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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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바둑기사.
녜웨이핑 九단의 제자로 녜웨이핑이 조훈현에게 응씨배에서 패한 뒤, "나에게는 무서운 제자가 있다"며 호언장담했는데, 그 제자가 바로 마샤오춘과 창하오이다. 하지만 둘의 연령대는 차이가 있는 편이라 세대는 약간 차이나는 편이었다. 녜웨이핑과 마샤오춘에 이어서 중국 바둑의 1인자 자리를 이어받았다는 평.
2. 상세
만 10살 때 프로에 입단했고 입단 3년 후에는 중국 랭킹 7위까지 올랐다. 그리고 20세 때인 1996년에는 제10회 중일 슈퍼 대항전에 중국 대표로 출전해서 5연승을 기록, 중국 대표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이듬해 제11회 중일 슈퍼 대항전[1] 에서는 일본 대표팀의 마지막 주자까지 격파하며 6연승을 기록, 또 다시 중국 대표팀에게 우승을 안겨주었다. 21세 때인 1997년에는 당시 중국 1인자 마샤오춘을 3대1로 누르고 첫 본격 타이틀인 천원 타이틀을 획득했다. 대륙 바둑의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순간이기도 했으며, 2년 뒤엔 九단으로 승단했다.
기풍은 단단한 포석에 이창호에 비견되는 두터움이 매력. 그러나 비슷한 기풍을 가진 이창호에 비해 수읽기에서 밀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으며, 후반부 승부수에 새가슴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많이 보이며 역전패를 당하는 상황도 많이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약점도 차차 나아지면서 이름값을 하는 성과를 만들어낸다.
유독 국제기전에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98년 여름 제11회 후지쓰배 때 창하오보다 한 살 위의 이창호에게 결승에서 무너지고 2001년 말, 창하오는 제6회 삼성화재배 준결승서 숙적 이창호를 잡고 결승에 올라 조훈현과 결승전에서 대결하게 되지만 이번에도 1대2 역전패를 당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2국의 반집패가 특히 뼈아팠다. 중국 팬들의 창하오를 향한 질타의 소리가 높아져 갔다. 그러던 중 2002년 토요타덴소배가 새로 창설됐다. 창하오는 이세돌을 2회전에서 만나 탈락시켰고 이듬해 초로 이어진 대회에서 결승까지 올랐다. 결승에서 창하오를 막아선 기사는 또 이창호였다. 백을 쥔 창하오가 꾸준히 리드해가자 중국 검토진들은 축제 무드로 들떴지만 바둑은 기어이 흑 불계승으로 끝났다. 창하오는 2004년에 접어들면서 다시 세계 정상권 노크에 힘을 낸다. 송태곤, 최철한을 제물 삼아 제2회 토요타덴소배에서, 그리고 유창혁, 쿵제, 송태곤을 꺾고 제5회 응씨배에서 잇달아 결승 고지를 밟은 것이다.
그 해 12월 최철한과의 응씨배 결승 두 판이 먼저 서울서 시작됐다. 1승 1패를 기록한 상황에서 일단 휴전. 그리고 곧바로 토요타덴소배 결승으로 이어져 이세돌과 한 판씩 주고받았다. 최종국은 그야 말로 필승지세였건만, 최종 승자는 이번에도 창하오가 아니었다. 세계 기전 결승에 여섯 번 모두 패한 실망감으로 중국 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인터넷은 창하오 성토장이 됐다.[2]
창하오는 이렇게 이창호에게 3번, 조훈현에게 2번, 그리고 이세돌에게 1번씩 세계대회에서 결승전 6전 6패를 당했다. 당시 나이는 이미 29세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제5회 응씨배 결승이 베이징서 재개됐다. 토요타덴소배를 패배한 후유증으로 창하오는 7번째 준우승에 그치고 한국은 응씨배 석권 전통을 이어갈 것이란 예상이 많았지만 결과는 창하오의 우승이었다. 3대1의 스코어로 마침내 어른 키만한 응씨배 우승 트로피가 창하오의 가슴에 안겼다. [3] 그 후 2007년 삼성화재배, 2009년 춘란배를 우승하며 준우승 전문가라는 이미지를 불식시켰다. 특히 이창호에게는 철저한 약자 신세였으나 세계 대회 결승에서 연거푸 이창호를 제압하며 천적이라는 꼬리표를 뗐다.[4] 하지만 이후로는 구리와 이세돌에 밀려 지금은 정상권에서 많이 내려온 상태.
흔히들 중국 기사하면 건방지고 오만한 이미지를 떠올리곤 하지만,[5] 창하오는 이와 정반대로 예의바르고 겸손해서 기사들로부터 호평이 자자하다고 한다. 본인이 승리한 후 인터뷰에도 "운이 좋다"라는 수식어를 항상 붙이며 겸손을 드러내기도. 특히 라이벌이라고도 평가받던 이창호에게도 존경한다는 등 상당한 예의를 표하며 둘의 친분도 꽤 깊은 사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창호와의 대결 이후에 회식 자리에서 추가 복기를 요청하며 정중히 무릎을 꿇고서 이창호 옆에서 복기하는 모습이 찍히기도 했다. 중국에서의 이창호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장면이었지만 창하오의 인품도 알 수 있는 장면.
[1] 제11회 대회를 끝으로 중일 슈퍼 대항전은 폐지되었다.[2] 스승 녜웨이핑은 “그토록 유리했던 바둑을 패했다니 믿을 수 없다”며 탄식했다. 사형인 마샤오춘은 백의 침투 부대가 살아간 순간 즉각 바둑을 보고 있던 컴퓨터를 꺼 버렸다고...[3] 최철한 九단은 다음 대회에서 이창호를 꺾고 우승컵을 가져간다.[4] 이는 이창호의 기풍 변화에서 기인하는 점이 큰데, 이창호의 파훼법이 알려지며 2005년 이래 정상권에서 밀려나면서 기풍이 제법 호전적으로 바뀌었기 때문. 반해 창하오는 자신만의 기풍을 간직하며 달라진 기풍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5] 녜웨이핑과 마샤오춘은 인터뷰 때마다 자신을 천재라고 여기며 다른 기사를 자극하는 말을 숱하게 남겨왔으며, 이는 현재 에이스라 불리는 커제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