의 나이로 데뷔한 후 꼭 20년 만에 세운 기록. 2011-12 시즌이 시작된 현재는 바비 찰튼 경의 기록을 (606경기)을 이미 넘어섰다. 통산 리그 출장 기록은 672경기이며 클럽 최다 출장 기록은 963경기로 역시 맨유 최다 출장자이다.[15]

  • 데뷔 이후 프리미어 리그 출범 원년인 1992-93 시즌부터 2012-13시즌까지 22년간 매 시즌 골을 넣은 유일한 선수. 그와 함께 EPL 최다출장 & 매년 출장 & 매년 득점 등등의 기록은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현역 마지막 시즌인 2013-14 시즌은 골을 넣지 못하고 은퇴했다.
  • 2000년부터 공식집계된 EPL 어시스트 회수는 105번째, 그 전도 포함한 프리미어리그 통산 어시스트 회수는 163어시. 얄짤없이 맨유는 물론이요 EPL 역사를 통틀어 최다 어시스트 기록 보유자이다. 163개가 92-93 시즌부터 집계된 것이라 긱스가 데뷔한 90년부터 92년까지를 계산하면 조금 더 추가될 수 있다. 리그 외에 각종 컵 대회를 종합하면 248어시스트이고 국가대표를 포함하면 이보다도 더 늘어난다.
  • 현재 UEFA 챔피언스 리그 역대 최다 출장 3위(145경기)이며 챔스 역대 최고령 득점 2위(37세 289일[16]). 더불어 챔스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라면 이 사람은 챔스 최다 어시스트 기록 보유자(49개). 다만, 공식 기록은 01-02 시즌부터 집계되어서 30개이다.[17]
  • 1998/99 FA컵 4강 재경기(VS 아스날)에서 보여준 매직 드리블은 맨유 역사상 최고의 골로 선정되었다.

2.2. 국가대표 경력


[image]
요약하자면 클럽 선수로서는 화려한 커리어를 가졌지만, 국가대표로선 녹록치 못한 조국의 국가대표팀 전력을 극복하지 못한 채 FIFA 월드컵은 물론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마저 제대로 누벼보지 못한 비운의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조지 웨아 등과 더불어 안습의 국대 커리어 선수로 곧잘 거론되는 선수.
'''"FIFA 월드컵 대회 중에 언제나 나는 늘 작은 방에 틀어 박혀 있었지만 원망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누군가 기억해주겠지요. 이 영광의 대회 팬 중에는 영국의 작은 나라의 한 선수, 라이언 긱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 라이언 긱스가 FIFA 월드컵의 꿈이 좌절된 소감을 웨일스의 축구 전문지에다 직접 기고한 편지의 내용에서.
'''"잉글랜드 대표가 되길 희망했다면…이라는 가정으로 시작되는 질문이 여전히 날 괴롭힌다. 난 웨일스인이다. 이것으로 모든 이야기는 끝이다.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고, 내 부모와 아무 관계도 없는 잉글랜드를 위해 뛰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라이언 긱스에게 "왜 잉글랜드 대표가 되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긱스가 잉글랜드 축구협회로부터 국적을 바꾸라고 권유받았으나 어머니와 자신이 태어난 모국을 위해 웨일즈 국가대표를 선택했다고 넷상에서, 특히 국내에서 온갖 미사여구와 멋진 사진을 곁들여서 훈훈하게 포장지로 싸여진 이야기가 중2병 학생들의 미니홈피 및 블로그에 퍼져 있는데... 그냥 개드립이다.
영국에 나뉘어 있는 네 개의 축구협회를 선택하는 것에서 우선하는 것은 출생지와 부모 및 조부모의 출신지였다. 외국에서 태어나는 등 일정한 특수요건이 있다면 자유롭게 선택이 가능한데 라이언 긱스의 친할아버지는 시에라리온 국적, 친할머니, 외조부모는 모두 웨일즈 출신에 어머니와 아버지마저도 웨일즈 출신이었다[18]. 그나마 긱스 자신의 출생지도 웨일즈의 중심지 카디프. 현재 개정된 영국 국대 선발 규정대로라면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뛸 수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어떤 식으로든 잉글랜드 대표팀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라이언 긱스가 프로 데뷔하던 당시 잉글랜드 U-21 대표팀에서도 그를 뽑으려 했지만 이러한 사실 때문에 '''뽑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실 긱스는 이전에도 잉글랜드 유소년 국가대표 팀의 주장으로 뛴 적도 있었다. 월드컵 비운의 별 긱스의 비하인드 스토리
결국 라이언 긱스는 1991년 웨일스 U-21대표팀에서 단 한경기를 뛰고 바로 웨일스 성인 대표팀에 차출, A매치에 데뷔하게 된다. 물론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규정이 있더라도 어차피 같은 영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니 규정 뜯어 고쳐가며 데려올 수도 있을 위인들이지만, 그것은 라이언 긱스 자신도 그렇게 해서라도 잉글랜드 국가대표로 뛰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 한국 뿐만이 아니라 영국 현지,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긱스와 잉글랜드 대표팀'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다들 알다시피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왼쪽 윙 자리는 20년이 넘도록 답이 없다. 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잉글랜드는 수비면 수비 공격이면 공격 게다가 조직력까지 갖춰져 있었던 명실공히 강팀이었다. 당시 맨유가 자랑하던 좌긱스-우베컴 라인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도 가동했다면 한 번 정도는 우승을 노릴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레스 베일이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웨일스 국가대표 최연소 데뷔'''였으며, '''웨일스 국가대표 역대 최장기간 주장 역임'''이었다. 사실상 긱스 이외에는 전력이 참... 눈물나는 상황이었으니... 특히나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경기라도 있다치면 베컴, 네빌, 퍼디낸드 등 클럽팀에서 똑같이 우승을 맛봤던 동료들을 상대로 다구리를 맞아야 했던 긱스였다. 어느 인터뷰에서 긱스는 "분명 내가 공격하고 네빌이 나를 막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국가대표 경기에서의 모습은 늘 반대였다"고 토로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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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07년 여름, 체코와의 유로 2008 최종예선 경기[19]를 끝으로 눈물없이 볼 수 없었던 그의 국가대표 경력을 끝냈다. 팬들은 사방에 플랜카드를 걸고 주장 완장을 내려놓는 국가의 레전드의 뒷모습에 박수와 함께 눈물을 뿌렸다. 이렇게 긱스의 국대 경력이 끝났다.
이후 2012 런던 올림픽 영국 단일팀(Team GB)최종엔트리에 선발되었다. 올림픽 대표팀은 일반적으로 국대라 불리는 A 대표팀이 아니라 U-23 대표팀이고, 긱스가 평생 뛰었던 웨일스 대표팀이 아닌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팀이지만 그의 국제대회 마지막 도전이라 그의 팬들은 은근히 호성적을 기대하고 있다. 게다가 주장 자리에도 낙점되었다. #
본선 조별예선 2차전 UAE와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하는 등[20] 주장으로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8강전까지 나름 승승장구하였으나...
레전드 말디니의 마지막 A매치를 눈물에 젖게 만들었던 동방의 한 국가에게 영국 단일팀이 녹아웃됨에 따라 긱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국가대항전 본선 도전도 막을 내렸다. 올림픽 축구종목은 A매치가 아니기에 결코 메이저 대회라고 할 수 없지만 긱스의 국가대표 커리어가 선수 본인의 클라스에 비해 워낙 안습하다보니 탈락에서 속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웨일즈 대표로 월드컵에 한번도 못 나간 것에 한이 맺혔는지 2002년 월드컵 기간에 집에서 혼자 노는 긱스라는 주제로 몇개의 웃긴 리복 CF를 찍었다. 혼자서 집 정원에서 웨일즈 국대 유니폼을 입고 잉글랜드를 상대로 월드컵 결승전에 나간 상상을 하며 노는 것이 특히 웃기다.#

