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에르 사네티

 

''' 하비에르 사네티의 역임 직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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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주장'''
주세페 베르고미
(1992~1999)

'''하비에르 사네티
(1999~2014)
'''

안드레아 라노키아
(2014~2015)

<color=#373a3c>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로베르토 아얄라
(2003~2007)

'''하비에르 사네티
(2007~2008)
'''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2008~2011)

''' 하비에르 사네티의 기타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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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부회장'''
'''Football Club Internazionale Milano S.p.A. VP'''
''' 이름 '''
'''하비에르 사네티'''
'''Javier Zanetti'''
''' 본명 '''
하비에르 아델마르 사네티
Javier Adelmar Zanetti[1]
''' 출생 '''
1973년 8월 10일 (50세)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 국적 '''
'''아르헨티나'''[2] 이탈리아
''' 신체 '''
178cm, 체중 75kg
''' 직업 '''
축구선수 (라이트백, 중앙 미드필더[3], 레프트백, 윙어 / 은퇴)
축구경영인
''' 등번호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 4번, 8번[4]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4번[5]
''' 소속 '''
''' 선수 '''
CA 타예레스 (1991~1992)
CA 반필드 (1992~1995)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95~2014)'''
''' 경영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14~ / 부회장)'''
<color=#373a3c> '''국가대표'''
'''143경기[6]''' 5골(아르헨티나 / 1994~2011)
1. 소개
2. 클럽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멘탈갑
6. 은퇴 이후
7. 기타
8. 기록
8.1. 대회 기록
8.2.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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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image]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오랜 기간 동안 없다고 안타까워하지 말라. 그대들에겐 그 어느 우승컵보다도 위대하고 빛나는 주장이 있지 않은가."'''

프란츠 베켄바워[7]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선수이자 현 인터 밀란의 부회장이다.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수 중 한 명으로, AC 밀란에 프랑코 바레시파올로 말디니로 이어지는 위대한 계보가 있다면 인테르에는 주세페 베르고미와 하비에르 사네티가 있다. 국내 팬들은 '''사주장'''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주 포지션은 라이트백이지만 마이콘과 산톤이 중용된 이후에는 레프트백, 중앙 미드필더, 라이트윙 등 골키퍼와 최전방 공격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포지션에서 뛰었다. 뛰어난 축구 지능을 바탕으로 한 유틸리티와 지치지 않는 엄청난 체력을 겸비했던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축구 역사상 가장 꾸준했던 선수로도 평가받았고, 그는''' 축구 역사상 세번째로 많은 공식 경기에 출전한 필드 플레이어'''이다. # 클럽과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합하여 총 '''1,114''' 경기에 출전했다.[8]

2. 클럽 경력



2.1. 초창기


어린 시절 벽돌공인 아버지를 도우며 학업과 축구를 병행했다. 19세 때 CA 타예레스에 입단했고, 이듬해 아르헨티나 2부 리그의 CA 반필드로 이적해 주전 라이트백으로 활약하면서 점차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런 사네티를 눈여겨 보던 인테르의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의 적극적인 구애로 1995년 인테르에 입단한다.[9]

