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샤오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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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자기 이름을 간체자로 쓰는 것을 매우 싫어해서 馬曉春이라는 정체자만 죽도록 고집하기로 유명하다. 중국 국내대회에서 자기 자리에 간체자로 马晓春라고 명패가 있으면 정체자 프린트한 종이로 덮어 씌우기 전까지 앉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2017년 열린 서봉수와의 대국과, 2019년 열린 녜웨이핑컵에서는 명패가 간체자로 적혀 있음에도 그냥 바둑을 두는 것을 보면 이제는 딱히 간체자 정체자에 연연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
전성기에는 중국 명인전에서 '''13연속 우승'''을 기록할 정도로, 녜웨이핑 이후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바둑의 1인자였다.[2] 1995년에는 당시 둘뿐이던 국제기전 후지쯔배와 동양증권배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며 세계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다.[3][4] 그야말로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천재 기사였으나 이창호가 1996년부터 국제 기전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이창호에게 번번이 덜미를 잡히며 2인자가 되었다. 이창호와의 통산 상대 전적이 '''6승 27패.''' 실제로 마샤오춘은 이창호를 공식전 결승에서 만난 뒤 세계대회에서 단 한 번도 우승을 해보지 못했다.[6]
사실 당시 이창호에게 맥을 못 추던 것은 마샤오춘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기사였다.[7] 그러나 그 실력만큼 대단한 자존심 때문일까. 계속해서 이창호에게 패하자 서서히 부진해지더니 결국 은퇴의 길을 걸었다. 변화무쌍하며 화려한 요도(妖刀)로 대륙을 재패했던 기재가 천외천의 존재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사례라 하겠다.
2003년 1월 3일 병환을 이유로 명인전 첫 번째 대국을 기권하고 2003년 2월 14일 제2회 아시아 바둑 단체전 중국 대표팀 선발 대국에서 선발전 참가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는 등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각한 모습을 보였다. 모두가 탐을 내는 중국 대표팀 선발 자격을 왜 포기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마샤오춘은“저 무서운 용과 호랑이들을 보라. 나는 지금 저들과 도저히 대적할 힘이 없다.”라고 답했다. 언제나 당당하고 오만했던 그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자조였다.
기풍은 굉장히 감각이 좋은 실리파이며 타개에 능하였다. 전성기 시절 ‘마요도(馬妖刀)’라 불렸을 정도로 요사스러운 행마는 감히 따라올 자가 없었다. 당시 월간바둑에서는 그의 기풍에 대해 '상대방의 집을 갉아내는 스타일이다. 밝고 가볍다. 색으로 치면 흰색'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바둑TV 김성룡 기적의 묘수 100에 나온 이창호의 축머리 묘수 한 방.
이창호와의 상대 전적이 6승 27패나 된 계기가 있다. 1997년 동양증권배에서 이창호와 만났을 때 그에게 축머리의 묘수 한 방을 제대로 얻어맞고 패배했었데, 타격이 컸던지 이후로는 이창호에게 제대로 이기지 못했다.
탁월한 재능과는 별개로 입이 방정맞은 편이다. 그는 이창호를 맞수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는데, "바둑계의 천재는 나와 이세돌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작 그 이세돌은 실력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기사가 누구냐는 질문에 "(기자가 예시로 든 이창호·조훈현·마샤오춘을 두고, '좋은 기사'에서) '''마샤오춘은 빼 주세요'''"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는 이창호를 인정했었는지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사실 이창호 九단은 자신과 달리 바둑 외의 잡기에도 능한 마샤오춘 九단을 부러워했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꽤나 친분을 쌓게 되었다. 마샤오춘이 은퇴를 밝혔을 때 자신의 탓이 아닌가 하여 괴로워한 사람도 이창호였다.
은퇴 후에도 성깔은 어디 안 가는 듯, 2010년 3월 춘란배 16강전을 평한 블로그 글에서 대회 운영을 비판하며 '춘란배('''春'''兰杯)'를 '준란배('''蠢'''兰杯)'로 써서 어그로 탱킹 능력이 죽지 않았음을 한껏 과시했다.[8] 열받은 중국 바둑 팬들은 그의 이름을 馬曉春 대신 馬曉'''蠢'''으로 불렀다카더라. 덧붙여 이 사건에 대해 기자가 전화 인터뷰를 시도하자 “그것은 내 마음대로 쓴 것이니 상관하지 마시오.”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고 한다.(...)
