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라국

 


1. 소개
2. 국가명
3. 역사
3.1. 전기 가야(3세기 후엽 ~ 4세기)
3.1.1. 문헌
3.1.2. 고고학
3.2. 후기(5세기 ~ 6세기 중엽)
3.2.1. 고고학
3.2.2. 문헌
3.3. 기타
3.4. 멸망 이후
4. 유적
5. 같이 보기


1. 소개


安羅國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일원에 위치했던, 일명 아라가야로 알려져 있던 가야의 소국 중 하나. 삼국지에 의하면 변한 시대부터 있었던 나라인데, 그 위치가 논란이 거의 없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가야 안에서도 다른 작은 나라들이 안라를 형님격으로 모시고 따랐을만큼, 양대 강국 금관가야대가야 이외에 나름대로 족적을 남긴 나라.

2. 국가명


일반적으로 '''아라가야'''라고 불리우나, XX가야란 이름은 고려 태조 왕건후삼국시대 통일 이후 개편된 행정 제도하의 이름으로 실존 당시의 정식 국명은 아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으로, (광개토왕릉비의 안라인수병 구절을 안라국으로 파악한다면)《광개토왕릉비》와 《일본서기》에서는 안라(安羅)와 아라라(阿羅羅)로 나타난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선 《가락국기》를 인용, 아시량국(阿尸良國)으로 기록했다.[1] 그 외에 아나가야(阿那加耶), 아야가야(阿耶伽耶) 등 비슷한 여러 기록이 남아있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고유어/지명문서에서 아라 가야를 찾아보자.