2.2.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image]
'''AC 밀란파올로 말디니와 함께.'''
[image]
'''45년 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확정 지은 후'''
[image]
'''현역 은퇴 경기에서'''
그때만 해도 아직 재능 있는 젊은 선수 A 수준이었기에 입단 당시 잡음이 좀 있었지만, 사네티 자신이 이탈리아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고[11] 그라운드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 주며 팬들의 인정과 사랑을 받게 된다.
이후 1995년부터 2014년 은퇴할 때까지 인테르에서 활약했다. 1999년 인테르의 전설적인 수비수 주세페 베르고미로부터 주장 완장을 넘겨받은 이래 외국인 선수인 그가 인테르에서 거친 감독은 주제 무리뉴가 15번째, 라파엘 베니테스가 16번째, 레오나르두가 17번째, 가스페리니가 18번째, 클라우디오 라니에리가 19번째, 안드레아 스트라마초니가 20번째, 발테르 마차리가 21번째다. 무리뉴 이후로 싸이클이 급격히 빨라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1998년에 UEFA컵 결승전에서 결승골로 팀에 우승컵을 가져다준 이후 한동안 인테르나 사네티나 상복이 없었다. 이른바 7공주 시대 때도 호나우두, 크리스티안 비에리 등 주전 공격수들의 부상으로 울어야 했고, 챔스에서는 밀란과 달리 번번히 초반 탈락했다. 7공주 시대는 피오렌티나, 파르마, 라치오, 로마가 재정난으로 몰락하며 막을 내렸지만 인테르는 유벤투스의 벽을 넘지 못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가 좋은 조건으로 여러번 구애를 보냈다고 한다. 실제 2000년대 초반에 이적할 뻔하기도 했으나, 마시모 모라티 구단주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이후 2006년 칼초폴리로 인해 유벤투스 FC가 몰락하고 인테르가 리그에서 독주하며 우승의 한을 풀었고,[12] 주제 무리뉴와 함께하며 그토록 바라던 '''빅이어도 들었으니''' 사네티와 인테르 모두에게 좋은 결정이었다. [13]
[image]
동년배인 히바우두, 에드가 다비즈, 크리스티안 비에리, 로베르 피레스, 라이언 긱스같은 선수중에서 긱스를 제외하면 대부분 노쇠화로 몰락하거나 하향세를 보인것과 확연히 대비된다. 라이언 긱스도 나이 들어 신체 능력이 떨어지며 준주전급 멤버로 돌아갔는데, 사네티는 그런 것조차 없어서 체력 소모가 많은 편인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도 잘만 뛴다. 쉽게 말해 일반적으로 말하는 회춘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 '''매시즌 거의 전경기에 거의 풀타임으로 출장'''하며 리그 정상급 실력을 과시하는 것을 두고 회춘이라고 할수는 없잖은가?
위에서 언급한 선수들도 그렇고 대부분은 사네티정도의 연배가 되면 피지컬적인 약점을 노련함으로 메꾸는데, 이 아저씨는 그런 것도 없다. 활동량, 순간속도, 주력 모두 전성기와 비교해서 큰 하락이 없다. 이쯤 되면 자기 관리도 자기 관리지만 엄청난 강골로 타고난 것. 사네티와 비슷한 연배로 육체적인 왕성함과 높은 클래스를 유지하는 선수는 브라질의 제 호베르투뿐이다.
12/13 시즌 들어서는 시즌 중반 후반 로스타임에 상대진영까지 전력질주 드리블로 돌파하는데에 30대 초반인 안토니오 카사노가 헉헉거리며 역습 스피드에 못 쫓아가는[14] 미친 노익장을 선보였다. 한국 나이로 40이 넘었는데...
롤모델이 철인 로타어 마테우스인데 이 사람(?)이라면 마테우스처럼 40살까지 무난히 뛸수 있지않을까? 선수 본인은 인테르에서 '''두번째 별은 달고'''[15] 은퇴해야겠다고 말 했는데, 인테르는 최소 2년은 사주장과 함께할 것이고 주세페 베르고미의 최다 출전 기록도 경신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네티는 40살때까지는 무조건 현역으로 축구선수를 하겠다고 한다.