2.3.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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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베스트의 재림" 혹은 "왼쪽의 절대자"라 불렸던 "전성기 긱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귀신같은 드리블". 영국 축구 역대 최고의 드리블러를 꼽을 때 결코 빠지지 않는 전성기 당시 긱스의 드리블은 말 그대로 알고도 못막는 레벨이었고, 입벌어지는 스피드의 돌파에 이은 다이렉트 러닝크로스의 정확도는 당시 누구와도 비교를 거부했다.[21]
주특기인 드리블을 이용한 돌파와 스피드, 왼발의 마술사라는 별명답게 왼발 크로스 능력과 패스가 강점이다. 거기다 득점력[22], 전술 이해도, 개인기 등등 윙어로서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완벽한 선수였다.[23] 심지어 헤딩마저 나쁜 편은 아니었으며, 킥의 정확도 역시 천하의 데이비드 베컴과 번갈아가며 프리킥을 찰 정도였으며 베컴이 레알로 떠난 후에는 팀의 전담 키커였다. 세트피스 상황에서 베컴과 동시에 프리킥을 차는 듯한(훼이크) 영상은 꼭 찾아보길 바란다.
젊은 시절의 긱스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술과 스피드, 판단력, 차분함을 갖춘 선수였다. 특히 드리블을 할 때면, 긱스가 가진 덕목들이 모두 시너지가 되어 말그대로 눈이 즐거운 드리블이 펼쳐졌다. 공을 발에 붙였다, 멀리 떨어뜨렸다를 반복하는, 제동 및 가속을 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깔끔한 볼 터치로 민첩한 방향전환을 하며 자유자재로 공을 몰았다. 원체 균형감각과 밸런스가 역대급이라 급격한 방향전환을 할 때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우아함을 뽐냈다. 199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스널이 맞붙은 FA컵 준결승전이 좋은 예. 여기서 나온 일명 사과나무 골은 맨유 역대골 중 하나로 두고두고 회자되곤 한다.[24]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발이 다소 느려져[25][26] 더 이상 상대 수비를 젊을 때 만큼은 따돌릴 수 없었고, 순발력도 젊은 시절보다 떨어지면서 일대일 상황에서 위력이 반감 되어있었다.[27] 그러나 긱스는 자신의 몸에 나타난 변화를 그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었고, 화려함을 버리는 대신, 영리함과 정교함을 살리는 쪽을 택했다. 은퇴를 바라보는 30대의 나이에 중앙 미드필더로의 변신을 시도한 긱스는 넓은 시야와 정확한 킥 능력, 빠른 두뇌 회전을 무기로 새 포지션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다만 굳이 단점을 찾는다면 반댓발(오른발)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28] 길고 긴 그의 커리어에서 그가 오른발로 넣은 골의 개수를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3. 지도자 경력