3. 역사


초중고교 교육 과정에는 전기 가야의 맹주 금관가야, 후기 가야의 맹주 대가야만 부각되어 아라가야는 나머지 가야 중 하나 정도로만 배운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야 이전 변한 시절부터 주요 국가로 꼽힌데다 김해 금관국 쇠퇴 이후, 고령의 대가야와 고성과 산청의 소가야 연맹과 함께 후기 가야 연맹의 한 축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6세기 쯤에는 고령 대가야가 안라의 외교 방향을 뒤따를 정도였다.
고고학과 문헌기록으로 안라의 역사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단 안라국에 관한 문헌사료는 주로 일본서기의 간접적 기록들의 재구성이고[2] 그나마 일본서기의 안라국 기록도 비교적 자세한 건 멸망 직전 6세기, 즉 말기 몇십 년 것이 거의 대부분이라 그 이전 수백 년은 유물을 통한 고고학적 접근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기록된 변한 시절을 보면 안야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금관국(구야국)과 함께 변한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눈에 띄게 독자적인 호칭인 축지(踧支)를 가지고 있을 정도라고 적고 있다. 진왕이 있는 목지국을 제외하면 한반도의 마한 55국, 진변한 24국을 통틀어서 독자적 우대호칭은 단 4개 나라만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3] 이 중 나머지 둘이 마한 쪽 나라이므로 영남지역에서는 김해의 구야국과 함께 둘뿐인 사례다. 일본서기에서도 긴메이 덴노 5년 기사에서 임나(가야권 전체)가 안라국을 혹은, 백제본기를 인용한 주석에서는 안라를 아버지로 삼고 따랐다고 하고 있다. 이런 걸 보면 가야 안 여러 나라 중에서 안라국은 거의 큰형님 나라 급으로 취급됐던 듯 하다.
그런데 이렇게 기록상으로는 안라국이 무언가 대단한 권세나 상징성을 가진 것처럼 많이 나오지만 정작 고고학적으로는 그 시기 함안이 주변지역에 비해서 특출난 흔적이 없기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든 가야사 복원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특히 4세기 이전 유적은 거의 없다시피한 수준으로 부실하고, 같은 시기에 고고학적으로도 강국의 면모가 드러나는 금관가야 김해나 신라 경주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정도로 세력권이 미약하다.
후기 가야 제국(諸國)에서도 주변 소국들이 안라국의 외교노선을 대체로 잘 따라와주는 리더십을 보여주고[4] 대가야와 안라국만 '한기'[5]가 아닌 '(王)' 칭호를 쓰거나 나름대로의 분화, 체계화된 관직체계가 엿보이는 등 여타 소국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대가야와 더불어 높은 위세를 보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고고학적으로 보이는 실제 영역은 지금의 함안군 땅을 채 벗어나지 않는 정도로 보인다. 즉 고고학으로 알아낸 물리적 국력으로는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긴 있었던 듯한데 그게 뭔지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안라국이 변한 가운데 유력한 세력이 될 수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정황상, 함안은 낙동강의 가장 큰 지류 남강의 남쪽에 위치하고 남해 바다에도 가까우므로 김해 구야국이 통제하는 낙동강 하류 수로를 이용하지 않아도 바깥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덕분이라고 추정할 수는 있다.[6]
이렇게 안라국이 문헌기록상 잘 나갔다는데 고고학적으로 초기에는 별로 그렇다할만한 근거가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안라국이 초창기에는 지금의 마산합포구 진동면 지역에 있다가 점차 함안으로 중심지가 이동했다고 봐서 고고학과 문헌 기록 사이의 불일치를 해결하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7] 그 외에 함안 북쪽 외곽 법수면 황사리, 윤외리에 있는 목곽묘에 주목해서 거기쯤에서 기원했다가 가야읍 지역으로 중심지가 이동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계에는 이처럼 이동 과정을 설명할 수 없거나, 특정 시기의 자료가 없을 때 중심지 이동설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도 있다. 물론 중심지가 이동하는 것이 명확하게 관찰되는 사례도 있긴 있지만[8] 확실하지 않아도 거의 한번씩은 나오는 설이라 비판적 시각도 많다.
함안 분지에서 3세기 ~ 4세기 대 유구가 잘 나오지 않는 이유로 또다른 설로는, 초기엔 대부분 평지에 무덤을 조성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다. 당연히 이 땅들은 훗날 이 되면 그나마 다행이고(...), 평지가 부족한 경상도 지역 특성상 인간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 파괴되어 잔존하기 어렵다. 즉 말이산 고분군의 위치와 구조를 미뤄봤을 때 지금의 함안 가야읍 시가지가 있는 바로 거기에 초기 무덤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특히 3세기 ~ 4세기 대 무덤은 그 당시 중심지 바로 근처에 조영되었고 무덤이라고 눈에 띄는 성토분구가 거의 없는데다가, 4세기 이후 삼국 시대에 진입하면서 인구가 폭증하기 때문에 시가로 개발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한번 파괴된 3세기 ~ 4세기 대 고분이 있던 자리는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인간 활동이 일어나며, 특히 근 현대에 엄청난 인구 증가, 도시화, 그리고 결정타로 철근 콘크리트 건물(특히 아파트) 들이 건설되면서 유구가 엄청나게 파괴되었다. 결정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구제 발굴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은게 1990년대라는걸(...) 상기시켜 보면 5세기 성토분구를 쌓기 전 고분들은 거의 다 파괴되었을 것이다.
발굴 조사가 가장 활발히 진행된 영남 지역의 경우 특히 초기 국가가 형성되고 대규모 취락이 생기는 3세기 ~ 4세기 대의 고분 자료가 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기원전, 후부터 5세기 ~ 6세기까지 고분 자료가 풍부하게 조사된 금관국의 경우 정말로 천운이 따라서 평지에 조성된 목곽묘, 목관묘들이 많이 조사된 경우다[9].
안라국의 중심 고분군인 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경우 북쪽 능선에는 4세기 후엽의 고분이 조사되고,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5세기 ~ 6세기로 시기별 축조 지역이 확실한 편이다. 따라서 3세기 ~ 4세기 대 고분은 말이산 북쪽의 현재 시가지가 되어버린(...) 곳에 있었을 것이다. 특히 3세기 ~ 4세기 무덤들은 성토 분구가 없어서 무덤인지 뭔지 알기 힘들기 때문에[10] 아주 손쉽게 파괴되었을 것이므로 중심지 이동설을 과신할 필요는 없다.

3.1. 전기 가야(3세기 후엽 ~ 4세기)



3.1.1. 문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금관국과 함께 독자적인 호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라고 적고 있다. 진한/변한에서도 주변지역보다 위상이 높았던 나라라는 뉘앙스를 주는 기록이다.