여기에 자기보다 10살 어린 젊은이보다 젊어보이는 동안에[16], 머리스타일까지 몇년동안 똑같아서 차두리도 그렇듯이(?) 이 사람이 로봇이 아니냐는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다. 앞에서 언급한 강철체력과 더불어 이 점때문에 사주장을 슈퍼맨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2010년말 근래 들어 가장 큰 고민이 뭐냐고 하니 '''탈모'''라고 한다.
2012년 4월 14일 세리에 A 570경기 출장 기록을 달성했다. 이는 파올로 말디니의 647경기, 잔루카 팔류카의 592경기에 이은 역대 3위의 기록.
그리고 2012년 여름 '''3살 연하'''인 프리마베라 감독 안드레아 스트라마치오니가 성인 팀 감독으로 부임하여 '''감독이 선수보다 어리게 되었다.''' 그래서 안드레 빌라스 보아스의 사례를 보고 사람들이 사네티의 갑질로 인테르에 불화 생기는 거 아닌가 했는데 그런 거 없었다.
2013년 2월 8일 세리에A 592경기 출장 기록을 달성하며 공동 2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한국시각으로 2013년 4월 28일, 인테르의 부상 병동 속에서도[17]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철인'은 팔레르모와의 리그 경기 중 아킬레스건 파열로 쓰러지며 6~9개월간 그라운드에 돌아올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이대로 커리어를 마감하는 게 아닌가 우려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본인은 "I will be back"을 천명했고, 결국 그 해 11월 10일에 리보르노와의 경기에서 후반 82분에 교체 투입되면서 복귀전을 치렀다.
영원할 것만 같던 철인이 2013-14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다고 한다. 이때가 만 40세였다.[18]
그간 이 선수가 인테르에서 남긴 기록들은 이렇다.
- 인테르 역사상 최다 출장(858경기)
- 인테르 역사상 최다 수상(16 트로피)
- 인테르 역사상 밀란 더비 최다 출장(47 경기)
- 인테르 역사상 UEFA 챔피언스리그 최다 출장(105경기)
- 인테르 역사상 세리에A와 코파 이탈리아, UEFA대회에 최다 출장
- 세리에A 인테르 선수로 최다 연속 출장(137 경기)
- 세리에A 외국인 최다 출장(615 경기)
- 세리에A 외국인 최고령 출장(vs 라치오(2014.5.10), 40세 274일)
- UEFA 챔피언스 리그 최다 경기 주장 역임(82경기)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장(143경기)[19]
- 클럽 월드컵 최고령 득점(37세 127일)
2014년 5월 11일 리그 37라운드, SS 라치오 전이 사네티의 마지막 경기 출전이 되었다.
사네티의 은퇴 경기가 진행되던 도중 경기 후반에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떠나는 그를 만나고자 경기장에 팬이 난입을 했었는데 경기의 흐름이 끊어지는것으로 인해 선수의 입장으로써 불쾌할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남성팬을 위로해주면서 '자신이 직접' 경기장 바깥으로 에스코트해주었고 관중들은 기립박수로 이 행동을 칭송했다.# 번개맨 박종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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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은퇴를 기념해 특별 제작한 주장 완장. 깨알같이 작은 글자들 속에는 그동안 사네티와 인테르에서 함께 뛰었던 선수들 전원의 이름이 들어있다.
'''THE RECORD MAN, JAVIER ZANETTI 4 EVER'''