3.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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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 감독대행 라이언 긱스'''
2013-14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은퇴하기도 전, 플레잉 코치 역할을 수행하던 중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의 경질로 시즌 잔여 경기를 지휘한 것이 첫 감독 경력이다. 상기 선수 경력에 함께 서술. (2승 1무 1패)

3.1.1. 2014-15 시즌


2014년 5월 19일 맨유의 차기 감독으로 루이 판 할 감독이 선임되면서 수석 코치에 내정되었다. 아무래도 구단 차원에서 차차기 지도자를 맡기기 위해 전략적으로 키우는듯. 반 할 감독은 월드컵이 끝나 네덜란드 국가대표팀과의 계약이 만료되는 대로 구단에 정식으로 합류할 계획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마침내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러나 맨유와 EPL을 통틀어 역대 최고였던 선수의 현역생활이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맨유 통산 963경기 출장.
은퇴 후 그의 등번호는 유망주 아드낭 야누자이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야누자이의 소시에다드 이적 이후 앙토니 마르시알이 2016-17 시즌에 11번을 달게 되었다.[29]

3.1.2. 2015-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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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시즌에 이어서 판 할의 수석 코치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번 시즌은 작년과 다르게 판 할 감독이 훈련장과 경기 당일에서의 권한을 부여했고[30] 전술적인 부분에서 긱스가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첼시와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거둔 것과 스완지 전에서 2:1로 승리한 것. 이 경기 모두 긱스의 전술로 경기를 했다.
이번 시즌 판 할의 부진으로 다음 시즌 무리뉴와 함께 감독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판 할이 경질되고 무리뉴가 맨유 감독에 선임될 것이란 소문이 돌면서 긱스가 수석 코치 직을 떠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결국은 주제 무리뉴가 감독으로 공식 선임 되었다. 팀은 긱스가 U-23(2군)의 감독이 되기를 원하고, 긱스는 판 할의 후임 감독이 되기를 원했으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긱스가 떠난다고 사실상 확정되는 분위기. 무리뉴는 어떻게든 긱스가 남게 하기 위해 '''원하는 어떤 자리든 내주겠다'''는 승부수를 던졌다.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무리뉴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안에도 불구하고, 7월 2일, 자신의 야망을 위해 맨유를 떠났다. 29년간 오로지 맨유만을 위해 헌신했던 마법사도 끝내 막을 내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난 후에는 2016년 카디프 시티 감독 경쟁에서 밀렸었다.

3.2.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8년 1월에는 월드컵 예선 탈락 후 공석으로 남아 있던 모국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에 선임되었다. 첫 경기인 중국전을 6-0 대승으로 잡으면서 좋은 시작을 보였다. 2018년 9월에 개막한 네이션스 리그에서는 리그B 4조에 속해 첫 경기 아일랜드전을 4-1로 이기고 덴마크에게는 0-2로 패했다.
유로 2020 예선에서는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등이 포진된 E조에서 치열한 순위 경쟁 끝에 헝가리와의 최종전에서 2-0 승리를 거두면서 조 2위로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이로써 긱스는 선수 시절 이루지 못했던 메이저 대회의 꿈을 감독으로서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감독 경력을 이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2020년 11월 2일, 긱스가 여자친구를 폭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기 때문. 이로 인해 웨일스 축구 협회 측도 선수단 발표가 연기되었다고 밝혔고, 사건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한다. 만약 이 폭행 혐의가 사실이라면 더 이상 대표팀 감독으로 활동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결국, 웨일스 축구 협회는 2020년 11월 3일, 긱스는 11월에 지휘봉을 잡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감독 대행은 로버트 페이지.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LW 8위)
  • PFA 올해의 선수: 2008-09
  • PFA 올해의 영플레이어: 1991-92, 1992-93
  • PFA 올해의 팀: 1992-93, 1997-98, 2000-01, 2001-02, 2006-07, 2008-09
  • PFA 세기의 팀[31]: 2007
  • PFA 메리트상: 2016
  • FWA 공로상: 2007
  • 브라보 상: 1993
  • BBC 올해의 운동 선수: 2009
  • BBC 올해의 웨일스 운동 선수: 1996, 2009
  • BBC 올해의 골: 1998-99
  • 프리미어 리그 20주년 최우수 선수: 2012
  •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베스트 XI[32]: 2002
  • 프리미어 리그 20주년 베스트 XI[33]: 2012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2006년 8월, 2007년 2월
  • UEFA 챔피언스 리그 도움왕: 2006-07, 2010-11
  • 인터컨티넨탈컵 맨 오브 더 매치: 1999
  • 웨일스 올해의 축구 선수: 1996, 2006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올해의 선수: 2005-06
  • 맷 버스비 경 올해의 선수: 1997-98
  • 지미 머피 올해의 신인 선수: 1990-91, 1991-92
  • GQ 올해의 운동 선수: 2010
  • 골든풋: 2011
  • IFFHS 레전드: 2016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5
  • 글로브 사커 어워드 선수 경력상: 2019

