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찰식 점화법
1. 개요
고대로부터 인류가 사용해온 불 붙이는 방법. 두 물체 사이에 일어나는 마찰의 운동에너지를 열에너지로 변환하고, 이 열에너지로 물체의 온도를 발화점까지 끌어올리는 원리다.[1] 이때 사용하는 나무는 습기 하나 없이 바짝 마른 것이어야 한다. 습기가 열에너지를 흡수하고 기화해서 발화점까지 온도가 오르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마찰식 점화법은 '''상당한 요령'''을 필요로 하므로, 어지간하면 파이어스틸이나 성냥, 혹은 라이터 하나쯤은 구비하고 다니는 게 좋다. 아무리 준비가 잘 되어 있어도 불 붙는 데까지 수십 분은 기본으로 잡아먹고 몸도 그만큼 혹사당한다. 진짜 야생에서의 서바이벌을 목적으로 할 때에만 시도할 것.
2. 핸드 드릴
Hand drill. 이 바닥의 원조는 핸드 드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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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판에 가늘고 긴 막대를 대고 두 손바닥으로 비비며 아래로 압력을 가해서, 그 마찰로 불씨(embers)를 만들어낸다. 아래로 누르기 때문에 비비다보면 손이 막대 하단으로 내려가는데, 다시 막대 위로 올라가서 비비기를 반복. 빡세게 비비다보면 언젠가는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는, 잘 하면 불을 붙일 수 있는 톱밥 불씨가 생기는데 이걸 좀 더 큰 불쏘시개로 옮겨서 훅훅 불어주며 불을 붙인다.
이 방식은 가장 원시적이고 간단하지만 그만큼 힘이 많이 든다. 익숙하지 않다면 하루 종일 달라붙어도 나무만 까맣게 닳을 뿐 불을 못 붙인다. 마르고 건조한 기후, 바닥판과 나무가 부드럽고 불이 잘 붙는 재질이라면 능숙한 사람은 몇십 분 이내에 성공시키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불 붙이는 데 몇 시간씩 걸리고, 성공하든 실패하든 손바닥에 물집 잡힘은 예사다. 사실상 성공시킬 수 있으면 전문가라고 봐도 되고, 비숙련자는 성공하기 전에 포기하는 사람이 절대다수. 베어 그릴스가 말했듯, 이거 하다 코에 맺힌 땀이 드릴 주변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요령은 손가락 쪽이 아니라 손바닥 내에서 비비는 것이고, 축 막대가 앞뒤로 흔들거리지 않고 수직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나무 선택이 엄청나게 중요한데, 다른 방식은 좀 단단한 나무를 써도 상관없지만 압력이 약한 핸드 드릴에서 단단한 나무를 썼다간 불붙이기는커녕 손바닥에 물집만 잡힌다. 멀린(현삼과玄蔘科 식물), 유카, 부들, 루트우드(목질 덩굴의 일종) 같은 연한 나무를 사용해야 한다. 보우드릴에 비해 가늘고 긴 것이 적합하다.
핸드 드릴의 변형으로 핸드 드릴 축 막대 꼭대기에 두가닥 끈을 달아서 그 끈을 엄지에 묶는 방법이 있다. 이러면 손을 다시 위로 올릴 필요 없이 정자세로 꾸준한 하방 압력을 가하며 손을 비빌 수 있다.
3. 활비비(보우 드릴)
Bow dr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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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 드릴의 난이도를 낮추기 위해 발전시킨 방식. 활을 이용해서 비비는 방식이다. 적어도 기원전 5천 년 무렵에 사용한 유물이 있을 정도. 순우리말로는 활비비라고 한다.(참조)
부품은 아래쪽 불판(hearth board), 마찰을 가하는 축(spindle), 축을 눌러주기 위한 누름돌(bearing block), 활(bow)로 구성된다. 축에 활줄을 감아서, 누름돌로 축을 수직으로 세워 누른 채로 활을 앞뒤로 움직여 켜주면 축이 회전하고, 그 마찰력으로 불판에 탄화 톱밥을 만들어낸다. 축은 엄지 굵기 정도로 비교적 두꺼운 것을 쓰는 편이다.
