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데사 백국
1. 개요
1098년 보두앵 1세가 건국하고 약 60년간 존속한 십자군 백국으로, 주요한 네 십자군 국가중 가장 빈약한 국가였다. [8] 안티오키아 공국, 동로마 제국을 비롯한 주변 기독교국가들과의 사이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2. 백국의 성립
1차 십자군이 맹위를 떨쳐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룸 술탄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후 1년이 지난 1098년, 십자군 본대의 대부분은 안티오키아를 공략하기 위해 거의 1년에 가까운 공성을 계속하고 있었다.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들은 조금씩 기나긴 공성에 지쳐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던 1097년 아내를 잃고 지참금과 영지 대부분을 장인어른에게 돌려주고 만 고드프루아의 동생인 보두앵은 털터리가 되었고, 그에게 남은 것은 약간의 자금과 500여명의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 뿐이었다. 처음에는 형 고드프루아와 함께 순수한 신앙심과 모험심으로 시작한 원정이었지만, 이제 이 원정에서 영토를 얻지 못하면 그는 거리에 나앉게 생긴 판이었다. 영지가 절실한 상황에서 그는 언제 점령할지 모르는 안티오키아에 사활을 걸 수 가 없었다. 그는 그와 같은 처지인 보에몽 1세의 조카 탕크레드와 함께 각각 500여명과 300여명의 기사들만을 이끌고 십자군 본대에서 이탈했다. 탕크레드는 킬리키아의 타르수스를 점령하러 서쪽으로 향했고, 보두앵은 에데사를 향해 동쪽으로 말을 몰았다.
2.1. 혼란의 에데사
당시 에데사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에데사에 사는 백성들의 대다수는 시리아 정교회교도거나 아르메니아인이었고, 명목상으로는 셀주크 제국의 칼리프와 술탄 아래 있었지만, 지배자는 친 동로마 제국파인 늙은 영주 토로스였다. 이 개판 5분전인 구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약 30여년 전 있었던 만지케르트 전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가 일어나고 에데사 일대가 혼란스러워지자 아르메니아와 바스푸라칸[9] 의 영주들은 로마 제국에게 반기를 들었다. 바실리우스 2세가 평화적으로 바스푸라칸의 아르메니아 영주들을 복속시키고 나서 이들은 거의 반 독립에 가까운 지위를 얻었다. 원래 정교회를 믿는 로마제국과 문화권이 다르던 아르메니아인들은 로마의 지배가 약해지자 서로 패권을 놓고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에데사는 생각보다 오랜 기간동안 셀주크의 지배에 저항한 동로마의 거점이었다. 1087년경에야 셀주크 투르크는 요새지대에서 항거하던 동로마 제국의 군대를 에데사에서 걷어낼 수 있었다.에데사의 군주는 동방 정교회인 토로스였다. 토로스는 후계자도 없는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늙은이 였다. 그는 백성들의 그릇된 행동을 바로잡을 힘도, 사악한 이교도들을 막아낼 힘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
하지만 셀주크의 지배는 선형적이었고, 아직도 동로마를 따르는 아르메니아계 영주들이나 아예 두 세력에게서 모두 독립할 것을 원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의 소국들이 이 지역에 들어섰다. 토로스의 경우는 전자에 가까웠다.[10] 1094년경 지리한 전쟁 끝에 셀주크 제국의 술탄 투투쉬는 에데사 영주 토로스에게 명목상으로 충성을 바치는 대신 기독교 신앙을 믿어도 될 것을 허락하고 책봉했다. 토로스는 혈통상 아르메니아 왕국의 헤툼 왕조 출신이었지만 젊었을 적부터 동로마 제국에 충성했기 때문에 정교회 신앙을 강요하여 신민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1098년, 전황은 토로스와 에데사에게 좋지 못하였다. 투르크군은 에데사를 2개월간 포위하다 물러나 에데사는 황폐해져있었다. 그러는 동안 멀리 서방에서 온 젊은 기사가 정예군 500명을 이끌고 에데사로 온다는 소식은 토로스를 기쁘게 해 주었다. 이미 그는 안티오키아 근교에서 거룩한 기독교 군대가 이슬람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지도자중 하나인 보두앵이 와 준다는 것에 너무나도 감사한 상황이었다. 보두앵이 에데사로 도착하자 마자 토로스는 그를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고 에데사의 후계자로 삼았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에데사 근교의 투르크 요새 투르베셀을 점령해 보이며 토로스를 만족시켰다.