4.3. 수훈


  •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 2007

5. 개인사



5.1. 가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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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찍은 사진. 아버지는 시에라리온 혈통의 웨일스인이자 유명 럭비 선수 대니 윌슨이었다. 그는 웨일스 출신의 '''16세''' 소녀 라이네 긱스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 후 아이까지 낳게 된다. 그 아이가 바로 라이언 긱스.
하지만 윌슨의 바람기는 상당히 유명했는데, 라이네와 결혼한 후에도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내와 아이가 있었지만 여러 여자를 만나러 다녔고 그 모습을 소년 라이언이 보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라이언은 아버지에 대해 실망하고 싫어하게 되었다. 이후 윌슨이 이적함에 따라 라이언은 맨체스터로 이사하게 되고, 당시 맨체스터 시티의 스카우터였던 데니스 스코필드에게 발굴되어 딘스 유스클럽에서 축구를 하고있었는데 '''귀신 같은 드리블을 치는 꼬마가 있다'''라는 스카우트의 보고를 받은 알렉스 퍼거슨이 14세 생일날 긱스의 집에 직접 찾아가 라이언의 첫 유스 계약을 성공시킨다.
라이언이 14세가 된 어느 날, 아버지 윌슨은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이혼을 하게 된다. 이미 아버지에 대해 좋은 기억이 없던 라이언은 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되었고 성도 어머니의 성을 따른 "긱스"로 바뀌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란 라이언에게 퍼거슨 감독은 많은 위로를 해주었고 라이언은 퍼거슨을 아버지처럼 따르게 된다.
긱스의 할아버지가 시에라리온 출신이기 때문에 긱스 역시 흑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34] 그 때문에 어렸을 때 인종차별[35]로 인한 힘든 시절을 보낸 듯, 그 당시를 잊지 못하고 성년이 된 지금 유니세프의 인종차별 추방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36]