3.1.2. 고고학


문헌과 달리 함안의 중심 고분군인 말이산 고분군에서는 5세기 이전 분묘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전기 가야에서 아라 가야가 어떤 위상이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4세기 대 조업한 것이 확실한 우거리 토기 가마 요지에서는 아라 가야의 특징적인 도질 토기 문화가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으며, 황사리 등 함안의 주변 지역에서 이 우거리요지에서 출토된 양식의 토기들이 출토된다.
그리고 3세기 혹은 4세기 초로 편년되는 독자적인 양식의 토기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토기의 연대를 3세기 중후엽으로 끌어 올리느냐, 4세기 초로 내리느냐에 따라서 영남 지역의 역사상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는 학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즉, 3세기 후엽에 독자적인 도질 토기의 양식이 확인되었다면 이는 안라국이 금관국과 맞먹는 생산 체계와 독자적인 제의 체계를 갖춘 것으로 해석되며, 앞서 언급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금관국과 더불어 안라국이 마한 왕으로부터 우대받았다는 기사와 부합된다. 반면, 기존 금관 가야의 역할을 강조하는 부산대 쪽 편년안에 의하면 이 토기들은 4세기 초나 심지어는 김해로부터 이입품일 가능성도 지적한다. 따라서 이에 따른 역사상은 금관국의 안라국, 심지어 사로국에 대한 압도적인 우위(신경철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영남 지역의 패자')를 점했다고 해석된다.
연대 문제에 대한 양쪽 의견이야 금관국 문서에도 보듯이 그렇게 쉽게 타협될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이 시기의 문제가 아니며 전체적으로 봤을때는, 초기 철기 시대의 개시 문제, 목곽묘의 출현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부산대 쪽 편년은 대체로 BC 108년 낙랑군 설치로 철기의 생산 체계의 성립, 엘리트 층을 나타내는 목관묘가 출현했다고 보며 기원후 2세기 후엽 중국의 환령지말의 혼란으로 인한 중국계 유민의 발생과 한반도유입으로 목곽묘가 출현하면서 엘리트 층에서도 격절된 존재(즉 영속 지배층)가 출현했다고 보고 있다. 반면, 정인성 등 경북 쪽 연구자들은 전방위적으로 이러한 연대관을 비판하고 있으며, 서북한 지역의 주요 유구, 유물들의 연대가 실은 BC 108년 이전, 즉 위만 조선의 것이며 따라서 그것과 교차된 영남 지역의 목관묘 출현 및 철기 연대도 격상된다는 증거를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첫 단추부터 첨예하게 대립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뒷쪽 시기의 연대도 모두 차이가 나는 셈이다(이런 문제를 경사편년의 문제라고 한다). 심지어는 절대 연대 자료가 풍부한 시기인 6세기 대에도 복천동 고분 출토 청자완에 대해서도 부산대 쪽 편년은 보수적으로 느린 연대를 취하고 있다.
아무튼 연대관에 연대관 논란은 따로 문서를 만들어서 논쟁해야하니 접어두기로 하고 학계에서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안라국의 고고학적 특징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함안 양식 도질 토기는 금관국의 도질 토기와 기술적으로 유사하며, 출현 시기도 비슷하거나 조금 더 늦다. 상술한대로 경북 쪽 연구를 취하면 같거나 거의 비슷하고, 부산쪽 연구 결과를 취신하면 한 분기 -25년- 정도 느리다. 그런데 어느 쪽을 취하더라도 그 당시의 최신 세라믹 제조 기술의 총아인 도질 토기 제작 기술을 가장 빠르게 갖춘 정치체 중 하나로 분류되는건 사실이다.
안라국 도질 토기의 구체적인 양상은 금관국과 비슷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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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국시대 토기인 와질 토기에서 도질화(경질화)되는 단경 호류에 성형시 승문타날이 가해지고 일정한 간격으로 침선을 돌려 돗자리 문양(승석문)이 전면에 베풀어지며 양쪽에 귀가 붙어 있다. 또한 기벽이 대단히 얇으며 구연부나 동체부가 대칭적인데다가 아래에는 토기 종류나 장인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시문한 '기호'인 '도부호'가 그려져 있다. 이 기종을 승석문양이부호라고 부르며 아라 가야 양식의 특징적인 토기로 본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아무런 조형적인 특징이랄게 없는 단경호인데도 '아! 함안 토기다!'라면서 구분이 될 정도이다.