3. 국가대표


1994년 다니엘 파사레야 감독이 지휘하던 시절 아르헨티나 대표팀에 첫 발탁된 사네티는 11월 16일 칠레와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에 첫 출전한다. 이후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의 아르헨티나 올림픽 대표팀에 뽑혔지만 조 본프레레가 이끄는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결승에서 패배하여 은메달에 그쳤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16강 잉글랜드 상대로 동점골을 넣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8강에서 거스 히딩크의 네덜란드를 만나 탈락. 그리고 마르셀로 비엘사 시절인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파탄난 와중에 선수들이 사비를 들여 힘들게 출전한 대회였으나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게 되었다.
사네티는 2005년 컨페더레이션스컵 4강 멕시코전에서 A매치 100경기에 출전하였다. 하지만 2006년 독일 월드컵,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는 최종 명단에 들지 못하며 출전하지 못했다. 2006년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호세 페케르만후안 파블로 소린을 밀어주기 위해 소린과 사이가 나쁜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을 배척하느라 베론과 친한 사네티도 뽑지 않았던 것이며, 2010년엔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 시절 트레블의 주역이었던 에스테반 캄비아소도 함께 석연찮게 명단에서 제외된 것을 두고 마라도나가 나폴리 레전드라 안 뽑았단 설까지 나왔다. 어쨌건 2006년에는 박빙의 승부 끝에 승부차기에서 독일이 준결승에 진출한 것이고, 2010년의 경우는 전력 불균형과 부실한 수비진으로 결국 8강에서 독일에게 패했는데, 많은 팬들이 '''이때 사네티만 있었어도''' 라고 탄식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이후 후임으로 아르헨티나의 감독이 된 세르히오 바티스타는 부임하자마자 사네티를 다시 국가대표에 복귀시켰다. 바티스타가 부임한 이후 사네티는 꾸준히 대표팀 경기에 출전하고 있으며 2011년 코파 아메리카에도 선발되었다. 하지만 8강 우루과이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면서 아르헨티나의 탈락을 막지는 못했다.