5.2. 전설적인 불륜 행각


커리어도 화려한데다 가족들에게 헌신적이고 가정적인 가장으로서, 모범적인 이미지가 좋았으나 선수생활 말미에 '''불륜 스캔들'''을 일으켰다. # 과거 자신이 아버지의 불륜으로 많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타 선수들에게 귀감 및 모범이 되었던 선수 생활 말년에 벌인 불륜이라 팬들의 배신감은 상당히 커서 넷상에서 옹호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긱스의 이런 갑작스런 막장극장을 풍자한 한국 누리꾼의 댓글 원문
2007년경 카카AC 밀란 시절 긱스의 멱살을 잡는 사건이 있어서 까인 적이 있는데 2011년 긱스의 스캔들이 드러나자 타 팀 팬들에게 찬양받았다.
  • 첫 번째 불륜: 연예계 최고의 모델
언론에 알려진 첫번째 불륜 상대는 이모겐 토마스(Imogen Thomas)라는, 1982년생 웨일스 출신의 유명한 슈퍼 모델이다. 2010-11 시즌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EPL에서 오래 뛰고 타이틀을 많이 얻은 웨일스 선수가 불륜을 했고 아내에게 고백해서 결국 아내를 울리게 했다.'고 현지 언론 및 신문이 보도하기 시작했다. 조건이 워낙 한정적이라 웬만한 사람들은 누군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지만 당사자가 안팎으로 존경받는 인물이기에 그냥 뻘루머로 여기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트위터를 비롯한 SNS에선 이미 널리 퍼질 대로 퍼져나갔고 특히 5월 1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스널 간의 경기를 앞두고 런던 원정에 긱스가 아무런 이유없이 불참하면서 SNS 및 팬포럼에 상주하던 사람들은 사실상 확정짓게 되었다. 결국 더 선이 냄새를 맡고 제대로 터뜨리려고 하자 재빠르게 본인은 아내에게 사실대로 고백하고 법정에 보도 금지 명령을 신청해서 막았는데, 다른 법역[37]스코틀랜드에서 보도하는 것은 보도 금지 명령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악용한 영국 언론이 거의 대놓고 당사자의 사진을 올리며[38]이 사진 스코틀랜드에서 보도하게 된다.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앞두는 중요한 시점에서 맨유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일이 터졌다.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FC 바르셀로나와의 경기에 출전은 했고 루니에게 어시스트를 올렸으나 오프사이드 상황이었고, 맨유에서 가장 많이 뛰었지만 멘탈 초토화로 인한 공황사커 끝에 그라운드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축구계의 슈퍼스타에게 젊은 애인이 하나 생겼거니 하는 "쯧쯧쯧" 정도의 시각과, 이모겐 토머스란 여성이 과거부터 축구선수에게 자주 달라붙었다는 사실로 인해 "에휴 긱옹 어쩌다가..." 하는 정도의 눈물겨운 쉴더들도 있었지만...
  • 두 번째 불륜 : 동생의 아내 (제수씨)
전설의 시작. 폭탄이 제대로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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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동생과 만나기 전부터 나이트에서 만나 관계를 가졌으며, 동생에게 그녀를 소개시켜 줬고 그녀가 동생과 약혼한 후에도 8년간 계속 관계를 가져왔다고 한다. 축구 커뮤니티에서는 '테리: 긱스는 나보다 나은 선수. 나는 동료의 아내였지만 그는 동생의 아내였다.', '긱스 조카가 귀신같은 왼발 드리블을 치기 시작하는데...' 같은 드립을 치면서 긱스를 깠다. 형에게 NTR을 당한 긱스 남동생이 2006년 태어난 자신의 아들 친자 확인 검사를 실시할 것이라고 한다. 만일 검사 결과 긱스 남동생의 아들이 긱스 아들로 밝혀진다면 역대 스포츠 스타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전설로 등극할 것이다. 사실 지금 터진 것만 따져도 충분히 역대급 전설이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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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긱스와 8년간 불륜을 저지른 나타샤가 긱스와 사귀면서 긱스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동료와도 불륜을 저질렀다고 한다. 나타샤가 긱스가 아닌 다른 맨유 선수[40]와 사귄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며, 사람들은 어떻게 나티샤가 긱스와 남편 로드리, 또다른 맨유 선수와 동시에 만날 수 있었을까 매우 궁금해 했고, 특히 긱스는 나타샤가 자신의 팀 동료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감쪽같이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나타샤 긱스가 드와이트 요크 이외에도 맨유 선수 출신 2명과도 불륜을 저지른 사실이 드러났다. 상대는 필 바슬리(선덜랜드), 대니 심슨(뉴캐슬)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타샤가 뉴스 오브 더 월드에 충격적인 고백을 했는데, 나타샤가 긱스의 아이를 임신하자 낙태를 종용했다는 것, 그리고 낙태 확인만 했을 뿐 곁에 있어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것으로 인해 긱스는 언론들에게 집중 포격을 받고 있다. 또한 나타샤는 그 외에도 긱스의 동료들과는 잠시 만났을 뿐 그들과의 관계는 언론이 부풀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타샤가 일방적으로 "자신은 피해자다"라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현지에서는 "나타샤 역시 가해자이다"라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단순히 긱스 한 명과의 밀애를 가진 것이 아니라 많은 수의 선수들과 원나잇 스탠드를 가진 것을 비롯하여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관계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 이머전 토머스의 등장으로 자폭하는 심정으로 일을 터트렸다는 것으로 인해 현지에서는 긱스만큼이나 '미친 년'으로 까이고 있다. 긱스의 아내인 스테이시 역시 "나타샤가 긱스를 망가트리고 빼앗기 위해 터트린 폭탄이다."라며 "내 남편을 빼앗기지 않겠다."라며 긱스를 용서하겠다고 한 것으로 인해 더욱 더 까였다. 이쯤되면 단순한 불륜극이 아니다.#