한때 중국 바둑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는데, 바둑 리그 선수 선발 문제로 스승 녜웨이핑과 충돌하는 등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다가 기어이 감독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감독직은 같은 정상급 중국 바둑기사 위 빈이 물려받았다. 녜웨이핑이 중국 바둑계에서 가진 권위는 가히 절대적이기 때문에 중국기원과도 영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다만 여기를 보면 녜웨이핑과는 그래도 이후 화해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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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 개요
중국의 프로바둑기사. 1964년 8월 26일 생. 이창호의 전성기가 시작되기 전, 세계 1인자 자리를 잠시동안 차지했던 인물.
자기 이름을 간체자로 쓰는 것을 매우 싫어해서 馬曉春이라는 정체자만 죽도록 고집하기로 유명하다. 중국 국내대회에서 자기 자리에 간체자로 马晓春라고 명패가 있으면 정체자 프린트한 종이로 덮어 씌우기 전까지 앉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2017년 열린 서봉수와의 대국과, 2019년 열린 녜웨이핑컵에서는 명패가 간체자로 적혀 있음에도 그냥 바둑을 두는 것을 보면 이제는 딱히 간체자 정체자에 연연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
2. 설명
전성기에는 중국 명인전에서 '''13연속 우승'''을 기록할 정도로, 녜웨이핑 이후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바둑의 1인자였다.[2] 1995년에는 당시 둘뿐이던 국제기전 후지쯔배와 동양증권배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며 세계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다.[3][4] 그야말로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천재 기사였으나 이창호가 1996년부터 국제 기전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이창호에게 번번이 덜미를 잡히며 2인자가 되었다. 이창호와의 통산 상대 전적이 '''6승 27패.''' 실제로 마샤오춘은 이창호를 공식전 결승에서 만난 뒤 세계대회에서 단 한 번도 우승을 해보지 못했다.[6]
사실 당시 이창호에게 맥을 못 추던 것은 마샤오춘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기사였다.[7] 그러나 그 실력만큼 대단한 자존심 때문일까. 계속해서 이창호에게 패하자 서서히 부진해지더니 결국 은퇴의 길을 걸었다. 변화무쌍하며 화려한 요도(妖刀)로 대륙을 재패했던 기재가 천외천의 존재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사례라 하겠다.
2003년 1월 3일 병환을 이유로 명인전 첫 번째 대국을 기권하고 2003년 2월 14일 제2회 아시아 바둑 단체전 중국 대표팀 선발 대국에서 선발전 참가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는 등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각한 모습을 보였다. 모두가 탐을 내는 중국 대표팀 선발 자격을 왜 포기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마샤오춘은“저 무서운 용과 호랑이들을 보라. 나는 지금 저들과 도저히 대적할 힘이 없다.”라고 답했다. 언제나 당당하고 오만했던 그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자조였다.
기풍은 굉장히 감각이 좋은 실리파이며 타개에 능하였다. 전성기 시절 ‘마요도(馬妖刀)’라 불렸을 정도로 요사스러운 행마는 감히 따라올 자가 없었다. 당시 월간바둑에서는 그의 기풍에 대해 '상대방의 집을 갉아내는 스타일이다. 밝고 가볍다. 색으로 치면 흰색'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3. 기타
바둑TV 김성룡 기적의 묘수 100에 나온 이창호의 축머리 묘수 한 방.
이창호와의 상대 전적이 6승 27패나 된 계기가 있다. 1997년 동양증권배에서 이창호와 만났을 때 그에게 축머리의 묘수 한 방을 제대로 얻어맞고 패배했었데, 타격이 컸던지 이후로는 이창호에게 제대로 이기지 못했다.
탁월한 재능과는 별개로 입이 방정맞은 편이다. 그는 이창호를 맞수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는데, "바둑계의 천재는 나와 이세돌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작 그 이세돌은 실력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기사가 누구냐는 질문에 "(기자가 예시로 든 이창호·조훈현·마샤오춘을 두고, '좋은 기사'에서) '''마샤오춘은 빼 주세요'''"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는 이창호를 인정했었는지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중국에서 열린 국제 대회 후, 중국기원 측 사람과 한국기원 측 참석자들이 모여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마샤오춘은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높은 사람이 술을 권해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마치 아랫사람이 주는 걸 받듯이 했는데, 그 날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마샤오춘의 평소 태도였다. 피아노도 일류급으로 연주하며 바둑 실력도 뛰어난 그는 스스로를 천재라 자부하며 좀체 남을 존중하지 않았던 것. 그러다가 술이 돌고 돌아 이창호가 마샤오춘에게 술을 권하기 위해 술병을 들고 그에게 가게 되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태평스레 앉아 있던 마샤오춘이 이창호를 보고 그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술잔을 받았는데 이것을 본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마샤오춘이 이렇게 술잔을 받은 것은 이창호가 유일했다고. 분명 '''이창호보다 11살이나 위'''인데…….
