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신토)

 



1. 개요
2. 현황
2.1. 등급
3. 참배 과정
4. 일제강점기 조선의 국가신토 신사 참배
4.1. 조선인의 참배법 차별이 있었나?
4.2. 조선에서의 인식
5. 대중매체
6. 기타
7. 유명한 신사
7.1. 성지순례로 유명한 신사
7.2. 가공의 신사
8. 관련 문서


1. 개요


일본의 민속신앙인 신토(神道)의 을 모시는 종교시설. 공식적으로 집계된 일본 내 신사는 약 8만여 곳에 이르지만, 알려지지 않은 작은 신사들까지 포함하면 30만여 곳이 족히 넘어간다고 추정한다.[1]
일본이라는 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종교시설로 한국인 일부도 일본에 관광을 오면 지역마다 꼭 들르는 장소로 유명한 곳들이다.

2. 현황


종교시설이나 신을 기리기 위한 곳이라 포교활동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 지배층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 정치와 관련해서는 포교가 있었다. 예컨대 일제는 식민지에 신토를 포교(?)하고자 식민지에 신사를 세웠다. 현재 서울 남산 케이블카 자리는 조선신궁으로 올라가는 도리이 계단이 있었고, 부산의 부산타워가 있는 용두산공원도 원래 용두산신사가 있었다. 일본에서 신사는 한국으로 치면 절이나 교회만큼이나 흔한 종교시설로, 곳곳의 작은 무인 신사나 사당, 부속시설들까지 합치면 그 많다는 한국의 교회 밀도 이상으로 굉장히 흔하게 널린 건물이다. 대신 규모가 작거나 주택가 동네 공원과 일체화된 경우도 있고, 그 지역의 역사와 관계가 밀접한 신사도 많아서 일본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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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신사는 군마현 오타시에 있는 세라다 도조궁(世良田東照宮). 에도 시대 초기인 1644년에 현 위치에 건립된 신사로 일본 3대 도조궁으로 꼽힌다. 제신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신사는 대도시 도심에서는 민가 사이에 있기도 하지만 보통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짓고, 입구에는 신사의 대문이라 할 수 있는 도리이(鳥居)를 세운다. 한국의 홍살문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한국의 홍살문과 일본의 도리이가 상호영향을 줬다는 주장이 있다.
번듯한 신사는 교외 외곽에 있지만 주택가나 시가지에 자리잡은 신사도 의외로 많다. 이런 신사는 땅값 문제인지 그리 규모가 크지는 않다. 문이 없다시피 한 열린 구조가 특징. 대부분 24시간 무료개방이다.[2] 밤에 가면 의외로 무섭다.[3] 신사에 놀이기구를 설치하고, 지역유지와 지역단체의 관계자들이 관리하는 곳도 많다. 그런 이유로 어린이들이 낮에 놀이터만큼이나 많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따금 우리나라 의 삼성각이나 산신각처럼 절에 신사가 딸렸거나, 반대로 신사에 절이 딸린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빈도는 우리나라와 달리 매우 낮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찰에 있는 삼성각 등은 크기가 작긴 해도 제대로 된 건물 1채는 되는 반면, 일본에서 이런 부속시설은 감실[4]이나 큰 석등만 한 크기일 때가 많다. 단, 큰 신사 안에 다른 신사가 딸리는 경우 제법 구색을 갖추기도 한다.
고대 일본에서 신사는 지금처럼 하나의 독립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 아니었다. 숲이나 동굴, 바위 등 특정장소를 신성한 장소로 지정하고, 의식을 거행할 때 신이 그곳으로 찾아오도록 하는 식이었다.[5] 그러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처럼 신사 건물을 짓고 신을 모신 뒤 사람이 찾아오는 식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에 들어온 불교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불교에서 사찰을 세워 불상을 봉안하고 신자들이 찾아오는 것에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신사 건축양식은 보통 일본 전통건축양식과 많이 달라서, 일본 전통건축을 전혀 모르는 한국인이라도 조금만 보면 다른 (불교 사찰 같은) 전통건물과 신사를 쉽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정형화되었다. 현대의 신사 건축은 에도 시대 유행하던 신사건축양식인 복고 양식이 점차 고착화된 것이다. 즉 '고대의 건축은 이렇게 짓지 않았을까.' 하고 에도시대에 추측하면서 정립된 모습이다. 이세신궁 문서 참조.
신사의 관리와 의식진행을 맡는 사람을 신쇼쿠(神職 신직) 또는 간누시(神主 신주)라고 부른다. 한 신사에 신쇼쿠가 여럿인 경우도 있는데, 그 중 최고 책임자를 구지(宮司 궁사)라 하고 그 아래로 네기(禰宜 예의)[6], 곤네기(権禰宜 권녜의) 등 직책을 둠이 일반적이다. 물론 이는 신사에 따라 다르다. 구지 이외의 다른 신쇼쿠가 없는 신사도 있고, 구지 아래에 곤구지(権宮司 권궁사)라는 직책을 두는 신사도 있다. 신쇼쿠는 대개 남자지만 여자 신쇼쿠도 일부 존재하며, 이들은 무녀와 다르다. 신쇼쿠가 되려면 대학교에 진학하여 신도를 배운 뒤 시험을 보는 방법이 가장 흔하다.[7]
신을 모시는 곳이나, 일본 신화에 내려오는 신 외에 지역고유의 토속신, 국가나 지역에 크게 이바지한 위인을 모시거나 심지어 악령을 위안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지기도 한다.
신사는 정치적 목적으로 세워지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가 있다. 이 신사에서는 메이지 유신 지사들이나 군인 등, 근대 일본제국에 기여한 인물들을 모시고 있어 국립묘지(한국으로 따지면 현충원) 같은 성격이 강한데, 이 중에는 유족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한국인이나 대만인, 류큐인 전사자들도 있어서[8] 거센 항의를 받는다. 게다가 태평양 전쟁의 전범들도 포함되어 있어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때문에 A급 전범들을 모두 분사하라는 목소리가 크다.
기독교 계열 종교 중 가톨릭에서는 한일양국(조선/에도) 선교과정에서의 충돌을 겪은 경험 때문에 종교적 의미가 아닌 조상공경 차원이어야 한다는 조건부를 달아 신사참배를 부분적으로 허용한다.[9] 그러나 신사참배를 용인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교회의 결정은 신사가 종교법인화하면서 자동으로 그 효력을 잃었기 때문에 신사참배 자체를 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며[10] 일본인 가톨릭 신자들도 구경이라면 모를까 우상숭배가 걸리기 때문에 참배는 피하는 경우가 많다. 개신교(성공회 포함)에서는 원천 금지한다. 한국의 제사 허용 여부하고 대체로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고 생각하면 된다. 신사 안에는 위패의 형식이 아니라 신체(神體)로 신상(神像)이나 거울을 모셔 놓는다. 특히 신체는 대부분 거울(신경 神鏡)이다.
신토는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만신사상에 가까운 신앙이다. 개인의 악행이나 선행도, 해당 개인이 악하거나 선한 것이 아니라 신이나 악귀가 깃들어서 저지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죽은 후에는 정화하는 의식을 거쳐 신이 거하는 사당에 안치하며, 이때 해당 사람의 죄나 악행이나 선행, 관련된 모든 과거에 대해 용서하고, 그 자리에는 이승의 삶에서 만들어진 인과에서 벗어난 순수한 혼을 묻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누구 제사를 유족 중 누가 지낼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 이 기준을 지키지 않고, 즉 제사를 지내지 말아야 할 사람이 제사를 지내면 혼령이 불편해한다고 여겨서 금기시했다. 예를 들어 야스쿠니 신사가 정착한 뒤에 어느 집안의 딸이 시집 간 뒤 친정 부모님 제사를 지내자 친가 쪽에서 불쾌하게 여겼는데, 이에 딸이 "그러면 야스쿠니 신사에 혼을 모신 집안은 전부 혼령이 불편해 하는가?"라고 되물어 친가를 버로우시킨 적이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그만큼 일본 전통에서는 이질적인 존재이며, 야스쿠니 신사가 정착하자 기존의 일본 전통과 충돌하였다. 기존 일본 전통에 따르면 야스쿠니 신사는 제사를 지낼 권리가 없다.
또한 일본 내에서는 소수인 기독교 신자들도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인해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지기를 싫어한다. 현대 일본에서 기독교 신자인 자위대 대원이 임무 중에 사망하여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합사되는 일이 있었다. 여기서 빼내기 위해 일본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아스쿠니 신사 문제위원회를 만들어 법정투쟁까지 나섰지만 패소했다. '신으로 모셔주는데 뭐가 불만이야?' 하는 논리. #,#,# 현재는 한국 기독교계 관련 단체와 연계해 계속 이러한 강제합사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지만 워낙 일본 내에서 규모가 작은 집단이라 잘 되지는 않는 모양.