2.2. 보두앵, 에데사의 백작으로 옹립되다
토로스와 보두앵은 아르메니아의 풍습대로 입양 의식을 행했다. 에데사의 백성들 앞에서 보두앵은 하체를 제외한 모든 옷을 벗은 채 토로스 내외에게 안겼다. 토로스는 그의 육신을 안고 손수 화려한 옷을 입혔다. 이로써 입양의 의식은 확인되었고, 보두앵은 토로스의 정당한 후계자가 되었다. (중략) 보두앵은 아비된 토로스의 명으로 유프라테스 근교의 사모사타에서 바르두크 등의 무슬림 영주들이 무단으로 점령한 에데사의 요새를 그의 병사들을 이끌고 되찾아 주었다. - 아헨의 알버트 『예루살렘 기행의 역사 』 -
에데사의 아르메니아 신민들은 보두앵을 해방자로 생각했다. 정교회 신앙을 강요하지도 않고, 젊고 잘생긴 데다가, 4년간 시달려온 투르크군을 박살내준 그의 모습은 늙고 인기 없는 토로스와는 딴판이었다. 에데사 시민들은 토로스가 그를 후계자로 삼은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와 시리아 정교회를 믿는 백성들은 보두앵을 옹위하기 위한 쿠테타를 준비했다. [11] 그가 사모사타에서 에데사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 신민들은 토로스를 향한 봉기를 시작했고, 모두에게 외면당하던 토로스는 에데사 성곽 안의 별채에 갇힌 꼴이 되었다. 보두앵은 그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지만, 에데사 신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토로스와 그의 아내는 별채에서 추방당하자 마자 성난 시민들에게 능지처참당했다. 에데사 시민들은 보두앵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치며 그를 에데사의 영주에 임명할 것을 지방 귀족들에게 요구했으며, 이해 응하여 12명의 주교, 토착 귀족으로 이루어진 대표단이 그를 에데사의 둑스[12] 로 임명했다. 에데사의 정권교체는 곧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귀에도 들어갔다. 제국 입장에서는 시리아 지역에서 항거하며 끝까지 동방 제국에게 충성했던 토로스가 제거된 것은 슬픈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어떤 행동을 취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알렉시오스는 보두앵이 에데사를 차지하는 것을 묵인할 수 밖에 없었다. 최초의 십자군 국가는 이렇듯 역설적이게도 기독교도 군주의 살해와 함께 세워졌다.에데사의 사악한 조언자들이 보두앵에게 이미 상속을 약속한 토로스를 암살하고 도시를 차지하도록 부추겼다. 토로스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달아났다.토로스는 밧줄을 성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그는 반역자들이 쏜 화살에 맞아 거리로 떨어졌다. 그들의 군주의 머리를 잘라 창에 꽃은 뒤 광장으로 가져와 모든 시민에게 보여줬다. - 한 십자군 기사의 기록 -
2.3. 1차 십자군의 전략거점이 되다
일단 에데사를 점령하고 보니, 십자군은 이곳이 천혜의 요새지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알레포와의 국경에 세워진 투르베셀과 리벤델 요새는 인구는 적지만 모술과 바그다드의 무슬림 영주들이 함부로 기동할 수 없게 만드는 첨탑 역할을 했고,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퍼진 농지는 오랜 세월동안의 관개농업때문에 조금씩 척박해지고 있는 중이었지만, 십자군에게는 가뭄 속 한줄기 빗방울 같은 중요한 보급처였다. 에데사의 전술적 진가는 모술의 아타베그 케르부카가 대군을 이끌고 안티오키아의 무슬림 영주 야기 시안을 지원하려고 떠난 순간에서 발휘되었다. 안티오키아를 공격하는 도중 역포위될 위기를 감수할 수 없었던 케르부카는 후방의 에데사와 보두앵을 먼저 제거해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다. 그러나 보두앵과 에데사는 3주간의 격렬한 포위전을 견뎌내며 십자군의 탱커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 동안 십자군은 장장 8개월간의 포위전을 끝내고 안티오키아를 점령했다. 십자군의 주력군이 1099년까지 남하를 계속하는 동안 에데사의 보두앵은 그들을 지원하고, 에데사로 십자군 기사들을 끌어들이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기 위해서 보두앵은 피치 못하게 영지의 신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십자군 기사들을 봉신으로 임명할 수 밖에 없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분노하여 1098년 9월에 보두앵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하였다. 보두앵은 아르메니아인들의 분노를 이해하고 음모에 참가한 토착 귀족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처벌을 내렸으며[13] 오히려 더 큰 직책에 등용하였다. 1099년 5월, 십자군이 결국 염원했던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그에 따라 각자의 공국을 가꾸고 있던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1세와 보두앵도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1099년 12월, 그들은 교황의 특사와 순례자들의 무리를 따라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명망 높은 십자군 귀족들 사이에서 고드프루아가 새로운 예루살렘 왕국의 수호자로 임명되었다. 교황의 사절들은 각각의 십자군 영주들을 각 봉토에 임명해주었지만 보두앵은 어째서인지 이 의식에서 빠졌다.[14] 십자군 영주들은 1100년 1월에 각자의 영토로 돌아갔다.
