녜웨이핑

 


'''녜웨이핑
聶衛平(섭위평) / Nie Weiping
'''
[image]
'''직업'''
바둑기사
''' 소속'''
중국기원
''' 생년월일'''
1952년 8월 17일(71세)
''' 국적'''
[image] 중화인민공화국
''' 출신지'''
허베이성 선저우
'''단급'''
九단
1. 개요
2. 상세


1. 개요


중국의 프로 바둑 기사. 1952년생으로 조훈현 九단과 1살 차이.
일본이 바둑계를 점령하던 80년대에 혜성같이 등장하여 중국내 최강자로 군림하며 중국바둑을 국제무대로 견인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한국의 조훈현과 비슷한 위상.
이름의 한자 표기인 聶衛平을 한국식 독음으로 읽은 '섭위평'으로도 표기되는 경우도 많았다.

2. 상세


기풍은 두텁고 중후하다. 한마디로 대륙적인 기풍.[1] '헤이룽장 성반달곰', '철의 수문장'이라는 별칭이 그 기풍을 말해준다.
수학자인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 동생과 함께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바둑 실력이 늘려면 초창기에 맞수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정설인데, 녜웨이핑에게는 동생이 맞수였던 것. 동생이 섭위평보다 기재는 뛰어났지만 끈기가 부족해서 나중에는 격차가 벌어졌고, 결국 동생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중국에서 손꼽히는 청년 기재가 되어 진조덕 등의 중국 노국수들과 바둑을 연구하였으나 문화대혁명 이후 '바둑은 반동들이나 하는 비생산적 놀이'라는 인식 때문에 헤이룽장 성에 있는 돼지 도살장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녜웨이핑의 바둑 인생 1부가 동생과의 맞대결이었다면 2부는 이 돼지 도살장에서의 생활. 훗날 중국의 1인자가 된 뒤 녜웨이핑 자신도 "헤이룽장 성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당시 일화를 소개하자면, 착실한 생활로 모범수로 자리 잡았던 녜웨이핑에게 동생이 일본의 바둑 사절단이 베이징을 방문한다는 소문을 전하자마자 바로 탈영, 베이징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적도 있다. 그러나 이는 헛소문이었고, 복귀 후 모범수에서 다시 돼지 당번 강등 크리. 그러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바둑에 대한 중국 정부의 인식이 달라져 다시 바둑을 두게 되었다.
여러 차례 열린 중일 슈퍼 대항전에서 중국 최후의 주자로 나와 남아 있는 일본 기사들을 모두 무찔러 '철의 수문장'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중국 정부로부터 명예기성 타이틀까지 수여받았다. 당시가 녜웨이핑의 전성기로, 연승식 11연승을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이창호 九단이 나타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제 1회(1984년 ~ 1985년)에는 당시 일본의 최강급 기사 셋이[2] 남아 "우리가 지면 삭발을 하고 일본에 돌아가겠다"고 강수를 두었으나, "'''세 분이 삭발하신 모습을 꼭 보고 싶다.'''"라고 대꾸한 다음 모두 물리쳐서 삭발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날은 아직까지도 일본 바둑계에서는 자신들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흑역사로 회자되고 있다. 다만, 이때 녜웨이핑은 실력만큼이나 자만심도 컸다. 중국 국내 기전 결승전 당시 중간 봉수 시간에 기자가 '현재의 바둑 상황'을 묻자, "지금부터 내가 백으로 두면 백이 유리하고, 내가 흑으로 두면 흑이 유리하다"고 부심을 부리다가 결국 중국의 신예들에게 밀려 어느 날 문득 무관으로 전락하였다.
제1회 응씨배에서도 몸이 좋지 않아 산소호흡기를 달아 가면서[3] 조훈현을 2-1까지 몰아붙이는 데 성공했으나, 4경기의 드라마틱한 반집차 패배 후 5국을 허무하게 내주며 2-3으로 역전패. 이때의 충격이 컸던지, 아내 쿵샹밍과도 이혼하게 된다.