2.1. 등급


일본의 신사에는 흔히 등급이 있다. 물론 아무 등급도 없는 신사들이 더 많긴 하지만, 역사가 오래된, 또는 규모가 큰 신사 시설 관련 자료를 모으다 보면 흔히 '등급'이 나오곤 한다. 이러한 제도는 일본 조정이 영토 내의 신사들을 통제하는 한 가지 수단이기도 했다.

  • 식내사(式内社)
927년에 일본 조정이 편찬한 《연희식(延喜式)》[11]이란 문서의 〈신명장(神名帳)〉 항목에 기록된 신사 시설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바꾸어 말하면 식내사는 최소한 10세기 초에는 존재했고 규모도 있으며 당시에 어느 정도 중요성을 인정받았던 유서 깊은 곳이라는 뜻이다. 신명장에 기록된 식내사는 총 2861곳, 모신 신령들은 총 3132위인데, 당시 일본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오늘날의) 교토부, 나라현, 미에현 등에 특히 많았다. 하지만 당시 일본 조정은 식내사를 선정하면서 정치적인 요소를 많이 고려했기 때문에, 당시부터 존재했고 대중적 인기도 있었지만 식내사가 되지 못한 신사들도 많았다.
식내사를 중요도에 따라 관폐대사(官幣大社) - 국폐대사(國幣大社) - 관폐소사(官幣小社) - 국폐소사(國幣小社) 등 4등급으로 나누고 공적으로 신령들에게 예물(폐백幣帛)을 바쳤다. 여기서 관폐사와 국폐사는 예물을 바치는 주체에 따른 구분이다. 관폐사에는 조정에서 파견한 신기관(神祇官)이, 국폐사에는 조정이 각 지역으로 파견한 국사(国司: 지방관)이 예물을 바치도록 했다.
연희식신명장에서 사용한 이러한 구분과 용어들은 19세기 메이지 시절에 제정한 근대 사격 제도에서 많은 부분을 따갔다.

  • 명신대사(名神大社)
8-9세기에 식내사 중에서도 특별히 영험한 신령(명신名神)을 모신 곳이라고 조정이 공인한 신사. 전부 식내사 중 관폐대사/국폐대사였기 때문에 '명신대사'라고 하였는데, 이들을 기록한 목록이 따로 있다. 일본 조정이 특별히 신령의 영험을 구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때에는 명신대사에 사람을 보내어 제례를 올리도록 하였다. 기록에 따라 구체적인 수가 좀 다르지만, 대체로 2백여 곳이 있었다. 명신대사는 후에 22사로 축소되었다.

  • 22사(二十二社)
11세기에 일본 조정이 무언가 신령에게 긴급히 고할 일이 생겼을 때 폐백을 올리며 제례를 바치기로 결정한 신사. 일본 각지의 주요 신사들에게 동시에 고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수도와 그 주변 인근지역에 한정하여 영험하다 싶은 신사들을 골랐다. 처음에는 등급이 아니었지만 점차 해당 신사의 명예이자 등급으로 변한 것 같다.
22사 내에서도 다시 상7사(上七社) / 중7사(中七社) / 하8사(下八社)로 나누었는데, 당연히 상이 가장 높은 등급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런 관습은 10세기에 나타났는데, 숫자가 늘었다 줄었다 하다가 1081년에 22사로 고정되었다. 22사 중 18개 시설이 교토부와 나라현에 있다. 이후 일본 조정은 꾸준히 22사에 폐백을 올렸지만 1449년을 마지막으로 관습이 사라졌다. 이후에 일시적으로 상7사에 봉폐를 올리는 일도 있긴 했지만, 잠깐의 이벤트로 끝났을 뿐 관습이 다시 부활하지는 못했다.