2.4. 보두앵,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되다
성묘의 수호자 고드프루아는 왕위를 사양하고 즉위식을 포기하자 마자 남하하여 다미에타, 하이파를 포함한 곳곳의 파티마 왕조 영토를 차지하여 예루살렘의 안전을 확고히 했다. 그렇게 분주히 정벌을 계속하던 1100년 7월, 그는 갑자기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유언장에는 예루살렘 왕국을 동생 보두앵과 그 혈족들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상속할 수 없다고 못박혀 있었다. 그러나 교황 특사 다임베르트와 보에몽 1세는 십자군 왕국을 자기 손에 넣을 계획을 꾸미고, 보에몽이 먼저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만들려 했다. 그러나 고드프루아의 충신들은 예루살렘의 다윗의 탑을 통제하고 보두앵에게 서신을 보내 예루살렘에 최대한 빨리 입성해야 한다고 기별했다. 보두앵에게는 다행히도 보에몽은 그해 8월에 다니슈멘드 왕조에게 사로잡혔다. 보두앵은 이제 급할 것이 없었다. 그는 멜리테네로 가 다니슈멘드의 특사들에게 보에몽을 선처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멜리테네에서 기사 50여명을 모집한 후 백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1100년 10월 왕국 통치에 필요한 금은과 약 9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15]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 와중 다마스쿠스의 이슬람 영주가 그를 기습하려 했지만, 주변 백성들이 먼저 귀띰해준 덕에 그는 오히려 다마스쿠스 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 마찬가지로 보에몽이 왕이 되길 원했던 그의 친척 탕크레드가 자파 시에서 그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십자군들이 이를 거부하고 나섰다. 보에몽과 결탁한 다임베르트 주교는 시온 산으로 도망쳐 대관식을 거부했지만, 예루살렘 시민들은 오히려 보두앵을 격려하며 그에게 예루살렘 대공 직위를 수여했다. 그는 1100년 11월 초에 도착해 1개월간 예루살렘에서 병력을 모은 후 그해 12월 21일 파티마 왕조의 아스칼론을 공격해 빼앗았다. 이로 인해 십자군 사이에 그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고, 다임베르트는 어쩔 수 없이 그해 크리스마스에 그의 대관식을 치를 수 밖에 없었다. 보두앵은 프랑스에 있던 옛 영지와 에데사를 사촌지간인 보두앵 2세에게 수여했다.보두앵의 즉위를 막아야 합니다. 그의 즉위는 예루살렘 교회, 나아가 전 기독교 영토의 쇠퇴를 가져다 올 것입니다. - 교황 특사 다임베르트, 보에몽 1세와 작당하며 -
3. 보두앵 2세의 치세
보두앵 1세가 보두앵 2세를 찾았을 때, 보두앵 2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군사령관 직위에 있었다. 공작 보에몽이 사로잡힌 상황에서, 공국은 혼란스러웠고, 탕크레드를 비롯한 노르만 귀족들이 겨우 겨우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해 버티는 중이었다. 1100년 10월 2일, 그는 에데사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안티오키아 자체도 그 안위가 걱정되는 시기였으므로 그가 끌고 나올 수 있는 병력은 수백여명 뿐이었다. 보두앵 2세는 에데사 내에서 그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멜리테네에 있는 아르메니아 영주의 딸 모르피아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몇 개월 후인 1101년, 위기는 시작되었다. 예루살렘 왕 보두앵이 대관을 위해 병력을 끌고 간 공백을 틈타, 주변 지역인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 아미르가 병력을 끌고 에데사 주변의 촌락 Saruj를 공략했다. 보두앵 2세는 수백의 기사들을 이끌고 Saruj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아르튀크 씨족의 병력은 그들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에데사에 있는 십자군으로는 Saruj를 탈환할 수 없다고 판단한 보두앵은 안티오키아로 가서 노르만 기사들과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에데사로 데려왔다. 그러는 동안 Saruj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했다. 포위에 견디다 못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문을 열었고, 마을 한가운데 있던 요새만이 홀로 저항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두앵은 기병대를 이끌고 아르튀크군을 후방 기습했고, 적군은 와해되어 도망쳤다. 그는 이슬람과 내통한 시민들을 모두 죽이고 새로 얻은 병력들과 함께 에데사로 돌아왔다. 다음 해인 1102년에는 그의 숨통을 틔위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의 사촌인 조슬랭이 소규모 십자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서부로 향한 것이었다. 그는 조슬랭을 반기며 그와 기사들에게 유프라테스 서부 요새와 농경지의 지배권을 주었다.그는 육체적으로 허약해 보였고, 겁쟁이처럼 행동했다. - 에데사의 마태오 -
3.1. 보두앵 1세와 안티오키아 공국을 지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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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십자군 본대인 예루살렘 왕국은 파티마 왕조와 기나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스칼론은 이미 몇 차례나 파티마와 십자군을 번갈아가며 주인이 바뀌었다. 보두앵 왕의 형 고드프루아가 파티마군 수만명을 도륙하고서 잠깐 점령할 뻔했던 아스칼론은 무너질듯 말 듯 하며 버티기를 반복했고, 1102년에는 해로와 육로를 통한 대규모 지원군까지 도착하였다. 아스칼론은 공격당하던 처지에서 신생 예루살렘 왕국을 무너트릴 전초 기지로 변모했다. 보두앵 왕은 십자군 영주 모두를 소집하여 아스칼론에 모인 이집트 대군을 물리치려 하였다. 에데사 백작 보두앵은 백국을 조슬랭에게 맞긴 후 남하하였고, 탕크레드는 다니슈멘드에 포로로 잡힌 안티오키아 공작을 대리하여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그들은 예루살렘 근교에서 몇 차례 소규모 승전을 거두고 도착했지만, 그들이 도착한 1101년 9월에는 이미 보두앵 왕이 홀로 파티마군과 대적하여 그들을 다시 아스칼론 성 안으로 몰아넣은 상태였다. 일단 도착한 두 영주의 병력은 곧바로 아스칼론을 포위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스칼론 포위전이 지리하게 길어지자 탕크레드와 보두앵은 더 이상 자신들의 영지를 비워둘 수 없었다. 두 군주가 각각의 공국으로 돌아가버리자, 포위전은 흐지부지되고 파티마와 십자군은 짧은 휴전에 들어갔다.
