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빌 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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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ville Louis Kossuth Dewey
1851년 12월 10일 ~ 1931년 12월 26일
듀이 십진분류법(DDC)의 기원론에 대한 연구
1. 개요


1. 개요


미국사서, 도서관학자. 듀이십진분류법(Dewey Decimal Classification,DDC)을 만든 사람이다. 도서관의 역사를 말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전 세계의 도서 분류법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존 듀이와의 혈연관계는 없다.
뉴욕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에 아버지가 경영하던 잡화점 일을 거들면서 지냈으며, 산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장부를 읽고 작성한 재고감정표를 이용해 아버지의 점포가 적자라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그의 재능은 후에 십진분류법을 많은 도움이 되었다.
1870년에 암허스트 대학교에 입학하여 선교사와 교육자의 갈림길에서 갈등하다가 2학년 때인 1872년에, 교내도서관에 학생보조원으로 근무하면서 도서관계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그는 영국 공공도서관의 아버지 에드워드 에드워즈의 '도서관의 기록 Memories of libraries)을 읽고 도서관에 평생 몸 바쳐 일할 것을 다짐했고, 공공도서관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이 때 도서관장서 배열의 필요성을 느껴 대학 도서관 위원회에 DDC의 초안이라고 할 수 있는「도서관장서의 분류 및 목록을 배열하는데 대한 계획안」을 제출하여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게 된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존속되어왔던 방법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독창적인 분류법으로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 했다.
1872년 이후 듀이는 미국 사람들이 초등교육을 받고 바로 취업을 하여 이후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교육이 중단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좋은 독서할 기회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듀이에게 독서란 '교육의 궁극적인 초석'이라고 생각했다. 비정규적 교육을 통해서 자유스럽게 교육을 받는 방법이 무료 공공도서관(Free Public Library)라고 생각했다. 그는 학교, 교회, 공공도서관 이 세 가지 기관이 교육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무료 공공도서관을 통한 가정교육'에 헌신하기로 마음을 정했으며, 1874년 7월 무료 공공도서관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어서 그 이용을 늘리고 대중을 교육하는데 제자리를 찾게 확신 할 수 있는 분류법의 골격을 마련하였다. 듀이는 암허스트대 졸업 후 자신의 이름의 철자를 Melvil Dui로 심플하게 표기했으며, 같은 대학의 임시직 사서로 출발하였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분류표 작업에 매달렸다. 자기의 분류표로 8,000여권의 도서를 정리하여 배가하였다. 그는 도서관 운영을 위해 영어 철자의 개량도 주장했다. 영국 영어로 catalogue라고 쓰는 데에 반대하고 미국 영어에서는 catalog라고 쓰는 것을 주장했다. 오늘날 미국의 영문법, 속기법은 듀이의 사상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것이다. 링크
그는 1876년 그의 친구이자 동료사서인 찰스 에이미 커터와 함께 미국도서관협회(ALA, American Library Association)를 창설하였고 함께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도서관 협회 제 1차 회의에서 성명을 냈다. 그 후 도서관분야의 최초의 연속간행물이자 ALA의 기관지인‘American Library Journal' 편집자로 활약하면서 DDC의 보급과 공공도서관을 통한 생애교육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 해에 DDC 2판을 개정 출판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27세 때인 1878년에 여대인 웨슬리대학의 도서관 사서인 애니 갓프리와 결혼하였다. 그는 결혼도 도서관 사서와 할 정도로 철저히 도서관을 사랑한 사람으로써, 도서관을 이용하여 입신했다는 말은 모함일 뿐이다.[1]
1883년 컬럼비아 대학(단과대)의 초대 도서관 관장으로 임명되면서 성은 다시 듀이(Dewey)로 쓰기 시작했지만, 멜빌은 그대로 썼다. 그리고 관장일을 맡으면서 장서를 3배 증가시키고, 예산(인건비)을 4배 증가시켰으며, 최초의 여성 사서를 채용하였다. 당시 여성고용을 못 하게한 이사회와 충돌이 심했다. 듀이는 DDC분류법을 기초로 한 장서 관리 및 체계적인 목록작성, 책상 앞에 직접 책을 가져다주는 참고봉사, 도서관 이용교육, 적절한 도서관 환경을 제공, 도서선택 정책 수립 등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지금의 미국 대학도서관의 전형이 되었다. 이 때 최초의 도서관학교 설립을 건의하였고, 학교재정을 쓰지 않기로 하고 설립인가를 받았다. 듀이는 콜롬비아대학 교수들에게 연체 등 도서관 규칙 위반 시 벌금을 부과하여 교수들과 충돌이 있었다.