  • 일궁(一宮)
율령국(令制国)이 있던 시절에 각 쿠니(国)에서 으뜸가는 신사라고 통용된 곳. 그래서 명칭도 일궁(一宮), 또는 일지궁(一之宮)이다. 그 외에도 쿠니별로 이궁(二宮), 삼궁(三宮)도 있지면 별로 언급되지 않는다. 대체로 각 지역에서 대중적인 인기와 지지를 얻은 신사가 일궁이 되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식내사에도 포함된 곳들이다. 대략 11-12세기 무렵에 '일궁'이 나타났다. 위에서 설명한 여타의 등급과 달리, 조정 등 공적인 세력이나 권력자가 정한 것이 아니라 민중 차원에서 통용된 개념이 체계화된 것 같다. 공적인 권위로 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신사가 왜 일궁이 되었는지는 일본에서도 모르고 몇 가지 설이 있을 뿐이다.
당연히 그냥 '일궁'이라고만 하면 어디를 말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율령국의 이름을 앞에 붙여 부른다. 예를 들어 오늘날 일본 나라현 일대가 과거에는 야마토노쿠니(大和国)였기 때문에, 나라현 사쿠라이시(桜井市)에 있는 오미야 신사(大神神社)는 '야마토노쿠니 일궁(大和国一宮)'이라고 했다. 대개는 식내사와 겹친다. 일본에는 일본 전역의 일궁들을 순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현대 그런 사람들이 사용하는 목록에 따르면 일궁들은 대략 100여 개가 있다는 듯. 여기에서 나와 각 쿠니보다 작은 지역단위에서도 '일궁'이라고 불린 곳도 있었다.

  • 근대사격제도(近代社格制度)
1871년 메이지 정부가 연희식의 용어를 가져와 새로이 정비한, 신사 시설에 사격(社格: 신사의 등급)을 매겨 관리하는 제도. 물론 당시 메이지 정부가 사용한 용어는 아니고, 식내사나 22사 등 옛 율령제 시절의 제도와 대조하여 '근대'에 나온 제도라고 후대에 이름을 붙인 용어이다. 식내사 등등은 중세사격제도(中世社格制度)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근대사격제도의 특징은 신불습합[12]을 거부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체계적으로 일본 전체의 신사 시설들을 포함했다는 점이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신궁 항목을 참조.
크게 관폐대사 - 국폐대사 - 관폐중사 - 국폐중사 - 관폐소사 - 국폐소사 등 6등급으로 나누었다. 또한 별도로 관폐소사에 준하여 (천황의 충신들을 모시는) 별격관폐사를 지정했고, 관국폐사 등급 밑으로는 일본의 각 행정구역을 대표하여 현사, 부사, 촌사 등도 지정했다. 그리고 아무 등급을 받지 못한 신사는 따로 무격사(無格社)라고 불렀는데, 당시 일본의 신사들 중 거의 절반이 무격사였다. 그런데 반대로 설명하면, 신사들 중 절반은 어떤 식으로든 등급을 받았단 소리이다.
19세기에 들어 서양에서 과학기술이 들어오면서 교통과 통신이 발달했고, 정치체 또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다. 과거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지만, 변화된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전면적인 통제와 조직화가 가능했다. 국가신토를 가능케 하는 한 가지 제도적 기반이기도 했다. 1946년 GHQ가 근대사격제도를 폐지했지만, 과거에 높은 격을 받았던 신사는 여전히 중요하게 대우받는다. 신사 관련자료에서 흔히 말하는 '옛 사격(旧社格)'이 바로 근대사격제도에서 받았던 등급을 말한다.

  • 칙제사(勅祭社)
근대사격제도에서 따로 매년 천황의 이름으로 칙사가 파견되어 폐백을 바치는 시설. 다만 이세신궁은 너무 존엄하다는 이유로 매년 칙사를 파견하는데도 따로 '칙제사'라고 묶어 부르지 않았다. 총 17개 시설이 있었지만, 1945년 광복 후에 조선신궁이 사라져서 16곳만 남았다. 비록 현대에는 공식적으로 '칙제사'란 등급을 인정하지는 않으나, 과거 칙제사로 지정되었던 곳들과 이세신궁에는 여전히 칙사들을 파견하여 예물을 바친다.

  • 별표신사(別表神社)
1946년 근대사격제도가 폐지되자 관련된 신토의 관계자들이 신사본청이라는 민간종교법인을 만들었다. 신사본청에 일본에 있는 어지간한 신사들은 거의 다 가입했는데, 신사본청은 일단 '모든 신사는 평등하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하지만 역사가 깊거나 규모가 큰 신사들을 조그만 신사와 똑같이 다룰 수가 없다고 1948년에 따로 '별표신사'라는 구분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별표 참조'라고 할 때 쓰는 그 별표(別表)이다. 따로 만든 표(별표)에 수록한 신사라는, 정말 단순한 작명.
원래는 신사본청 내부의 행정적 구분이지만, 별표신사가 된다는 것은 신사본청이 '허다한 신사들과 똑같이 다룰 수가 없다.'고 인정했다는 뜻이라 사실상 등급이 되었다. 별표신사의 거의 대부분은 근대사격제도에서 관국폐사 등급을 받았던 곳이다. 일본 전역에 약 3백여 곳이 있지만, 크고 유명하고 인기 있는 신사인데도 신사본청에 가입하지 않았다거나 해서 별표신사가 아닌 곳들도 있다.