4. 플레이 스타일


'''필립 람과 더불어 멀티 포지션의 대명사.'''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에 고령에도 피지컬이 아주 좋고, 스피드가 매우 빨라서 상대 공격수와의 몸싸움이나 속도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다. 그 수준은 리오넬 메시아르연 로번같은 초절정 드리블러들조차 쉽게 돌파하지 못할 정도. 전성기 카카의 치달을 '''스피드만으로''' 쫓아가서 태클해 내는 장면은 레전드.
공격력도 준수한 편인데, 레프트백으로 나오는 경우에는 주로 수비적인 플레이를 하지만, 라이트백으로 나오는 경우에는 역대 사이드백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힐 만한 단독 드리블 능력으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상대 좌측 수비진에 틈이 보인다 싶으면 슬금슬금 드리블을 하면서 올라가는데, 기술적으로 화려하진 않았지만 강철 같은 몸을 활용해서 공을 지키고 수비들을 튕겨내며 전진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그 덕에 나온 별명이 '''트랙터'''. 라이트백으로서는 단연코 아르헨티나 역사상 최고라고 할 만했다. 남미 최고가 못된 건 이 양반 때문에.. 90년대 밀라노 더비에서 볼 수 있었던 장면
한편, 그는 2000년대 중후반 소속팀 인테르가 오른쪽에 마이콩을 영입한 후 수비수로서 입지가 좁아질 수 있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실제 그 당시에 이미 3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으므로 주전에서 밀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모양새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중앙 미드필더로[20] 포지션을 바꾸어 출전했고 마이콩이 특유의 공격력을 마음껏 펼치려 오버래핑하면 사네티가 뒤를 받쳐 주는 형태로 플레이하면서 휼륭한 플레이를 펼쳤다. 이외에도 크리스티안 키부가 플레이에 기복이 심하고 부상도 자주 입었기 때문에 레프트백으로 경기에 출전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말년에는 다시 본포지션인 라이트백으로 돌아가기도.
무엇보다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꾸준함이다. 사네티의 플레이는 보지않고 나이만 본 사람들은 "세리에 A는 노땅들만 뛰니까 젊은 다른 선수들이 아니라 사네티 같은 늙은이가 나온다"고 폄하가기도 하지만, 사네티를 논할때 항상 나오는 말이 '''"몇 년이 지나도 거의 똑같다."'''라는 것이다.

5. 멘탈갑


이 사람을 설명할때 빼먹을 수 없는것이 바로 군자의 마음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성인, 주장으로서 모범을 보이면서 멘탈이 좋은 축구선수를 꼽으라고 하면, 아는 사람은 모두가 사네티를 떠올릴 정도로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인테르를 싫어하는 라이벌 팀의 축구 팬들도 하비에르 사네티는 좋아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인테르를 혐오하는 네드베드조차 인테르는 '''사네티 빼고''' 다 싫다는 말을 남겼다.
남성적인 카리스마로 이끌어가기보다는 친절하고 세심하게 팀원들을 돌보는 타입이라서, 말디니나 토티에 비해 존재감이 옅어 보이지만 1999년 주장 완장을 찬 이후 단 한번의 반발도 없이 인테르 선수라면 누구나 사네티를 잘 따르는 것에서 그 위대한 리더쉽이 드러난다. 이해가 안된다면 밑의 업적들을 보도록 하자.
  • 주말마다 팀원들을 직접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 자리까지 준비.

