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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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선수 시절 포지션은 라이트백이었다.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으면서 2002 한일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고, AS 로마에서 클럽 경력의 전성기를 보내며 2000년대 초에 치열하기로 유명했던 세리에 A를 제패한 전설적인 선수이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카푸는 여느 브라질 스타들처럼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그런 가난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뽐낼 상파울루에 입단한다. 사실 상파울루에 입단하기 전 까지 그는 SE 파우메이라스, 산투스 FC, SC 코린치안스 등 여러 클럽을 돌아다니며 입단 테스트를 봤지만 무려 12번이나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계속된 노력 끝에 결실을 맺으며 프로 데뷔에 성공한다.
상파울루 FC는 당시 브라질 리그에서 전성기를 맞고 있었고 운좋게 그럴때 들어와 여러 타이틀을 따낸다. 상파울루 FC에서 카푸는 크고 작은 우승컵을 모두 포함해 10개 가까이 얻지만 그의 활약은 그리 크지않았다. 하지만 충분히 재능이 있었던 카푸였기에 그는 팀을 떠나서 주전을 차지한 클럽이 필요해 상파울루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EC 주벤투지, 레알 사라고사, SE 파우메이라스를 거쳐 1997-98 시즌 AS 로마로 이적한다.
그 전까지의 팀들 역시도 카푸는 빛났으나 제대로 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던 찰나였다. 당시 세리에 A는 세계 최강리그로 칠공주라고 불리던 시기였고 로마 역시 그 칠공주 중 하나였다. 당시 로마의 감독인 파비오 카펠로는 카푸를 쓰리백의 윙백으로 기용했고 카푸는 제대로 활약했다. 그리고 3년 뒤인 2000-01 시즌에는 스쿠데토와 수페르코파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카푸는 프란체스코 토티,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왈테르 사무엘, 에메르송과 함께 우승의 주역이 되며 월드 클래스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무려 18년만에 우승을 맛 본 로마팬들은 카푸에게 열광 했다. 이 후도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며 2002-03 시즌까지 로마에서 활약한다. 그러나 당시 세리에는 너무나도 강력했기에 그런 로마도 순위를 유지하기 힘들었고 챔스 출전 순위권은 커녕 UEFA컵 순위권에도 겨우 든다. 카푸는 어쩔수 없이 로마를 떠나 세리에 A 최강의 팀 AC 밀란으로 떠난다.
AC 밀란에서도 그의 기량은 여전했다. 카푸는 안드리 셰브첸코, 안드레아 피를로, 젠나로 가투소, 알레산드로 네스타, 파올로 말디니 등의 멤버와 함께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리고 이적한 해인 2002-03 시즌부터 스쿠데토를 들어올린다. 다음 시즌인 2004-05 시즌에는 스탐이 오면서 말네스카 라인을 형성하지만 사실 이 수비 라인이 제대로 가동된 시간은 한 시즌 정도 밖에 없었다. 리그 최저 실점도 리그 우승과 함께 유벤투스 FC에게 내줬다. 말디니와 카푸는 이미 30줄을 타고 있으며 전성기는 지난 상태. 때문에 2004-05 시즌에 남은건 UEFA 챔피언스 리그뿐이었고 결국에는 결승까지 진출한다. 리버풀과의 경기였는데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말디니의 챔스 최단 시간골, 이 후 쐐기를 박는 2골로 전반전이 끝나며 빅 이어를 드는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후반전 스티븐 제라드의 헤딩골과 함께 3골을 내리 먹히며 승부차기로 갔고 승부차기에서 결국 패배해 이스탄불의 기적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이런 비극에도 2시즌 뒤인 2006-07 시즌, 리버풀에게 복수할 기회가 찾아왔다. 챔스 결승에선 필리포 인자기의 대활약으로 2년전 기적의 주인공 리버풀을 2-1로 꺾는다. 그렇게 카푸는 자신의 첫 번째 빅 이어를 들어올린다. 노인정이라고 불렸던 그 밀란은 거짓말같이 챔스 우승을 하며 그런 칭호를 버리게 되나 싶었으나 2007-08 시즌에는 카푸도 극심히 부진하더니 밀란은 챔스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어쨌든 그런 부진과 함께 카푸는 몸의 한계가 왔는 것을 인지했는지 2008년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2.2. 국가대표 경력
1990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한 카푸는 1994년 미국 월드컵때 엔트리에 뽑혔으나, 후보에 그쳤다. 하지만 조르지뉴가 부상을 당해 결승전에 출전하고, 승부차기 끝에 카푸는 첫 월드컵 우승을 경험한다.