크고 오래된 곳인데도 이런 신사 등급을 받지 못한 시설들도 있다. 이런 등급, 사격을 받는 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정치적 요소가 관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이런 등급을 받았던 신사는 유서 깊고 주변 지역에서 중요하다고 인정받은 곳임은 분명하다.
일본의 신사에는 드물게 오쿠미야(奥宮)라고 불리는 시설들이 있다.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으면 '오궁'인데, 여기서 오(奥)는 원래 방의 제일 안쪽, 후미진 곳을 가리키는 한자이다. 마치 월경지처럼, 신사의 본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졌지만 본전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곳을 따로 '오쿠미야'라고 부른다. 대개는 해당 신사에서 중요한 곳이지만 어떤 이유로 신사 시설을 설치할 수가 없어서 간이시설을 세워둔 곳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후지산 정상에는 후지산을 신령으로 숭앙하는 센겐 대사(浅間大社)의 오쿠미야가 있다. 후지산 정상에 센겐 대사의 본전을 세울 수 있을 리 없으니 후지산 아래에 본전을, 정상에는 간이시설을 세우되 간이시설 또한 본전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이다.
오쿠미야는 등급도 무엇도 아니지만 자칫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여기에 설명을 남긴다.

3. 참배 과정



일본의 일상적인 종교시설이라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일본 만화, 일본 영화 등 일본 미디어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지라 새전(賽錢)만 던지고 대충 기도하면 참배가 끝인 줄로 아는 사람도 많으나 진지하게 참배를 목적으로 신사를 방문하는 과정은 꽤나 복잡하다.
신사에 도착하면 입구 도리이 앞에서 가볍게 고개만 숙여 절 한번. 도리이(鳥居)를 지나 신전까지 가는 길인 참도(参道)에서는 길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로 걸어야 하며[13] 길에 깔린 자갈들은 조금 끌듯이 해서 소리를 내면서 걸어야 한다.[14], 참배객이 몸을 정화하는 장소인 조즈야(手水舎)에 도착하면 바가지에 물을 받아 양손을 씻고 입을 헹군다.[15] 배전에 도착하면[16] 고개 숙여 인사를 2번 하고 오른손을 왼손보다 살짝 내려 박수를 소리나게 2번 친 뒤,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마지막으로 고개 숙여 1번 인사하고 떠난다. 이런 예법을 니레이니하쿠이치레이(이하 二礼二拍一礼)라 한다. 거창한 이름도 아니고 그냥 '절 2번 박수 2번 절 1번'이라고 한잣말로 표현한 것.[17] 이때 소리가 다소 들리게 치는 것이 예의. 신토에서 소리가 나지 않게 박수를 침은 장례의식의 예법이다.
이것이 신사본청에서 권장하는 표준적인 예법으로, 세세한 부분은 전례마다 지방마다, 또는 일본인마다 다르다. 심지어 오모토의 성사(聖師)로서 메이지-쇼와 시기에 영향력 있는 종교인이었던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郞 1871-1948)는 오모토 신자들에게 박수를 4번 치는 것이 예부터 내려온 예법이라고 가르쳤다.[18] 사실 저 일반적인 예법도 지키지 않고 참배하는 일본인들도 많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참배하는 모습을 관찰하면 사람마다 각양각색이다. 불교에서 사용할 법한 수인(手印)[19]을 맺으며 참배하거나 염주를 들고 참배하는 사람들도 있다. 새전함에 돈을 언제 넣을지도 고민하지 마라. 어떤 사람은 미리 돈을 넣고 참배하기도 하고, 기원하기 전이나 후에 하는 사람도 있다. 원래 참배의 작법도 일본 각지마다 다 달랐으므로 메이지 유신 이후 신사청에서 표준형을 제정했으나, 모든 사람들이 옙 하고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일본 어디에서도 모든 동작을 일일이 규정하지는 않기에, 참배하는 상세한 예법을 물어봐도 곤란해하는 절이나 신사도 적지 않다. 하지만 대체로 二礼二拍一礼를 지키면 어느 신사에서든 일반적인 예법을 따랐다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새전함(賽錢函)에 넣는 돈은 대개 5엔이나 50엔짜리를 넣는다. 5엔의 발음이 ごえん(고엔)으로, 御縁(고엔, 좋은 인연)과 발음이 겹치기 때문.
방울 달린 새끼줄이 참배하는 자리에 있기도 하는데, 이 새끼줄을 흔들어서 소리를 내 참배를 하기 전에 신에게 사람이 왔다고 알리려는 목적이다. 도쿄 시내에서 그런 신사는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교토 등 다른 도시의 신사나 시골의 신사에는 많이 달려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팔뚝만큼 굵은 새끼줄에 징채가 달려 있어서 새끼줄을 흔들면 징이 울리게 한 곳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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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참배 하는 법 원본

