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드 포르투
1. 개요
모리스 드 포르투(Maurice de Porto : ?년 ~ 1102년)는 1095년부터 1099년까지 포르투-산타 루피나(Porto-Santa Rufina) 교구의 주교며, 1102 년부터는 추기경으로서 예루살렘 왕국에 파견된 교황 사절이었다. 1101년 후반부터는 임시로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를 맡았으나 그 다음해 선종했다.
2. 생애
모리스가 추기경으로 임명되기 전의 삶은 별로 알려진 바 없다. 여러가지 모순된 기록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그는 1088년에 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고 하지만, 1095년 2월 18일에는 아직 포르투의 주교로 주앙이라는 사제가 있었다. 1098년 2월 24일에는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Santa Cecilia in Trastevere) 성당의 제단을 축성하는 기록도 있다. 이런 기록의 근거는 모두 다 불확실하고 그 과거의 역사학자들이 참고한 원전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주교로써 모리스의 첫 번째 믿을만한 기록은 교황 연대표(Liber Pontificalis)에서 나오며, 기록 상 1099년 8월 14일에 교황 파스칼 2세가 임명한 6명의 주교 사이에서 그의 이름이 처음 나타난다.
1100년 5월 4일, 파스칼 2세는 제노바 공화국에 예루살렘 왕국의 제해권을 도우라는 임무를 하달했고, 모리스를 레반트 지역의 교황 사절로 임명하고 추기경으로 서임해 새로운 십자군 국가를 교황의 통제 하에 두는 임무를 맡게 했다. 그는 7월 20일 제노바에 도착한 뒤 때마침 건설된 성 테오도로(San Teodoro) 성당의 축성을 지원했다. 그 후 8월 1일에 제노바 해군의 배를 타고 9월 25일경 안티오키아 공국의 라타키아(Latakia)에 도착했다. 하필 그 시점에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1세 공작이 최근에 북쪽 변경 지대를 정비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다니슈멘드(Danishmend) 왕조에 사로잡혔다. 당시 고드프루아 역시 사망했던 시점이였고,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이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 이동하다 통치자가 없는 안티오키아의 무방비 상태를 정비하고 나아가려는 찰나에 모리스 추기경을 접견했다. 그래서 아마 10월 중순쯤에 그는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 백작의 수행단에 동행하여 예루살렘으로 이동했다. 12월 25일, 보두앵은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 총대주교 다임베르트에 의해 예루살렘의 왕으로 등극했다.
보두앵 1세의 대관식이 얼마 지나지 않아 보두앵은 다임베르트가 십자군 국가를 배신하여 정교회 도시를 공격하는 보에몽을 말리지 않고 동참했다고 고발하며, 또한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들통났다며 의회에서 총대주교를 비난했다. 기록에는 모리스가 이러한 고발에 즉시 어떻게 대응했는지 나타나 있지는 않다. 다만 다음해에 당대 역사가 알베르(Albert d'Aix)에 따르면 다임베르트의 부활절 미사 집전을 금지했고, 모리스 스스로 집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리스와 제노바 함선에 같이 승선하여 예루살렘까지 함께 동행한 제노바의 역사학자이자 외교관인 카팔로 디 루스티코(Caffaro di Rustico da Caschifellone)는 성묘 교회에서 모리스와 다임베르트가 부활절 미사를 함께 집전했다고 기록했다.
어쨌든 보두앵과 다임베르트 사이의 분쟁은 다음 해에도 지속되었으며, 모리스는 둘 사이에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결국 1101년 가을에 모리스는 교황 특사의 전권으로 총대주교 다임베르트를 탄핵하여 폐위시켰다. 그래서 임시로 총대주교의 임무를 모리스가 대행했으며 이 상황은 모리스가 1102년 봄에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죽음 후 총대주교 자리는 보두앵 1세에 의해 에브르마르 드 테루안(Evremar de Thérouanne)이 승계했고, 교황 사절의 자리는 파리의 로베르(Robert de Paris)가 그해 가을에 성지에 도착해서 승계했다. 다임베르트는 안티오키아로 피신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안티오키아 공국의 도움이 필요했던 보두앵이 조건부로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돌아와 봉직하는걸 묵인했지만, 다임베르트는 로베르에게 또 폐위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