또한 고배는 '工'자 모양의 대각에 삼각형 투공(투창이 아니다!) 뚫린 무개고배가 있으며 이는 단각에 외절구연의 접시가 붙은 금관 가야의 이른바 '외절구연고배'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또 파수부가 묻지 않은 노형기대도 금관 가야와 구분된다.
이 토기들은 당대 경쟁 국가인 금관국의 대성동 고분군에서도 출토되며, 낙동강 건너 복천동은 물론 대구, 칠곡, 그리고 진한의 유력국이었던 사로국(후에 신라)의 고분군에서도 발견될 정도로 넓은 지역에서 출토된다.
특히 아라 가야 양식의 단경호는 4세기 후엽 대구 신당동 요지에서도 모방품이 제작되었는데, 전체적으로 형태는 비슷하지만 기벽이 두껍고 타날 간격에서 차이가 관찰되며 결정적으로 도부호가 시문되지 않은 점이 큰 차이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함안 양식 토기들이 단순히 영남 지역 전체로 운반되어 부장된 것 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도질토기 생산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금관국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외절구연고배를 비롯한 파수부노형기대, 단경호 등이 진영 분지, 창원, 고김해만, 부산 동래 지역 등에서만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것과 대비된다. 즉, 금관 가야의 특징적인 양식은 금관 가야 권역 안에서만 유통된 반면, 아라 가야 양식의 토기들은 부산, 김해를 비롯한 경주, 대구, 칠곡 등 범 영남 지역에 전체적으로 유통된다. 심지어는 남해안 지역을 따라 영산강 유역의 호남 지역과 일본 열도에서도 반출된다.
이상 서술하 바가 의미하는 것은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안라국은 구야국(금관 가야)와 거의 비슷한 시기 혹은 간발의 차이로 당대의 최첨단 기술인 도질 토기 제조 기술과 생산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 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발달된 성형 기법을 보유하여 이미 4세기 전반 대에 기벽이 대단히 얇은 양질의 도질 단경호를 생산하 * 독특한 스타일의 토기 기종군들도 보유하고 있다.
  • 또 안라국의 토기는 금관 가야나 사로국과 같은 유력국을 포함한 영남 지역의 여타 소국의 지배 계층의 분묘에 부장될 뿐만 아니라, 그곳의 도질 토기 생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 4세기 이전 안라국의 양식은 진변한 공통의 양식을 계승하는 것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시작한 경주와 김해에 비해 발전이 느리다고 볼 수 있고, 이는 함안 지역에 4세기 이전 거대 고분군이 나타나지 않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5세기 후 함안의 발전이 시작하면서 오히려 아라 가야계 토기의 분포가 함안 일대에 한정되는데 금관가야 '트레이드 마크'가 금관 가야 권역 안에서만 유통되는 양상과 비견될 수 있다. 한편, 중심 고분군이 별로 발달하지 못한 소가야계 토기가 전남 - 경남 남해안 일대에 널리 부장되는데 역시 중심 고분군 없이 넓은 토기 유통망을 보이는 3세기 ~ 4세기 아라 가야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러한 안라국의 위상은 변한의 국가 중 금관국과 함께 유이하게 마한 왕의 우대를 받은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위상을 가진 국가였기 떄문에 금관국과 경쟁하던 신라는 그를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안라국과 긴밀히 교류한 것으로 보이며, 4세기 포상팔국 전쟁으로부터 신라의 지원군을 받는 등의 사실도 그를 방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함안 안라국의 중심 고분군인 말이산 고분군에서의 3세기 ~ 4세기에 해당하는 고분의 조사 사례가 없는 것이 연구에 어려움을 겪게 한다. 말이산 고분군에서 5세기 이전 분묘의 조사가 절실히 요망된다고 하겠다.