사실 이창호 九단은 자신과 달리 바둑 외의 잡기에도 능한 마샤오춘 九단을 부러워했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꽤나 친분을 쌓게 되었다. 마샤오춘이 은퇴를 밝혔을 때 자신의 탓이 아닌가 하여 괴로워한 사람도 이창호였다.
은퇴 후에도 성깔은 어디 안 가는 듯, 2010년 3월 춘란배 16강전을 평한 블로그 글에서 대회 운영을 비판하며 '춘란배('''春'''兰杯)'를 '준란배('''蠢'''兰杯)'로 써서 어그로 탱킹 능력이 죽지 않았음을 한껏 과시했다.[8] 열받은 중국 바둑 팬들은 그의 이름을 馬曉春 대신 馬曉'''蠢'''으로 불렀다카더라. 덧붙여 이 사건에 대해 기자가 전화 인터뷰를 시도하자 “그것은 내 마음대로 쓴 것이니 상관하지 마시오.”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고 한다.(...)
한때 중국 바둑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는데, 바둑 리그 선수 선발 문제로 스승 녜웨이핑과 충돌하는 등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다가 기어이 감독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감독직은 같은 정상급 중국 바둑기사 위 빈이 물려받았다. 녜웨이핑이 중국 바둑계에서 가진 권위는 가히 절대적이기 때문에 중국기원과도 영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다만 여기를 보면 녜웨이핑과는 그래도 이후 화해한 듯 하다.
4.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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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병법 36계 - 중국 바둑기초 마샤오춘의 : 2003년 대한민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한국에 번역 출간된 마샤오춘 九단의 유일한 저서. 여기서 마샤오춘이 마이너스 계가법이라는 것을 창안하고 알려주는데, 흑집을 먼저 계산한 뒤에 백집을 따로 계산하는 것이 아닌, 백집 한 집마다 흑집을 하나씩 까 내려가는 방식이다. 이 마이너스 계가법으로 했을 시 +7(덤 7집반 기준)이면 백 승, +8 이상이면 흑 승이라는 논리. 아주 좋은 책인데 한국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안 알려져 있다.
[1] 실제로 국내 바둑잡지에서 저런 소리를 그대로 했었다.[2] 당시 녜웨이핑을 '대룡(大龍)', 마샤오춘을 '중룡(中龍)', 창하오를 '소룡(小龍)'으로 불렀다. 녜웨이핑, 마샤오춘, 창하오는 각각 52년생, 64년생, 76년생으로 용띠해 기사인것에서 따왔다. 한 마디로 중국 바둑계의 시대를 구분하는 기사라는 것. [3] 이창호는 당시 저 두 대회에서 초반에 탈락했다. 특히 동양증권배에서는 16강 문턱에서 완패를 당했는데, 그 완패를 안긴 주인공이 바로 마샤오춘의 스승 녜웨이핑이다.[4] 1994년에는 조훈현 九단이 두 개 대회를 휩쓸었고, 한 해 뒤인 1996년에는 이창호 九단이 두 개 대회를 휩쓴다. 그리고 이창호 九단의 시대가 시작된다.[5] 상대전적은 녜웨이핑 기준 2승 5패지만, 처음 두판은 녜웨이핑이 승리를 거두었다.[6] 정작 마샤오춘의 스승 녜웨이핑은 이창호를 상대로 만나기만 하면 강한 모습을 보여줘서 이와 비교되었다(...).[5][7] 당시 창 하오, 위 빈, 조치훈 같은 1류 프로 바둑 기사들도 이창호 九단과는 만나기만 하면 지는 수준이었다. 또 마샤오춘은 이창호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사들에게 상대 전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8] 蠢자는 '꾸물거릴 준'자로 '꾸물거리다, 멈칫거리다.' 등 뜻이 있지만 일상적으로는 그냥 멍청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 둘은 한국어로도 발음이 비슷하고, 중국어로는 성조만 다르다. 春은 chūn으로, 蠢은 chǔn으로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