나무 선택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선택의 폭이 있다. 유카, 사시나무, 백삼목, 참피나무, 버드나무, 벅아이(칠엽수류) 같은 나무가 많이 쓰인다. 개암나무와 포플라로 각각 축과 불판을 만들어도 성공적이라고 한다. 누름돌은 나무로 만들어도 상관없지만, 돌이나 뼈로 만든 것도 흔하다. 조개껍질이나 병뚜껑을 사용해도 좋다. 누름돌은 마찰하지 말라고 기름이나 동물 지방을 살짝 발라주기도 한다.
과거에 2007년 무한도전 무인도 특집에서 선보인 적이 있는데, 렛츠고 시간탐험대에서도 해당 점화법을 시연하려다 실패했다. #. 하술하겠지만 대부분 예능에서 간과하는 것이 홈(notch)이다. 홈으로 산소공급이 되어 불이 붙는데 홈이 없으니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실패한다.
4. 펌프 드릴
Pump dr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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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가 조금 복잡해진다. 마찰용 축이 있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축을 중앙에 관통시키는 누름막대가 필요하고, 누름막대는 축 상단에 끈으로 묶는다. 그리고 축 하단에는 둥근 접시형 플라이휠을 달아준다. 축을 감아서 끈을 축에 감아준 다음, 누름 막대를 아래로 눌렀다가 손에 힘을 빼면 플라이휠의 운동에너지로 누름막대가 다시 거슬러 올라가며 끈이 되감겨, 다시 눌러줄 준비가 이루어진다. 다시 눌렀다가 되감고... 를 반복하며 마찰열로 탄화 톱밥을 만들어낸다.
플라이휠의 구조를 이용해서 회전마찰 시퀀스를 반자동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2] 구조 자체야 간단하지만 드릴을 제대로 만들려면 어느 정도 숙련되어야 한다. 일단 만들어놓으면 굉장히 편하게 드릴질을 할 수 있고, 조금만 익숙해지면 단 몇 분 만에 불을 지필 수 있다.[3]
일본 신사에서는 종교적 목적으로 신령 앞에서 깨끗한 불을 얻고자 미히키리구(御火鑚具)라는 도구로 나무와 나무막대를 비벼 불을 피우는데, 미히키리구가 일본식 펌프 드릴이다.
미히키리구로 혼자 불을 피우는 일본 신토의 신직
5. 파이어 소우
Fire s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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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 소우는 두 막대를 대고 톱질하듯 마찰시키는 방식이다.
흔히 대나무가 있는 지역에서 많이 하는 방식인데, 불판, 불쏘시개까지 대나무 혼자 다 해낼 수 있다. 부시크래프트 /서바이벌계에서는 대나무가 만능 구조재로 사용되니 그야말로 만능목.
불판 역할을 할 아래쪽 대나무(반원형으로 쪼갠 것)에 가로로 아래쪽이 뚫릴 정도로 홈을 판다. 여기에 대나무의 잘 마른 속살을 얇게 깎거나 긁어내 만든 불쏘시개를, 대나무 쪼가리로 꾹 누질러 고정시킨다. 그리고 위쪽에서 홈에 대고 역시 대나무 반 쪼갠 것의 모서리로 신나게 톱질하면, 탄화 톱밥이 불쏘시개에 쌓인다.[4]
변종으로, 불판 역할을 할 대나무를 위에 두 손으로 들고, 막대 역할을 하는 대나무는 발이나 배로 눌러 고정시킨 다음, 양손으로 불판을 잡고 엄지로 뒷면의 불쏘시개와 고정 나무를 누른 채로 톱질할 수도 있다. 사실 이 방식이 메이저.