  • 동생장모 불륜설
파문 와중에 타블로이드지인 미러에서 나타샤의 어머니.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사부인과도 일이 있었다는 기사가 터졌다.# 긱스가 가족 모임에서 동생장모까지 꼬시려고 했고, 심지어는 동생장모와도 불륜을 저질렀다는 찌라시인데 이걸 국내 정론지에서 인용하여 기사들을 쏟아내는 바람에[41] 일반인들에게 팩트로 각인되어버렸다. 하지만 국내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실제로 해외의 모든 긱스의 장동생모 유혹설을 언급한 기사들의 출처가 위의 미러 지 기사 딱 하나인데 미러 지야 더 선과 더불어 갖가지 찌라시 소설들을 매일 같이 업데이트하는 황색언론으로 악명이 자자한 곳이라... 더 이상의 후속 보도도 없는 것으로 보아 사실상 동생장모 유혹설의 신빙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 세 번째: 과거 최고 모델
이번에 나온 상대는 과거 미스 카디프 출신 모델인 1968년생 리사 제인스. 본인이 데일리스타에서 폭로한 뒤 알려졌다. 위의 이머전 토머스처럼 웨일스 출신의 인기 모델에 금발이고 유명 리얼리티 쇼 '빅브러더'의 영국판에 출연한 적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둘의 관계는 13년 전에 처음 시작되었다고는 하는데, 사실 이건 불륜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 것이 당시 긱스는 물론 제인스 역시 싱글이었다. 1년 정도 만남을 가지다 헤어졌다고 하는데, 영국 현지에서도 "10년도 지난 일을 이제 와서 꺼낸다는 건 긱스 스캔들 여파에 물타기로 돈이나 뜯어내려는 수작"이라고 보는 시각이 대세다.[42]
  • 계속되는 막장 드라마
긱스와 스테이시는 지난 11일 맨체스터 근교 워즐리의 한 중화요리 레스토랑 밖에 나타샤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봤다. 이들은 지난 6월 나타샤가 긱스와의 근친상간을 폭로한 뒤 이날 처음 만난 뒤 말싸움으로 번졌고 이 와중 긱스는 "난 네게 신경도 쓰지 않아. 그저 잠자리 상대였을 뿐이야"라고 나타샤에게 어떤 감정도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로드리 긱스에게 벌레(bug)라고 욕을 먹으면서 라이언 벅스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종합해보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넘어 EPL의 출범과 함께 그 시작을 함께 했던 레전드 중의 레전드지만, 스캔들 한방에 모든 영광을 싸그리 날려버렸다. 차라리 원래부터 여성 문제로 시끄러웠다면 충격이 덜했겠지만 스캔들이 터지기 전까지 긱스의 이미지는 바른 생활하고 가정적인 건전한 스포츠인이었다. 게다가 과거의 일도 아니고 8년이나 계속해왔다는 사실에 대해 배신감과 가증스러움을 느꼈다는 팬들도 많다. 축구 관련 웹툰에서도 종종 등장하여 동료들의 아내를 탐하는 모습으로 자주 비춰진다. 결국 선수 말년에 그리고 맨유 수석 코치에 이어 웨일스 국가대표팀 감독이 된 지금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2015년 긱스의 동생이 한 인터뷰의 내용이 화제가 되었는데, 자신으로 인해 친동생의 가정이 완전 파탄났음에 불구하고 이에 전혀 뉘우치는 기미 없이 뻔뻔하게 '''"단지 성 관계였을 뿐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대응하고 있음이 알려지면서 더욱 파문이 일고 있다.[43]기사 그러다 얼마 후, 동생과 화해했다는 기사가 떴다. 로드리가 나타샤와의 관계 지속에 실패하고 이혼 절차를 밟고 난 후, 라이언이 로드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사과를 했다고. 이후 형제간의 관계가 서서히 회복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정작 그 사건 이후로 긱스는 동생이 아내와 이혼하면서 정신적인 고통으로 마약에까지 손을 대면서 불운한 가정사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이후 한동안 조용하다가 2016년 결국 아내와 이혼 절차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긱스 자신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에게 작업을 걸다가 이걸 아내에게 들켜버렸다. 그동안 참아왔던 세월도 있고 그 사건 전후로부터 누적된 것이 폭발하여 더 이상은 못참겠다며 아내가 이혼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2017년 결국 아내 스테이시가 거액의 위자료를 청구한 이혼 소송을 걸었고, BBC에 따르면, 긱스의 재산의 절반을 위자료로 청구하였다 한다. ‘불륜남’ 긱스, 재산 절반 날릴 위기 그리고 12월에 최종적으로 이혼했으며 자세한 합의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법률대리인이 한다는 말이 이혼했지만 두사람은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 지낼거라고...
이혼할 무렵 긱스는 호텔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때 비즈니스적으로 도움을 준 8세 연하의 케이트 그레빌과 2018년에 공개 연애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2020년 11월 , 두명의 여자와 바람을 피다 들키자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여자친구를 폭행해 체포되었다. 가족의 인터뷰도 실렸는데 '''아버지''' 데니 윌슨은 "라이언은 여자를 많이 밝히지만(....) 폭력쓸 사람은 아니다. 아들을 믿는다."였고, 동생 로드리는 "형은 섹스 중독. 여자랑 사귀면 무조건 섹스를 생각한다. 그냥 딱할뿐이다."라는 인터뷰를 올렸다.
네티즌들 사이에선 클럽 감독이 되었을때, '''성적 안 나오면 가정방문 하겠다''' 등의 드립을 날리기도 했다.