그들은 각자 영토로 돌아가자마자 서로간의 내홍에 시달렸다. 안티오키아 공국 섭정 탕크레드가 에데사 주변의 영토에 욕심을 부린 것이다. 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 베르나르도는 이러한 무리한 팽창을 제지하기 위해, 원래의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이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혼자서는 다니슈멘드의 가지와 담판을 지을 수 없었던데다가, 이대로 공국을 삼키고 싶었던 탕크레드의 방해로 보에몽은 벌써 몇 년째 공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베르나르도는 에데사 백작에게 도움을 청했다. 에데사 백작도 탕크레드가 걱정되었으므로 남이탈리아의 보에몽 친척들과, 자신을 후원하는 아르메니아인 귀족들에게 돈을 모아서 결국 1103년, 보에몽 1세를 풀어 줄 수 있었다. 그는 풀려나자마자 탕크레드를 내쫓았다. 금전적 지원에 감사하는 뜻에서 보두앵은 아르메니아인 귀족들에게 자신의 요새와 영지에 대한 더 많은 권한을 허락해주었다.
3.2. 하란 전투 (1104년)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하란은 에데사 백국에서 매우 가까운 지역이었다. 하란을 지배하고 있던 모술의 아타베그 지르키미쉬와 보두앵은 서로를 약탈하고 약탈하면서 악연을 쌓아갔다. 1104년 지르키미쉬 주도의 이슬람 연합군이 에데사를 공략했다. 에데사 근교의 라스 알 아인이라는 지역에 모여있던 보두앵의 군대는 보에몽 1세에게 전갈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고, 자신의 사촌 조슬랭의 군대에게도 소집령을 보냈다.
세 군세가 모이자 십자군은 지르키미쉬의 군대를 압도했다. 지르키미쉬는 부유한 요새도시 하란으로 기동하여 수비를 준비했다. 십자군은 하란을 포위했는데, 이 도시의 소유권을 가지고 보두앵, 조슬랭과 보에몽, 탕크레드는 반목을 시작했다. 지르키미쉬는 두 군대의 혼잡한 지휘체계를 보고 도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기와 연합군 대장 소크만의 궁기병들을 이끌고 하란을 빠져나가 패퇴하는 척 기동을 시작한 것이다. 승리를 원했던 십자군은 꼬박 이틀동안 지르키미쉬와 소크만을 쫓았다.
그러나 이틀째 되는 날, 지르키미쉬의 궁기병들은 반전하여 그들을 역습하기 시작했다. 안티오키아군과 에데사군은 서로 꽤 간격을 둔 채 좌우익으로 나뉘어있었고, 궁기병들에게 쉽게 포위되어 박살났다. 보에몽과 탕크레드는 겨우 몸만 가지고 도망쳤다. 하지만 에데사군은 도망칠 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두 사촌형제는 그대로 사로잡혔다. 지르키미쉬는 일단 그 둘을 사로잡았지만, 하란의 피해도 상당했고, 얻은것도 별로 없이 모술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동지 소크만은 그럴거면 차라리 보두앵과 조슬랭을 자기에게 팔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지르키미쉬는 그거라도 가지고 돌아가자는 심정으로 대충 둘을 소크만에게 팔아넘겼다. 이후 소크만은 아르투크 왕조를 개창하게 되고 후계자인 동생 일 가지는 1119년에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안티오키아 공국을 패배시킨다.
이 패배는 십자군 전쟁 초기의 가장 큰 위기중 하나였다. 병력을 홀랑 날려먹은 안티오키아 공국은 세력을 회복한 동로마 제국의 상대가 되지 못라게 되었다. 이 공백을 틈타 알렉시오스 1세는 안티오키아 공국 주변의 라타키아와 킬리키아의 탕크레드 영지를 포함한 여러 지역을 수복했고, 아르메니아 영주들도 옛 주인인 동방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해버렸다. 무슬림들은 에데사 주변의 영토들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보에몽 1세는 여기서 잃은 병력을 매꾸기 위해 남이탈리아로 돌아가 노르만 기사들을 추수해서 돌아와야만 했다.
3.3. 파란만장한 포로 생활
에데사는 바로 지르키미쉬와 소크만의 포위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그나마 탕크레드가 섭정을 맡아 겨우 수백의 기사들을 추려서 지르키미쉬군을 격퇴한 덕분에 백국은 생존할 수 있었지만, 지르키미쉬는 또 병력만 날리고 손해만 봤다. 그는 그나마 몸값을 받을 만한 둘을 팔아치운걸 뼈저리게 후회하고는 소크만 몰래 병사들을 시켜 조슬랭과 보두앵을 빼돌렸다. 이 전투에서 지르키미쉬는 자신의 아내를 탕크레드에게 빼앗겼는데, 지르키미쉬는 자기 아내를 돌려주면 1만 5천 베장트의 금 혹은 보두앵 둘 중 하나를 내 주겠다고 보에몽과 탕크레드에게 제안했다. 그런데 여기서 탕크레드와 보에몽은 에데사 백국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속셈으로 1만 5천 베장트를 받아내고는 조슬랭과 보두앵을 내팽개쳐 버리고 만다.
보에몽은 탕크레드를 안티오키아 섭정으로, 다른 친척이자 다음 공작이 될 루지에로를 에데사의 섭정으로 임명한 채 노르만 기사들을 모으러 남이탈리아로 떠나버렸다. 이제 조슬랭과 보두앵은 자력으로 탈출해야 했다. 그들은 지르키미쉬가 다스리는 모술로 끌려갔다. 포로 생활을 하는 도중인 1107년, 모술은 자왈리라는 용병대장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는데, 그만 지르키미쉬가 그들에 의해서 포로로 잡혔다. 그들을 사로잡은 지르키미쉬가 끌려가자 조슬랭에게는 기회가 찾아왔다. 조슬랭은 자왈리를 찾아가 6만 디나르를 줄 테니 그와 보두앵을 풀어달라는 제안을 했고, 자왈리는 이를 승낙하여 조슬랭을 몸값을 수금하게 하기 위해 풀어주었다.