  • 선수 생활 대부분을 수비수로 뛰었음에도 레드 카드를 안 받은 시즌이 두 자릿수가 훌쩍 넘어감.

  • 병결이나 국대 차출을 제외하고 훈련장 불참 횟수 0회.

  • 인테르 라이벌 팬들이 뽑은 최고의 인기 선수 1위.

  • 매년 연봉의 30~40%를 기부. 아예 재단을 만들어서 기부하고 있다. 재단에 대해서는 후술.

  • 마라도나마스체라노에게 주장 완장을 주자 분노한 팬들이 마스체라노의 차를 박살냄. 그러자 사네티가 마스체라노에게 새 차를 사줌. 그리고 A매치 끝날 때마다 마스체라노에게 문자를 보내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 에이전트가 구단에 더 높은 주급을 요구하자, 에이전트를 직접 해고.

  • 팀에 새로 이적해 온 선수가 있으면 출신국적을 불문하고 직접 발 벗고 뛰면서 팀 적응을 도와줌.[21]
  • 발로텔리가 에투의 페널티킥을 차겠다고 떼를 쓰자 하프라인 뒤부터 뛰어와서 발로텔리의 손을 잡고 페널티 박스 밖으로 끌어냄. 발로텔리는 사네티한테 불평하기는 커녕 순순히 따라나왔다.
페르난도 가고 등 뜻이 맞는 선수들과 합심하여 자선 경기를 자주 여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수익은 모두 기부한다. 애처가로도 유명하여서 19살때 만난 부인과 금슬좋게 잘 살고 있다.
주제 무리뉴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마치고 곧바로 레알로 떠날 때 속이 넓기로 소문난 모라티 구단주도 너무 아쉬웠는지 불평을 했는데, 사네티는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다" 라고 아쉬워 하면서도 '''무리뉴의 결정을 존중해주자''' 라며 감독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언제는 지각한 동료들로부터 지각 벌금을 걷은 적이 있는데[22], 그 돈을 멕시코의 저항세력인 '''사파티스타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들과 친선경기까지 할 뻔했으나 성사되진 못했다고.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디스라서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23] 어쨌든 즐라탄의 말에 따르면 인테르 내에서는 용병 파벌이 있다고 한다. 워낙 인테르가 다국적 선수들의 집단이긴 하지만 세력이 큰 두 집단이 있는데 아르헨과 브라질이라고. 실제로 선수들 수도 얘네들이 제일 많고. 이들 때문에 다른 용병들이 불편해 한다. 그렇지만 어느 클럽이나 같은 국적 출신의 선수들이 모이면 파벌은 형성될 수 있으며 20년 가까이 되는 인테르 생활 동안 선수들과의 관계에서 미미한 마찰조차 언론에 누설되지 않은 사네티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어보인다. 그렇기에 큰 문제는 아니라고 봐도 무방하다.

6. 은퇴 이후


은퇴 후 곧바로 인테르 보드진에 합류하여, 인테르의 부회장으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또한 전설적인 풀백이자 구단주였던 자친토 파케티의 3번 이후 두 번째로 인테르의 영구 결번 선수가 되는 영예를 누렸다. 국내 보도가 잘못되어 부회장 선임 직후 지정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는데 실제로는 곧바로 지정된 것은 아니고 1년 뒤에 정식으로 영구결번이 지정되었다. 그 사이 1년간 아무도 4번을 달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24]
부회장이 된 이후에는 무난히 클럽을 잘 이끌고 있다. 토히르 회장은 이탈리아에 연고가 전혀 없고,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아서[25] 인테르의 일에만 전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부회장인 사네티가 클럽의 일상 업무들을 총괄해서 맡고 있는 상태. 중국으로부터의 인수 이후에도 토히르가 국내 업무 및 부친상 이후 업무 승계 과정을 거치느라 인테르에 거의 손을 못 대고 있고, 쑤닝 측 역시 장진둥 구단주가 쑤닝 본사의 경영으로 바쁘기 때문에 대신 파견한 92년생의 아들 스티븐 장이 이탈리아 업무를 보고 있는 상황이라 회장직의 사실상 공백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프런트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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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여름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장직에 지원했다. 그런데 디에고 마라도나가 그에게 나댄다고 저격을 했다.