3.2. 후기(5세기 ~ 6세기 중엽)



3.2.1. 고고학


위에서 언급한 함안 안라국의 중심 고분군인 말이산 고분군에서 현재 조사된 고분은 대부분 5세기 이후의 고분이다(도항리(문)35호 등 4세기 후엽의 고분이 일부 조사되긴 했다). 이 5세기 대 아라 가야 고분은 다른 영남 지역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봉토를 축조하는데, 이는 이전 시기 목곽묘와는 현저히 다른 전통이다. 즉, 단순히 매장과 재례에서 그치던 무덤의 기능이 보다 가시적인 효과가 영속적으로 지속되는 지역 집단의 랜드마크 형태로 분묘가 변했음을 의미힌다. 영남 지역에서는 5세기 영남 지역의 패자라 할 수 있는 경주를 정점으로 대규모의 고분들이 각 지역에 등장한다. 이를 고총이라 부르며 이전 시기 고분과 구분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특히 함안 안라국의 고총군은 가야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낙동강 이서 지역에서는 후기 가야의 맹주인 대가야 다음 가는 규모와 크기를 자랑한다. 다만 매장 주체부의 변화는 더딘 편이어서 다른 지역보다 늦게 석곽을 채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이러한 도항리 고분군의 위상에서 대가야 다음가는 후기 가야의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전 시기 큰 특징이었던 아라 가야 양식의 토기는 그 양식이 이전 시기와는 구별되면서도 분포 범위는 축소되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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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안라국 양식의 고배는 4세기 안라국의 특징적인 형식이었던 '工'자형 대각의 폭이 넓어지며, 화염 문양의 투창이 뚫린다. 이전 시기의 아라가야의 특징적인 토기라 할 수 있는 승석문양이부호(繩蓆紋兩耳付壺)도 입구가 C자형으로 부드럽게 외반하면서 양 귀가 없어진다. 또 장식성이 높은 고사리 모양의 손잡이들이 부착된 통형기대라던지, 마찬가지로 고사리가 가운데 붙은 각배 등 조형미가 뛰어난 토기들이 여전히 제작된다.
다만 그 분포 범위는 그야말로 '범 영남 지역'에 분포하던 이전 시기와는 달리 함안 분지 내로 축소된다. 이렇듯 토기 분포 양상만 보면 이전 시기보다 훨씬 쇠퇴하였다고 해석되어도 무방할 정도인데, 그렇지 않다.
이전 시기 가야 중 유력국인 금관국 토기가 부산 - 김해 - 창원 - 진영 외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것은 독자적인 생산 체계 뿐만 아니라 유통망까지도 제어할 수 있었던 권력이나 시스템이 존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같은 시기 광역 분포망과 비슷한 수준의 제작 기술과 체계를 갖추고 있던 아라 가야보다 금관국의 시스템이나 권력이 보다 우월했다고 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시기 함안 안라국은 이전 시기 금관 가야가 그랬듯이 독자적인 토기 제작 기술과 양식을 보유하면서, 그 유통까지도 제어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선 것이다. 이를 통해 4세기 안라국보다 5세기 안라국이 좀 더 발전된 국가 체계를 보여준다고 보기도 한다.[11] 이와 함께 상당한 규모의 고총군과 그 규모에서도 반파국만큼은 아니지만 전 시기 금관국을 초월하는 국가로 보기도 한다. 비록 토기 권역은 좁아졌을지언정..
다만 고총 내에서 출토되는 마구나 무기류들은 신라와 반파국산이 섞여 있는데, 특히 신라산이 우월하다. 역시 신라 지역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합천 다라국에서 반파국 양식 토기와 무기류, 장신구류가 신라산과 경쟁하는데 반해, 다라국보다 좀 더 낙동강 서쪽에 위치한 안라국에서 신라산 무기류나 마구류가 많은 것은 다소 의외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안라국이 반파국이나 고자국 등 여타 가야국과 경쟁하면서 낙동강 동안의 패자 신라와 친선 관계를 맺은 결과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독자적인 양식의 무기나 마구의 생산을 안했다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의 양식이 없을 뿐이지(즉, M16 및 온갖 무기류들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거나 라이센스 생산하던 한국을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분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독자적인 금공품 양식의 부재는 안라국의 명백한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화려한 금공품 문화와 장식 마구 등 독자적인 문화를 가졌던 백제, 신라, 그리고 그와 구별되는 금공품과 무기체계를 갖춘 반파국보다는 국가 체계가 덜 잡힌 상태였다는 것이다.

