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군인 법원 난입 사건

 



1. 개요
2. 배경
3. 전개


1. 개요


1964년 5월 21일 새벽 대한민국 국군 군인들이 판사 저택에 난입해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학생들에게 영장을 발부할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2. 배경


한일협정 체결로 국민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고 1964년 5월 20일 오후에 서울시민 4천여 명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 대회'를 열고 박정희 정부가 매판자본과 반민족적 악질 재벌을 두둔하고 있으며, 이를 '민족적 민주주의'로 꾸며 합리화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후 행진하던 학생들은 이화동 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였고, 그 결과 100명에 가까운 학생과 민간인, 경찰이 부상을 입었으며, 188명이 집시법과 특수공무집행방해로 연행되었다. 경찰은 연행자 107명에 대한 영장을 지방법원에 신청하였으나, 13명에게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3. 전개


1964년 5월 20일 밤, 법원 영장담당판사는 전날 밤 종로경찰서에서 신청한 11명의 구속영장 중 8명은 소명 불충분으로 기각하고 3명에 대해서만 발부하였고, 동대문경찰서에서는 신청했던 8명분을 자진하여 회수하였다. 담당판사는 21일 새벽 27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검찰에게 신청받아 자택에서 새벽 3시까지 검토하였다.
그런데 5월 21일 4시 반에 최문영 대령을 위시한, 총칼로 무장한 육군 제1공수특전단(현재는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 소속 군인 13명이 구급차를 타고 법원에 난입하였다. 군인들은 검사실을 거쳐 6시경에 숙직실을 찾았으나, 숙직 판사가 귀가하였기에 6시 10분에 동소문동에 있는 판사의 자택에 들이닥쳤다. 그러면서 '''군의 충정을 이해해 달라''', 학생들을 구속하라는 요구를 하고 1시간 20분 뒤인 7시 30분경에 철수하였다.
수도경비대 수사과는 법원 난입에 가담한 군인 8명을 특수주거침입과 무단이탈 및 명령 위반으로, 사건과 관련된 예비역 2명을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하였지만 3명은 7월 28일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고 나머지는 징역 3년 ~ 5년형을 복역하였다. #
이 사건을 카드뉴스로 요약한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공식 블로그
저 사건을 주도한 최문영은 형 선고 이후 기자회견에서(1964년 7월 11일자 조선일보 기사) '''"내가 한 일은 사리사욕을 떠난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이며 역사의 심판이 있을 것"''', '''"내가 그러지 않았다라면 지금 이렇게나마도 사태는 수습 안 되었을 것"'''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