4. 일제강점기 조선의 국가신토 신사 참배



4.1. 조선인의 참배법 차별이 있었나?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인 학생들을 강제로 신사참배 시킬 적에 박수 1번은 제대로, 2번째 박수는 오른손을 반 내려서, 왼손 손바닥에 오른손 손가락 끝을 대어 박수를 치게 함으로써 신사예법에서도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항목의 구판에도 그런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정말로 차별인지, 또는 차별이 아니지만 조선인들이 차별로 받아들인 것인지 의문스럽다.
일본 신사 예법에서는 오른손을 살짝 내려 오른손 중지의 끝이 왼손 중지의 첫 번째나 두 번째 마디쯤에 닿도록 하여 박수를 2번 침이 일반적이다. 신사의 신령 앞에서 박수치는 행위를 카시와데(拍手)라고 부른다. '카시와데'의 사전적인 의미는 당연히 두 손을 맞추어 치는 것이지만,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크게는 신사본청에서부터 공영방송, 신사나 신토에 관련한 소규모 사이트까지 오른손을 내려서 두 번 친다고 설명함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오른손을 내려서 박수 침은 신령에게 경의를 표하고 신령과 인간이 일체가 아님을 나타내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므로 일제시대 조선의 신사참배에서 조선인 차별이 있었다 하더라도, 정말로 '두 손의 높이를 똑같이 하여' 첫 번째 박수를 치게 했을지 의문스럽다. 당시 조선에 있던 신토 관계자들은 조선인들이 일본인들과 달리 신사를 경외하는 마음이 없어 불경하게 무례를 저지른다고 개탄을 했다. 안 그래도 조선인들이 불경하다고 개탄하는 사람들이 조선인에게 일부러 틀린 예법을 요구했다면 많이 이상하다. 더구나 오른손을 맞추지 않음은 신령과 인간이 동등하지 않다고 경의를 표하기 위함인데, 하필 그런 부분을 수정하여 신령 앞에서 무례를 저지르게 했을 가능성은 낮다. 설령 조선인과 일본인의 예법을 다르게 했다 하더라도, 신토가들이 바라보기에 '신령 앞에서 불경하지 않은 방법으로' 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첫번째 박수를 손을 맞추어 치는 행위가 불경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자신을 낮추는 행위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나 종교적인 이유가 필요하고, 일본인들이 오른손을 낮추어 두번 치는 이유와 배치되는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질적인 주장은 찾아보기 힘들다.
二礼二拍一礼가 태평양 전쟁 후 미군정 시대에 미국의 압력 하에 정립된 것이고 본래는 다른 예법이 있었다 하더라도, 일본인들 중에서도 본래의 예법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거나 미국 때문에 피치 못하게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일본인들은 二礼二拍一礼가 오래된 일본의 전통을 다듬은 예법이라고 인식한다. 만약 외세 때문에 전통이 변해버렸다면 그런 부분에서 가장 일본에서 반발이 심해야 할, 지금은 미국의 눈치조차 볼 생각도 없이 줄기차게 총리와 천황이 참배 오기를 요구하는 야스쿠니 신사마저도 신사참배 중 박수는 두 번 모두 오른손을 내려서 친다고 홈페이지에서 설명한다.
일본 위키의 카시와데 목록의 서술에 따르면 한 번은 두 손을 맞추어 한 번은 엇맞추어 치는 예법이 있다는 소리도 있다. 이런 설명은 일부러 손을 엇나가게 치는 예법 중에는 도중에 엇나가는 예법도 있다고 한다. 이는 '차별을 위한 예법'과 동일해보인다. 또한 일제시대에는 '표준형 참배 예법'도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조선에 소수의 예법이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차별을 받지 않았을 일본인은 과연 조선에서 어떻게 박수를 쳤을까? 조선인들이 차별을 받았다고 느끼려면 일본인들은 일괄적으로 조선인들과 다른 예법을 취했어야 자연스럽다.
신사에 가서 유심히 관찰해보면 일본인들도 저마다 예법이 미묘하게 다르고, 이런 불일치를 신토의 특징으로 받아들이는 일본인이 많다. 그렇다면 당대 조선인이 애초에 원치 않았던 신사참배를 일방적으로 배우고 실시하도록 강요받은 조선인들이, 별 생각 없이 자기가 나고 자란 지역이나 가정의 습관대로 참배하는 일본인과 비교되어 차별이라고 느꼈을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카시와데'라 하는 손을 내려서 박추 치는 종교적인 풍습은 일본의 고유한 것이라고 하니 더욱 이상하게 받아들였을 수 있다.

4.2. 조선에서의 인식


조선시대 부산 초량왜관(草梁倭館)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참배하고자 숙종 4년(1678) 즈음하여 지금의 용두산공원 주변에 여러 신사를 건립했다. 이것이 기록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한반도 최초의 일본식 신사이다. 당시에는 단순히 조선 거주 일본인을 위한 종교시설일 뿐이었지만, 조선이 일본의 무력에 굴복해 개항하고 식민지로 전락하자 의미가 달라졌다.
현대 한국의 노인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전국 각지의 신사에 강제로 참배한 기억이 있다. 내선일체 사상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한반도에도 신사를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수도권이나 대도시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지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서울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이다.[20] 보통학교 등에서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21], 그때 반감을 가지고 피해를 입은 일부 사람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
더군다나 특히 기독교인 사이에서 논쟁이 되었는데, 이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순교하거나 불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1936년 5월 18일가톨릭이 먼저 신사참배를 허용했는데, 교황청은 일본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해도 된다는 훈령을 내렸고,[22] 일본 주재 교황 사절 마렐라 대주교가 한국 천주교회에 <국체명징에 관한 감상>이라는 통첩을 내리고 신사참배를 직접 권고하였다.
이후 1938년 2월부터 총독부 경무국에서 기독교지도대책을 마련하고 친일화를 독려함에 따라 9월 10일에 조선예수교장로회 교단 차원에서 개신교 역시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결의했다. 이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는 국가신토의 신토 비종교론에 근거해 '신사 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애국적 국가의식이므로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하신 그리스도교 신앙에 전혀 어긋날 것이 없다.\'는 이유로 교계 차원으로 신사참배 의결을 강제로 밀어붙였다.## 실제로 한국의 개신교 교파 기준으로[23] 신사참배에 동참하지 않은 교단은 손으로 꼽아도 될 정도이다.[24]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교단들은 진짜로 교단 자체가 사라진 경우가 많은데, 전체 기독교 비율로 보면 이들은 결국 소수였다.
민족 감정을 거르고 보자면, 이 시기 신사 참배에 대한 해석은 "조상제사는 우상숭배인가?"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해석과 유사한 면이 있다. 누군가는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라고 해석할 것이고, 누군가는 종교성이 없는(혹은 희석된) 문화이지 우상숭배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비슷하게 신사참배 논쟁은 '신사참배가 종교성이 없는(혹은 희석된) 문화인가?' 하는 물음에 본질이 있다. 조상제사에 대해 유화적인 스탠스를 취한 가톨릭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신사참배에 대해서도 그러했다는 점, 신사참배를 거부한 계열인 예장고신은 조상제사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한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면모가 드러난다. 순수하게 신학적 관점만으로 보자면, 조상제사와 신사참배는 세트로 붙어다니는 논쟁거리이고, 설득력 있는 답변은 둘 다 수용하는 것이나 둘 다 거부하는 것이지, 하나만 수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5]
문제는 민족 감정이다. 일본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사 참배의 종교성 여부에만 파고들어도 그걸로 족하지만, 조선 그리스도교에서는 종교성 여부뿐만이 아니라 민족 감정도 고려해야 했다. 신사 참배는 일본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국의 문화가 그리스도교와 공존할 수 있는가 하는 '관용'의 문제였다면, 조선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질적인 해외 문화를 강요당하는 '억압'의 문제였다.[26]
결국 신사 참배는 그리스도교 안에서든 밖에서든 조선인에게 '억압'의 상징이었고, 광복 직후에 경성의 조선신궁과 지방 주요 도시의 몇몇 신사는 스스로 승신식을 열고 철거했지만 나머지 대다수 신사는 광복 직후 빠르게 민중들의 손에 파괴되었다.[27] 현재 대한민국에는 서울이나 소록도 등 일부 지역에 부속건물·반석·기단 등 신사의 흔적이 남았을 뿐인데[28], 어디까지나 신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정도이고 종교시설로서 활동하는 신사는커녕 건물조차 제대로 남은 신사도 없다. 심지어 대만이나 동남아시아에는 여럿 있는 토리이 하나까지 싹 사라졌다. 군산 동국사나 대구 관음사 등 일부 일본식 사찰 건물들은 '불교시설'인 덕에 아직도 현지에서 종교시설로서 건물과 형식을 보존했지만[29], 신사는 확연히 일본색이 강한 종교시설인 데다가 조선인 사이에는 광복 전부터 기저에 강한 반일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떠난 뒤에는 파괴를 면할 길이 없었다.[30] 식민지 당국 또한 광복 후 신사와 신사에 모신 신체(神體)가 조선인의 손으로 파괴될 줄 짐작하고, 광복 당일 조선신궁의 궁사(宮司)가 조선 전역의 신사에 승신식, 즉 신체에 깃든 신령을 되돌려보내는 의식을 거행하고 철거하라고 지시했다. 경성의 조선신궁과 지방 주요 도시의 몇몇 신사를 제외하면 대다수 신사는 시설은 파괴를 피하지 못했으며 평양신사 등 그 중 일부는 승신식조차 하지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신사의 터로는, 소록도신사가 대표적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한국인들 중에는 신사 자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요즘은 그런 시각이 상당히 감소해서 일본 관광 나가서 특별히 문제 되는 신사만[31] 아니면 일본인들 따라서 재미삼아 참배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특히 가고시마현 나에시로가와의 옥산궁[32], 사이타마현고마 신사[33], 교토의 야사카 신사[34], 야마구치현의 기시즈 신사[35], 카가와현의 콘피라산 신사[36], 시가현 온조지의 신라선신당[37] 같은 한국사와도 연관이 있는 신사들에는 일부 역덕들이 일부러 찾아가서 참배하기도 한다.