3.2.2. 문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라국은 5세기 ~ 6세기에도 이전 시기처럼 여타 가야 소국들보다 우월한 지위로 인정받았는데, 이는 이전 시기부터 내려오던 변한의 우대국의 지위와 함께 국가적으로도 반파국 다음가는 국가 체계를 정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리더쉽은 반파국이 백제에 의해 섬진강 유역을 상실하고, 이에 대응하여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었지만 모종의 사태로 동맹이 파탄나는 혼란이 가중되는 520년 대, 530년 대에 본격화된다. 반파국은 섬진강 유역의 상실, 이어서 중요 교역항인 다사진(지금의 경남 하동)을 백제로 부터 상실하고, 이에 대응한 것이 신라와의 결혼 동맹인데 노골적으로 친신라를 밀어붙이는 과정 중에 몇몇 가야 소국들이 반파국에 불만을 품은 점, 이로 인해 종국적으로 결혼 동맹이 파기되고 신라가 가장 가까운 가야소국인 금관국탁기탄, 그리고 곧 탁순국 등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낙동강 서안 지역으로의 침략을 노골화하면서 여타 가야 소국들은 외교를 말아먹은 반파국보다는 안라국을 중심으로 대응하게 된다. 그것이 일본서기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기록된 안라회의(고당회의), 웅진회의, 제1차, 제2차 사비회의로 묘사되는데 여기서 여타 가야 소국들은 반파국보다는 안라국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에 대해서 일본서기에서는 가야 소국들이 안라국을 형님처럼 모신다라고 묘사될 정도이 점에서 가야 말기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시기 안라국은 백제와 신라와 왜국 사이에서 외교로 밀당을 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예전 전성기 금관국이나 반파국처럼 확실하게 주도권을 잡고 우세한 모습을 보여주는 정도는 아니다.
안라회의에서는 안라국은 높은 회의용 건물(고당)을 지어서 백제, 신라, 왜국의 대표를 모으고 신라가 털었던 남가라(금관국), 탁기탄 등의 재건과 가야의 독립 보장을 시도한다. 하지만 백제와 신라는 안라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이용하려 했을 뿐이었다. 신라를 규탄하는 상황이므로 애초에 신라는 신라 제 17 관위 체계중 제 11위에 해당하는 내마급을 보내는 식으로 별 관심없음을 어필했고 백제는 이를 가야의 영향력 확대의 기회로 삼으려 생각해 백제 제 1위 관등 체계에 해당하는 좌평을 보냈지만, 안라의 나제 어느 쪽에도 무작정 접근하지 않는 자주적인 태도 때문에 백제 측도 크게 이득을 보진 못했다.

『백제 본기』를 취하여 쓴 것이다. 거기에 “신해년 3월에 군대[12]

가 나아가서 안라(安羅)에 이르러 걸탁성(乞乇城)을 쌓았다.

- 일본서기 케이타이 덴노 25년(531년)

그러나 백제 역시 신라와 마찬가지로 가야 지역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안라국도 체급이 차원이 다르게 커진 백제에 의해 반속국화되며, 안라국을 중심으로 이뤄진 외교적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어 인근 탁순국이 신라에 차례차례 멸망하는 등의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걸탁성을 쌓았을 시점에 완전히 백제에 속박된 건 아니고, 백제가 530년대 후반에 이키미 등 친백제 왜인 위주로 설치한 안라왜신관[13][14]을 조종해, 친안라성향 왜인인 이나사(移那斯). 마도(麻都) 등을 통해 안라국의 이익을 위해 안라왜신관이 행동하도록 하며 줄타기 외교를 시도하는 등 생존을 모색했다. 백제는 '임나의 하한' 지역에 군령, 성주를 파견해 침투를 계속했고 가야가 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살아남기 위해 사비회의가 개최되는 등 외교적 시도는 계속됐다. 그러나 사비회의에서 백제는 가야 독립 보장 약속을 확실히 하지 않으려 했고, 결국 안라국은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방향을 바꿔 고구려에 백제 정벌을 비밀리에 요청해 시간을 벌려고 했다.
고구려도 평소에 영 사이가 안 좋았던 백제를 손봐줘야 할 이유는 충분했기에 548년, 6천 병력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나제동맹에 의거한 백제신라 연합군은 고구려군을 크게 깨트리고(독성산성 전투) 고구려군 포로를 통해 안라국 및 왜신관이 공격을 요청한 것을 알아채게 된다. 당연히 백제는 이 사태에 대해 안라와 왜 쪽에 분노해 추궁했는데, 왜국 본국은 자기들은 이번 사태에 연루되지 않았고 왜신관의 이나사, 마도에게 따져줄테니까 의심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백제 편을 들었고 결국 변명거리도 외교 카드도 없는 안라국은 지난번 사비회의의 백제가 내건 조항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는 가야의 어느 한 나라나 왜가 백제의 의사에 반대해 행동하는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백제의 반속국으로 전락한 가야권은 나제 연합군의 한강 유역 공격[15]관산성 전투에도 백제 측의 우군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가 백제에 크게 이기면서 더이상 백제군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게 됐고 신라 앞마당의 한 끼 식사거리로 전락한다. 대가야와 달리 안라국의 멸망은 사서에 직접 나오지 않는데, 일본서기 흠명 22년 기사에서 신라가 왜에 대비하기 위해 아라(=안라)의 파사산에 성을 쌓았다고 하였으니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전인 561년 경에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인다.

