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은행 인질극 사건

 


三菱銀行人質事件
1. 개요
2. 사건의 경위
3. 범인은 어떤 인물이었나
4. 기타


1. 개요


1979년 1월 26일 발생한 은행강도인질극 사건. 일본 국내에서 발생한 인질극 중 범인이 사살됨으로써 해결된 3건[1] 중의 하나다.

2. 사건의 경위


1979년 1월 26일 오사카시 스미요시구에 위치한 미쓰비시은행 키타바타케지점에 골프 모자에 검은 옷,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착용한 남성 우메카와 아키요시(梅川昭美)[2]가 침입, 소지하고 있던 엽총을 발포하면서 은행 직원들을 협박했다. 그 사이 20대 남성 직원이 긴급전화로 경찰에 신고하려 하였으나 우메카와가 이를 눈치채고 사살[3], 이 과정에서 유탄으로 인해 직원 2명이 추가로 부상을 입었다. 결국 은행 직원들은 체념한 채 요구대로 가방에 현금을 담았고, 남성은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도주하려 했으나 은행에서 도망친 고객 한 명이 마침 자전거로 순찰 중이던 경찰에 신고하여 사건이 알려진다.
우메카와의 예상보다 빨리 경찰이 도착, 총을 버릴 것을 권유하며 위협사격을 가했으나 우메카와는 이를 무시하고 경찰의 얼굴과 가슴에 총격을 가해 사살했다. 한편 은행에서 탈출한 직원들이 인근 카페로 들어가 경찰 신고를 요청했고, 은행에 남아 있던 다른 직원도 경찰 직통 비상버튼을 눌러 신고했다. 하지만 범인은 뒤이어 출동한 경찰 2명에게도 총을 발사하여 1명을 숨지게 했다.
오후 2시 35분경 오사카부 경찰에 키타바타케지점의 비상 사태가 보고되었고, 3분 후 오사카부 내 전 경찰서에 긴급수배령이 발령되었다. 이후 무장경관 약 320명이 키타바타케지점을 포위, 인근 500미터 내의 도로를 폐쇄하고 범인과 대치에 들어갔다. 이에 범인은 직원을 협박해 은행 셔터를 내리게 하여 출입구를 폐쇄했지만 마침 현장에 도착한 경찰관의 기지로[4] 셔터가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다.
은행 내에는 총 39명[5]이 인질로 잡혀 있었다. 당시 키타바타케점 내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사살당한 이들의 시신이 인질들 바로 옆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고, 우메카와는 엽총으로 인질들을 위협하면서 의자와 책상 등으로 바리케이트를 만들게 하는가 하면, 직원들을 일렬로 세워놓고는 돈을 준비하지 않았으니 너희가 잘못했다며 지점장을 사살[6], 경찰의 저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답시고 직원들에게 고기방패가 되기를 강요하는[7] 등의 온갖 정신나간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한편 경찰은 키타바타케 지점 2층 사무실에 요시다 로쿠로[8] 본부장을 필두로 하는 현지 수사본부를 개설하였다. 수사본부와 1층 간에 전화 연결이 가능한 핫라인을 설치하고 외부에서는 경찰차 113대와 경찰관 644명이 은행을 포위, 반경 1km 이내의 교통을 모두 차단하였다. 또한 수사본부는 은행 건물의 설계도면을 바탕으로 건물 북쪽과 동쪽 셔터, 2층 출입문 등에 작은 구멍 7개를 뚫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외에도 현금인출기를 옮긴 뒤 그 틈으로 내부 상황을 정찰하는 한편, 구내 방송용 스피커의 회선을 반대로 연결하여 본부에서 우메카와와 인질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협상에 돌입했다.
1월 27일로 넘어가면서 한동안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으나, 새벽 2시경 70대 남성 인질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자 우메카와는 나이를 물어본 뒤 그를 풀어주었다. 그로부터 수 시간 후 요구했던 라디오가 늦게 들어오는 것에 불만을 품은 범인이 사물함에 총을 발사, 남성 직원 1명과 고객 1명이 유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오전 8시경 41세 여성이, 9시 30분에는 57세 남성 인질이 석방되었다. 이 중 남성은 전직 경찰로, 우메카와가 직업을 물었을 때 처음에는 목수라고 속였으나 라디오가 반입된 후부터는 언제 거짓말을 알아채고 분노해서 엽총을 난사할 지 몰라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오전 10시 30분경 경찰은 우메카와의 모친과 숙부를 수사본부로 불러 전화로 설득을 시도했으나 실패, 이후 모친이 편지로 계속 설득한 끝에 우메카와는 인질들에게 화장실 사용을 허락했다.[9] 그러자 수사본부 측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잠시 빠져나온 은행원들을 격려하는 한편으로 작전 계획을 알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인질들이 하나둘 씩 풀려나는 와중에 우메카와는 직원에게 은행에 있던 현금 500만엔으로 자신의 채무를 대신 갚고 오라고 명령했다. 우메카와의 지시를 받은 직원이 차로 출발하자 즉시 암행순찰차가 그 뒤를 추적했다. 이 때 차에 탄 남성이 인질로 잡힌 은행원으로 추정된다는 정보가 언론사 기자들 사이에 돌아다녔으나, 이 빚 변제에 대한 내용은 사건이 종결된 후에야 알려졌다.[10] 또한 그 와중에 인질과는 별도로 사건 발생 당시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대여금고 보관소 등에 숨어 있었던 고객 5명이 수사관들의 유도에 따라 탈출에 성공했다. 이 때 민간 기술자가 수사본부의 요청으로 통로 등의 잠금장치를 해제하여 탈출을 도왔는데, 우메카와는 끝까지 이 5명의 존재는 물론 탈출 사실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 큰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차례차례 풀려나기는 했으나 아직도 안에는 풀려나지 못한 인질들이 억류되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오후 7시경 우메카와가 셔터에 뚫린 구멍을 발견하고 인질을 시켜 모두 메우게 했다. 하지만 다행히 동쪽 셔터의 구멍만은 발견되지 않아서 경찰은 이 구멍을 통해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계속 우메카와의 동태를 감시했다. 한편 1월 28일 오전 0시경부터 경찰 측은 돌격작전을 개시, 오전 2시경 구급대원이 은행으로 진입하여 희생자들의 시신을 반출했다.[11] 당시 우메카와는 남성 인질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고 총을 들게 한 뒤 자신이 인질로 위장하고 있었으나, 경찰은 이미 그 계획을 간파하고 있었다.
아침까지 기회를 엿보던 경찰은 1월 28일 오전 8시 40분경 특수부대를 돌입시켰다. 은행으로 진입한 특수부대는 권총을 발포, 그 중 3발이 우메카와의 머리와 목, 가슴에 명중했다. 우메카와는 즉시 오사카 경찰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경부 관통상이 치명적으로 작용하여 결국 오후 5시 43분에 사망했다.