5. 대중매체


토속신앙으로 폭넓게 사랑을 받으며 민간에게도 친숙한 종교답게, 일본의 서브컬처 작품들에 흔히 등장한다. 단골 메뉴는 퇴마, 무녀 등. 또한 여름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작품이라면 신사에서 열리는 여름 마쓰리가 흔히 등장하곤 한다. 실제 존재하는 신사를 모티브로 하여 작중의 신사를 묘사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럴 경우 해당 작품의 팬들이 성지순례를 가기도 한다. 관광명소가 되기에 지역경제나 신사 재정이 도움이 되는지라 이를 적극 활용하는 경우도 있는 한편, 제작자가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하여 소란스럽게 굴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경우도 있다.
성인향 작품 등에선 신사 부근이 밤에 으슥하다는 걸 활용해서 물레방앗간(…)과 같은 용도로 사용하는 사례가 종종 묘사되지만, 그런 일은 말그대로 에로물의 클리셰이다.
한국에서 현지화할 때는 불교이나 사당으로 바뀌는 경우가 보통이다. 일본이야 불교의 나라라는 인식도 일부 있고 신불습합 전례에 따라 일부 신사에서 인도 계통의 종교 신이 편입되는 식의 혼재양상이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넘어갈수도 있는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38] 이것도 그나마 왜색 관련 심의가 많이 풀린 2003년에 와서 일반화된 것이고, 그 전에는 신사라면 무조건 심의에서 걸렸다.[39] 예컨대 1997~1998년에 KBS에서 더빙한 세일러문 시리즈에서는 신사 배경 때문에[40] 아예 방송이 되지 못한 에피소드가 수두룩하며, 이로 인해 내용 연결이 안 되거나 일부 캐릭터가 거의 등장을 못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아즈키쨩에서도 대교방송 쫑아는 사춘기 시절(1기 1998년, 2기 2002년, 3기 2004년 더빙)에 신사 장면 조금 들어있는 에피소드가 통째로 잘리기도 했다.[41] 그나마 투니버스에서 음양대전기아침 안개의 무녀 같은 신토를 다룬 애니메이션을 방영해주거나, 노라가미러브라이브 같은 일본 애니를 접한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서 일본식으로 신을 모시는 신사라는 것이 있고 한국의 절이나 당집하고는 조금 다르다고 알음알음 퍼져나가는 중이다.

6. 기타


  • 일제의 다른 식민지에도 신사가 곳곳에 세워졌고, 일제 패망 이후 일본인들이 스스로 부수고 나가거나 현지 민중들이 불태웠다. 대만에 있었던 신사들은 대부분 중화민국 정부가 접수한 이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자국 국가유공자 위패를 모신 충렬사를 세웠다.
  • 1997년 MBC에서 광복절 특집극으로 방송되었던 객사(客舍)라는 드라마에서는 일본식 신사를 아예 조선향교 옆에다 지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일본인들이 스스로 불태우면서 철거되었다.
  • 2010년대부터는 각 신사의 수익이 영 좋지 않은 모양이다. # 25년 장기불황을 겪으면서 신토에도 최근 들어 경영난이 심해지고 폐업하는 신사도 속출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상당수 신사는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한다." 하며 기본적인 부적 팔기와 제비뽑기 등은 물론 맞선 이벤트와 재개발까지 나서는 실정이다.
  • 일본 외에도 신사가 있는 곳이 있다. 미국 워싱턴주아메리카 쓰바키 대신사, 하와이하와이 신사, 산마리노산마리노 신사[42] 등이 있다.
  • 일본의 전직 프로야구 선수 다무라 히토시의 기나긴 부상 경력 중에는 2005년 1월 1일 첫 참배 때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고 정작 자신은 감기 걸려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주옥같은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듬해에 '흉'을 뽑았다...
  • 2017년 12월 도쿄에 있는 도미오카하치만구(富岡八幡宮) 신사에서 구지(宮司)[43] 자리를 놓고 나이가 50대인 남매끼리 칼부림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 남동생이 1995년 구지 자리에 올랐다가 씀씀이가 헤프다며 아버지에게 해임당했는데, 누나한테 화풀이를 한 것. 자세한 사항은 토미오카 하치만궁 살인사건 참조.
  • 우리나라에서 관광지로 유명한 신사들 중에는 현지에선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한국인 관광객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 있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규슈 지방 신사들이 흔히 그런데, 아타고 신사(愛宕神社) 같은 곳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자주 들리는 곳으로 손꼽힌다.