3년 뒤 1997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대활약하며 브라질의 우승에 공헌한다. 호마리우, 호나우두가 투톱으로 있던 브라질은 6경기에서 무려 22골을 넣는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줬고 브라질 역시 1년뒤 월드컵에서 우승후보로 점찍혔다.
1년 뒤 기량이 물오른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는 지난 대회처럼 주전 자리를 차지했고 대활약을 해낸다. 당시 브라질의 공격은 호나우두 - 베베투 투톱, 2선 미드필더에는 레오나르두 아라우주와 히바우두가 있었다. 또 든든한 주장이자 지난 대회 우승의 주역 둥가와 아우다이르, 카푸와 카를로스가 양쪽 풀백으로 버티고 있던 어마무시한 팀이었다. 브라질은 조별예선을 3경기를 2승 1패로 16가에 오른다. 16강 칠레를 상대로 호나우두의 2골에 힘입어 4-1로 승리한다. 8강에서는 덴마크를 상대로 전반 2분만에 마르틴 예르겐센에게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베베투의 골로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전반 27분에 히바우두가 역전골을 넣으나, 50분에 브리안 라우드루프에게 동점골을 내주었고, 다시 히바우두가 결승골을 넣으며 3-2로 승리해 4강 진출에 진출한다. 4강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호나우두의 선제골로 앞서갔으나, 87분에 파트릭 클라위버르트에게 동점골을 허용해 1-1로 연장전까지 가게되었고, 결국 승부차기 끝에 승리해 결승 진출에 성공한다. 결승전 상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지네딘 지단과 '철의 포백'이 버티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 전까지는 기적적으로 올라온 프랑스였기 때문에 압도적인 모습으로 올라온 브라질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고 호나우두와 히바우두는 경기 내내 이전 경기와는 다른 부진한 모습을 보여줬고, 결국 브라질은 3-0으로 대패하고 만다.
1년 뒤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월드컵의 아쉬움을 털어버리며 호나우두와 히바우두가 괴물같은 골 스코어링을 보여주며 자국을 코파 아메리카 2연패룬 이끌었다. 브라질은 다시 한번 재기에 성공하며 다음 월드컵 역시도 기대되었다. 그리고 카푸는 둥가의 은퇴로 이 대회부터 주장 완장을 차고 뛴다.
그러나 2002 월드컵 지역 예선까지만 해도 팀의 조직력 문제로 말이 많았다. 지역 예선도 힘겹게 올라온 상태였고 호나우두 본인은 부상으로 신음을 앓다가 복귀한지 얼마 안된 상태였다. 하지만 본선에서 그들은 각성한다. 당시 공격의 삼각편대 3R은 막강한 모습을 보여줬고 카푸는 카를루스와 함께 쓰리백에서 측면 윙백을 맡아 수비 부담이 줄어들었다. 조별예선에서는 C조에 걸려 터키, 중국, 코스타리카를 모두 꺾고 3전 전승으로 16강에 올라간다. 16강에서는 벨기에를 2-0 승리, 8강은 잉글랜드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둔다. 4강에서 다시 만난 터키를 상대로 호나우두가 결승골을 넣으며 1-0으로 승리하며 다시 결승에 오른다. 결승 상대는 독일이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골키퍼 올리버 칸이라는 강력한 수문장이 버티고 있었으나 호나우두가 2골을 집어 넣었고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4년 뒤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팀도 카카-아드리아누-호나우두-호나우지뉴로 이어지는 판타스틱 4를 구성했고 F조에서 호주, 크로아티아, 일본을 상대로 3전 전승을 거두며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한다. 16강 가나를 상대로 호나우두와 아드리아누, 제 호베르투가 골을 넣어, 3-0으로 승라하며 8강에 진출한다. 8강에서 지네딘 지단의 프랑스에게 1-0으로 패배하며, 카푸는 4년전 영광과는 다르게 불명예스러운 국대 은퇴를 가진다.[2]
여담으로 카푸의 후계자로 꼽혔던 선수로는 마이콘과 다니 아우베스가 있다. 마이콘은 최전성기였던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까지 자주 비교되었고 마이콘이 노쇠화하자 아우베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이탈리아 팬들에게 고속 기관차(Il Pendolino)라고 불릴 정도의 재빠른 기동력과 브라질리언다운 천재적인 드리블 기술, 브라질리언답지 않은 왕성한 체력과 꾸준함, 탄탄하고 끈질긴 수비력까지 모든 것을 갖추었던 라이트백이다. 게리 네빌이 라이트백의 교과서 같은 선수였다면 카푸는 거기에 공격적인 능력이 훨씬 더해진 선수였다. 카푸는 뛰어난 드리블 능력을 통해 압박을 손쉽게 벗겨냈고, 탈압박 후 빠르게 양질의 크로스을 제공할 수 있었다. 오른발을 자주 사용하긴 하지만 왼발 크로스도 상당히 정확했다.
