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위야 2세

 


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2.2. 즉위 직전
2.3. 평화주의자 칼리프와 개혁 정책
2.4. 요절


1. 개요


우마이야 왕조의 3대 칼리파. 재위 기간 683.11 ~ 684.2.

2. 생애



2.1. 유년 시절


4대 정통 칼리파 알리의 피살, 그리고 그의 장남 핫산의 칼리프 직위 포기로 1차 피트나가 끝나자, 이후 열린 슈라 (부족 회의) 에서 무아위야 1세의 즉위에 대해 토의가 이어질 무렵, 그의 아들 야지드가 아들을 보았다.
중대한 시점에 태어난 손자에게, 무아위야 1세는 그가 비범할 것이라 여겨 자신의 이름인 무아위야를 붙여주었다. (661.3) 손자 무아위야는, 이후 암살을 피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의 궁정 안에서만 지냈다.

2.2. 즉위 직전


부왕 야지드 1세 말년 (683년) 의 히자즈에서는, 이븐 욱바와 이븐 누마이르가 이끄는 우마이야 군대가 이븐 주바이르와 대결하며 메디나를 함락, 약탈하였고 메카에서 투석기 공격 & 화공을 병행한 공방전을 벌이며 카으바의 목재 부분이 불타 없어지는 등 신성 모독, 성지 훼손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때, 야지드 1세가 낙마 사고로 숨지자, 무아위야가 즉위하였는데, 메카를 포위 공격하던 이븐 누마이르는 포위를 풀고 이븐 주바이르에게, 충성할 테나 함께 다마스쿠스로 진격하자고 하였으나 의심 많은 아븐 주바이르는 이를 거절하였다.

2.3. 평화주의자 칼리프와 개혁 정책


무아위야 2세는 독실한 무슬림이었고 성지에서의 전쟁에 반대하여 이븐 누마이르 지휘의 시리아 군을 철수시켰고, 이븐 주바이르와 강화가 성립되었다 어쨋거나 내전에 지친 무슬림들은 그의 결정에 환호하였다.
이슬람 울라마의 단합을 소망하였던 무아위야 2세는 내전의 종식을 위하여, 이븐 주바이르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24세의 무아위야의 말에 60대의 주바이르가 제안을 거절하고 이집트 남부와 이라크를 침공하자, 무아위야는 수많은 무슬림을 희생시키느니 차라리 칼리프 직을 포기하려 하였다.
무아위야 2세는, 칼리프 퇴위 가능성 언급 2주 만에 사망하였다. (화병/우마이야 일족에 의한 독살) 그가 사망하자 이븐 주바이르의 세력은 이집트, 아라비아, 이라크, 시리아 동부에 이르게 되었다. (다만 다마스쿠스 진격을 유보하여 결국 우마이야 조가 내부를 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고, 이것이 반란 실패 요인이 되었다.)
무아위야 2세는 그의 짧은 치세 동안 3가지 개혁 법안을 내었다. 첫째는 여성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 둘째는 사형제 폐지, 셋째는 모든 무슬림의 자카트(자선금) 납부 의무화였다. 기득권 계층은 이에 큰 위협(특히 마지막 법안)을 느꼈고, 그의 사후에 이 개혁들은 모두 폐기되었다.

2.4. 요절


짧은 재위 기간의 이 칼리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이루어진 이유는, 무아위야 2세가 근대적 정신을 지닌 인물이었고, 또 무아위야 1세의 직계(수피안 가문)의 마지막 칼리파이기 때문이다.
무아위야 2세는 후대의 우마르[1]와 함께, 우마이야 왕조의 개혁 군주로 평가받는다. (다만 후자의 개혁안은 후대 아바스 왕조에 의하여 어느 정도 실현되었으나, 전자의 경우는 그러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1] 라쉬둔 우마르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