6. 파이어 플로우
Fire plough/p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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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작지에 쟁기질로 긴 이랑을 만들어놓듯, 부드러운 나무판에 긴 홈을 파놓고 여기에 단단한 막대로 홈을 앞뒤로 마구 밀어서, 마찰열로 탄화 톱밥을 만들어내는 방식. 동남아시아와 폴리네시아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러빙스틱이라고도 한다. 핸드 드릴만큼 힘은 들지만, 손바닥에 물집 잡히는 일은 없기에 부상의 위험이 한결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인공이 이 방식으로 불을 피우려다 손에 쥔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부상을 입는 장면이 있으니만큼 아주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고 하겠다...[5]
핸드 드릴이건 보우드릴이건 파이어소우건 간에 숯가루를 모으고 산소를 공급할 홈(notch)이 정말 중요한데, 파이어플로우 홈을 만들기 난감한 경우가 많고, 힘이 부족하여 열을 내기가 힘들다. 에너지 소모가 크고 열손실이 많아 비효율적이지만, 힘과 기술이 갖춰지면 의외로 아주 빨리 불이 붙는다. 막대기를 판과 닿는 부분을 앏게 그리고 사선으로 깍아 조각도 처럼 만들어 날 부분을 넓게 닿게 하면 쉽다. 가늘고 긴 나무가 필요하지않아 나무 모양에 구애를 덜 받고 홈을 따로 파지않아 팔 도구도 필요없다.
7. 파이어 롤
rudiger roll이라고도 한다. 마른 풀에서 섬유만 분리해 뭉치거나 휴지, 솜에 재를 넣고 단단히 만 다음 나무판이나 돌판 사이에 놓고 비빈다. 재료만 갖춰진다면 쉽고 간단하며 빠른 방법이다. 초보자에게 추천하는 한 가지 방법. 다만 자연상태에서 휴지, 솜을 구하기 어렵고 크기가 적당한 나무판을 만들기 힘들며, 강가가 아니라면 평평한 돌판을 구하기 어렵다. 재료가 다양하고 구하기 힘든 대신 구할 수 있다면 시도해볼 방법이다. 핸드 드릴에서 갈색재만 나오고 실패했다면 그 재를 이용해 시도해볼 수 있다. 일반적인 방법에 비해 인지도가 적다. 연기 발생 확인이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8. 불판 제작 요령
활비비 항목의 사진을 잘 보면, 마찰하는 구멍 옆에 홈(notch)이 있다. 불판의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 홈이다. 홈없이 드릴질하면 탄화 톱밥이 주변으로 흩어지고, 그래서 쌓인 채로 온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식어버린다.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판에 칼로 원추형 구멍을 낸 다음, 불타는 드릴질로 구멍과 축의 접점을 마찰시켜 좀 탄화시킨 다음에, 톱이나 칼로 불판 구멍의 일부를 깎아 홈을 만든다. 이후 다시 드릴질 하면 탄화 톱밥이 홈에 쌓인다. 불판 아래에 불쏘시개를 깔아놓고 드릴질을 해주면 탄화 톱밥을 불쏘시개에 바로 올릴 수 있으므로 금상첨화.
[1] 건기 사바나나 캘리포니아 산지 등에서 자연 발화가 일어나는 원인도 이와 같다. 바싹 마른 초목이 바람을 받아 마찰해서 발화점 이상의 온도가 되는 것이다.[2] 누름막대를 나무 판자에 구멍을 뚫어서 사용하면 누름막대의 마찰에 의한 에너지 손실이 줄어서 플라이휠 없이 가능하다. 사막 지역처럼 플라이휠 만들 점토를 구하기 힘든 곳에서 돌에 구멍 뚫을 수고가 덜어지지만, 그런 곳에서는 태울 장작도 구하기 힘들어 미묘하나, 장작이 많거나 한번 쓰고 드릴도 장작으로 쓸 경우 쓸만하다.[3] 혹자는 직접 사용해 봤는데 2~3분만 빡세게 해도 충분히 불이 붙을 정도로 뜨거워진다고 한다.[4] 채널A의 '기발한 세계여행 바로지금' 이란 프로그램에서 무인도에서의 72시간에 당첨되어 태평양의 무인도에 간 마르코는 바로 전의 스튜디오 녹화에서 손호영이 필리핀 대나무마을에 방문한 촬영분 중 원주민들이 이 방식으로 불을 피우는 모습을 눈여겨 봐둬서 무인도에서 제작진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나무를 주워 비교적 손쉽게 불을 피웠다. 게다가 촬영 막바지엔 사흘 동안 혼자 놀다 지쳐서 짜증이 극에 달해 식수를 부족하게 가져오고 응급상황이 발생해도 외부와 연락 방법도 없었다는 PD를 개념 없다며 구박했다.[5] 병만족이 파이어스틸 없이 불 피우겠다며 무려 8시간 동안 개고생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