7. 기타


정치적으로는 좌익 성향으로 알려져 있다. 상술했듯 사파티스타에 성금을 보내기도 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을 전해서 지지를 표하기도 했다.

우리는 세계화가 이뤄지지 않은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라 믿습니다. 또한 각자의 문화적 차이와 관습이 존중될 때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자기 뿌리를 지켜내고 이상을 위해 싸우는 당신들의 투쟁을 우리가 지지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26]

기부 재단도 갖고 있는데 자신의 별명을 딴 PUPI 재단이다. 본래는 2001년 아르헨티나의 금융위기 이후 빈곤한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돕기 위해 시작했으나 현재는 국가를 가리지 않고 활동한다. 돈만 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행사를 매번 빠짐 없이 하고 아르헨티나에 돌아갈 때면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축구를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27][28]
인테르에서 전 세계의 축구 유망주 중 형편이 어려운 선수들을 대상으로 학업과 축구를 병행할 수 있도록 돕는 '''인테르 캠퍼스'''를 모라티 회장 시절부터 운영 중인데, 사네티가 부회장으로 부임한 이후 많은 관심을 보이는 분야 중 하나가 이 인테르 캠퍼스라고 한다.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와도 친분이 깊다고 한다.[29] 둘이서 행사를 열기도 했다.
UEFA 챔피언스 리그/2015-16 시즌 16강 대진 추첨자로 등장해 인테르의 레전드답게 '''유벤투스바이에른 뮌헨과(...), AS 로마레알 마드리드(...)와 붙여 버렸다.''' 덤으로 '''아스날 FC의 상대로 FC 바르셀로나'''를 뽑으며 레바뮌을 혼자 다 뽑는 후덜덜함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 팀들은 전부 광탈했다.[30] 웹툰 작가 와싯이 이를 보고 그린 작품이 몇 개 있다.
사신 사네티
신계 브로커 사네티
또한 밀라노에서 식당도 운영한다. 에스테반 캄비아소와 함께 운영한다고. #
본인 '''인생의 최대 패배는 아드리아누를 구원해주지 못한 것'''이라고 자서전에 썼다. 아드리아누가 역대급 탕아로 몰락했던 계기는 바로 아드리아누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죽음이라고 판단했다.

난 아드리아누의 방에서 그가 전화기를 집어던지고 울부짖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런 소리가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절규였다. 난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그 날 이후, 모라티 구단주와 나는 아드리아누를 마치 친동생처럼 돌봤다. 그런 와중에도 아드리아누는 계속 축구를 하면서 골을 넣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세레머니를 했다. 그러나 그 전화를 받은 후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우리는 아드리아누를 우울증에서 끌어내지 못했다. 그건 어쩌면 내 커리어에 있어 최대의 패배일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인테르에서 같이 뛰었던 이탈리아 출신의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노 사네티와는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다. 성의 철자는 둘 다 '''Zanetti'''로 동일하지만 그것 외에 공통점은 없는 편.
6살 터울의 형 세르히오 역시 축구선수였다가 은퇴해 인테르 유소년 팀 코치를 하기도 했다. 참고로 하비에르 사네티는 오랜 동안 주장을 하고 늦은 나이에 은퇴해 맏이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은 집에서 막내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다니엘 린데만과 함께 나왔던 친구 중 하나가 하비에르 사네티와 많이 닮았다. 사네티의 금발벽안 버전이라고 봐도 될 정도.[31]
목소리가 맑고 깔끔하다. 인테르 응원가 Pazza Inter를 다른 선수들과 부를 때 파트도 제일 많고[32] 이탈리아 원로가수 미나의 명곡 Parole Parole의 피처링을 하는 등 가창력도 상당하다. 성우로 데뷔하기도 했다.
그의 인품과 명성을 알 수 있는 사례인데, 유벤투스와 인테르 간 깊은 골로 인해 인테르를 엄청나게 싫어하는 파벨 네드베드조차 사네티는 싫어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오.....