7. 유명한 신사


자세한 것은 신사(신토)/목록신사(신토)/목록/도호쿠 문서로.


7.1. 성지순례로 유명한 신사


  • 모리야 신사(洩矢神社): 동방풍신록
  • 미소데텐만구(御袖天満宮): 카미츄! (라이후쿠 신사, 코믹스판은 야시마 신사)
  • 스와 대사: 동방풍신록
  • 시라카와하치만 신사: 쓰르라미 울 적에 (후루데 신사)
  • 야사카 신사: 동방풍신록[45]
  • 와시노미야 신사: 러키☆스타 (와시미야 신사)
  • 하나부시 신사: 칸나기 (칸나기 신사)
  • 간다묘진: 러브라이브[46]
  • 아와타 신사, 이시키리 신사, 토요쿠니 신사, 키타노텐만구: 도검난무-ONLINE-
  • 후시미이나리타이샤: 이나리, 콩콩, 사랑의 첫걸음
  • 기후네 신사: 지옥소녀

7.2. 가공의 신사



8. 관련 문서



[1] 나가사키카스테라 신사처럼 유머스러운 신사들은 통계에 잘 잡히지 않는다. 카스테라 신사에도 도리이, 새전함, 오미쿠지, 부적 등 있을 건 다 있다.[2] 교토 같은 관광지에 가보면 불교 사찰들은 입장시간과 입장료가 있지만, 신토 신사는 관광지라도 그러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3] 어떤 신사는 상점에서나 볼 만한 셔터로 닫아두기도 한다.[4] 위패를 모시는 작은 나무상자를 뜻한다.[5] 이러한 모습은 오키나와 토속신앙인 류큐 신토에서 신성시하는 성소들인 우타키(御嶽)에 남아있다.[6] 禰라는 한자는 한국식 한자음으로 '녜', '선'이라고 읽는다. 네이버 한자사전은 '니'라는 음도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오류. 원래는 아버지를 모시는 사당, 또는 사당에 모신 아버지의 혼령을 가리키는 한자이다. 한국어에서 '녜'가 글자 앞에 있으면 두음법칙이 적용되므로, 네기(禰宜)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으면 '녜의'가 아니라 '예의'이다. 제사에 관련된 글자를 모으긴 했지만, 한자 자체의 뜻보다는 발음을 표사히는 목적이 더 컸으므로 굳이 한자의 뜻을 따질 필요는 없다.[7] 일례를 들자면 2014년 아키히토 덴노의 5촌 조카딸 노리코 공주와 결혼한 센게 구니마로(千家國磨). 고쿠가쿠인(國學院) 대학 신도학과를 졸업하여 쭉 신관으로서 봉직하였다.[8] 후술하겠지만 신사는 위패를 모시는 방식이 아니다.[9] 가톨릭은 한국의 유교제사도 거의 같은 이유로 종교적 의미가 아닌 조상공경 차원에서 허용한다.[10] 가고시마 교구장 이토나가 신이치 주교의 논평.[11] 일본식 발음은 엔기시키(えんぎしき). 일본의 연호로 엔기(延喜) 5년(905)에 집필을 시작했기 때문에 '엔기시키(연희식)'이란 이름이 붙었다.[12] 일본에서 천여 년 넘게 불교와 신토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불교 중심으로 두 종교가 서로 반쯤 합해진 상태였음을 가리키는 용어.[13] 가운데는 신이 지나다니는 길. 우리나라에서도 종묘라든가 조선왕릉 정자각 등에는 길의 가운데를 '신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제사 때 위패를 들고 가는 사람이 아닌 이상 지나다니지 못하게 한다.[14] 신께 자신이 왔음을 알리기 위해서라는데, 어떤 신사에서는 예의가 아니라고 주의를 주기도 한다.[15] 바가지의 물을 흘려서 손을 씻고, 바가지의 물을 손으로 받아 입을 헹굼이 올바른 방법. 한국인들은 약수터 바가지를 떠올리는지 입 대고 마시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물이 부정을 씻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목욕재계를 해야 하지만 이를 간략화했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실수를 많이 저지르는지,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은 한국어로 물 마시지 말라고 붙여놓은 곳도 있다. 씻는 순서는 왼손 → 오른손 → 왼손에 물 받아서 입 헹구고 → 왼손 → 바가지를 세워서 남은 물로 손잡이까지 씻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물을 한바가지만 쓰는 것이 보통이니 의식적인 부분에서 살짝 닦는 수준으로만 하는 것이다.[16] 일본 신사는 대개 배전(拜殿)과 본전(本殿)이 따로 있어, 배전에서는 일반인들이 참배를 하고 본전에서는 신관과 무녀들이 제사를 지낸다. 가끔 본전에 들어갈 수 있는 신사나 배전이 없는 신사도 있지만, 이러한 곳에서는 신을 상징하는 신체(神體)를 작은 집 형태인 감실에 넣어 보관하여 본전을 대신한다.[17] 동방 프로젝트에서 등장하는 캐릭터 모리야 스와코의 스펠카드 '절 2번, 박수 2번, 절 1번\'이 여기서 유래하였다.[18] 그래서 지금도 오모토 교단에서는 박수를 4번,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끝이 왼손 가운데 손가락 둘째 마디에 닿도록 하여 친다. 천리교에서도 의례 중에 박수를 오른손을 살짝 내려 4번 치므로, 오니사부로의 말처럼 옛날 일본에서는 박수를 4번 치는 쪽이 더 일반적이었을지도 모른다.[19] 본디 불교에서 불상이나 보살상 등이 취하는 특유의 손 모양을 가리킨다. 저마다 상징이 있기 때문에, 불교 수행이나 의례 중에 사람이 수인을 취하기도 한다.[20] 일본이 이걸 지으면서 당시 한국의 토속신들을 모신 서울 국사당이 자기들보다 높이 있다면서 트집을 잡았고, 결국 국사당은 원래 위치인 현 서울 남산 팔각정에서 지금의 위치인 인왕산으로 이전됐다.[21]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도 분쟁의 시작은 일본인 학생의 조선인 여학생 희롱이었지만 보통학생에게 강요된 신사참배가 타오르던 불에 기름을 끼얹을 정도로 항일 운동의 주된 요인이었다.[22] 이후 1939년. 교황 비오 12세가 '동양의 조상 제사는 그들의 조상을 기리는 민속적인 관습일 뿐 종교적인 의미가 없고 우상숭배가 아니다.' 하는 내용으로 칙서를 발표.[23] 감리회, 재림교회, 성결교회, 구세군, 성공회신사참배를 시작하였고, 1938년 장로회마저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 이 중 성결교는 일본 교단부터 순교자 6명을 내며 조선의 교단에도 저항을 독려하였으나 끝내 수용했다.[24] 침례회는 교단이 폐쇄되고 목사 32명이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는 개신교에서 교단 차원에서 끝까지 거부한 유일 사례이다. 