6. 여담


  • 가슴이 많아서, 사과나무라는 별명이 있다.[44]사과나무
  • 2020년 1월 ,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30대 중반에 중앙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해 자리잡는 데에 큰 도움을 준 동료로 마이클 캐릭, 웨인 루니, 파트리스 에브라, 박지성을 꼽았다. [45]

7. 라이언 긱스에 대한 헌사


[image]

'''에릭 칸토나는 훌륭한 선수다. 하지만, 라이언 긱스만큼은 아니다.'''

요한 크루이프

'''그가 뛰는걸 보게된다면, 그는 매우 영리하단걸 알 수 있을꺼야. 그는 모든 미드필드 지역을 커버할 수 있지만, 내 생각에 역시 그의 최고의 포지션은 왼쪽 윙어야. 그는 모두의 눈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선수였어. 물론, 그의 상대방에겐 아니었겠지만.'''

프랑코 바레시

'''나는 내 현역 시절에 대해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라이언만큼은 결코 넘을 수 없었다.'''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판타지스타? 그 말은 라이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고 트레이닝할 때 그를 딱 봤는데, 모든걸 쉽게 하더라고. 패스하고, 좋은 런을 하지. 라인플레이도 잘하고, 크로스는 거의 택배라고. 그리고 윙어인데 골도 잘 넣을 수 있는 선수야'''

야프 스탐

'''긱스가 프랑스 사람이었다면, 나는 벤치에 있었을 것이다.'''

지네딘 지단

'''축구장 왼편은, 긱스의 영지다.'''