1884년에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도서관학교를 설립하였다. 도서관학교는 최초의 도서관 실무와 이론 교육이었으나 정규대학교육은 아니었다. 아마 오늘날 사서교육원의 시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학생을 신입생으로 선발(정원20명중 17명이 여학생)하여 이사회와 충돌하였다. 당시 사회는 여학생들이 대학에 진학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여성에 대해서도 동일한 대학교육을 받을 자격을 주어야 한다는 것과 도서관 업무상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와 봉사가 필요하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다.[2] 이런 독단적인 행동은 이사회와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콜롬비아대학의 도서관직을 사직한 듀이는 뉴욕주립도서관장직을 수행하면서 도서관학교를 뉴욕 주 알바니로 옮겨서 사서 양성교육을 계속하였다. 허가는 받았으나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여 운영하는 37년 동안 듀이의 개인적인 희생으로 유지가 되었다.
1889년 뉴욕주립대학 평의회 사무국 서기장 및 뉴욕주립도서관장 직을 맡았다. 이때 도서관 및 고등교육관계법을 개정하였으며 강화했다. 뉴욕교육국 직원들과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도서관학교도 올버니로 옮겼으며, 도서관에 대한 주정부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이동도서관을 운영하였다. 양서목록을 많이 출판하여 배포하였으며 맹인들의 집서, 의료도서, 여성도서관, 어린이도서관용 집서들을 개발하였다.
듀이는 자신의 이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과감히 사임했고, 도서관을 위해서 정책을 집행할 때 주지사사무실, 주 의회 평의회를 직접 방문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관철시키려고 논쟁을 벌이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 후 54세에 모든 도서관 공직에서 물러났다.
1905년 이상사회를 실천하기 위하여 휴양시설인 <레이크 플레시드 클럽>(Lake Placid Club)을 창설하였다. 이곳에서 반유대주의를 표방하고 유대인들은 회원으로 받아주지 않아서 또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후일 재정적자로 폐쇄되었다. 클럽회원자격이 엄격하여 음주자, 도박자, 질병자, 유대인 등은 이용을 못했다.
1931년 80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한 후 듀이의 공적을 기려 1951년 미국 도서관 협회가 선정한, 현대 도서관에서 지도적 역할을 한 40명의 명단인 "도서관 전당" (Library 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렸다.
오늘날 미국 공공도서관의 95%가 DDC(벌써 개정 24판이 발행)를 사용하고 있다. 듀이는 의회도서관(LC)의 비십진분류법과 충돌이 있었고 보고서 은폐의혹도 받았으나, DDC의 우수성(지식의 전개성, 조기성, 십진식 전개, 숫자의 범용성, 상관배가법, 상관색인)등은 아무것도 따를 수 없는 천재적 독보적인 아이디어인 것이다.
멜빌 듀이만큼 도서관을 통한 평생교육을 강조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대학 학부생 때부터 도서관에 미쳐 일했고 미국의 기초교육을 안타깝게 여겨서 공공도서관의 활성화 필요성, 공공도서관을 통한 평생교육, 도서관 활성화를 위한 듀이 십진분류법 창안, 도서관 전문단체 ALA설립, 최초의 도서관전문지 편집, 최초의 도서관 용품회사 설립, 대학도서관장, 공공도서관장, 도서관학교장, 최초의 여성사서 선발 등 듀이 보다 도서관을 실천하며 사랑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어떤 원리나 이론의 자랑보다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정책을 입안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사사건건 당시 미국의 보수층들과 충돌이 심했다.
이렇게 도서관계에서는 매우 유명하나, 정작 일반인들의 인식에서는 존 듀이보다 인지도가 낮다. 원래 특정 학문계에서는 유명한 인물이 일반적으로는 유명하지 않은 경우가 꽤 많긴 하지만.

[1] 다만 애니 갓프리와는 아들 한 명을 두고 나중에 에밀리 맥케이 빌(Emily McKay Beal)과 다시 결혼한다.[2] 사실 듀이는 여성인권을 높이려고 그런 것이 아니고, 당시 시대의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으며, 여성들이 사서를 해야하는 이유도 도서관에 연구를 하러 온 교수들을 보조하기 위해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단기간에 저렴한 비용으로 사서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상대적으로 교육기회가 적고 임금이 낮았던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기관에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러한 영향은 그대로 전 세계로 퍼져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사서의 비율에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결과를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