8. 기록



8.1. 대회 기록



8.2. 개인 수상


  • FIFA 100: 2004
  • 프레미오 인테르나치오날레 자친토 파케티: 2012
  • 골든풋: 2011
  • 팔로네 디 아르젠토: 2002
  • 인터 밀란 올해의 선수: 1995-96
  • 인터 밀란 명예의 전당: 2018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8
  • 글로브 사커 어워드 선수 경력 상: 2016
  • 아르헨티나 역대 베스트 XI: 2015
[1] 스페인어 발음: /xaˈβjeɾ saˈneti/. '자네티'는 오표기이고, '사네티'가 맞는 표기다. 스페인어권 국가에서는 외래어 또는 차용어로 여겨지는 이름도 스페인어식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Zanetti는 이탈리아어 이름이지만 스페인어 표기법을 적용한다.[2] 아르헨티나의 국적법은 국적 포기를 허용하지 않는다.[3] 오른쪽 중앙 미드필더[4]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는 22번을 달았으며, 이후로 4번과 8번을 돌아가며 달았다.[5] 클럽 영구 결번[6]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전 2위[7] 사실 베켄바워는 챔스 결승 직전 바이에른 뮌헨이 우승할 것이라는 뜻으로 비꼬는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주장은 만 36세의 나이에 팀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인테르의 45년 만의 챔스 우승과 함께 2009-10 시즌 트레블의 주역이 되었다. 당시 챔스 결승 상대는 다름 아닌 베켄바워가 현역 시절 뛰었던 바이에른 뮌헨.[8] 필드 플레이어 중 사네티보다 많은 출장을 기록한 선수는 1,135 경기를 뛴 차비 에르난데스와 1,139 경기를 뛴 호베르투 카를루스를 제외하면 없다. 여담으로 사네티는 전체 출장 기록에서는 8위인데, 사네티와 차비, 카를루스를 제외하면 10위권은 모조리 골키퍼들이다. 역대 1위는 피터 쉴튼의 1,390 경기.[9] 모라티가 구단주로 부임한 후 처음으로 영입한 선수다.[10] 이탈리아에서 z은 ㅊ에 가까운 발음이 되므로 이탈리아식으로 부른다면 차네티로 부르는 것이 맞다.[11] Zanetti란 성씨가 이탈리아의 성씨인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예를 들자면 인테르에서 같이 뛰었던 크리스티아노 자네티(Cristiano Zanetti)가 있고, 이탈리아의 유명 커피 브랜드 세가프레도(Segafredo Zanetti)도 있다. 사네티는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으로 이탈리아 여권을 인테르 입단시부터 보유하고 있었다. 사네티가 아니라 자네티라고 부를 수도 있다.[10] 다만 사네티 본인은 '사네티'라고 불러 주길 원한다고 한다. 그리고 자네티라고 부르는 팬들도 많지만 애칭으로도 '자주장'이 아닌 '사주장'으로 많이 불리니... 사실 생각해보면 독일계 성씨를 가졌다고 해서 하인츠라라고 부르지 않고 스페인어 발음으로 에인세라고 말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네티는 이탈리아계이지 이탈리아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영문 위키 백과의 발음 기호 역시 사네티에 가까운 쪽으로 표기하고 있다.[12] 칼초폴리 이후를 기준으로 하면 레알의 리그 우승 횟수보다 인테르의 우승 횟수가 더 많다(...).[13] 반면 이 때 레알 마드리드에 간 호나우두는 축구천재란 호칭에 걸맞지 않게 챔스 우승이 하나도 없다.[14] 물론 카사노가 심장 수술로 인해 풀타임을 소화하지 못 하는 체력임을 감안해도…[15] 세리에에선 10회 우승당 1개의 별이 달린다. 인테르는 18번 우승으로 별 하나.[16] 인터밀란 시절 그의 얼굴 변화 [17] 사미르 한다노비치후안 제수스, 안드레아 라노키아를 제외한 '''주전, 준주전 전원'''이 병상에 누워 있다.[18] 생일이 지나지 않았기에 한국 나이로는 42살. 40이 넘은 나이에 빅클럽에서 노익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말년 없이 그대로 은퇴한걸로 매우 유명한 라이언 긱스, 파올로 말디니, 프란체스코 토티, 에드빈 판데르사르와 비슷한 나이때 은퇴한것이다. [19] 다만 이 기록은 후에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경신한다.[20] 정확히는 4-3-1-2 포메이션의 오른쪽 미드필더.[21] 09/10시즌 새 얼굴들을 대거 영입한 인테르가 트레블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무리뉴의 카리스마와 함께 사네티의 역할도 컸다. 디에고 밀리토는 사네티의 세심함 덕에 적응이 쉬웠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또한 나가토모 유토도 인테르 이적 초기에 사네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인터뷰 했으며, 아드리아누가 각종 깽판과 우울증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던 시절엔 직접 막스웰과 함께 "아드리아누가 팀에 남아줬으면 좋겠다"라고 응원해주기도 하였다.[22] 참고로 옛날에 라울 곤살레스니콜라 아넬카가 지각했을때, 아넬카의 물품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물론 이건 아넬카가 잘못하긴 했지만, 라울이 아넬카를 왕따시키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 레알 마드리드 시절 괜히 라울이 라커룸의 제왕이라는 말이 나온게 아니다. 아드리아누마리오 발로텔리 같은 멘탈들이라도 사네티는 저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23] 외향적이고 거침없기로 유명하지만 언론 플레이를 즐기는 독설가이기도 하다. AC 밀란을 제외하고는 이적 후에는 꼭 한 마디씩 이전 팀에 대한 디스를 해 주곤 했다.[24] 이후 4번을 좋아하는 들이 팀에 왔지만 모두 사네티의 영구결번으로 다른 번호들을 달아야 했다. 이 중 한 명은 패기 좋게 사네티에게 4번을 달 수 있냐 물어봤지만 사네티의 무응답으로 14번을 달게 되었다. [25] 본인이 갖고 있는 회사도 있고, 미국에도 경영에 참여하는 스포츠 클럽들이 있어서 거기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26] 얼핏 보면 2018년 현재 반세계화 추세를 이끄는 것은 서구의 극우 세력이라, 저 글도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좌파들은 자본 중심의 세계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해 왔고 저 글 역시 그런 맥락인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자세한 것은 반세계화 참조. 사파티스타 역시 나프타 체결 후, 미국 자본의 멕시코 수탈을 우려하며 등장했다는 점에서 반세계화적 색채가 짙다.[27] 여기에 후배을 끌어들인 적도 있었다.[28] 여기에 알레산드로 플로렌치, '''리오넬 메시''' 등이 유니폼을 기부하기도 했다.[29] 안드레아 보첼리는 어렸을 때부터 인테르의 팬이었다고 한다. 2018년 인테르 훈련장에 와서 깜짝 라이브 공연을 해주기도 했다.[30] 그나마 유벤투스는 연장까지 갈 정도로 꽤 접전을 보였다. [31] 외모 뿐 아니라 철저하게 시간 관리를 하는 면과 친구들을 이끄는 면도 비슷하다. 사네티는 '''지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32] 2가지 버전이 있다. 2002년 버전에서는 사네티의 첫 파트 이후 파비오 칸나바로가 이어 부르며 알바로 레코바도 등장한다. 2008년 버전에서는 다음 파트를 마르코 마테라치가 부르며 사네티의 베프 에스테반 캄비아소를 비롯한 트레블 멤버들 모습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