3.3. 기타


고대 한반도의 국제 전쟁이었던 포상팔국의 난 기록 해석과 관련해서도 초기엔 안라국이 이들 배후에서 금관국을 공격했다는 설이 다수였으나, 2000년대에는 역으로 금관국과 함께 가야 초기를 주도하던 안라국이 포상팔국의 공격 대상이었다는 설이 나오고 있다. 4세기 초반의 화염 투창 고배의 대유행을 이와 연결시켜 포상팔국의 난이 4세기 초에 발생했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습하여 세력을 확장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포상팔국 전쟁은 워낙 다양한 해석이 있고 복잡한 문제라 해당 문서를 참조하라.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함안에 거대 수혈식 봉분이 조성되는 건 5세기는 되어서이고 최대 영역은 함안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
광개토대왕 남정 이후 함안 말산리 말이산 고분이 축조되면서 크게 발전하고, 나중 반파국(대가야)에 대항하는 가야 남부 일대 국가들의 주축이 되기도 했다. 고고 자료로 볼 때 아라가야 유물과 반파국의 유물은 서로 공존하지 않는다. 역으로 소가야 토기창녕 양식 토기 등은 아라가야 양식의 토기와 공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이라 완전히 신뢰할수는 없지만 안라회의도 안라국의 주도 하에 개최한 국제 회의인 만큼 후기 가야 연맹에서 강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주도하였으나, 점차 신라의 압박이 강해지자 성왕에게 요청해 사비회의를 주선했으나 결렬되고, 생존을 위해 고구려와 손을 잡았으나 고구려군도 독성산성 전투에서 나제동맹군에 패배해 이후 백제에 종속됐다가 관산성 전투로 백제가 약해지자 결국은 신라에 복속되었고 그 자리에 성산 산성이 축조되었다.

3.4. 멸망 이후


왕릉급 고분군인 말이산 고분군의 조영도 문헌상 멸망 추정 시점인 560년 전후로 중단된다.
통일신라의 행정 구역 9주 5소경에서 알 수 있듯 신라는 서라벌(경주시)을 중심으로 전국에 작은 수도 소경을 두었는데, 통일 이전에 함안에는 아시촌(阿尸村) 소경을 설치했다고 한다. 尸는 향찰로 ㄹ 받침을 뜻하므로 알촌, 알마을로 위의 안라, 아라와 사실상 같은 이름이다. 통일 이전에는 신라 전국에서 손에 꼽히는 주요 도시였지만 안습하게도 통일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밀려난 듯, 9주 5소경의 5소경에는 들지 못했다.[16]
함안 성산산성에서는 엄청난 양의 간독 유물이 출토되었다. 한국 간독유물의 대부분이 성산산성에서 나왔는데, 안라국 시대는 아니고 신라에 병합된 뒤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 신라의 지방 통치의 흔적이라고 한다.
안라국의 왕에 대해서는 국내외 기록을 모두 살펴도 이름이 남은 자가 없다. 6세기에 가장 활발하게 외교적 노력을 전개한 안라왕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 것은 아쉬운 부분. 아이러니하게도 2인자격인 차한기(次旱岐) 지위의 이탄해(夷呑奚)·대불손(大不孫)·구취유리(久取柔利) 등은 이름이 기록에 남았다. 이들이 사비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4.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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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서는 전기 후기 금관 가야 대가야 이렇게만 가르치기에 금관국과 반파국에 밀려 인지도가 희미하지만 함안군의 말이산 고분군은 가야 고분 유적 중 최대, 경주시 대릉원에 맞먹는 백 기가 넘는 고분이 발견되었다. 함안군 청사 바로 뒤에 있어서 외국인 관광객이나 높으신 분들이 순시하러 들리기도 한다. 과거에는 이 주변 학교에서 비료 푸대 깔고 미끄럼 타다가 군청 직원한테 혼났다고 한다.
아라가야 즉, 안라국의 왕성지(王城址)로 추정되는 유적[17]이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함안군지를 비롯한 일제강점기 학자들의 조사에서도 왕궁이 있었다라는 구전 등이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었으며 2018년 현재 그 실체에 대해서 조명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도 왕궁지를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특정한 시설을 찾지 못하였다. 2000년대에는 왕성의 토성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발굴조사하였으나 그 결과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제방 둑이었던 것으로 판명난 적이 있었던 바 있었다. 풍납토성과 같은 판축공법으로 지어졌다.#
처음으로 안라국, 아라가야에 의해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 그 외에도 함안 분지에 위치하는 여러 산성들이 안라국의 주도하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 첫번째 증명인 조사인 셈.
561년을 즈음한 안라국 복속 이후 신라가 축조한 성곽. 이 일대의 새로운 신라의 통치거점으로 추정된다.