조슬랭이 떠난 동안, 모술의 상황은 급박해졌다. 바그다드의 칼리파 무함마드 1세 타파르는 그가 임명한 지르키미쉬를 붙잡고 모술을 차지한 자왈리를 파면하고 맘루크 마우두드를 모술의 아타베그로 임명했다. 자왈리는 모술에서 가까운 한 요새로 도망쳤다. 조슬랭은 조슬랭 나름대로 난관에 봉착했는데, 그가 겨우 3만 디나르 밖에 모으지 못한 것이었다. 조슬랭은 원금의 반인 3만 디나르를 들고 자왈리를 찾아가 자기가 대신 인질이 되고, 에데사에서의 무슬림 활동을 어느 정도 인정해 줄 테니 3만 디나르로 보두앵을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자왈리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보두앵은 1108년 여름에 겨우 풀려나 에데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3.4. 안티오키아 공국과의 다툼
그가 에데사를 비운 몇 년 동안 백작의 자리는 보에몽의 노르만 친척들이 전부 집어먹고 있는 상황이었다. 탕크레드는 백국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보두앵을 쫓아냈고, 그는 겨우 겨우 자신을 따르는 수백 명의 기사들과 함께 요새 도시 투르베셀로 도망쳤다. 탕크레드는 투르베셀로 육박하여 포위를 준비하였다. 핀치에 몰린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이 그에게 다가왔다.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이 십자군 국가끼리서의 내전을 막기 위해 탕크레드와 보두앵의 평화 협상을 제안한 것이었다. 협상은 투르베셀에서 열렸지만, 이미 우세한 편이었던 탕크레드가 물러설 리가 없었으므로 결론은 지지부진했다. 실질적인 지원은 아르메니아와 동로마 제국에서 왔다. 보두앵의 우방인 아르메니아 영주 바일이 미약하게나마 수백 명의 지원군을 파병했고, 킬리키아에서 탕크레드가 힘을 쓰는 것을 억제하고 싶었던 동로마의 지방 영주이자 세바스토스였던 램프론의 오신[16] 도 페체네그 기병대 300명을 그에게 지원했다. 세 군대가 안티오키아 공국을 압박하자 탕크레드도 버티지 못하고 가톨릭 교회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보두앵은 결국 1108년 9월 18일에 4년간의 포로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백작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왈리와의 약속을 지켜 지금까지 잡아들인 무슬림 포로들을 모두 방면하고 에데사 부근에서 모스크를 지을 수 있게 해 주었으며, 기독교로 개종해 무슬림들을 살해했던 배교자들을 이슬람교도 손에 넘겨주어 처분했다.
자왈리는 약속을 성실히 지킨 그가 마음에 들었다. 마찬가지로 보두앵을 위해 인질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조슬랭도 비록 이교도이지만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자왈리와 보두앵은 곧 동맹을 맺게 되었다. 둘의 동맹은 주변의 영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특히 자왈리와 사이가 좋지 않던 알레포의 아미르 라드완과, 보두앵과 겨우 몇주 전까지 전쟁상태였던 안티오키아 공국의 탕크레드가 바로 그랬다. 결국 둘은 공동의 적인 자왈리와 보두앵을 견제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고, 자왈리가 알레포를 침공하자 서로의 동맹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에데사의 기사들과 안티오키아의 기사들이 서로 전투를 벌이는 기괴한 장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안티오키아 공국은 에데사와 자왈리의 군대를 대파하고 두 군대를 투르베셀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그 전투는 워낙 치열해서 에데사 성내에서는 보두앵이 죽은 것으로 착각해 섭정단을 꾸리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보다못한 상위 군주인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1세는 두 군주를 예루살렘 교회의 이름으로 소집하여 순례자의 산에서 중재시켰다. 보두앵 왕은 탕크레드에게 갈릴레아 공작령을 하사하는 대신 에데사를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탕크레드는 그 명령에 마지못해 복종했다. 보두앵 2세는 왕의 도움을 받은 대가로 트리폴리 공성전을 지원하였고. 결국 1109년 4월경에는 탕크레드도 자신의 영지로 떠나고, 트리폴리 시도 십자군에게 함략되었다.
3.5. 마우다드의 1차 침공
십자군 국가들이 안정되는 동안 셀주크 술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맘루크 마우다드에게 병력을 양성시키게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일 가지, 소크만 등의 주변 토후들에게도 소집령을 내려 유프라테스 동부의 에데사 영토를 공격할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1110년 4월에 만반의 준비를 갖춘 무슬림 연합군이 에데사를 공성하기 시작했다. 에데사 백작은 보두앵 왕에게 다급하게 헬프콜을 날렸지만 보두앵 왕도 베이루트를 공성중이였기에 바로 지원을 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5월 경, 베이루트가 십자군의 손에 떨어지자 왕은 소수의 방위군만 놓아두고 십자군 영주들을 소집해 에데사로 향했다. 에데사 백작 보두앵의 사촌 조슬랭과 원수인 탕크레드, 그를 지지하는 아르메니아 영주들의 병력이 모두 예루살렘 왕국의 기치 아래 모이자, 그 군세는 상단한 크기였다. 놀란 마우다드는 에데사 공성을 포기하고 하란으로 후퇴했다.