카를루스가 엄청난 활동량과 미드필드진과의 연계플레이로 왼쪽을 휘저었다면, 카푸는 여느 윙플레이어 못지않은 화려한 발재간과 엄청난 스피드를 통해 보다 직선적인 움직임을 가져가며 공격적인 라이트백의 정석과도 같은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때문에 카를루스처럼 직접 득점까지 한 상황은 많지 않다. 그러나, 카푸의 드리블 능력은 실로 엄청났기 때문에 굳이 슈팅을 하지 않더라도 공격적 역량을 충분히 뽐낼 수 있었다. 카푸를 역대 모든 라이트백 중 최고의 드리블러라고 봐도 무방하다.
슈팅을 자주 하지 않는다고 쓰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카를루스에 비해서이고, 카푸도 라이트백 치고 매우 공격적인 선수이니만큼 슈팅을 자주 찼다. 자주 차기만 한 건 아니고 잘 차기도 했는데, 특히 오른쪽에서 대각선 궤적으로 꽃아넣는 발리슛이 일품이다. 개인기가 좋은 선수답게 발리슛을 매우 잘 찬다.
멀티 플레이어이기도 했는데, 3백의 라이트 윙백과 4백의 라이트 풀백 포지션 모두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었다. 센터백과 윙어도 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공격적인 라이트백 내지 윙백으로 분류된다. 2002 월드컵에서는 브라질 3-4-1-2[3] 포메이션의 오른쪽 윙백이었는데, 아예 오른쪽 측면을 혼자 맡아버렸다. 당시 왼쪽 날개는 당연히 호베르투 카를루스.
수비력 역시 당대의 라이트백 중 최고 반열에 들었다. 태클이 깔끔하지는 않았지만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상대 선수를 경기 내내 괴롭혔고, 혹여 상대 선수가 드리블로 자신을 벗겨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쫓아가는 끈질긴 수비를 선보였다. 현대축구에서 말하는 수비력(태클, 대인 수비, 몸싸움 능력 등)이 좋다기보다는 적극성이 매우 뛰어나서 상대 선수를 질리게 만들어버리는 타입. 좋은 의미에서 지저분한 플레이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작은 덩치의 한계 때문에, 수비 능력 면에서는 릴리앙 튀랑이 카푸보다 약간 우세하다는 평가가 많다. 애초에 튀랑은 센터백 출신이니 공중볼 처리와 몸싸움까지도 완벽했다.
또한 38세 때 무릎관절 나이 판정이 '청소년과 다를 바 없다'고 나오기도 했다. 뭐 그래도 AS 로마 시절 부상으로 선수생명이 끝장날 뻔한 위기가 닥쳤는데, AC 밀란의 밀란랩에서 재활에 성공했다. 폭발적인 오버래핑과 무서운 돌파력, 화려한 개인기, 날카로운 크로스 등 오른쪽 윙백, 풀백이 갖춰야할 모든 조건을 갖춘 선수다.
또한 그는 좋은 인성, 훌륭한 리더십과 활기차고 긍정적인 태도로도 유명했다. 이것은 카푸가 스타들이 흘러 넘치는 브라질 선수단을 융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말디니가 주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밀란에 이적해 가서도 특유의 부드러운 성격 덕분에 금방 선수단에 낄 수 있었다.
4. 평가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실력이 출중한 선수라도, 월드컵이나 챔스 무대를 제패하려면 천운이 따라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하늘이 총애한 선수'''라고 봐도 무방할 듯. 월드컵 우승은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조차 이루지 못한 기록이다.[4] 또한 카나리아 군단에서도 총 142경기를 출전하여 기라성 같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출장 경기수 1위''' 기록을 지키고 있다.
호베르투 카를루스와 함께 카나리아 군단의 측면을 지배했던 전설적인 수비수로서,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이다. 카푸와 비견되는 오른쪽 수비수는 카를루스 아우베르투와 자우마 산투스가 있다. 아우베르투는 역대 최강의 월드컵 대표팀으로 꼽히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브라질의 주장을 맡았던 선수이고 자우마 산투스는 그 유명한 프란츠 베켄바워와 더불어 역대 월드컵 베스트 11에 무려 3차례 지목된 레전드이다. 때문에 브라질 내에서는 저 둘을 앞에 놓고 바로 뒤에 카푸를 놓는 경향이 있다.