그 이후로도 한동안은 세계 최강급 기량을 유지했지만, 세계대회 타이틀을 따는 일은 없었다. 그 이후 세계대회 최고성적이라면 1995년동양증권배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정도가 고작이었다.[4] 국내국제 가리지않고 우승맛을 톡톡히보던 조훈현과는 대조적. 그래도 중국 기원 내에서는 그야말로 절대권력자여서 그의 한마디에 중국 기원이 좌지우지되었을만큼, 현대 중국 바둑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하다 할 것이다. 중국 어린이들의 장래희망 조사에서 1위는 언제나 축구선수, 2위는 프로 바둑 기사라고 하는데, 이것도 모두 녜웨이핑의 대활약 덕분이다. 현대 프로 바둑의 기틀을 잡은 것이 일본 기원이며 1980년대만 하더라도 세계 최강은 일본, 그보다 반점 정도 약한 것이 중국이었고, 한국은 듣보잡 취급이었음을 생각하면 일본 최강자였던 고바야시, 후지사와, 가토 등을 모두 때려잡은 녜웨이핑의 활약은 한국으로 치면 조훈현이 응씨배를 재패한 것에 비견할 만하다.
조훈현에게 밀린 이후, "나에게는 무서운 제자가 있다." 하며 호언장담했는데 그 제자는 바로 창하오마샤오춘. 그들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대단한 기사들이긴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조훈현에게는 '''그보다도 더 무서운 제자'''가 있었을 줄. 거기다 창하오는 그 제자도 아닌 유창혁의 경쟁자 정도로 평가받기도 했고.
여담으로, 90년대 초반 이후 세계 바둑계에서 독보적인 1인자로 군림했던 이창호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1995년 동양증권배[5]에서 당시에도 최강이던 이창호를 16강 문턱에서 만나 그야말로 개관광 시켜줬다. 그리고 녜웨이핑은 이 대회 준우승을 차지했는데 우승자는 다름아닌 자신의 제자 마샤오춘.[6] 한때 바둑 잡지에서 이창호에게 유난히 강했던 기사 중 한 명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바둑기사 중에서도 손에꼽히는 골초라는 점도 특이사항. 떠도는 사진을 봐도 바둑돌마냥 담배를 쥐는 모습이 많이 포착되곤하며, 대국중에서도 심심치않게 담배를 문다고 전해진다.(물론 상대기사에게 양해는 구하긴한다) 보통 바둑기사들은 오랜 시간동안 집중력을 요구하기에 체력관리를 위해 금연하는 모습과는 차이를 보인다.[7] 이 외에도 축구를 상당히 좋아하여 중국 슈퍼 리그 중계방송을 자주 관람한다고도 전해진다.
시진핑과도 친분관계가 깊다. 그것도 학창시절부터 절친했는데\ 아무래도 같이 반동의 아들로 낙인찍혀서 고생을 하던 비참한 시절이고 취미도 비슷하다보니 친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시진핑이 공산당원이 되어서 출세를 거듭하게 되었을때도 주말에는 같이 축구경기를 보러갔을 정도로 같이 취미생활을 즐겼다. 다만 시진핑이 주석이 된 이후로는 잘 만나지는 못한다고.

[1] 이창호 또한 두텁게 두는 편이라서 자신의 기풍하고 비슷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2] 그 3명이 바로 고바야시 고이치, 후지사와 히데유키, 가토 마사오 당시, 고바야시 고이치는 조치훈에게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당시로서는 일본 최강자였다.[3] 원래 심장 질환이 있어 산소호흡기를 자주 썼다고 [4] 이때 우승자는 하필 자신의 제자 마샤오춘이었다. 여담으로 이 대회에서 이창호는 녜웨이핑에게 완패를 당해 충격을 주었다.[5] 한국이 IMF를 겪는 바람에 그때 대회 자체가 폐지되었다.[6] 아이러니하게도 제자 마샤오춘은 이창호에게 상대전적에서 상당히 밀림으로서 1인자의 지위를 내주기 십상이었다.[7] 사실 조훈현도 한때는 둘째가면 서러울 골초라고 전해졌으나, 이창호에게 점점 밀려나는 시점부터 금연에 착수, 어느정도 재기하는데 성공하긴했다. 그리고 이세돌도 간간이 담배쥐는 모습을 보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