몇 차례의 소규모 승리를 거둔 후에, 탕크레드와 보두앵은 이슬람교도들의 응징 원정이 서로의 탓이라고 우기며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이 싸움 속에서 탕크레드는 에데사는 원래 동로마 제국 시절 안티오키아의 속령이었다는 주장을 다시 끌고 나와 사정은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은 그의 주장을 묵살하고 에데사의 손을 들어줬다. 전투는 계속 승세로 나아가고, 십자군이 오히려 무슬림 촌락을 공격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예루살렘 왕은 더 이상 소집령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에데사의 방위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 동편에 있는 모든 기독교도 인구를 에데사 백국의 방위 범위 안인 유프라테스 서편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기독교도 난민들이 유프라테스를 넘는다는 사실을 안 마우다드는 그 틈을 노린 반격을 지시했다. 유프라테스 강변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수천명의 기독교도들이 죽어나갔다. 먼저 강을 건너 이 사태를 지켜보던 에데사 백작 보두앵은 자기 휘하의 한줌도 안되는 병력을 데리고 마우다드의 진영으로 뛰어들어 난민들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기세 좋게 돌격해 적을 베어나가던 에데사의 기사들이었으나, 중과부적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 보두앵을 구해 낸 건 결국 원수인 탕크레드와 안티오키아의 군대였다. 에데사는 동부 유프라테스를 잃었지만, 백국에 모인 난민들에게서 징집한 병사들고 세금으로 어느 정도 상황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영토를 잃은 조슬랭은 투르베셀로 가서 영주를 자처하였다.
3.6. 마우다드의 2차 침공
1111년, 마우다드는 다시금 에데사를 포위했다. 십자군에 시달리던 샤이자르의 에미르는 에데사 백국보다 탕크레드의 안티오키아를 공격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마우다드를 설득했다. 마우다드는 그의 의견을 듣기 위해 샤이자르로 향했고, 포위는 잠시 풀리게 되었다. 샤이자르에 도착한 마우다드는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 토그테긴과도 동맹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마우다드가 동맹을 모으는 동안 그의 주력군과 봉신들은 에데사 주위에 진지를 구축하고 재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슬림 연합이 다시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침공은 다시 십자군 전체에 대한 위기로 작용했다. 보두앵 왕은 모든 십자군에게 다시 소집령을 내렸다. 에데사 백작 보두앵도 세력을 회복한 조슬랭과 휘하 아르메니아 영주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마우다드가 동맹군들과 함께 에데사로 돌아오는 동안, 그의 주력군과 봉신들은 지원을 기다리지 못하고 메소포타미아의 각자 영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십자군의 수가 무슬림군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동맹들은 퇴각하기 시작했고, 마우다드도 샤이자르를 거쳐 모술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듬 해 다시 에데사를 공격했다. 이번에 그는 반간계를 시도해, 에데사의 아르메니아인들을 매수하여 성문을 열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슬랭이 그 계획을 먼저 눈치채고 막아내었다. 1112년 이후로도 십자군을 압박하려고 했던 마우다드는, 결국 그해 아사신파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보두앵은 투르베셀에 있는 조슬랭이 그곳을 독차지하고 세력을 키우는 것이 못마땅했다. 투르베셀은 에데사의 중요한 보급기지였는데, 조슬랭이 그곳을 다스리게 되자 에데사로 식량이 오지 않아 식량부족 현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중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는 거짓 전갈을 보내 조슬랭을 에데사로 소환하고, 조슬랭이 에데사로 도착하자 마자 사로잡아 투르베셀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조슬랭은 그에게 실망하여 자신의 병력을 끌고 갈릴레아로 가 버렸다. 1114년과 1115년에도 각각 부르수크가 이끄는 셀주크 제국의 대군이 에데사를 공격했지만,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 루지에로와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의 무슬림 영주들, 예루살렘 왕국의 동맹군이 1115년에 살민에서 셀주크군을 박살내면서 에데사 백국은 안정을 찾았다.
4. 조슬랭 1세의 치세
4.1. 보두앵 2세, 예루살렘의 왕이 되다
1118년 7월, 보두앵은 이집트와의 기나긴 전쟁 중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유언장에는 두 명의 후계자가 적혀 있었는데, 자신의 동생인 외스타슈와 에데사의 보두앵 2세였다. [17] 보두앵 2세는 친척의 죽음을 모르고 예루살렘으로 부활절을 보내러 출발했다. 우연의 일치로, 보두앵이 도착한 날은 선왕의 유해가 카이로 근교에서 운구되어 온 바로 그날이었다. 역사가들의 기록은 하루 이틀 정도는 차이나지만, 그가 유언이나 왕의 죽음에 대해 모르고(혹은 출발하기 전에는 모르고) 도착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몇몇 대귀족들은 외스타슈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갈릴레아의 대영주가 되어 있던 조슬랭과 왕국의 공위를 걱정하는 영주들의 추대로 보두앵 2세로 즉위하게 되었다. 에데사 백작위는 조슬랭에게 돌아갔지만, 그는 갈릴레아의 방위를 향해 에데사로 가지 않았다.
4.2. 조슬랭아! 또 잡히냐!