장로회는 이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조선예수교장로회를 나온 장로회 교인들이 고신(고려신학)이라는 분파로 나누어졌다. 예장고신은 광복 이후 신사참배를 회개하라고 주장했다고 오히려 쫓겨났다. 그리고 루터교는 일제강점기 후에 들어왔기에 신사참배 논쟁과는 무관하다.[25] 다만 이 설명은 어디까지나 국가신토에 해당하는 것이며, 가톨릭 신자의 전후 신사참배 허용 여부에 대해서는 위에서 링크한 가고시마 교구장의 논편을 참고할 것.[26] 극단적으로 말해서, 만약 조선이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유교 문화 바같에 있는 나라를 침략하고 조상제사를 강요했어도 피해국 그리스도교에서는 비슷한 논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이 경우 조선 그리스도교에서는 조상제사가 자국 문화와 그리스도교가 공존할 수 있냐는 '관용'의 문제가 되지만, 피해국 그리스도교에서는 '억압'의 문제가 된다. 같지는 않지만 역사상 비슷한 사례로, 만주국이 국민 단결 목적으로 공자숭배를 의무화하자 교황 비오 11세가 공자 존경의식을 허용한 역사가 있다.[27] 심지어 평양신사는 광복 당일 방화로 파괴되었다.[28] 이외에도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옥구공원에도 신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은 도리이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았다.[29] 서양으로 치면 가톨릭 신자가 대다수인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 러시아 제국의 주도로 세워진 정교회 성당들을 파괴하지 않고 그냥 놔둔 경우가 많은(파괴된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가톨릭이든 정교회든 간에 똑같이 야훼를 섬기는 기독교니까.[30]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절에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하던 네덜란드로부터 전파된 칼뱅파 개신교는 인도네시아 독립 후에도 인도네시아 소수민족들(화교 포함) 사이에서 나름 강세를 보이는 점을 감안하면, 한반도의 신토는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 더더욱 처절하고 완벽하게 몰락한 것이다. 광복 후에도 여전히 한반도에 잔류했던 극소수 일본인(주로 한국인과 결혼한 이들이나 광복 전까지 일본인 정체성을 가졌던 한일혼혈)들 또한 신토 신앙은커녕 한국인들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는 데도 급급했기 때문에 자연히 신토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다.[31] 야스쿠니 신사나 A급 전범들, 혹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을 호국 위인이랍시고 받드는 신사.[32] 임진왜란 때에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의 후손들이 단군을 모시려고 지었다는 신사인데, 신사의 마쓰리에서 불리는 "오나리 오나리쇼셔" 하는 말로 시작하는 축가가 우리나라의 청구영언에 실린 '오늘이 오늘이소서'라는 시조와 거의 닮아 있어서 주목되기도 했다.[33]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고구려 왕족의 후손으로 일본에 귀화했다는 현무약광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다.[34] 고구려에서 사신으로 온 이리노사주라는 인물이 고구려로부터 모셔온 신격인 우두천왕을 모실 사당을 지었다는 데에서 기원한다.[35] 임성태자를 모신 신사다.[36] 임성태자의 조각상(좌상과 기마상)과 투구를 소장했다.[37] 천태종 승려 엔닌이 당나라에서 귀국하는 길에 신라 남해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에 앞에 나타나 풍랑을 가라앉히고 귀국길의 안전을 약속했다는 '신라명신'이라는 신령을 모신 사당. 한국에는 신라명신이 장보고나 그의 휘하 신라인 해상 세력가를 신격화했다고 보고 주목되었는데, 신라명신 앞에서 관례를 올려 이름에 신라사부로가 들어간 미나모토노 요시미츠가 엉뚱하게도 신라계로 몰리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38] 따라서 진짜 (일본)불교가 나오면 대단히 골룸해진다.[39] 일본문화 전면 개방 이전에는 신사 뿐 아니라 피구왕 통키의 사례처럼 일본식 불교 사찰도 편집 대상이었다.[40] 세일러 마스(히노 레이)가 신사의 무녀.[41]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에는 심의가 완화되어, 이후에 들여온 이누야샤는 신사, 무녀 관련 요소가 거의 그대로 나왔고, 아즈키쨩은 2010년 투니버스가 사랑은 콩다콩으로 재더빙하면서 신사가 절로 바뀌어서, 2012년 대원에서 재더빙된 세일러문은 '사당'으로 나오고 무녀복 등 편집 없이 그대로 나왔다. 문화 개방 후에도 신사라고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이들 입장에서는 한국에 있지도 않은 신사를 언급해봤자 이해를 못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42] 홈페이지에서는 유럽 영내에 최초로 생긴 신사라고 홍보하고 있다.[43] 신사의 책임자. 사찰의 주지 스님 격이라고 할 수 있다.[44] 일본 신들과 달리 고구려 왕자가 주신이다. 이 때문에 주일 대한민국 대사가 여기서 참배하고 있다.[45] 스사노오를 모시는 신사로, 야사카 카나코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다. 하지만 이름 탓에 착각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듯(…).[46] 아키하바라와 가까워서 그런지 러브라이브 흥행 이전부터 서브컬쳐쪽 팬들의 방문이 많기로 유명했다.[47] 동명의 실제 신사에서 따온 것이지만 한자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