5. 같이 보기





[1] 아시량국(阿尸良國) 시(尸)는 받침 ㄹ을 쓸때 사용된 한자다.[2] 신라계 사서를 바탕으로 한 국내 사서는 가야를 김해 금관국, 고령 반파국 양대 맹주국 중심으로 일률적으로 '가야'로 기록했다 보니 안라국 관련 기록은 매우 한정적이다.[3] 삼한에서 독자적 호칭이 전해지는 신지는 넷뿐으로, 각각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야'''축지(安邪踧支), '''분신'''리아불예(濆臣離兒不例), '''구야'''진지렴(拘邪秦支廉)이다. 이들은 각각 신운신국, 안라국, 신분활국, 금관국의 수장을 이르는 호칭으로 여겨진다.[4] 안라회의에서는 가야 동부의 멸망한 나라 복원을 논의하는데 이게 안라국으로 한정될만한 문제는 아닌데도 다른 가야국가들은 안라국에 위임한 듯 안라국 대표가 가야권에서 홀로 교섭에 나섰고, 사비회의에서는 참석한 여러 가야국가 명단 첫번째에 기록되었고, 가야 여러 나라들의 대표가 회의 마지막에 '가라(대가야), 안라 왕에게 여쭤보고 결정하겠다'고 성왕에게 대답하는 등. 문헌기록에는 안라국의 위상이 가야 안에서도 상대적으로 높다는 정황이 매우 많다.[5] 신라 마립간에서도 나타나는, 왕 이전의 '간' 계통 칭호. 간지 문서 참조[6] 주보돈 (2016), 가야사 새로 읽기[7] 김세기 (2012), 아라가야의 성립기반과 영역의 변천[8] 중심지 이동설의 예를 들면 부산 동래구 복천동 고분군 → 연산동 고분군에서는 수장묘가 옮겨가는 현상이 관찰된다. 창녕 비사벌의 수장묘도 초기 계성, 계남리 고분군에서 지금의 창녕 읍내인 교동, 송현동 고분군으로 대형묘가 옮겨가는 현상이 보인다. 이런 경우는 확실히 중심지가 이동했다고 보기도 한다. 고조선도 아주 대표적인 중심지 이동설의 사례다.[9] 한편, 그렇기 때문에 금관국이 상대적으로 과대평가 받기도 한다는 주장도 있다. 도질 토기 문화, 철기 문화가 금관국에서 성립해서 주변으로 뻗어나간다거나, 혹은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공으로 금관국 유민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한참 뒤쳐져있던 다른 국가들이 그때부터서야 국가 단계로 도달한다는 식의 금관국 중심적 해석이 바로 이런 것의 잔재라는 것.[10] 겉보기에 무덤이라는 티가 났다면, 동서고금 막론하고 무덤을 훼손하고 망자의 잠을 방해하는 일은 부정으로 금기시되었으므로 사람들도 어지간하면 거기에 농사를 짓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건드리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11] 박승규 2010년 외[12] 여기서는 백제군을 의미한다.[13] 백제 성왕이 직접통치를 하지 않고 이런 간접적인 방법을 시도한 것은 이 시기 일본서기 기록에서 반복적으로 나오지만, 가야인들이 백제가 대놓고 밀고 들어와 가야를 먹어버리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경계했기 때문이다. 가야의 체급이 하나하나 나눠먹는 정도면 몰라도 단숨에 삼키기엔 백제나 신라에겐 아직 좀 컸기도 했다. 안라국과 가야제국들은 그 때문에 신라나 가야, 왜국, 나중엔 지리적으로 거리가 있는 고구려까지 포함해서 계속 줄타기 외교를 시도한다.[14] '안라왜신관'은 원문에는 '일본부', 즉 그 유명한 임나일본부다. 그러나 이 기관의 왜인들이 왜왕의 명령조차 들어먹질 않고 안라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등 후대 일본측의 윤색이 들어간 정황이 드러나는 부분이 너무 많아 현대 사학자들은 명칭도 당대에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 명백한 일본부가 아닌 안라왜신관으로 부르고, 기관의 성격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물론 일본부 하면 일반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한반도 남부 식민통치기관설은 학계에서 사장된지 오래다.[15] 가야(임나)의 한성 공격 동원 기록은 일본서기에서만 등장한다.[16] 다만 기년 수정을 하지 않는다면 514년에 설치되었다는 아시촌 소경이 함안으로 비정될 수 없다.[17] 대중적 인식과 고고학계에서의 표현상 아라가야라는 표현으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