3. 범인은 어떤 인물이었나


범인 우메카와 아키요시는 1948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이혼 후 집안의 장남이면서도 대를 잇지 않고 젊어서 가출한 부친은 일가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았고, 우메카와는 그런 아버지를 증오하여 가출, 어머니가 있는 오오타케시로 오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 혼자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야 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살핌을 거의 받지 못한 우메카와는 탈선을 거듭하게 되었다. 히로시마공대 부속 공고에 진학했으나 수업은 거의 받지 않았고, 오토바이 절도 사건으로 결국 입학한 지 불과 4개월만에 퇴학당했다.
부모는 고민 끝에 아들의 갱생을 위해 재결합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이미 혼자 살기 시작한 우메카와는 1963년 12월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오오타케 시내의 건설업자 자택에 침입, 사장의 아내를 살해하고 현금과 통장 등이 들어있던 금고를 강탈하다 체포되는 이른바 '오오타케 강도 살인사건'을 일으켰다. 체포된 후 그는 반성은 고사하고 오히려 "(돈을 빼앗는 데)방해되길래 죽였다", "딴 놈들은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나만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야 하냐"고 진술했다고 한다. 사건의 내용이 워낙 끔찍하고 잔인했기 때문에 사형이나 무기징역등 중형이 불가피한 상황이었으나, 우메카와가 사건 당시 15세의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소년법이 적용되어 소년원 송치 처분을 받는 데서 그쳤다. 하지만 히로시마 가정법원 재판부에서는 우메카와의 비틀어진 인격을 의식한 듯 판결문 말미에 아래와 같은 보충 의견을 내놓았다.