조슬랭은 이제 예루살렘 왕국에서 가장 거대한 영지를 가진 영주가 되었다. 그의 직함은 갈릴레아의 대공이자 투르베셀의 군주, 에데사의 백작 등 다양했다. 그의 재력 덕분에 백국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122년에 또 무슬림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번에 그를 사로잡는 영광을 얻은 장군은 발락 가지라는 영주였다. 그는 한창 상승세를 탄 투르크 영주였는데 1120년에는 경쟁 상대인 투르크 부족들과 연합한 동로마 제국의 둑스, 콘스탄티노스 가브라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르투크 왕조의 우두머리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이듬해에 조슬랭을 구하러 온 보두앵 2세마저 사로잡았다. 조슬랭 휘하의 아르메니아 군인들은 그를 되찾기 위한 작전을 세웠다. 죽음을 불사한 아르메니아 특공대 50명은 상인으로 위장해 그들이 갖힌 요새로 잠입한 뒤, 투르크 병사들을 밤에 몰래 살해하고 요새를 차지하였다. 보두앵과 조슬랭은 자유를 찾았으나, 발락 가지는 탈옥 사실을 알아채고 곧바로 요새를 포위했다. 조슬랭은 보두앵을 구하러 오겠다고 다짐하고 혼자서 도망쳤다. 다행이도 왕이 없는 1년간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단은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협정으로 지원을 약속받고 이집트의 공세를 몰아냈으며, 보두앵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프랑스의 선량공 샤를과 외스타슈를 왕으로 삼으려 한 시도도 있었지만, 둘 다 왕위를 거절하면서 해결되었다. 조슬랭 본인은 보두앵의 아내 모르피아와 함께 보두앵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발락은 이미 1124년에 반란으로 죽었고, 일가지의 아들 티무르타쉬가 보두앵을 데리고 있었다. 조슬랭은 안티오키아의 아자즈, 아니텝등의 성곽을 내 주고 8만 디나르를 줄 테니 보두앵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티무르타쉬는 보두앵의 어린 딸을 조약이 성사될때까지 데리고 있겠다는 조건으로 보두앵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보두앵은 풀려나자 마자 에데사 백작 조슬랭과 안티오키아 지원군을 이끌고 자신의 딸이 잡혀있는 알레포 성채를 두들겼다. 보두앵의 딸은 풀려났고, 조슬랭도 그 기세를 몰아 1125년에는 아자즈 주변의 많은 땅을 얻었다. 모술에서 쳐들어오는 무슬림군도 1126년에 보두앵 왕과의 연합으로 박살낼 수 있었다.
4.3. 어이없는 죽음
1131년, 그는 알레포 근교를 공격하고 여러 촌락을 약탈했다. 만족스럽게 알레포를 공성하러 가던 도중, 갑자기 땅이 푹 꺼지더니 그와 그의 말이 사라져버렸다. 알레포 공병들이 십자군 기사들을 막기 위해 파놓은 지뢰에 조슬랭이 그대로 걸려버린 것이다. 그는 심각하게 다쳐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소식을 들은 다니슈멘드의 가지는 그대로 조슬랭이 죽었고, 그의 군대가 와해되었다고 믿고, 에데사의 북방을 공략하고 케이손의 요새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조슬랭의 아들 조슬랭 2세가 다니슈멘드의 군대에 쫄아서 요새를 지원하기를 포기해버리자 가지의 오해는 더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나 조슬랭은 아직 자신의 군대를 지휘할 만큼의 여력이 있었다. 에데사 백국의 대군은 알레포의 진지를 버리고 바로 북방으로 향하여 다니슈멘드군을 역포위할 기세로 달려들었다. 가지는 조슬랭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 싸움을 해보지도 않고 도망치고 말았다. 이는 조슬랭의 마지막 승리였다. 그는 에데사로 개선하는 중 길에서 숨지고 말았다. 백국은 이제 그의 아들의 것이 되었다.
5. 조슬랭 2세의 치세
5.1. 요안니스 2세의 동방 원정을 훼방놓다
조슬랭 2세가 에데사 백작이 된 시기부터 이미 에데사에 암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장기 왕조의 이마드 앗 딘 장기는 모술에 이어 알레포까지 장악한 후 십자군을 향해 대성전을 벌이려 했다. 마지막 부흥기를 맞은 황혼의 로마 제국은 현제 요안니스 2세의 치세 아래 십자군 공국들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고 있었고, 1131년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시점으로 안티오키아 공국은 작년에 죽은 보에몽 2세 이후 후계 문제를 두고 내분이 한창이었으며, 예루살렘 왕국은 보두앵 2세의 죽음과 새 왕 풀크가 즉위하여 혼란기를 맞고 있었다. 에데사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게 되었다. 거기 더해 조슬랭 2세 자신도 트리폴리 백국의 내분에 끼어들어 에데사 영지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는 그와 안티오키아 공작을 향한 거대한 공세가 준비되고 있었다.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가 이끄는 4만 5천의 대군이 1138년 오론테스 강을 넘어 안티오키아와 에데사의 영지로 진입한 것이다. 요안니스는 프랑크 귀족들에게 샤이자르와 알레포를 점령해 주는 대신 안티오키아를 동방 제국의 직할지로 인정하라는 협박을 가했다. 안티오키아의 공작 레몽은 원래 조슬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둘은 로마 황제가 자신들의 영지를 집어삼키는것을 그냥 지켜볼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두 국가가 합쳐서 1만명도 안되는 군대로 요안니스의 정예 부대를 이길 가망성도 없었다. 그렇기에 두 영주는 황제군이 샤이자르를 공성하는 동안 태업을 벌여 시간을 끌고, 안티오키아의 민심을 선동하여 황제가 그들을 노예로 만들러 왔다는 반 로마 감정을 퍼트렸다. 소규모 주둔군과 안티오키아 성채에 있었던 요안니스는 어쩔 수 없이 시내에서 빠져나와 군대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5.2. 장기 왕조의 공세를 막기 위해 분전하다
