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계자

 

勿稽子
1. 개요
2. 상세


1. 개요


신라 초기 내해 이사금 시대의 장수.

2. 상세


삼국사기에 열전이 있는데, 집안은 평범하고 작았지만 어릴 때부터 기개가 있었다고 한다.
한반도 남부의 여덟 나라가 연합을 결성해 안라국을 공격하자(포상팔국 전쟁), 안라의 사신이 힘이 부족해 신라에 구원군을 요청했다. 석우로를 대장으로 출진했는데 이 전쟁에서 물계자는 큰 공을 세웠지만 왕손에게 미움을 사서 그 공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공을 인정받지 못해 원망스럽다고 왕에게 말하지 않냐고 묻자 공을 자랑하는 것은 지사(志士)가 할 일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후 3년 뒤 패배했던 포상팔국 중 골포국, 칠포국, 고사포국 세 나라가 3년 뒤 신라 수도 경주시의 동남쪽인 갈화성, 즉 지금의 울산으로 보복하러 쳐들어왔지만 내해 이사금이 직접 물계자 등을 부장으로 거느리고 친정에 나서 세 나라의 군사를 패배시켰다. 여기서도 물계자는 수십여 명을 잡아 목베는 공을 세웠지만 이번에도 그 사이가 안 좋았던 왕족의 모함을 받았는지 공을 인정받지 못해, 결국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가지고 사체산(師彘山)으로 들어가 평생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위와 같은 간략하고 안타까운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지만.. 공을 기록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했다는데 어째서 천년쯤 지난 고려시대 김부식삼국사기를 편찬할 시점까지 물계자의 저런 억울한 일화가 멀쩡히 전해졌는지 의문. 포상팔국 전쟁 이후 어느 시점에 물계자의 군공에 대해 재평가가 있었던 듯 하다.
현대 학계에서 물계자 열전에서 주목하는 것은 물계자라는 사람 자체보다는 고대 한반도의 국제전쟁이었던 포상팔국 전쟁의 전황이 꽤 자세하게 기록돼있는 게 훨씬 더 큰 안습한 상황이다. 거의 아오안인 다른 열전의 수많은 인물들보다야 낫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