"소년의 병적인 인격은 이미 뿌리깊게 형성되어 교정이 용이한 상태에 있지 아니하다. 소년이 앞으로 사회에 나가게 되면 동일한 다수의 비행을 반복하여, 재차 희생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소년이므로 처벌은 불가능하다."

또한 우메카와가 수감된 소년원도 법원의 보충 의견과 비슷하게 아래와 같은 정신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이런 자질을 지닌 소년을 사회에 방임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므로 적극적으로 규제할 필요가 있다. 이 병적인 인격은 이미 뿌리깊게 형성되어 있어 교정이 곤란하며, 사소한 일에서 반사회적 행동이나 범죄로 결부되기 쉽고, 누범 가능성이 극도로 높다."


4. 기타


사건이 종결된 지 2일 후 니혼 TV 계열에서 방영된 형사 드라마 '대도시 파트3'에서 본래 17화에 방영 예정이었던 한 에피소드가 이 사건의 영향으로 2주 후로 옮겨져 방영되는 일이 있었다. 해당 에피소드의 소재가 은행강도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를 의식한 조치로 보인다.
또한 사건이 터지기 한 달 전인 1978년 12월에 배우 타미야 지로[12]가 엽총으로 자살한 사건이 일어나서 대중들에게 큰 화제와 충격을 주었는데, 불과 1개월만에 또다시 엽총이 사용된 큰 사건이 일어나 사회적으로 한층 더 큰 충격을 가져왔다. 다만 우메카와가 이 엽총 자살 사건에 영향을 받았는지의 여부는 불명.
1982년 『TATTOO〈刺青〉あり』(문신 있음)이란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작중에서는 '다케다 아키오'(竹田明夫)란 가명으로 나오며, 록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우자키 류도(宇崎竜童)가 우메카와의 대역을 맡았다.
사건이 발생한 키타바타케지점은 지금도 존재하며, 건물 자체도 사건 이후 대대적인 내부 리모델링을 거치기는 했으나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1] 나머지 둘은 1970년 세토우치 해상납치 사건, 1977년 나가사키 버스 납치 사건.[2] 후에 라디오 뉴스에서 인질극이 보도되었을 때 아나운서가 이름을 잘못 읽은 것을 듣고는 "내 이름은 테루미가 아니야! 아키요시라고! 보도하는 새끼들한테 아키요시라고 말해둬!"라며 분노했다고 한다.[3] 이 직원은 총에 맞은 후에도 장시간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구출이 늦어지는 바람에 사망했다.[4] 가까이에 있던 간판과 자전거 등을 문 아래에 놓아서 틈이 생기게 했다.[5] 고객 12명+은행 직원 31명으로 43명이었다가 임산부와 어린 아이를 동반한 부모 4명은 바로 풀려났다.[6] 근거리에서 권총(사살한 경찰관이 지니고 있던 것을 탈취했다)을 발사했다.[7] 특히 여성 직원들은 전화응대 업무를 하는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라로 만들었는데, 마치 스트립쇼라도 하는 양 옷을 벗는 순서까지 일일이 지시하면서 수치심을 주었다고 한다. 그나마 나중에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는 여성 직원 1명에게만은 옷을 입혔다고.[8] 이 사람은 오쿠보 키요시 사건산악 베이스 사건등이 발생했을 당시 군마현경 본부장을 역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9] 그 전에는 일절 허락하지 않았고, 그나마도 20초라는 시간 제한을 두었으며 우메카와 자신도 바닥에 종이를 깔아서 용변을 해결했다.[10] 또한 이는 법률상 무효였기 때문에 대금은 후에 경찰이 회수, 은행으로 환원되었다.[11] 시신 썩는 냄새가 심해지자 우메카와가 인질들과 함께 옮겨두었다.[12] 하얀거탑 1978년작 드라마에서 자이젠 고로 역을 맡았던 유명 배우.