브라질에서야 워낙 대단한 라이트백이 많이 나온 까닭에 많이 밀리면 3순위까지도 밀리지만, 1990년대의 라이트백 중에서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활약을 펼쳤다. 동시대의 라이트백 중 그와 비견될 만한 선수는 릴리앙 튀랑 한 명 뿐이다.
자우마 산투스의 등번호였던 2번을 달고 국가대표와 클럽팀에서 크게 활약하여 2번을 라이트백의 상징적인 등번호로 굳히는 데 공헌하였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상파울루 FC (1989~1994)
-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 1991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91, 1992
- 코파 CONMEBOL: 1994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92, 1993
-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 1993
-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1993, 1994
- 인터컨티넨탈컵: 1992, 1993
- 레알 사라고사 (1995)
- UEFA 컵 위너스컵: 1994-95
- SE 파우메이라스 (1996~1997)
-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1996
- AC 밀란 (2003~2008)
- 세리에 A: 2003-04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2004
- UEFA 챔피언스 리그: 2006-07
- UEFA 슈퍼컵: 2003, 2007
- FIFA 클럽 월드컵: 2007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94, 2002
- 코파 아메리카: 1997, 1999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1997
5.2. 개인 수상
- FIFA FIFPro 월드 XI: 2005
- UEFA 올해의 팀: 2004, 2005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2
- FIFA 100: 2004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1994
-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 1992, 1993, 1994, 1995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발롱도르 드림팀: 2020
- AS 로마 명예의 전당
- AC 밀란 명예의 전당
6. 여담
뛰는 모습 자체가 경이로운 선수라 매순간이 명장면이나 다름없는데, 특히 AS 로마에서 활약할 때 당시 SS 라치오 소속이던 파벨 네드베드를 농락하는 장면이 유명하다.
지금도 회자되는 말네스카 라인의 한축. 물론 말네스카는 모였던 두 시즌 중에서 제대로 가동된 적이 생각보다 없었고, 네스타를 제외하면 나머지 3명이 전성기에서 내려가는 시점이라서 압도적인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브라질리언 축구선수 치고 매우 모범적이고 훌륭한 멘탈을 가졌다. 단적인 예로, 04-05시즌 맨유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꼬꼬마 호날두의 시비를 넓은 마음으로 웃어넘겼던 사례가 있다.
이덕화와 닮았다.
7. 은퇴 이후
2013 발롱도르 수상식때 동방의 한나라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는데 그 이유가 참으로 어처구니 없게도 오렌지 삼총사 출신의 네덜란드 레전드 루드 굴리트의 인지도가 우리나라에서는 시궁창수준이라 닮은 꼴인 카푸로 착각해서 벌어진 해프닝(...).
2014년 SBS의 '''SNS 원정대 일단띄워'''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브라질 월드컵 특집 겸, 오만석이 카푸의 집을 직접 방문해 만나고 온 적이 있다. 당시 이미 손자가 둘 있었던 것에 많은 이들이 놀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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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5일 아들이 축구하다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링크
아들을 잃은 일에 상심이 아주 큰 듯 하다.
[1]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장자.[2] 지난 대회 쓰리백에서 오른쪽과 왼쪽 윙백을 맡았던 카푸와 카를루스는 2002년에서는 공격가담을 자주 시도하면서도 빠른 스피드로 수비 복귀 속도가 커버가 됐지만 4년이 지난 2006 월드컵, 사이드백으로 출전한 둘은 뒷공간을 아주 탈탈 털렸다. 2002년까지만 해도 그들의 나이는 카푸가 32, 카를루스가 29으로 아직 충분히 활약할 마이였지만 4년이 지나 카푸는 36으로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였고 카를루스 역시 33살로 노장의 시기였다.[3] 최고의 스타였던 호나우두와 히바우두가 투톱을 맡았고, 공격형 미드필더는 22세에 불과했던 호나우지뉴가 맡았었다. 이 3R 조합이 풀가동된 결과는... [4] 호나우두도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한 전적은 아쉽게도 없고, 그나마 카푸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월드컵, 코파 아메리카, 챔피언스 리그, 리그 우승을 전부 경험한 선수는 호나우지뉴와 호베르투 카를루스, 지다, 히바우두 네 명 뿐이다.[5] 사실 이벤트 매치에 일일코치 식으로 간 것이다. 애먼 사람 이상하게 만들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