루이스 피구

'''절대자란 말은 함부로 쓰는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라이언은 왼쪽라인의 절대자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할 수 있지만 나는 그가 하는것을 모두 해낼 자신이 없다. 라이언이 체코선수였다면, 벤치를 따뜻하게 데우고 있는 선수는 다름이 아닌 나일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파벨 네드베드

'''프리미어리그를 11번 제패한 선수를 두고 무슨 잔소리가 필요한가? 그 경력이 그를 증명해주고 있다.'''

주제 무리뉴

'''그는 놀랍고 또 놀랍습니다. 단지 17세의 소년으로 믿을 수 없는 재능을 보여줬던 그 때부터 36살의 노장으로 필드에 오르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제나 경이로움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입니다.'''

알렉스 퍼거슨

'''부끄러운 일이지만 난 축구선수를 보며 운 적이 두 번 있다. 첫번째는 로베르토 바조이고 두번째는 라이언 긱스다.'''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만나본 상대 중 가장 힘든 선수'''

하비에르 사네티


8. 관련 문서


[1] 2007년 수훈, 4등급 대영제국 훈장 Offic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2] 말년에는 중앙 미드필더로도 뛰었다.[3] 1985년부터 맨시티 유스에 속해 있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는 당시 맨시티 스카우트였던 데니스 스코필드의 딘스 축구 클럽에서 뛰었던 것일 뿐 정식 맨시티 유스 계약은 아니였고 상주하는 유스 선수도 아니였다. 게다가 긱스는 어릴 적부터 맨유 팬이었고 당시 학교에서 럭비 선수로도 뛰고 있었다. 14세 생일 날 맨유와의 정식 유스 계약이 공식적인 유스 커리어의 시작이다.[4] 모예스 경질 후 2013-14 시즌의 남은 경기를 감독대행으로 수행했다.[5] 이때 현 맨유의 주전 수문장인 다비드 데 헤아는 태어나지도 않았다.[6] 국가대표 경기에서 딱 한 번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다.[7] 원래 영상 자체가 있었으나, 차단당하여 바꾸었다.[8] 긱스 왼쪽의 트로피를 들고 있는 사람이 이 선수들을 유스 시절부터 키워낸 에릭 해리슨 코치다. 현지 시간 2019년 2월 13일에 별세했다.[9] 당시 유망주로 주목받았지만 약 4년간의 임대 생활을 거쳐 결국 맨체스터 시티 FC로, 거기서도 임대 생활만 전전하다가 MLS콜로라도 래피즈에서 겨우 정착해서 주전 선수로 활약하고 2011년 은퇴했다.[10] 박지성이 이적한 후로 맨유를 보게 된 한국팬들은 긱스가 수염을 기르고 나이가 들었을 때의 모습 밖에 모르지만 젊었을 때 긱스는 퍼거슨 자서전에 나와 있듯이 베컴 부럽지 않은 수려한 외모를 소유했었다. 퍼거슨은 긱스도 원한다면 베컴처럼 연예인이 될 수 있었지만 스스로가 축구에 집중하길 선호했다고 서술했다.[11] 무시무시한 드리블 실력과 깔끔한 외모를 갖추었기에 조지 베스트의 재림이라고 미디어가 치켜세웠다.[12] 리그 36경기 8득점, 전체 59경기 14득점.[13] 이 과정에서 니키 버트, 필립 네빌 등의 베테랑들이 밀려나갔다.[14] 근데 사실 2010-11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도 맨유에서 가장 많이 뛴 선수였다. 당시 2위는 마이클 캐릭, 3위는 박지성.[15] 참고로 오로지 클럽 출장 경기만이다. 국대까지 합치면 선수 통산 출전 기록이 1000경기를 넘어간다! 이에 버금가는 레전드는 오로지 파올로 말디니만이 비견된다.[16] 2014년 9월 30일 프란체스코 토티가 만 38세 3일에 득점하며 기록을 갱신하기 전까지는 역대 최고령 기록이었다.[17] 이 기록 또한 2016년 10월 21일 호날두가 통산 31도움을 기록하며 경신되면서 2위로 밀려났다.[18] 아버지인 대니 윌슨이 잉글랜드 출신 또는 대표팀이었다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정보다. 사실 대니 윌슨은 웨일즈 럭비 대표에 뼛속까지 웨일즈 사람이었고, 잉글랜드 럭비 리그에서 뛸 때도 자신이 웨일스 출신이라는 것을 어필했다.[19] 이 경기는 양쪽 모두 득점 없이 무승부로 끝났다. 참고로 웨일스는 체코와 독일에게 밀려 최종 5위로 탈락하였다.[20] 이 득점은 올림픽 축구 역대 최고령 득점으로 기록. 1924년 파리 올림픽 당시 이집트의 헤가지가 보유했던 기록(27세)을 갈아치웠다. 깨질 일이... 있으려나.[21] 베컴의 경우 러닝크로스는 전문이 아니었다. 베컴은 잠시 키핑-> 택배배달이 메인. 중앙에서 스콜스가 패스를 뿌리고 전혀 다른 스타일의 세계 최고를 다투는 좌우 윙어가 측면에 있었다[22] 맨유 역대 최다득점 8위다.[23] 이 이상의 극찬을 받은 선수로는 루이스 피구가 있다. 당대 최고의 윙어로 같은 포지션에서 긱스, 베컴조차도 한 수 접어줘야 했을 정도. 좌 긱스-우 피구는 그야말로 꿈의 조합.[24] 1대1로 비기고 있던 상황, 연장전 후반에 하프라인에서 패트릭 비에이라의 패스를 인터셉트하고 그대로 골 박스까지 수비수들을 모두 드리블로 제끼고 왼발로 강하게 때려 골든골을 넣었다. 80년대말 혹은 90년대 초반에 태어나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축구를 본 축구 팬들에게는 살면서 본 가장 인상깊은 골 중 하나로 기억된다.[25] 젊은 시절의 긱스는 아르연 로번 부럽지 않은 주력을 가진 폭발적인 드리블러였다.[26] 그래도 타고난 속도와 가속력 자체가 워낙에 뛰어나서 불혹에 가까운 나이에도 치고 달리기로 돌파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27] 물론 젊을 적 보다 떨어진 것이어서 13/14시즌 나이 40에도 여전히 간간히 나오는 위력적인 돌파와 빠른 순간속력을 자랑했다.[28] 해외선수들의 경우 주발이 아닌 반댓발의 정확도가 확연히 차이나는 경우를 종종 볼 수있다. 그래서인지 반댓발을 써야할 상황에서도 굳이 주발을 고집해서 답답하게 기회를 날리는 경우가 많다. 양발잡이라는 유형이 축구에서 유독 중요한게 드리블이나 킥에서 전혀 예측할수 없고 페이크 모션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되기때문이다. 그 예시로 히딩크가 우리 대표팀 감독을 맡고나서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우리 선수들을 보고 놀랄 정도였으니까(...)[29] 마르시알이 막 맨유에 온 15-16 시즌에는 9번을 달았다. 이후, 마르시알은 19-20 시즌에 다시 9번을 달았다.[30] 훈련의 흥미를 높이기 위해 선수들이 불평하던 판 할의 반복적인 훈련 방식 대신 퍼거슨 시절의 훈련 루틴을 도입하였다.[31] 1997~2007[32] 1992~2002[33] 1992~2012[34] 그래서 풋볼 매니저시리즈 할때 긱스 프로필을 보면 이중국적란에 시에라리온이 적혀있다. 만약 웨일스 국가대표도 안가고 시에라리온 국대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웨일스보다 더 안습의 국가대표 경력을 쌓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조지 웨아의 시에라리온버전이 될지도. 공교롭게도 하필 둘이 이웃나라다(...)[35] 우리가 얼핏 보기엔 그냥 백인으로 보이지만, 서양인 눈에는 백인의 혼혈 구분이 다 간다고 한다. 긱스옹과 혼혈로 인한 케이스로 줄리엔 강 역시 인종차별을 받았다.[36] 그 때문인지 경기장에서도 인종차별 느낌이 드는 제스처가 발생하면 표정이 급 안좋아진다. 단적인 예로 2009년 맨유 방한경기 당시 논란이 됐던 마케다의 골 세레모니. 선수단 짬밥 No.1인 긱스가 정색을 하고 달려와서 마케다를 뜯어말렸다.[37] 영국(본국)의 법역은 잉글랜드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셋으로 나뉜다. 해당 보도 금지 명령은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만 효력이 있었던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38] 눈을 가렸지만 딱 봐도 긱스인지 알 수 있는 수준의 사진을 실어서 보도했다.[39] 긱스 동생이 둔기를 들고 긱스에게 쳐들어가려 했다는 뉴스가 떴다. 이런 상황에서 친자 확인 결과 긱스 남동생의 아들이 알고보니 긱스의 아들로 밝혀진다면 그 다음은...[40] 긱스와 함께 맨유에서 100경기 정도 출전했으며 세번의 정규 리그 우승을 함께 만들었고, 아직 미혼이라는 이 선수는 맨유를 떠난 상황이라고(former teammate)하여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유력한 용의자였는데 알고보니 드와이트 요크였다.[41] 조선일보, 동아일보, YTN, 한겨레, 연합뉴스[42] 따져보면 둘다 싱글인 상태에서 만났고 긱스가 결혼하기 이전에 헤어졌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는 사안이다. 애초에 불륜이라 할 수도 없는 사안이다.[43] 그래도 로드리는 아직 이혼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때문에 자신이 고통을 겪은걸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또한 형 라이언은 이혼 당시 14-15세라서 맨유 유소년 클럽 동료들과 축구를 하거나 놀면서 고통을 잊고, 아버지같은 존재인 알렉스 퍼거슨이 있어서 안정을 찾았지만 훨씬 어린 자신한테는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라이언이 동생한테 신경을 좀 써줬다면 어느 정도 상처는 덜했을지도...[44] 제대로 보고 싶다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최고의 골로 선정된, 99년 FA컵에서의 아스날 전을 보자. 긱스가 셔츠를 벗고 바람개비처럼 돌리며, 지금은 보기 어려운 흥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나이가 20대 중반임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흥분했을 가능성이 높다.[45] 에브라를 제외한 3명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중미로 뛴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