요안니스 2세의 친정이 꼭 안티오키아와 에데사에 안좋은 영향만 미친 것은 아니었다. 요안니스는 동방 황제답게 큰 씀씀이로 두 귀족에게 선물을 안겨줬다 동로마 제국군이 준 제일 큰 이익은 장기 왕조가 동로마에게 꼬리를 내리고 십자군에 대한 공세를 늦췄다는 것이었다. 그 짧은 유예기간동안 조슬랭은 아르튀크 씨족이 다스리는 디야르바르크의 카라 아르슬란과 연합했다. 1142년, 십자군의 도발과 장기 왕조의 성장세를 꺾으러 출정한 요안니스 2세가 1143년, 킬리키아의 황야에서 유시를 맞아 허무하게 사망했다. 안티오키아 공국은 동방 제국이 더 이상 안티오키아에 간섭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의 막내아들이자 황태자인 마누일을 무시하며 도발했다. 결국 1144년에 마누일의 4만 8천 군세가 안티오키아의 성문을 두들기자, 안티오키아 공작과 근방의 프랑크 영주들은 맨발로 황제의 말을 끌며 굴욕적인 개선식을 벌일 수 밖에 없었다. 조슬랭은 1144년에 카라 아르슬란과 알레포를 공성하며 장기왕조를 밀어붙이는 듯 했으나, 장기는 단지 동방 제국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의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해 11월, 백국의 멸망이 닥쳐왔다.
5.3. 에데사 함략되다
장기에게 완벽한 타이밍이 다가왔다. 에데사 백작의 군대는 알레포에서 아직 돌아가는 중이었고, 안티오키아 공작은 킬리키아에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는 중이라 에데사를 지원할 수 없었다. 장기는 조슬랭보다 먼저 에데사로 향해 성채를 포위했다. 대주교 휴고가 에데사에 남은 몇 안되는 기사들과 함께 수비전을 지원하는 동안 조슬랭은 다급하게 모든 곳에 지원군을 요청했다.예루살렘의 멜리장드 여왕은 영주들을 소집해 에데사를 지원하게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방어군이 얼마 안된다는 것을 안 장기는 느긋하게 쿠르드족, 튀르코만 용병들이 오는것을 기다리며 에데사 근교에서 공성 무기를 건설했다. 방어군은 용맹하게 저항했지만, 장기의 군대가 에데사의 성벽 아래에 터널을 파고 성벽을 무너트리려 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결국 정문 주변의 성벽이 무너지며, 장기의 군대가 쏟아져 들어왔다. 1144년 크리스마스의 일이였다. 방어군은 성내에 있던 요새로 들어가 농성하였으나, 에데사의 시민들은 그러지 못했다. 피난가려는 시민들이 쏟아져나오며 압사사태가 발생했고, 대주교 휴고도 그 혼란속에서 선종했다. 방어군은 이틀을 더 버텼지만, 장기 군대는 12월 26일경에 결국 성채를 완전히 점령했다. 에데사에 살고 있는 모든 라틴인들은 사로잡혀 처형당했지만, 아르메니아인이나 정교회를 믿는 토착민들은 방면되었다. 조슬랭의 에데사군과 예루살렘 왕국의 지원군이 에데사 성채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장기는 예루살렘 왕국군이 생각보다 많은 데다, 모술에서 심상치 않은 반란의 징조가 일어난 것을 보고 군대를 돌렸다.
5.4. 항쟁과 멸망
아직 에데사의 주력군은 격파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조슬랭은 투르베셀을 새 도읍으로 삼고 항전을 계속했다. 하지만 에데사 백국의 북방과 유프라테스 서부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남았다. 조슬랭은 결국 동방 로마의 마누일 1세 황제에게 투르베셀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모두 팔아버렸다. 1146년, 장기가 자신의 노예에게 암살당하자, 조슬랭은 기회를 노려 에데사 성채를 다시 함략시켰다. 하지만 내성의 요새만은 아직도 조슬랭에게 항복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그해 11월에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이 돌아와 내성과 호응하여 에데사를 다시 빼앗았다. 조슬랭은 에데사에 남은 기독교인들을 하나라도 더 탈출시키기 위해 분투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에데사의 함략 소식은 서방 세계를 뒤흔들었고, 2차 십자군의 조직으로 이어졌다. 그는 투르베셀을 거점으로 새 십자군이 그를 지원하기를 바랬으나, 2차 십자군은 에데사 근방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채 다마스쿠스로 향하고 말았다. 1150년, 조슬랭은 안티오키아로 지원을 요청하러 떠났다가 누르 앗 딘의 튀르크멘 기병대에게 붙잡혔다. 그는 알레포에서 실명의 형벌을 당하고 남은 생을 누르 앗 딘의 지하감옥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의 가족은 남은 영지인 투르베셀마저 마누일 1세에게 팔아버렸다. 1150년, 투르베셀도 누르 앗 딘의 손에 떨어졌고, 그의 아들 조슬랭 3세는 1159년까지 에데사 백작을 자처했지만, 아크레 공성전에 잠시 참여한 것을 제외하고는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